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의외의 평화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나도 더이상 자의든 타의든 남의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같은반 녀석들과 무엇보다 초연이로부터 대단한 이쁨(?)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런것들이 귀찮을 뿐이였다. 녀석들도 눈치챘는지 쟤는 잘해줘도 지랄이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슬슬 다른 곳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나 또한 내가 좋아라 하는 과목인 국어, 수학, 과학, 미술, 체육시간을 제외하고는 칠판과 눈도 마주치려하지 않았다. 저 초록빛 눈동자!! 나를 푸르딩딩하게 홀리고 있어!! 동아리 생활도 처음의 설레임이 많이 가셔 그야말로 평범평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동아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당시 고등학교 내에 동아리가 있는 것이 흔치 않았는데(우리학교를 제외하곤 관내의 어떤학교도 동아리가 없었음) 우리학교는 그런 흔치 않은 동아리를 인정해줌과 동시에 언젠간 꼭 없애고 말리라는 신념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왜냐면 동아리 생활이 꼭 모범적이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일탈을 갈망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아도 나의 맘을 충분히 위로해준 것이 바로 동아리 활동속의 자유로움과 소소한 해방감이였다. 아무튼 동아리 친목도모의 일환으로 교환일기같은 것을 주고 받았는데 이것 때문에 우리 동아리에 들었던 남학생들이 나에 대한 오해와 소문에 왜곡됨을 깨달았다기 보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내가 의외로 미술쪽에 관심이 있고, 한때 그림그리는 것으로 낙으로 살만큼 열정적이였으며, 더욱 의외로 요리하기를 좋아하고 바느질, 뜨개질 등등 손재주가 좋은 현모양처감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물론 지랄맞은 성격이라는 큰 장애물이 없어진 다음에 현모양처고 뭐시고가 인정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조용하던 학교생활속에서 나의 소문은, 모든 소문이 그러하듯 얼마간 불꽃같이 피어오른 후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워낙 뒤끝이 없는데다가 괄괄한 편이라 이놈 저놈 책도 잘 빌려주고 준비물도 잘 빌려주고 하다보니 나를 다른 형태의 동성친구쯤으로 생각하는 남자얘들이 하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뭐 살짝 어색하긴 했겠지만..  

그즈음 내가 빠져든 것이 두가지가 있었는데, 뭐 하나는 알다시피 사색속에 몸부림치는 것이고(참..사색이라고해서 별다른 것은 아니고 그냥... 잡생각? 아니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는 생각?) 또 다른 한가지는 노래부르기였다.  

매일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다닐 정도로 음악듣기에 심취해 있던 나에게 노래부르기만큼 임펙트한 스트레스 해소방법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여성키의 소리내기가 어려워(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난 아직도 여자들만이 낸다는 그 소리지르기-귀가 찢어질 것 같은 고음 꺄~~-를 못낸다. 그 음자체를 모르겠거니와 올라가지도 않고, 올라간다해도 목소리가 너무 두껍다. 아~~~) 여자가수의 노래나 댄스가수의 노래는 접하지 않고 있었다. 들어도 못따라 부르니까 ㅎㅎ 아무튼 여자치곤 낮은 음은 잘 내려가는 편이라 왠만해서는 남자들도 내리기 힘든 임창정과 가슴을 후비는 애절한 가사의 김경호, 그리고 유일하게 좋아하는 가수 이브의 노래를 즐겨들었다.   

참, 여기서 유일하게 좋아한다는 것은 다른 가수들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무엇하나에 미쳐보질 못해서,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무엇하나에 오래도록 미쳐보질 못해서 한사람에게 무한한 열정을 쏟아보지도, 혹은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재능에 무한한 존경을 표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시대 소녀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연예인 남편삼기에 대한 무한한 혐오감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뭐.. 다 지가 마누라래. 참. 겉으로는 연예인을 두고 본처싸움을 벌이는 소녀들의 어린 감성을 이해하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참 딱하고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은 내가 그녀들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해서가 아니다. 물론 그땐 내가 정신연령이 높아서 그런가보다 하고 착각을 했지만,  지금와 생각해보니 난 소녀다은 감성이 없었고 그런 순수함을 누리기에는 마음이 편치 못한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사랑을 주기에는 나는 따지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인간적으로 좋지 않은 가수도 노래가 좋으면 그의 노래를 들으면 그뿐이였고, 유일하게 좋아한다는 이브의 노래도 싫은 노래가 나오면 다음 트랙으로 건너뛰었다. 그들이 언제 TV에 나오는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콘서트계획이 있는지 안중에도 없었다. 그냥 내가 필요한 시간에 나의 마음을 안정시켜줄 그의 목소리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동성친구 사귀기가 힘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아이들과 나와의 소녀다운 감성의 차이는 지구에서 안드로메다정도의 차이라고나 할까! 나는 그들이 흥분하는 연예인 이야기에도, 드라마 이야기에도, 그들의 일상 속 이야기에도 대화를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대신 나는 나와 지냈다. 쉬는 시간동안 노래를 들으며, 오늘의 슬픈 아침을 잊기위해 노래를 불렀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내가 하고 싶은데로. 교실을 넘어 복도밖으로 울리는 내목소리가 생소했을 것이다. 정말 특이한 녀석이라고.. 쪽팔리지도 않나? 밖에까지 다 들리는데.. 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남 신경을 안 쓰는 편이다. 시간이 지나면 슬슬 아이들도 적응이 되겠지.. 그려러니 하겠지.. 그리고 슬슬 나의 이런 행동도 너희들의 웃음에 묻히겠지..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겠지... 

두어달 후 새벽까지 잠 못이룬 어느날 그날따라 나의 기분은 노래를 부르고 싶지도 않을 만큼 다운이 되어있었다. 5교시 체육수업 후 시작된 6교시 과학수업. 체육시간동안 격학게 움직인 터라 과학수업 내내 노트에 아랍어를 적은 나는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자느라 정신이 없었다. 초연이 녀석이 신나게 흔들지만 않았어도 마지막 수업시간까지 그냥 잘 뻔했다. 초연이는 나를 깨우더니 싱글벙글 뭐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다.   

"잠에서 깨자 마자 니 웃는 얼굴을 보니 아예 눈을 감고 싶다는 마음이 물밀듯이 생긴다." 

"ㅋㅋ 여민아, 다른 반 얘들이 너 학교 안왔냐고 물어봐.. 오늘 하루종일 쉬는 시간에 니 노래부르는 소리가 안들린다고.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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