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딜레마란 말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어떤 식으로건 삶의 오명을 씻기 힘든 딜레마라는 말. 그 말에서 다시금 이전에 본문 옮길 때 했던 잠깐씩의 생각들이 들었다. 솔직하다는 것과 정직함의 덕이 있다는 것의 차이라던가, 정직함과 용기의 관계라던가, 내가 처한 지위의 책임이나 소임의 다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과, 스스로 그것이 옳다고 믿어서 행동하는 것의 차이와 연관을 생각하다 보니 ‘요즈음의 내 안팎의 일들’ 이 겹쳐지고 어쩐지 마음의 두 가닥으로 나뉘어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하나는, 나도 모르게, 어릴 때 그러니까 딜레마라는 말을 전혀 모를 때 딜레마의 그 느낌을 준 기억이 뭐였더라..하게 됐다. 퍼뜩 떠올랐던 것이 ‘우산 장수와 신발 장수 아들을 둔 할머니’ 동화였다. 하지만 본문 옮기기도 바빴던 날이라 맞는 그림을 찾지 못했고, 그맘때 신발 나오는 동화로 기억에 남은 ‘구둣방 할아버지와 구두 만들어주던 요정들’ 그림을 찾았다. 노래는 나머지 생각에서. 위에 적은 그 ‘요즈음의 내 안팎의 일들’ 이 떠올리게 하는 글들이 있었다. 그러다 wishbone ash 의 노래 한 곡이 생각났다. 귀에는 익지만 무척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들의 다른 곡으로 찾아 올렸다.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8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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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옮기면서 내용 하나하나가 흥미로웠고, 하지만 그 한 부분마다 이해가 안 가서 시간이 좀 많이 걸렸다. 내가 옮긴 말들의 근거를 밝히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디를 잘 모르겠더라, 이런 걸 좀 더 잘 이해했음 했다는 기록이 될 것 같다. 앞의 내용들과 달리 책 전반을 압축해서 요약하는 글이라 문맥에서 얻을 수 있는 힌트 같은 것이 없어서 그랬다고 생각한다.
2. Chapter 3. Irresolvable and Tragic Dilemmas. In particular a normative ethics should not aim to provide a decision procedure which resolves every dilemma in advance of deciding whether or not there are any irresolvable dilemmas. 여기서는 왜 a 나 any 가 아니라 every 였을까? 하는 점이 좀 불분명했다. 도덕 철학이나 윤리학 이론에서 말하는 절대기준적인 결정과정이 있다고 한다면 고민할 것이 없겠는데 아는 바가 없다 보니 혹시 every 에 어떤 부정적인 의미가 (마치 모든 걸 해결해 줄 것 처럼 판단과정을 내놓지 말아라의 의미가 되는)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몇 번 확인을 했다. Decision 에 대해서 지난 번에 ‘의사결정’ 으로 받았었는데 내 전공분야에서는 암묵적으로 그렇게 쓰고 있어서 그대로 썼고, 하지만 지금의 맥락에서는 행동을 전제로 한 판단/결심/결정 이라서 의사결정이란 말이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3. If there are any, then action guidance, in such cases, is not possible. However, action assessment is still not only possible, but needed-and virtue ethics can provide a particularly satisfying account of the differences between unworrying, distressing, and genuinely tragic dilemmas, the latter being those from which even the most virtuous agent cannot emerge with her life unmarried. Action guidance 를 지난 번에는 행위규범으로 했는데, 행위의 기준이나 행위지침 정도로 의미를 낮춰서 쓰는 편이 나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들은 언어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텍스트에 얼마나 익숙하고 아는지에 따라 다르리라는 생각에 속편히 넘어갔다. 물론 웹검색을 했는데, (나는 주로 애매한 말이 나오면 그 말+철학(윤리학/아리스토텔레스) 를 열쇳말로 확인한다. 대학에서 올린 웹페이지, 학술문서를 공개한 웹페이지에 나온 용례를 제일 적극적으로 따온다.) 행위규범과 행동지침 모두 있었다. the most virtous 의 경우 (다시 언급되겠지만) '덕이 가장 많은' '가장 덕이 높은' 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가장 완성된 덕을 지닌' 이라고 해야 할지가 좀 애매했다.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닐 것 같아서 우선 하나로 옮겨 두고 나중에 혹시 참고할 수 있는지 웹검색을 해 볼까 싶다.
4. Chapter 4. Aristotle and Kant. The decision of dilemmas brought in mention of the emotions the virtuous would feel on certain occasions, in particular, regret and even extreme grief as reactions to what ‘had to be done’ . 행위자에 초점을 두고 어떤 일이 되었어야-> 무엇을 했어야 로 했다.
5. Virtue ethics is often praised, especially at the expense of Kant’s deontology, for giving a better account of the moral significance of the emotions than the other ethical approaches, and, in particular, for giving a more attractive account than Kant of ‘moral motivation’. 여기서 moral significance 는 도덕적 의미도 되고 도덕적 중요성도 될 것 같다. 사실 중요성이나 의미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고 보지만 뭘 골라야 할지 망설였다. 직감적으로 여기서는 중요성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감정은 중요하다고 본 그 자체가 메시지인 것 같아서 의미로 했다. Attractive 는 나올 때마다 참 난감해서 그대로 ‘매력적인’ 이라고 했다가 여러 말들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다 역시 전처럼 설득력/호소력으로 결정했다.
6. However, a careful consideration of Aristotle’s enkrateia/arete distinction (the distinction between strength of will or ‘continence’ and full virtue) and the famous passage in Kant’s Groundwork in which he discuss moral worth, reveals that, in many ways, Aristotle and Kant are much closer than is usually supposed. Insofar as Aristotle has a notion of ‘motivation’, the continent and the fully virtuous agent have the same motivation-they both act from reason (logos) in the form of ‘choice’ (prohairesis). 어찌보면 제일 기본적인 의문이었던 말이 ethics 였다. 이 말은 윤리도 되고 윤리학도 되니까. 난 지금까지는 이 책이 대학교재를 염두에 두고, 또 동료 학자들과 어느 정도 저자의 관점을 나눌만큼 도덕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독자로 한 책이라는 점에서 윤리가 아니라 윤리학(이론) 이라고 전제하고 옮겼고 어느덧 그 말에 익숙해졌는데 본문 어딘가에서 윤리학이 아니라 일반적 의미의 ‘윤리’ 라고 해야 될 것 같은 부분을 봤다. 순간 이제까지 자리에 맞게 잘 옮겼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Reason 도 마찬가지로, 나는 불가산명사 이성으로 대체로 옮겨왔는데, 아래 ‘행동의 이유/근거’ 의 reason 을 보니 혹시 가산명사로 쓰이는 근거이유를 무작정 이성으로 옮겨온 건 아닐까 싶은 걱정이 좀 들었다. In the form of 도 마음에 딱 드는 우리말 번역구가 잘 잡히지 않아서 직역했는데, 이성을 따라 행동하면 선택의 양상을 띤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7. Full virtue 을 추가하면, 완전한 덕이라고 할 경우, 불완전함-완전함의 연속체 또는 정도의 문제로 덕을 보게 되므로 혹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지 않을까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Full virtue 는 우리말 문서에서 검색되지 않았고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어서 그대로 받았다. 그것 말고도 virtuous 혹은 virtuously 란 말도 따지고보면 지금까지 문맥에 맞다고 생각하고 다양하게 옮겨 왔는데 이 말을 구체적으로 혹은 통일되게 옮길 수는 없는지 알고 싶었다. 웹문서를 보면 ‘유덕한’ ‘덕스러운/덕있는’ ‘덕을 가진’ 등이 모두 있었다. 유덕한을 쓰면 덕의 있고 없음을 강조하는 말이라서 full virtue fully virtuously 같은 말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8. Chapter 5. Virtue and the Emotions. Where Aristotle is arguably superior is in his account of human rationality, an account that allows the emotions to participate in reason, rather than being mere animal, non-rational, impulses, and thereby play their proper role in the specification of full virtue. The virtues are concerned with actions and feelings, and the moral education needed to develop them involves the education of the emotions. The full significance of this fact can be fruitfully illustrated through an example of moral diseducation, namely, the inculcation of racism. Arguably 란 말을 말 그대로 논쟁의 여지는 있으나 라고 했다가 아마도의 의미로 바꿨다. 이때의 아마도는 논쟁의 여지가 없지 않다는 점에서 확신을 줄 수는 없지만의 뜻인 것 같고, 그렇다면 이렇게 쓴다는 것 자체로 의역일 수 있다 싶었다.
9. Chapter 6. The Virtuous Agent’s Reasons for Action. We noted in Chapter 4 that the fully virtuous act from reason, in the form of ‘choice’. Do they, thereby, act ‘out of a sense of duty’ or ‘because they think it’s right?’ When we consider careful what is involved in the attribution of such a reason, we can see that the answer is ‘Yes’ (thus brining Kant and Aristotle even closer together).
10. 옮기기는 했지만 밑줄친 부분에서 한 삼사십분은 썼나보다. 이 둘의 차이가 정확히 뭘 뜻하는 걸까를 좀 알고 싶어서. 그런 생각이 내가 이 일을 그저 번역연습으로 그치지 않게 할 길인 것 같았고, 그렇지만 그런 줄 알겠다는 생각만큼은 아니었다. 막연히 했던 생각은 의무감에서 한다는 것은 감정이 배제된 혹은 자유의지가 배제된 어떤 법칙처럼 (그래서 행위자인 나는 –과장한다면-기계처럼) 따른다는 것이고 내 생각에 그게 옳아서 한다는 것은 ‘자발적’ 으로 ‘내’ 감정생각판단이 모두 그것이 옳다고 나를 추동해서 한다는 것이고 정도가 그 차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 점에서 두 번째로 밑줄 친 부분이 어려웠는데 결론적으로 둘 다 맞으면 각각을 주장한 칸트와 아리스토텔레스가 크게 다르지 않은 주장을 하게 되는 셈인 줄은 알겠는데, 그 가운데에 놓인 것이 바로 저 부분이라서, 나는 ‘왜 그걸 숙고해보면 즉 그런 행동의 이유로 사람들이 돌리는 것들에 무엇이 있는지를 따져보면’ 둘이 비슷하게 되는지를 알 수 없었다…
11. The virtuous, when acting virtuously, act for a great variety of different reasons. These form certain ranges, characteristic of particular virtues such as honesty, friendship, justice, courage, temperance, etc. When children and people who are in a transitory emotional state act for such reasons, they do not count as ‘acting out of a sense of duty’, but when the virtuous, who act from a settled state of character, act for such reasons, they do. Acting from virtue is sufficient for acting from duty.
- Justice. 이 말도 나올 때마다 고민하게 한다. 전에 적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기록을 남긴다면, 박종현 교수가 번역한 플라톤의 국가편을 보면 justice 를 정의가 아니라 올바름으로 옮겼다. 그때 책을 읽으면서 ‘그럴 수 있겠다’ 했다가 ‘하지만 그 말을 올바름으로 옮기면 플라톤의 맥락에서는 맞을지 몰라도 다른 데선 아니겠다’ 했고 그랬다. 문득 그 생각이 여기서 다시 났다. 어떡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나야 이이상의 번역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 책의 역자가 제기한 내용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지. 지금까지 기록해 올 때의 감만 봐서는 나역시 just 와 ethics 의 관계에서 정의, 정의롭다란 말을 썩 환영하면서 옮긴 것 같지 않은데..(나중에 국가편을 펴서 언급한 부분을 다시 읽어 보겠다.) settled 란 말은 안정된( 확립된 에서 후자가 덕을 완전히 갖춘의 의미를 더 잘 받지 않는가 싶어 그것으로 골랐다. 그리고 이 문단이 이번에 글 옮기면서 ‘아 하나 배웠구나..’ 하는 물론 막연한 감일 뿐이지만 어떤 기쁨을 주었다. 텍스트를 읽고 자신의 해석을 내 놓는다는 것도 느꼈고 그 해석에 내가 수긍할 수 있다는 느낌도 있었다.
13. Chapter 7. Moral Motivation. Moreover, acting from virtue, from a settled state of character, sets the standard for acting from duty, or because one thinks it’s right. Whatever their sincerely avowed reason for acting, people act ‘from duty’ to the extent that their character resembles that of the ideally virtuous agent. Hence moral motivation can be a matter of degree, and is not introspectible. 이 부분이 제일 어려웠다. 대강 파악한 의미로는 사람은 이분법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즉 의무감과 (감정과 이성이 한데 내린) 자기판단의 어느 한쪽만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내 행위에 스며든 도덕적 동기부여는 상대적인 정도의 문제다………까지는 파악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맨 끝의 introspective 가 뭘까…가 좀체 잡히지 않았다. 처음 생각은 ‘I think what it’s right’ 을 받는 말일 것이다..그러므로 내향적인/내면의/자기반성의 차원이라고 했을 것이다…했고 내내 그것이 맞으리라 생각했는데 본문의 ideally virtuous agent vs. me 라고 한다면 introspectible 이란 말이 ‘기준없이 하는 생각’ 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가 싶어졌다. 비슷한 말인 것 같아도 좀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둘 중 어느 하나를 고를 확신이 들지 않아서, 결국은 애매하게 처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