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공학과 남녀합반은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차와 맞먹는 차이가 있다.  남녀공학은 단지 남학생 여학생이 있는 학교를 뜻하지만 남녀합반은 남녀공학중에서도 극히 선택(?)받는 학생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자 짐이였다. 남녀합반의 선택권에서 탈락되어진 평범한 학생들은 남녀합반을 마치 지구의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보듯 동경했지만 실상 남녀합반인 친구들에겐 활활타오르는 태양만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불편한 생활이였다. 특히 체육시간을 전후로... 

우리학년은 모두 남녀합반은 아니였다. 총 7개의 학급 중 (7개 학급이라고 작은학교라며 지금의 학교와 비교하면 곤란하다.  한반에 적어도 52명 이상씩은 꽉꽉 채워넣어 오죽하면 절반의 사물함을 복도로 내다놓았으니까) 딱 한반만 남녀합반이였고, 나머지 반은 모두 성별에 따라 나뉘어져 있었다. 학기초 일부 배포좀 있는 학생들은 남녀합반의 선택받은 남녀출입권을 교묘히 이용하여 책을 빌린다던가, 체육복을 빌린다던가 하는 핑계를 삼아 남녀합반을 만남의 광장으로 사용하였으나 남학우반이나 여학우반은 선생님 심부름이라하여도 감히 들어올수가 없었다. 수십명의 여학생들 속에 있는 남학생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지 않나! ㅋㅋ 

각설하고 1998년 4월 1일. 만우절. 한일전이 열리던 그날! 다른 경기도 아니고 특수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두 국가간의 축구경기를 앞두고 우리 1학년 350여명과 2학년 및 3학년 선배들까지 가정에서열띤 응원을 할 수 있도록 주장하였으나 이러한 원성을 무참히 묵살하고 야자는 진행되었다. 슬슬 경기시간이 되자 갑작스럽게 스피커에서 한일전을 시청해도 좋다는 방송이 나왔다. 이럴꺼면 진작 집에 보내주지! 사실 원래는 야자 진행하고자 했으나 감독중인 선생님들은 하필 그날 야자감독이라는 이유로 한일전을 놓치기가 아쉬워서 TV앞을 전전긍긍하다가 이럴바엔 속편하게 '얘들이 하도 보고싶어해서 공부가 제대로 안된다'는 것을 핑계삼아 자신들의 TV시청권을 사수하려던 것이였다. (후일담이지만 승률을 두고 돈내기까지 했다는 것이 어는 수업시간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흘러나오기도 했었다.) 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모든반에서는 "우와~!"하는 우뢰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으나 우리반만은 "에이~뭐야!"하는 탄성이 나왔다. 그도그럴것이 하필 우리반 TV녀석이 아주!! 완전!! 지대로 맛이 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반장은 감독선생님을 찾아가 "이럴꺼면 집에 보내주시지. 우리반 TV고장나서 못본단 말이예옷!"하고 하소연을 하였고, 형평성을 고려해 우리는 그날 야자시간 금녀의 반인 3반(남학생반-그날 야자감독 쌤네 반임과 동시에 축구로인해 절반가량의 학생들이 야자를 튀어 가장 널널했던 반)출입권을 얻었다. 확실히 남녀공학중학교를 나온 여자얘들은 3반은 이제 우리반! 인듯이 아무렇지 않게 쏟아져 들어가 축구를 보았지만 여중을 나온 대다수 학생들을 비롯하여 특히나 부끄러움쟁이 초연이는 내옆에 꼭 붙어앉아 연신 뺨을 붉게 밝히고 있었다. 야. 야. 아무도 너 인식하지 않거든.. 너만 왜 난리니? 

역시나 맨 뒷줄과 교실뒷편의 일부 사물함 위는 남학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명당자리는 주인이 빨리 나타나는 법이지.. 그렇다면 나도! 뭐니뭐니해도 TV시청은 뒤에서 관림해야 눈도 아니 아프고, 목도 아니 아픈지라 남학생들이 깔려있는 뒷자리를 향해 가는데 초연이 녀석이 자꾸 내 교복 윗자락을 땡기며 '앞에서 보자'고 속삭여댔다. 아 녀석. 축구보자니까 왜 못생긴 지뢰들을 인식하고 그러는 거야! 아니면 지 혼자 앞에서 보던가 왜 졸졸 따라오면서 앞에서 보자고 하는거임?! 나는 녀석의 작은 외침을 깨끗이 묵살하고 비어있는 사물함 위로 껑충 올라갔다. 초연이는 활활타는 얼굴을 한 채 내옆에 겨우 올라와 앉았다. 거참 결국 어디 혼자 가지도 못하고 붙어있을 것을 앙탈은...그리하여 나와 초연이 몇몇 여학생들이 무수히 많은 지뢰들 사이에 자리를 잡아 한일전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날 난 여자와 남자의 놀이의 차이가 얼마나 큰 지 새삼 깨달았다. 온국민이 사랑하는 축구의 룰조차 제대로 모르는 여학생들이 거의 대부분이였던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시절 쉬는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방과후에도, 주말에도 축구를 하면서 놀던 터라 비록 동네축구 정하는게 룰이였지만 기본적인 축구룰은 알고있었다. 내가 자연스레 알고있는 축구룰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겠어!하고 생각했던 나의 착각은 그날 완전 산산조각이 났다. 대다수의 여자들은 축구를 보기만 할뿐 아는 것음을.. 그저 남의 골문에 들어가면 우와!!  우리 골문에 들어가면 아~! 우리 선수가 볼을 잡으면 아싸!! 남의 선수가 볼을 잡으면 우씨~!한다는 것을 말이다. 특히나 초연이는 당최 공부나 할 것이지 왜 여기 앉아 저걸 보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어머 우리선수 왜 경고 받아." / "백테클했잖아. 심판이 백테클에 민감한가보지." 

"어머 우리 공인데 왜 저쪽팀 그냥 줘?"/ "오프사이드잖아~!"/ "옵뭐? 그게 뭔데?"/ "아~! 진짜 절로 가서 봐! 너 땜에 중요한 장면 다 놓치잖아!' 

그녀의 궁금증이 증폭될수록 나의 짜증은 심해져만 갔다. 그 당시 나는 심적으로나 표면적으로나 우리나라의 승리을 위해 기도했지만 사실 축구천재 나카타의 현란한 기술에 빠져있던 상태였다. 하필 그가 적극적인 모션을 취할 때마다 녀석의 질문이 쇄도하는 통에 나는 도통 나카타의 감격의 드리블에 집중할 수 가 없었다. 점차 그 녀석의 질문이 많아짐에 따라 나는 자연스레 눈으로는 화면을 보고 입으로는 녀석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 차라리 약아빠진 녀석이라면 내치기라도 할 것을.. 이건 뭐 순진해서 그럴수도 없고.. 

전반전이 끝나고 규현이가 슬쩍 뒤를 돌아보고 묻는다.   

"너 축구 즐겨보냐?" / "왜?"  

"아니, 여자애치고는 많이 알아서^^;"/ "관심의 차이지뭐. 여자애라고 꼭 연예인에만 미치는 건 아니니까." 

 "아 맞다! 너 초등학교때 니네반 남자애들 사이에서 축구하던 애구나!" / "그래서?!."  

느닷없이 제형이라는 아이가 끼어든다. 

"그래서 니 다리가 튼튼한 거구나 ㅎㅎㅎ."/ "하하하" 난 일부러 과장된 웃음을 지으며 살기가득한 눈을하고 녀석을 향해 살며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올려줬다. "흠흠.."녀석은 재빨리 TV로 시선을 옮겼고, 난 후반전에도 초연이의 캐스터 겸 해설자가 되어야했다. 그날 나는 2:1의 승리에 너무 기쁜나머지 약 40분갸량 남은 야자시간동안 흥분의 도가 속에 헤엄치고 있었다. 나카타도 멋있지만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 황선홍아자씨가 짱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 후 의외의 평화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나도 더이상 자의든 타의든 남의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같은반 녀석들과 무엇보다 초연이로부터 대단한 이쁨(?)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런것들이 귀찮을 뿐이였다. 녀석들도 눈치챘는지 쟤는 잘해줘도 지랄이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슬슬 다른 곳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나 또한 내가 좋아라 하는 과목인 국어, 수학, 과학, 미술, 체육시간을 제외하고는 칠판과 눈도 마주치려하지 않았다. 저 초록빛 눈동자!! 나를 푸르딩딩하게 홀리고 있어!! 동아리 생활도 처음의 설레임이 많이 가셔 그야말로 평범평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동아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당시 고등학교 내에 동아리가 있는 것이 흔치 않았는데(우리학교를 제외하곤 관내의 어떤학교도 동아리가 없었음) 우리학교는 그런 흔치 않은 동아리를 인정해줌과 동시에 언젠간 꼭 없애고 말리라는 신념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왜냐면 동아리 생활이 꼭 모범적이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일탈을 갈망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아도 나의 맘을 충분히 위로해준 것이 바로 동아리 활동속의 자유로움과 소소한 해방감이였다. 아무튼 동아리 친목도모의 일환으로 교환일기같은 것을 주고 받았는데 이것 때문에 우리 동아리에 들었던 남학생들이 나에 대한 오해와 소문에 왜곡됨을 깨달았다기 보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내가 의외로 미술쪽에 관심이 있고, 한때 그림그리는 것으로 낙으로 살만큼 열정적이였으며, 더욱 의외로 요리하기를 좋아하고 바느질, 뜨개질 등등 손재주가 좋은 현모양처감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물론 지랄맞은 성격이라는 큰 장애물이 없어진 다음에 현모양처고 뭐시고가 인정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조용하던 학교생활속에서 나의 소문은, 모든 소문이 그러하듯 얼마간 불꽃같이 피어오른 후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워낙 뒤끝이 없는데다가 괄괄한 편이라 이놈 저놈 책도 잘 빌려주고 준비물도 잘 빌려주고 하다보니 나를 다른 형태의 동성친구쯤으로 생각하는 남자얘들이 하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뭐 살짝 어색하긴 했겠지만..  

그즈음 내가 빠져든 것이 두가지가 있었는데, 뭐 하나는 알다시피 사색속에 몸부림치는 것이고(참..사색이라고해서 별다른 것은 아니고 그냥... 잡생각? 아니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는 생각?) 또 다른 한가지는 노래부르기였다.  

매일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다닐 정도로 음악듣기에 심취해 있던 나에게 노래부르기만큼 임펙트한 스트레스 해소방법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여성키의 소리내기가 어려워(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난 아직도 여자들만이 낸다는 그 소리지르기-귀가 찢어질 것 같은 고음 꺄~~-를 못낸다. 그 음자체를 모르겠거니와 올라가지도 않고, 올라간다해도 목소리가 너무 두껍다. 아~~~) 여자가수의 노래나 댄스가수의 노래는 접하지 않고 있었다. 들어도 못따라 부르니까 ㅎㅎ 아무튼 여자치곤 낮은 음은 잘 내려가는 편이라 왠만해서는 남자들도 내리기 힘든 임창정과 가슴을 후비는 애절한 가사의 김경호, 그리고 유일하게 좋아하는 가수 이브의 노래를 즐겨들었다.   

참, 여기서 유일하게 좋아한다는 것은 다른 가수들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무엇하나에 미쳐보질 못해서,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무엇하나에 오래도록 미쳐보질 못해서 한사람에게 무한한 열정을 쏟아보지도, 혹은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재능에 무한한 존경을 표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시대 소녀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연예인 남편삼기에 대한 무한한 혐오감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뭐.. 다 지가 마누라래. 참. 겉으로는 연예인을 두고 본처싸움을 벌이는 소녀들의 어린 감성을 이해하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참 딱하고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은 내가 그녀들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해서가 아니다. 물론 그땐 내가 정신연령이 높아서 그런가보다 하고 착각을 했지만,  지금와 생각해보니 난 소녀다은 감성이 없었고 그런 순수함을 누리기에는 마음이 편치 못한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사랑을 주기에는 나는 따지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인간적으로 좋지 않은 가수도 노래가 좋으면 그의 노래를 들으면 그뿐이였고, 유일하게 좋아한다는 이브의 노래도 싫은 노래가 나오면 다음 트랙으로 건너뛰었다. 그들이 언제 TV에 나오는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콘서트계획이 있는지 안중에도 없었다. 그냥 내가 필요한 시간에 나의 마음을 안정시켜줄 그의 목소리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동성친구 사귀기가 힘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아이들과 나와의 소녀다운 감성의 차이는 지구에서 안드로메다정도의 차이라고나 할까! 나는 그들이 흥분하는 연예인 이야기에도, 드라마 이야기에도, 그들의 일상 속 이야기에도 대화를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대신 나는 나와 지냈다. 쉬는 시간동안 노래를 들으며, 오늘의 슬픈 아침을 잊기위해 노래를 불렀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내가 하고 싶은데로. 교실을 넘어 복도밖으로 울리는 내목소리가 생소했을 것이다. 정말 특이한 녀석이라고.. 쪽팔리지도 않나? 밖에까지 다 들리는데.. 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남 신경을 안 쓰는 편이다. 시간이 지나면 슬슬 아이들도 적응이 되겠지.. 그려러니 하겠지.. 그리고 슬슬 나의 이런 행동도 너희들의 웃음에 묻히겠지..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겠지... 

두어달 후 새벽까지 잠 못이룬 어느날 그날따라 나의 기분은 노래를 부르고 싶지도 않을 만큼 다운이 되어있었다. 5교시 체육수업 후 시작된 6교시 과학수업. 체육시간동안 격학게 움직인 터라 과학수업 내내 노트에 아랍어를 적은 나는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자느라 정신이 없었다. 초연이 녀석이 신나게 흔들지만 않았어도 마지막 수업시간까지 그냥 잘 뻔했다. 초연이는 나를 깨우더니 싱글벙글 뭐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다.   

"잠에서 깨자 마자 니 웃는 얼굴을 보니 아예 눈을 감고 싶다는 마음이 물밀듯이 생긴다." 

"ㅋㅋ 여민아, 다른 반 얘들이 너 학교 안왔냐고 물어봐.. 오늘 하루종일 쉬는 시간에 니 노래부르는 소리가 안들린다고. 호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파이는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형과 함께 살고 있는 호기심 많은 아이입니다.  그가 여러 사람들을 이해해 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애어른이 따로 없구나! 하는 말이 절로나올 정도로 생각이 깊은 아이지요. 호기심도 많고 신앙심도 깊어(?)서 모든 종교에 관심을 보이며, 모든 신을 아무런 색깔없이 따르기도 합니다. 저 또한 모태신앙인 천주교와 잠깐 접해 본 기독교, 대학에 들어와 불교신앙에 빠져 본 사람으로써 동지를 만난 것 같아 기쁘더군요. 물론 저는 이슬람교나 힌두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인간들이 벌이는 싸움(두 종교간의 오랜 전쟁)으로 두 종교의 교리를 평가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그 두 종교 역시 사랑과 자비, 은혜를 제일 덕목으로 여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요. 이렇게 모든 신을 아낌없이 사랑하는 파이에게 멀리 혹은 가까이 계실지도 모를 신께서는(혹은 신들께서는) 신앙을 강요한 시련이나 시험 대신 인간으로서 가장 원초적인 본능을 일깨우는 사건을 던져줍니다. 바로 삶에 대한 집착이지요.. 무수히 많은 시련에도 파이는 신들에게 기적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인간의 본능 그대로 견디고 또 견디고, 또 견디어 냅니다. 어찌보면 참 아이러니한 사건이지요. 이 소설에서 아이러니 한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인간과 뱅골 호랑이와의 기막히 동거가 지속된다는 것과 그로인해 파이가 결국 생명을 이어간다는 것 또한 그러하니까요!

파이의 가족은 정든 인도를 떠나 새로 입양될 몇몇의 동물들과 함께 캐나다로 떠나는 배를 타고 얼마 후 이 배는 기계적인 문제일지도, 악천후때문일지도 모르는 사건으로 좌초됩니다. 그리고 유일한 생존자는 파이와 뱅골호랑이, 하이에나, 오랑우탄, 다리가 부러지 얼룩말뿐이지요. 아! 배에 숨어 있던 쥐를 빼먹을뻔 했군요! 좁은 구명보트 안에서 하나의 인간과 다섯의 동물은 자연 그대로의 법칙을 따르기도 하고 자연의 법칙을 어긋나기도 한 동거를 시작합니다. 동물들간의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뱅골호랑이만 남겨진 후 부터 파이는 언젠가 곧 자신이 먹이가 될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 분명한 사실이 실현 되지 않도록 그는 뗏목을 만들고, 호랑이를 보살피며, 호랑이를 길들이지요. 참으로 놀라운 것은 배가 좌초된 후 얼마간 파이는 자신의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립니다. 곧 죽겠구나 하고 최소한의 위험에서만 벗어난 체 몸을 방치하지요. 하지만 오히려 뱅골호랑이와 파이 둘만 남게 된 후부터 그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요. 그리고 결국 그가 삶을 계속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뱅골 호랑이와 함께 있었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곤 하지요, 죽음이 가장 가까이 있을때 삶에 대한 집착이 가장 강한 법이라고. 자살을 여러차례 시도한 사람이 사형선고와도 같은 병에 걸리면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해진다는 이야기는 모두 한번쯤 들어봤을테죠? 어쩌면 보이지 않는 죽음은 동경하면서도 눈앞에 보이는 죽음은 부정하는 이유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보다 더 크기 때문이고, 외로움에 대한 극복이 삶을 다시 갈구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만이 이 세상에 홀로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은 두려움을 만들고 결국은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결심하게 되지요. 만약 파이가 뱅골호랑이가 없이 홀로 구명보트에 남겨졌다면 그는 과연 안전하다 말 할 수 있을 까요?  망망대해에서 홀로 남겨지는 것 보다 무서운 것이 어디있을까요? 톰행크스 주연영화 캐스트어웨이에서 그의 배구공이 생각나는 이유는 아마 이것때문이겠죠. 비록 자신과 함께 있는 존재가 언제든 자신을 한입거리 먹이로 여길수도 있다는 사실에 파이의 삶에 대한 의지는 더욱 확고해지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이 놀랍고 거대하며 한없이 고된 여정이 해피엔드로 끝남에도 사람들은 그의 말을 쉽게 믿지 못하지요. 그가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했던 호랑이와 그가 겪은 무수한 일들.. 눈먼 프랑스인과의 만남이라던가 식인해초섬과 같은.. 것들말이예요. 하지만 나는 그가 겪은 일을 거짓이라 생각치 않아요. 극한의 상황에서 보이는 신기루라 생각하지 않죠. 고작 16살인 소년이지만 한계를 극복하는 그의 모습을 믿음으로써 내가 느껴지는 것, 얻어가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1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너무나도 살인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사실 어느 시대에나 연쇄살인은 존재했고, 원한없이 죽어간 불특정 다수의 시체들은 발견되어왔다. 하지만 실시간 뉴스가 가능한 지금 하루가 멀다고 들려오는 사체발견에 대한 소식과 살인마들의 이야기는 마치 이 세상에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만이 살고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이제 더이상 TV속의 범죄는 다른 세상이야기가 아닌 나에게도 언젠가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다.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 나같은 보통사람에게도 점점 와 닿는 것처럼 살인마들도 점점 일반화되고 있다. 

 예전의 살인마들은 뚜렷한 사회적 반감속에 대개 직업이 없거나 사회적으로 격리된 혹은 잉여된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살인을 저지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참 궁금했다. 하나같이 사회에서 조금은 동떨어진 그들.. 사회적 지위가 낮은 그들을(평범하고 주변사람들로 부터 성실하다는 소리는 들었을지 몰라도)을 볼 때 왜 소위말해 잘나간다는 사람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자들 중에는 살인마가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말이다. 물론 정치적인 살인마는 많지만.. 연쇄살인과 같은 살인자체를 즐기는 살인광들의 존재이유가 참으로 궁금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점점 깨어지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점차적으로 살인을 즐기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져가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진정으로 추구해야하는 가치들이 설 자리를 잃게될수록 그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며 방황하는 사람들은 반사회적 살인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결국 이 곳! 생명을 가장 중시하는 병원까지 그 살인바이러스는 침투하고 만 것이다.   

느닷없는 병원장의 호출을 받은 다구치는 병원장의 호출보다 더 느닷없는 부탁을 받았다. 거절할 수 없는 그 부탁은 최근 3건의 연속적인 사망사고가 일어난 바티스타수술팀을 조사해달라는 것이였다. 외과에 대해서는 거의 학부생수준이며, 부정수소외래를 맡고 있는 신경정신과 만년강사 다구치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바티스타 수술 최고의 기류가 맡고 있는 팀이 아닌가! 기류는 흠.. 거의 장준혁과 같은 포스를 지닌 인물이다. 이거 초반부터 완전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데.. 하지만 의외의 인물 시라토리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빠른 전개로 흘러간다. 침착하며 생각이 많은 다구치와 공격적이며, 논리적인 시라토리는 부조화의 조화를 이루면서 빛의 이면에 깔린 어둠을 찾아낸다. 아주아주 괴짜스럽고 독특한 시라토리의 행동들과 그때문에 골머리를 썩히는 다구치의 모습에서 추리소설속의 긴박함 보다는 많은 웃음을 유발하는데, 이는 역자가 말했듯 이 소설이 가진 엔터테이먼트적인 요소가 강하기 때문이다. 어쨓든 의료과실이 아닌 살인으로 밝혀진 진상은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라 할지라도, 누구보다 타인의 생명을 중시해야 하는 의사라는 입장에 있더라도... 잘못된 의료시스템과  삐뚤어진 인성이 만나 엇박자를 이룬 결과 살인마를 탄생시킬 수 있음을 납득시킨다.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야 이 소설의 작가가  본업은 의사이며, 그가 신예작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자의 이유로 이 소설이 가진 사실성, 그리고 한편의 글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잘 만들어진 의학드라마같은 환영을 보게 해준 이유를 알았다. 그리고 후자의 이유로 그의 타고난 글 솜씨가 부러웠다. 의사인데 글까지 잘쓰다니!이건 완전 김태희가 서울대 출신과 맘먹는 부러움이다.. 

덧붙여 역자의 후기와 삽화가 참 인상적이였다고나 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 왜 이런 소문이 나게 된 것일까? 왜...   나는 과연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이상한 아이일까?  난 한번도 내가 평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특이하다고까지 할 만큼은 아니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뿐인데.. 도대체 나의 뇌 구조는 그들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다른 것일까? 

이쁘다는 말을 조금 들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삐쩍마른 몸.. 웃을 때 한쪽볼에 보일듯 말듯 보조개가 들어가고 특히나 큰 눈이 맑고 이쁘다고.. 꼭 외국아이 같다고.. 머리가 붉은 편이라 오해하는 사람들도 몇몇있었다. 완전 외국인은 아니여도.. 외국애같다는 소리에 '몰랐어? 우리 할아버지가 미국인이야!' 하고 뻥을 치면 '역시'라고 믿어버리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하지만.. 우리집 형편상 외국에서 아이를 입양할 만큼 넉넉지 않으므로 과감히 패스!할 것!! 

잘생겼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점점 커가면서..약하고 삐쩍마른 몸이 안쓰러워 아빠의 강행군 체력단련 속에 다부진 체격을 가지게 되면서..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나의 체격사항은 항상 '다'를 기록하고 키-몸무게 연관성 99.8을 기록하는 완전 표준형 그자체였다. 운동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긴머리는 귀칞은 존재가 되었고, 머리를 짧게 자르자 마자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마다 우리 여민이 참 잘~생겼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아줌마 잘생기기만 했어요? 이쁘지는 않아요?"하고 물으면 "응! 잘생겼어!."라고만 하셨다.. 기왕 칭찬해주실라면 이쁘다고 해주시지..
  

내가 남자였으면 정말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반아이들로부터.. 키가 그리 크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왜? 키까지 컷으면 니들이 나 수술이라도 강제로 시키겠다는 거임? 나의 머리길이가 더 짧아지자 나에게 편지를 써주는 여자 후배들이 생겨났다. 가끔 사물함에 담아진 이니셜로 쓴 편지와 과자들.. 그래 여긴 여중이니까.. 아직 미숙한 아이들의 일시적인 현상임을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만 가봐라.. 니가 잘생긴 여자와 못생긴 남자중에 누굴 더 좋아하게 될지 ㅋ(앗! 잘생겼다는 말을 인정하는 꼴이 되었잖아!)중학교를 졸업하는 날 나에게 꽃다발을 준 후배는 자신이 이니셜의 그녀임을 밝혔고, 졸업선물과 함께 눈물을 흘리는 아이는 '전 정말 언니 좋아했는데.. 이제 못보네요..'라는 말만 남겼다.. 아... 나.... 이거.. 어쩌지...그때 나의 대략 난감함이란... 

 그리고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남학생들은 말했다. 재 채여민이지? 쟤 완전 남자애같지 않냐? 목소리도 허스키해서 밤에 길에서 만나면 깜짝깜짝 놀래. 어떻게 여자애가 나보다 목소리가 더 낮지?   길거리를 지나가다 나에게 장난을 거는 남학생들이 나에게 몇배의 응징을 당하자 더욱더 '남자애! 남자애! 하고 소리를 쳐대며 부르기 시작했다. 유치한 것이 용서가 되는 그 나이 또래 .짓궂은 동창녀석이 자기 친구를 지나가는 나에게 일부러 부딫히도록 밀었다. 이런 유치한 장난이 한두번이 아니였기에 예의 주시하고 가던 나는 나를 항해 떠밀린 그 녀석을 피하고 길가에 있던 주먹만한 짱돌을 들었다. 그 녀석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그 짱돌을 들었을 뿐만아니라 던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잽싸 도망가는 그 녀석은 "채여민! 이 사내자식아~"하는 말로 나의 속을 또 한번 뒤집어 놨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또 다른 뚱뚱보 유치빤스 하나가 하교하는 남학생들 사이에서 (난 남중근처에 살았기때문에 집에가는 길엔 항상 수십명의 남학생들이 참조출연하고 있었다.) "채여민~남중에 전학 안오냐?"며 소리를 질렀다.. 변성기 괴물같은 남자얘들의 합창웃음소리.. 허허허허허허... 악! 소름돋아! 니가 먼저 도발했다! "야! 내 걱정하지 말고 니 자전거 걱정이나 해! 자전거 허리가 아주 휜다 휘어!"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아까보다 더 크게 웃는 주변의 남학생들.. 그 녀석은 전세가 역전되자 가던 길을 되돌아와 자전거에 탄 체 다리를 쭉 뻗으며 나를 발로 차려는 시늉을 했다. 야! 내가 둔한 네 발에 맞고나 있을라고 운동하는 거 아니거든! 난 순간 그 녀석의 자전거 뒷바퀴를 발로 확 차버렸고 가뜩이나 주인을 지탱하기 힘든 자전거는 푹하고 옆을로 고꾸라 졌다.. 길가 도랑에 빠진 자전거과 함께 뒹굴던 녀석은 팔을 삐었는지 벌게진 얼굴로 팔을 움켜쥐고 외쳤다. "이 사내새끼!"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거 아니야.. 

난 귀찮은 게 싫어.. 꾸미는 것도 실어.. 왜 이쁘게 입어야 하고 아침마다 머리손질을 하느라 이삼십분을 허비해야 하는지 아직 모를 뿐이다. 짧은 머리가 훨씬 편해서 자른 것뿐이라고. 난 남자가 아니야. 여자인게 좋다구. 내가 치마를 입지 않는다고 해서 청바지와 면티를 즐겨입는 다고 해서, 왼종일 운동화를 신고 여기저기 뛰어다닌다고 해서, 축구와 농구라면 사족을 못 쓴다고 해서, 뒷말을 안한다고 해서, 제일 친한 친구와도 화장실을 같이 안간다고 해서, 가끔은 눈에 뵈는 게 없다고 해서 내가 남자라고 생가하지 않는다고. 나를 먼저 건드리는 것은 너희잖아! 그 순간에는 누구든 그렇게 화를 내기 마련이야. 그런 걸 가지고 나를 놀릴 필요는 없잖아!  난 짓궂고 유치찬란한 너희 장난에 내식대로 맞장구를 쳐준 것 뿐이야..물론 너희가 원하는 것은 꽤하고 소리를 지르면 울고 불고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이겠지만.. 

날 남자라고 부를 만한 이유가 눈꼽만치도 없는데.. 난 그냥 편한게.. 그리고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게 좋을 뿐이다.. 

난 내가 평범하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어.. 

하지만.. 지금.. 난.. 평범해 졌으면 좋겠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