롤랑 바르트는 동질적인 것 속에서 비동질적인 것으로서 자신을 찌르는세부요소로서의 푼크툼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것은 고통을 일으키는 무언가(something else)이다. 바르트는 상처를 주고 동요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푼크툼이 없는 사진은 아무런 갈등도 교란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는 시도 마찬가지다. 푼크툼이 없는 시는 동질적인 시간에 머물러 있다. 명확한 목적의식과 단일한 주제 의식 아래 구성되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할수록 그것은 실패한 것이다. 좋은 시들에는 분명하게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 시의 순간에 머물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비록 그것이 자기 안의 상처를 아프게 건드릴지언정 그것은 어떠한 깨달음을 준다.

밝은 방에서 바르트는 푼크툼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포르노 사진을 든다. “포르노 사진보다 더 동질적인 것은 없다. 그것은 언제나 천진하고, 의도도 계산도 없다. 조명이 비춰진 단 하나의 보석만을 보여주는 진열창처럼, 그것은 단 하나 오로지 섹스라는 것의 제시를 통해 전적으로 구성된다.” 그러니까 포르노 사진은 감추거나 주의를 흩트리는 세부 요소가 없다는 점에서 동질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동질적인 시간에서 벗어나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을 주는 시가 가능한가. 문제는 이러한 세부요소가 작가의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거나 최소한 완전히 의도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푼크툼은 특정한 의도를 넘어서는 의미의 잉여의 부분에서 발생한다. 다만 이 혼란을 작가가 고유의 방식으로 풀어낼 때 거기에는 특유의 명명이 발생한다. 가령 이 글에서 함께 읽어볼 이현승, 송재학, 김수복의 시에서 그것은 생활’, ‘검은색’, 그리고 하늘이라는 기표로 나타난다.

생활이라는 생각(창비, 2015.9.)은 이현승의 세 번째 시집이다. 이현승은 첫 시집에서부터 일상이라는 사태를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 당시 일상은 속속들이 구획되고 등록되어 투명하지만 친밀성의 땀내를 잃어버린 곳”(정한아, 거기 수심이 얼마나 됩니까?, 친애하는 사물들, 문학동네, 2012)이었다. 문명의 뒤편에 자리한 야수성이라는 은폐된 기원을 폭로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던 이 시집에는 기지 넘치는 공격적 유머가 빛을 발했다. 그런데 두 번째 시집을 거치면서 그의 시에는 내성적인 관찰자의 시각이 분명해졌고 비루하고 무서운 삶에 대한 측량할 수 없는 슬픔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활이라는 생각에도 이현승 특유의 블랙유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보다는 황폐한 진실을 마주한 자의 고독과 참담이 짙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다음 시에서 확인된다.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들이 갑작스러운 눈발에

하나같이 낭패감으로 허둥대는 길에서

나는 큰아이가 다니는 병원의 소아과 선생을 지나쳤다.

호주머니에 돌멩이를 잔뜩 넣은 버니지아 울프처럼

그녀는 잔뜩 앞으로 쏠린 채 걸어가고 있었다.

 

()

 

우리는 좁은 인도를 황급히 지나쳤다.

한줄기 불빛이 시력을 빼앗아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시력을 회복하는 동안 나는

망자의 뜬 눈처럼 열린 채 닫힌 눈으로

잿빛으로 지워져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 「갑자기 시작된 눈부분

 

전문을 인용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이 시는 예기치 않았던 순간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갑자기 내린 눈으로 허둥대면서 돌아가던 거리에서 시적 주체는 큰아이가 다니는 병원의 소아과 선생을 지나친다. 아픈 아이로 인해 그녀에게 다급하게 매달리며 희망을 갈구했던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동시에 시적 주체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당시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구르던 자신을 차갑게 다독여주던 그녀에게서, 시적 주체는 무섭게 일렁이는 강물을 앞에 두고 죽음을 생각하는, “호주머니에 돌멩이를 잔뜩 넣은 버니지아 울프를 상기한다. 그녀의 지폐처럼 피로한 낯빛이 잠깐 비친다. 시적 주체는 그녀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지를 상상해본다. 혹시 자신이 그러했듯이 다급하고 성마른 사람들이 하루종일그녀를 붙잡고 괴롭혔기 때문은 아닐까.

시적 주체는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죄책감을 느낀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시달렸다고 한 들 그것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피로한 낯빛은 푼크툼이 된다. 그녀의 이미지가 시적 주체에게 푼크툼으로 작용했음이 시의 마지막 연을 통해 분명해 진다. “한줄기 불빛이 시력을 빼앗아버렸던 것이다.” 이현승은 이를 망자의 뜬 눈에 비유한다. 눈을 뜨고 있지만 그 눈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만일 그 눈이 무언가를 본다면 그것은 비어 있음()에 불과할 것이다. 여기서 그녀는 시적 주체에게 한줄기 불빛이 되어 시력을 앗아가 버리는 존재다. 시적 주체는 그녀에게서 측정 불가능한 허무를 본다. 마치 죽음을 앞둔 버지니아 울프를 마주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거리에서 스쳐지나가는 낯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타인일 뿐이다. 그녀의 피로한 낯빛에서 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했을 때의 무력함을 직감한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현승이 미망으로만 붙들 수 있는 사물이 있다”(롤러코스터)라고 말하거나 터널과 터널 사이 구간의 운전자처럼/백일에 눈이 아프다”(인정도 사정도 없이)라며 갑자기 눈이 멀어버리는 사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징후적이다. 그는 무언가를 결정적으로 놓친 자들은/물고기에게 눈을 파먹힌 얼굴로 남겨진다”(사라진 얼굴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그가 심연을 응시하며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고 있음을 말해준다. 무언가를 놓쳤기 때문에, 볼 수 없음을 보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현승의 시적 주체는 눈이 파먹힌 얼굴로 허공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렇게 뚫어지게 본 것을 시로 쓴다(“뚫어지게 보고 있는 사람은 역시 쓰는 사람이다―「천국의 아이들2). “그럭저럭 살아지고 그럭저럭 살아가면서”(생활이라는 생각) 삶에서 참으로 모자란 것이 생활이 되어버린 이 시대의 절망을 그는 순간적인 눈멂의 체험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이현승이 운명론적 허무주의를 절망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데 반해 송재학의 경우(검은색, 문학과지성사, 2015.10.)에는 허무주의를 존재에 본질적인 것으로 상정하면서 그것을 긍정하는 데 이른다. 이는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검은색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통해서도 짐작되는 바다. 송재학은 시인의 말에서 어둠이라고 적었지만/그건 햇빛이기도 하고 메아리이기도 하고/무엇보다 시선(視線)이기도 하다라고 적었다. 송재학에게 검음은 주체의 내부에 존재하면서 주체가 대상을 바라보는 것을 가능케 하는 인식론적 배경과 같은 기능을 한다. 어둠이 무엇보다 시선이라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얼룩과 같이 형상조차 분명치 않은 어둠이 무언가를 보는 시선을 가능케 한다. 송재학은 카메라 옵스큐라 중, 고독의 냄새들카메라 옵스큐라 중, 길의 운명과 같은 시에서 풍경을 가능케 하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어둠을 고독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 고독은 태어나자마자 죽음과 마주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숙명적인 것이다. 더구나 유난히 죽음의 감각에 민감한 이들은 종종 죽음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기도 한다.

 

물끄러미 정지한 생()

나뭇잎 한 장 날아와서 얼굴을 가렸다

벌레 먹은 흔적 때문에 잎새에도 눈이 생겨

내 시선과 마주쳤다

물결 일렁이고 햇빛 으깨어지면서

송사리 떼 사금파리 하나씩 물고 물속으로 사라졌다

()

내 얼굴은 자꾸 어머니 얼굴 닮아가고

한 마장쯤 떠내려가면서도

다북쑥 손바닥 불쑥불쑥 내 생채기 건드린다

어머니 떠내려가면서

다북쑥만으로 내 속은 먹빛 물드는데

― 「물 위에 비친 얼굴을 기리는 노래부분

 

파리하게 머뭇거리는 얼굴이 물결 위에 일렁인다. 그것이 물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다분히 죽음의 분위기를 암시한다. 죽은 후의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심정으로 시적 주체는 거기에서 지치고 피로한 생의 몰골을 맞닥뜨린다. 이때 분위기를 전환해주는 것은 어디에선가 날아온 나뭇잎 한 장이다. 그것은 시적 주체가 죽음과 마주하는 것을 유예시킨다. 그런데 나뭇잎에 새겨진 벌레 먹은 흔적으로 인해 다시 잎새에도 눈이 생겨 서로의 눈이 마주친다. 갑작스런 시선의 마주침으로 인해 시적 주체는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끼며 세계가 으깨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는 세계 도처에 깔려 있는 사물들의 어둠과 마주한 데서 나타나는 현기증이다. 그런데 이 현기증을 달래주는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 윤곽과 같은 낮달이다. 시적 주체는 파리한 자신의 얼굴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발견하고 아마도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얻었던 상처를 다시 감각하게 된다. 허나 그것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아득한 슬픔으로 전환시키면서 어머니라는 부재하는 존재와의 연결고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송재학이 이번 시집에서 반복해서 발견해내고 있는 먹빛은 먹먹한 슬픔을 상기시키는 한편으로 사물들 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여 공통감각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 시집에서 그려지는 풍경들은 결코 시인의 외부에 있다고 할 수 없겠다. 경계를 공글러서 고독의 윤곽을 희미하게 드러내며 시인은 사물과 인간 간의 이진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를 상상하게 만든다. “사람과 나무가 윤곽 없이 생을 이룬 시절”, “나무는 사람으로부터 돋아 나오고 사람은 나무 속에서 죄를 고백했다”(나무가 비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이야기되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한 시절에 인간은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진리였으리라. 송재학은 그 전설 속에나 남아 있는 시공간을 재현한다. 정성스러운 손길로 탁본을 하듯이 사물의 고독한 윤곽을 부드럽게 두드리면서 말이다. 주체와 세계가 결국 중첩된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 그러니까 일종의 월식의 순간을 그는 기다린다(“다시 살살 두들기고 부드럽게 문지르고 공글리자, 먹을 서 말쯤 삼킨 시커먼 월식(月蝕)이다―「습탁).

마지막으로 김수복의 시집 하늘 우체국(서정시학, 2015.11)을 읽는다. 자연과의 일체감을 확인하는 1부와 2부의 시집들도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고통의 꽃”(수평선)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참회하고 있는 시들에서 코드화되어 있지 않은 찌르는 어떤 것(푼크툼)을 발견하게 된다. 쇠백로를 바라보며 하늘의 열쇠를 잃어버린 천사”(문밖에서)의 이미지를 발견한다든가, “그냥 오랜만에 첫사랑 연인이 죽도록 보고 싶어 그만 그 옛날집 골목으로 끌려가는 마음”(연인)에 대한 묘사들은 아득하고 저릿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이 서둘러 자리를 뜬 이후 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나와 마주앉아인연에 대한 원망 대신 고마움을 이야기하는 시에서는 연륜이 묻어난다(예순 살 즈음에). 하지만 이 시집에서 무엇보다 반짝이는 것은 어머니에 대해 읊고 있는 시편들이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재개발 아파트를 기다리며 어머니는

지난겨울 터진 보일러를 새로 놓아드린다 해도

다 허물텐데

나는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하신다

 

환절기 조심하시라 해도

차분 데서 있다가 차분 데로 가는 거는 감기 안 걸린다

너거는 밥 제때 애들하고 끼니 거르지 말고 잘 챙기라

― 「동백꽃부분

 

아들이 걱정할까봐 안심시키려는 어머니의 마음은 코드화된 것(스투디움)이다. 그런데 이 시에는 그러한 관습화된 의미를 넘어서는 한 구절이 있다. 보일러를 놔드리겠다는 아들에게 차분 데서 있다가 차분 데로 가는 거는 감기 안 걸린다라고 말하는 구절이 그렇다. ‘차가운이 아니라 차분이라는 사투리에서는 친근감이 느껴지지만, 그것이 촉각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은 죽음의 감각이다. 이 말에는 어머니 혹은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죽음을 예감할 수 있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삶 자체가 차분 데서 있다가 차분 데로 가는것이 아니던가. 시집의 표제시인 하늘 우체국에서 어머니가 여기가/천당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라든지, 염소 두 마리의 눈에서 아주 오래된 할머니의 눈빛으로 나를 읽고 있는 것”(경전)을 발견하는 데서도 죽음의 그림자는 얼핏 스친다. 죽음에 대한 예감이야말로 인간에게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경전이 되며 죽음이 드리운 음영을 담담히 바라보는 이의 텅 빈 시선은 두려움이 아니라 처연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읽는 이를 침묵하게 만드는 이 고요한 고통의 순간에 시는 고통의 꽃이 된다. “, 틀어막혔던 입을 열고 피는 꽃들”(봄꽃)이여.

 

서정시학 2016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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