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지에서 가지고 온 풍선을 방 안에 띄워 놓고 천천히 가라앉는 풍선을 지켜볼 때의 기분이란 어떠한 것일까(식욕). 어쩌면 그것은 비어 있는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를 볼 때의 막막한 느낌이라든가, 모든 배우들이 사라진 후에도 눈부신 조명이 가득한 무대를 바라볼 때의 쓸쓸한 기분 같은 것은 아닐까. 유계영의 시를 읽으며 모호한 기분에 잠기게 된다. 그녀의 시는 이열 종대의 해골들 사이”(묻고 답하다)의 어떤 중간지대에 머물러 있으면서 독자를 모호한 기분에 잠기게 한다. 풍선은 완전히 가라앉은 것도 완전히 떠 있는 것도 아니다. 낮과 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생각해보라. 그러한 이분법에 의해 세계는 구획되고 인식의 틀 속으로 안정적으로 안착한다. 착각과 오해를 이해와 확신으로 변화시키는 인식의 폭력적 힘은 그것이 안정적으로 기능하는 바로 그만큼 우리 삶에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때 유계영의 시는 공중으로의 도약과 동시에 바닥으로의 뚝 떨어짐이라는 지그재그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마치 초월과 몰락의 쉼 없는 반복을 통해 정신과 영혼의 근육을 팽팽하게 단련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춤이 허공에 기록되는 텍스트라고 했을 때 그 텍스트는 다분히 시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모호하고 압축적인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다. 순간적으로 허공을 가르며 일련의 동작들이 흘러갈 때 그 동작들은 몸이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언어가 있음을 보여준다. 종이에 고정되어 있기를 거부하며 의미 바깥으로 빠져나오려는 스텝들, 연속과 정지에 의해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일련의 제스처들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 하며 사물에 내재해 있는 해석적 잠재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이는 해석의 대상으로서조차 취급받지 못했던 사물들을 구원해내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존재하는지조차 불분명했던 것들을 감각하게 되는 충격에 의해 행위 주체들은 주체의 분열이라는 예기치 않은 사건을 겪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분열상은 유계영의 첫 번째 시집 온갖 것들의 낮에 대한 해설들에서 생각하는레이디의 탄생이라는 맥락에서 다뤄진 바 있다. 누군가는 이 생각하는레이디의 탄생에서 씩씩한 명랑함을 발견하고(양경언), 누군가는 우울한 천사의 모습을 읽어낸 바 있다(박슬기). ‘생각한다는 행위에서 지난한 반복을 부정하는 행위의 역동성에 방점을 둔다면 명랑함을, ‘생각한다는 행위가 바뀌지 않는 세계의 고정성과 마찰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데 초점을 둔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는 결국 우울함으로 귀결될 것이다. 다만 유계영의 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녀 자신이 우울한 명랑함, 혹은 명랑한 우울함이라고 할 수 있는 역설적 위치에 스스로를 놓으려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그녀에게 생각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분열증적인 위치에 두고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지 않는 불안정한 위치에 자신을 붙잡아두려는 의지의 발현일 수 있다.

유계영은 이를 빛과 비가/함께내리고 각각 쏟아”(식욕)지는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보여준다. 혹은 죽을 뻔한 이야기 속에서/웃음거리를 찾아내는 심정”(묻고 답하다)같은 것이기도 하다. 세계를 이해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정보 속에서 전망이 부재한 현실은 연기가 자욱한 방안의 풍경으로 제시된다. 그럼에도 유계영은 종말론적인 시각과 함께 그러한 세계에서 마지막까지 생각이란 것을 하는 주체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 생각은 이동성 혹은 전염성이 강하다. 하나의 생각은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며, 곧 다른 생각은 잊히고 만다. 생각들은 가벼워지고 지나치게 많은 생각들이 연달아 일어날 것에 대한 무서움을 불러일으킨다. 생각이 더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정신병적 상태에 대한 두려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서, 유계영은 이를 전염병에 비유하기도 하는데(니진스키), 이 전염병이야말로 의 존재감이 옅어지면서 우리우리이도록 하는 도래해야 하는 병이라는 관점을 보여준다는 데서 유계영의 독특한 병리학적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병의 전염성과 관련해 유계영이 쓴 천재 무용수 바슬라프 니진스키에 대한/바친 시를 조금 더 읽어보자. 니진스키에는 분열증적인 예술에 대한 지향이 나타난다. 니진스키의 춤을 직접 본 사람들은 그에게 중력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공중에서 날아올랐다. 그 불가사의할 정도의 날아오름’(엘레바시옹)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의 발이 인간과 새의 혼합인 해부학적 구조로 되어 있다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자기도 모르게 믿어 버렸다. 그의 춤은 환영을 만들었다. 공중으로 날아오르려는 한 무용수의 의지가 관객들을 집단 최면 상태로 이끌었다. 허나 니진스키의 삶은 여느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불행했다. 그는 꽤 오랫동안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그는 자신의 영혼이 병들었다고 생각했다(“의사들은 내 병을 모른다. 내 정신은 건강한데 내 영혼이 앓고 있다. 내 병은 너무나 위중해서 곧 치유될 수 없다.”바슬라프 니진스키, 이덕희 옮김, 영혼의 절규, 푸른숲, 2002). 날아오르고자 하는 무용수의 의지는 자신이 갇혀 있다는 데 대한 자각에서 촉발되었을 지도 모른다.

니진스키는 자신의 일기에 , , , 라고 노래하는 어린 딸을 보며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도 그 아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느끼며 모든 것은 ! 공포가 아니고 기쁨인 것을깨닫는다. 그의 정신은 새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올랐던 것이다. 약한 영혼을 지닌 자들이 합리적인 일상 세계와 부딪혔을 때 받게 되는 상처는 그들의 정신을 분열증적인 것으로 만든다. 허나 그들은 초월적인 세계를 주시할 수 있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몸이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개체로서의 좁은 시공간에서 해방될 수 있는 자유를 엿볼 수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삶을 생기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것이 명확한 의미로 파악되지 않더라도 표현하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기쁨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는 명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초월적인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 분열증을 앓으며 분열증을 앓기 위해 초월적인 것을 끊임없이 찾아 나선다. 초월적인 것이 분열증이 일으키다가 초월적인 것과 맞닿는 순간을 유계영은 이렇게 묘사한다. “오른손은 왼손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른손은 왼손을 맞잡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다”.

 

오른손은 왼손을 맞잡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다

나는 공중에서 머물다가

내려오고 싶을 때 흩어져 내렸다

― 「니진스키부분

 

니진스키는 무용수가 아니라 -되기를 관객들에게 보여주며 그들에게 환영(vision)을 제공했다. 그는 자신이 공중에서 머물다 내려오고 싶을 때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유계영은 이를 내려옴이라기보다 흩어짐에 가까운 것으로 보는데, 이는 그가 공중에서 내려오는 순간 더 이상 니진스키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니진스키라는 개체는 이미 흩어지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니진스키는 우리라고 하는 모호한 범주에 들어가 버렸다. 여기서의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음이라는 운명을 타고난 이들, 그들이 부재하는 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지러운 빛을 본 적이 있는 자의 영원체험에서 비롯한다. 유계영이 한 산문에서 죽음으로부터 삶을 위협받지 않는 천진난만한 표정의 빛, 실어증에 걸린 유령처럼 투명을 떠다니는 빛”(환상의 빛, 세계의 문학, 2015 겨울호)에 대해 쓴 것을 읽으며 새가 되어 날아올랐다가 흩어진 무용수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이처럼 시인의 앓고자 하는 분열증에는 어떤 초월적인 세계의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경험한 적이 있는 자가 느낄 법한 모호한 동경 혹은 연민 같은 것이 느껴진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스라한 빛 하나를 잡기 위해 허공에서 흩어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분열증의 전염병을 앓고 나서 탄생하는 우리라는 주체성은 독무를 마침내 두 사람이 함께 추는 춤, 그러니까 파드되로 변형시킨다. 묻고 답하다에서 당신의 긴 혀에 나를 묶고” “당신을 흉내 낸 목소리로뚝 떨어지면서 독무인 줄 알았던 그의 춤이 실은 파드되였음을 알게 된다. 이때 낮과 밤이 뒤엉켜” “모든 사물이 하나로보이는 증상의 정점에서 섬망을 비집고 쏟아진다(). 하지만 니진스키가 공중에서 아무리 오래 머물렀어도 결국은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였던 두드려도 텅 빈/나만 남은 소리가 되어 울려 퍼진다. 얌전히 있으라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며 살지 말라는 그런 가르침들과 학교에 가고 구걸을 하라는, 우울과 중독에 대해 떠들라는 요구가 중력의 장을 형성한다. ‘그러나를 중얼거리며 빛에서 멀어지는 그녀는 꿈속에서조차 슬프다. 그리고 끝까지 미안하다. ‘는 그저 공중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바늘 끝에 올라 춤추는 가장 작은 발을 가진 를 본다. 그리고는 이열 종대의 해골들 사이에 그렇게 묵묵히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묻고 답하다). ‘우리가 되는 데 실패한 의 절망은 대관람차에도 나타난다.

 

막다른 벽이라 생각하세요

결국 빠져나갈 것이라면 최대한 긴 과정을 출구 앞에 펼칠 것입니다

 

들어가서는 나오지 못한 수인들처럼

귓속에 이름이 쌓여있을 것만 같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잠자코 기다리던 그들이

일제히 터져나올 것 같았지만

― 「대관람차부분

 

분열증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초월적인 세계를 향해 있었던 자의 기쁨은 절망으로 쏟아진다. 미친 자는 우울하지 않다. 죽은 자는 절망하지 않는다. 고통과 절망은 초월적인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막다른 벽을 마주하고 만 모든 자들의 몫이다. 해서 그는 세계를 폐쇄되어 있고 자신은 텅 비어 있다고 여긴다. 다만 독특하게도 유계영은 자신의 몫이 되어버린 절망이나 우울 대신 미안함을 갖는데, 이는 우리에서 로 돌아와 버린 무거워져버린 자신에 대해 그 자신에게 느끼는 쑥스러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유계영은 막다른 벽을 앞에 놓고 명랑할지 우울할지에 대해 과묵하게 생각하는 중인 것 같다. 그러니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좋다라고 말했다고 해서(내일의 처세술, 온갖 것들의 낮)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그녀는 아무 것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가볍게 무언가를 계속하면서 공중에서 머무르다가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우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다채로운 자신을 터뜨려 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쩐지 몹시 강단이 있을 것 같은 이 덤덤하고도 단단한 시인에게서 무용수의 유연하고도 탄탄한 몸매를 연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녀가 보았다던 그 빛, 현기증이 날 만큼 압도적이었다는 그 빛이 언젠가 그녀의 시에서 터져 나오리라. 호주머니를 뒤집었을 때 흩어지는 먼지들처럼 쌓여 있던 이름들이 빛이 되어 춤을 출 것이다. 그때까지 그녀의 내면의 텅 빈 구조가 세계의 고유한 이름과 질료들로 채워지기를. 그것들은 자칫 우울 쪽으로 경사될 수 있는 그녀의 시를 명랑과 유머 쪽으로 이끌어 그녀에게 경계에 조금 더 머무르면서 생각할 수 있는 여력을 주지 않을까. 레이디의 다음 스텝을 기다린다.

 

<시로 여는 세상> 2016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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