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유령 (2004) SE
조엘 슈마허 감독, 에미 로섬 외 출연 / 아이비젼엔터테인먼트(쌈지)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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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을 여러번 본 언니와 함께 극장을 찾았다. 우리집은 강북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동네인데 코엑스 메가박스가 화면과 음상태가 가장 좋다는 얘기를 전해듣고는 일부러 거기까지 가서 이 영화를 보았다. 다른 영화라면 아무 극장이나 갈텐데 너무나 소중히 여기는 뮤지컬이기에 뮤지컬 공연과 같은 감동을 느끼고자 그리로 간것이다.

사람들은 공연에 비해 너무 못만들었다며 혹평을 늘어놓았지만 난 감동적이기만 했다. 아름다운 팬텀의 아리아와 크리스틴의 think of me 그리고 날 위해 노래해~ 하며 부르는 노래는 감동 그 자체였다. 음..솔직히 라울이 조금 못생겨서 실망하긴 했지만 역시나 최고의 뮤지컬 이기에 그 감동만큼은 사그러 들지 않았다.

집에서 DVD를 통해 다시 보면서 5.1 채널 사운드로 해서 봤는데 참 좋았다. 영상이나 배우들 뭐 이런건 둘째치고라도 뮤지컬 넘버를 듣는 재미와 감동!! 그것 때문이라도 꼭 소장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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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즈 [dts] - (2disc)
권칠인 감독, 장진영 외 출연 / 베어엔터테인먼트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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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살의 남녀들이 서른살을 앞두고 펼치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조금은 특별하고 조금은 과감하게 그린 영화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본것은 28살때였다. 싱글에서 벗어난 아줌마가 된지 1년이 덜된 상태였기에 싱글의 삶이 살짝 부럽기도 하면서 지금 즐기고 있는 신혼이 행복에 겨워있을때 였던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예쁘고 능력있고 섹쉬하고 귀엽기까지 한 여 주인공들을 보면서 그저 부럽다~ 라는 생각뿐이였던것 같고 마지막 결론은 지금까지 보아온 로맨틱 영화와는 전혀 다른 결론이여서 조금 놀라웠던것 같다.

오늘 마흔의 미혼인 아주버님과 우리  부부.. 함께 이영화를 보았다. 이제 결혼 4년차, 햇수로만 따지면 5년! 와우~ 그래서 일까  예전에 봤을때 하고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다. 뭐랄까.. 돌아가고 싶다! 라는 열망이 생겼다고나 할까! 싱글들의 삶이 참 귀여워 보였고 삶을 살아내는것이 아니라 즐기며 산다는 느낌이였다. 생각해보면 내 나이 스물아홉살엔 많은 생각들을 하며 보낸것 같다. 그래서 내가 살아온 날들중에 가장 바쁜시간을 스물아홉에 가졌었다. 그냥 서른살을 맞이하는건 죄악이라면서 어찌나 호들갑을 떨어대며 스물아홉을 치뤄냈는지.. 내가 나 뭐 좀 해야겠어. 벌써 서른인데 너무 허무하잖아! 뭐 이런식으로 얘기하면 싱글인 스물아홉의 친구들은 "넌 이년아 결혼이라도 했지!" 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었는데.. ㅋㅋ

스물 아홉.... 웬지 서른이라고 하면 뭐 하나는 이뤄놓았을것만 같고 이제 꿈을 ?는것이 아니라 꿈을 이루고 그 꿈을 단단하게 만들어 놓을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많이 했기에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너무 억울한 시간이 스물 아홉인것 같다. 그런데 서른을 지나 서른 하나를 맞이하니(다른 분들이 이 글을 보면 땍! 어린 것이~  이럴지도 모르겠군..) 그건 아무것도 아니였다. 서른이라고 해서 꿈을 이뤄내지도 못했고, 내 생각은 여전히 열아홉에서 멈춘듯 난장이 만한 내면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도 결말이 그랬던것 같다. 서른이라고 해서 뭔가 특별히 나아질것은 없다고, 그리고 여전이 꿈을 키워 나갈 수 있는 나이라고... 재미있고 즐겁고 유쾌하게 스물 아홉을 그린 싱글즈! 보면서 저 여자 패션이 어쩌구, 저 여자 속옷이 어쩌구, 저 여자가 머리 스타일이 어쩌구.. 이런것만 위주로 보려면 그냥 패션 잡지를 봤음 좋겠고 (뭐 그런것이 눈에 띄긴 하지만...) 자신의 스물 아홉을 곰곰히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뭐 생각한다고 딱히 나아질건 없겠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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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 다빈치 art 11
구로이 센지 지음, 김은주 옮김 / 다빈치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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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에곤 실레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것은 김지은 아나운서가 쓴 [서늘한 미인]에 실려 있던 이태경님의 작품을 통해서였다. 이태경님의 작품 중 왼쪽에 있는 그림 [무니르] 와 빨간색의  강렬한 색을 배경으로 하여 그린 [알렉상드르] 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 작품들을 보고 사람들이 에곤 실레와 많이 닮아 있다고 하는 것이였다. 그래서 뒤적여 보고 알아보는 가운데 이 책 에곤실레, 벌거벗은 영혼을 만나게 된 것이다.

  에곤 실레를 설명함에 있어 작가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이야기를 한다. 클림트를 통해 에곤 실레를 알게 되었다면서 클림트를 빼놓고는 에곤 실레를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클림트, 황금빛 유혹 에서는 또 반대로 에곤 실레의 이야기를 머릿말에 써놓았다. (물론 작가는 다른 사람) 클림트의 제자였던 에곤 실레의 작품을 보면 웬지 클림트로부터 벗어나려고 무던히 노력한 흔적 처럼 황금빛 색채와 같은 화려함을 벗어던지고 연필선처럼 투박한 드로잉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냥 실레의 작품만 봤더라면 저런 생각안하고 그냥 순수하게 드로잉을 좋아하는 구나..라고 하고 넘어 갔을텐데 클림트가 스승이라는것을 알게 되자 나도 모르게 분석적이 되고 비교가 시작이된다. 신영복 선생님이 쓴 [강의] 라는 책의 서론에 말하길 비교를 하게되면 보는 눈이 좁아진다고 하였는데 그래도 가장 손쉬운 분석 방법이 비교이고 비교하다보면 또 재미있는 것들도 알아내지니까 자꾸 비교를 하게된다.

어쨋든.. 이 책은 실레 연구자들의 의견을 통해 실레의 삶을 이야기하고  특히 실레의 편지와 일기를 통해서는 내면의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실레의 수많은 작품들을 시간의 순서를 통해 그의 삶과 함께 나열함으로써 실레가 추구하려고 했던
세계관이라든가 그의 생각들을 조금은 읽어낼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에로틱한 스케치나 수채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술 작품이다. 나는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으며, 그 작품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내 견해를 지지해 줄 것이다.
다른 예술가들은 에로틱한 그림을 그린 사실이 전혀 없다고 말할 것인가. 예컨대 롭스같은 사람은 전적으로 포르노 그림만 그렸다. 그러나 예술가를 감옥에 가두는 경우는 결코 없었다. 아무리 에로틱한 작품도 그것이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는 이상 외설은 아니다. 그것은 외설적인 감상자들에 의해 비로소 외설이 된다. 클림트를 포함하여 지극히 많은 대가들의 이름을 예로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식으로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에로틱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단,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그와 같은 그림을 고의로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다는 것, 내가 아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물론 타락한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타락이라는 말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어른들은 그들이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얼마나 타락해 있었는지, 얼마나 성적 충동에 시달렸는지를 잊어버린 것일까. 어른들은 자신들이 아직 어렸을 때 공포스러운 욕정이 급습하여 괴로웠던 기억을 잊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잊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로 인하여 정말 무섭고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성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는 한,성에대한 번민으로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 실레의 옥중 일기 중에서

이 책 한권을 통해 실레의 모든 미술관이나 세계관을 다 알수는 없지만 한 사람으로써의 실레. 예술가의 고민, 고뇌 등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28년의 너무나 짧은 생을 살다간 예술가를 깊이 연구하기란 쉽지 않았는지 [~ 가 아닐까] 식의 작가의 추측으로 이루어진 부분들이 있어서 조금 아쉽긴 했지만 나처럼 이제 갓 미술가나 미술에 대해 흥미를 갖고 읽는 사람이라면 에곤실레의 삶을 조금은 들여다 볼수 있어서 좋은 자료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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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화가.


황금빛의 화려한 화면과 장식성.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은 화폭에 담겨진 화려함에 금새 매혹되고 만다. 세기말과 세기초, 낡은 전통과 새로운 도전이 혼재된 이 시기에 클림트는 벌거벗은 여성들을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킨 화가였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파괴하고자 비엔나 분리파의 선구자를 자처하며 시대정신을 대변했던 클림트를 만나 보자.

후기 상징주의 회화의 대표 화가가 뭉크라면 구스타프 클림트는 전혀 다른 양상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상징주의는 모더니즘의 선구이자 제1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유럽 문명의 마지막 꽃이었다. 그리고 클림트의 상징주의적인 요소는 이 같은 시대적인 흐름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의 근교였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난 클림트는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데생 솜씨를 눈여겨 보았던 친척의 도움으로 그는 미술의 길에 들어선다.

클림트는 스물 한살이 되던 해부터 화가로서의 명성을 구축해 나갔지만,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은 서른 살이 될 무렵이었다. 이 때부터 그의 작품은 강렬한 느낌을 자아내며 관객들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1891년부터 1910년까지의 10여 년 동안 그의 작품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며, 구상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작품에서 보이는 부분 부분의 양상이 때로는 환상적이고, 때로는 평면적인 면으로 혼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 1897년 비엔나 분리파가 형성되고 그가 회장으로 임명되면서 그는 국제적인 평판을 얻으며 화가로서의 명성을 떨친다.

클림트의 작품에는 유난히 많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리고 클림트에 의해 표현된 여성상은 ‘요부'인 동시에 ‘어머니'라는 대조적인 상징성을 동시에 부여한다. 이는 클림트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었던 어머니에 대한 고착 현상과 여성을 통한 시대정신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당시 프랑스에선 최초의 여자중등학교가 등장했고, 독일에서도 여성 교육기관이 생기는 등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서양 문명의 오랜 관습을 서서히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다나에> 1907~1908년경
캔버스 유채 22×83cm 개인 소장

달콤함, 퇴폐로 가는 길 - 다나에 -

참으로 고혹적인 아름다움이다. 여인의 풍만함은 터질 듯 화면을 장악했다. 그녀의 반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나온다.

달콤하지만 뭔가 퇴폐적인 분위기가 물씬거리는 그림. 죄악의 냄새가 있고 절망적인 죽음의 그림자마저 엷게 드리워져 있다. 농밀한 에로티시즘을 담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의 이 그림 '다나에'를 보고 있으면 우리는 어느 새 몽환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여인의 누드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해 낸 거장

인체 표현, 그 중에서도 다양한 연령층의 여인누드를 서양미술사 안에서 가장 완벽하게 표현해 낸 작가로 알려지고 있는 클림트는 유겐트스틸 운동을 주도했던 오스트리아의 거장이었다. (유겐트스틸 운동이란 독일어 문화권에서 아르누보 양식을 호칭한 것으로서 아르누보의 특징인 식물을 모티브로 하는 화려한 장식효과를 보다 극적으로 연출하는 점이 색다르다.)

그는 여인을 사랑하고, 여체에 탐닉했던 자신의 성 의식을 그림으로 남기고 있다. 한편 에로티시즘을 바탕으로 시대정신의 나락과 자본의 발흥에 따른 인간(여성으로 대치되어)의 상품화를 죽음이라는 세기말적 분위기에 녹여 표현한 작품을 상당수 보여준다. '다나에'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에로틱한 분위기는 여체를 묘사해내는 독특한 작가의 개성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클림트는 여성의 작은 심리변화를 절제된 표정으로 여인의 나신에 숨겨 둠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분위기를 즐기도록 배려한다.

여성의 심리변화까지 화폭에 담아

이 작품에서도 그의 이런 팬서비스(?)는 예외 없이 드러난다. 살포시 감은 눈과 대조를 이룬 벌어진 입술. 무엇을 살짝 감아쥐는 듯한 긴장된 손의 표정 등은 분명 한 여인의 심리묘사와 연관된 구체적 표현이다. 몸을 크게 오므리고 흐벅진 여인의 허벅지 를 화면 중앙으로 배치한 클림트의 의도는 섹시한 분위기의 연출과 함께 이 여인의 포즈를 태아의 그것과 유사하게 보임으로써 상반된 두 가치의 합일과 원초적 모습을 담아두려 했다.

다나에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에게 겁탈 당한 여인. 그녀를 작가는 화려한 장식에 둘러 쌓이게 하고 뽀얀 나신을 그 속에 묻어 겁탈 당한 여인의 슬픔과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병치시키고 있다. 이는 당시 인문학이 관심을 기울인 인간 내면세계에 대한 관점- 본능적 충동(이드)에 의존하는 새로운 인간상에 대해 보내는 이 작가의 지지로 보인다.

<마이클럽에서>

구스타브 클림트의 영원한 에로스
클림트와 여인들展 2000.9.20∼2001.1.7 오스트리아 갤러리 벨베데레



〈클림트와 여인들전〉은 클림트의 여인 초상화의 도상과 상징의 변천사를 검토해 봄과 동시에 비엔나 모더니즘기에 묘사된 여성 이미지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모색한다는데 의의가 있다.
구스타브 클림트 〈다나에〉 77×83cm 1907
언젠부턴가 클림트는 모네, 반 고호, 피카소 등과 함께 미술상품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기작가의 대열에 서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에 대해 잘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196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첫 구스타브 클림트 회고전에 이어, 1986년 뉴욕 모마(MoMA)에서 비엔나 모더니즘 미술을 총정리한 〈비엔나 1900전〉을 계기로 19-20세기 전환기 비엔나 모더니즘 운동은 다시금 미술사적 조명을 받기 시작했고, 그에 힘입어 구스타브 클림트(1862-1918)는 금빛찬연한 장식성과 관능성 짙은 회화작품으로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2000년을 맞아 갤러리 벨베데레는 근대 비엔나의 간판적인 화가이자 세기전환기 빈 분리파(Wiener Sezession) 운동의 선두지휘자 클림트의 작품들을 한데 모은 〈클림트와 여인들전〉(2000.9.20∼2001.1.7)을 기획했다.
클림트 미술의 평생 핵심주제는 여성이었다. 콧대높은 상류계급 귀부인에서 청순한 시골 소녀에 이르기까지 클림트 미술의 모델이 되었던 여성들은 금색찬연한 장식과 화사한 색채를 한 몸에 받으며 캔버스 위에 재현되곤 했다.

방년 14세되던 해인 1876년, 비엔나 미술공예학교(Kunstgewerbeschule)에 입학할 만큼 일찌기 특출난 재능을 인정받았던 그는 특이하게도 작가 자신이나 작품에 관한 문서상의 기록을 일체 남기지 않았다. 문자언어에 대한 병적 거부감을 지녔던 구스타브 클림트의 미술인생은 그래서 오늘날까지 상당부분 규명되지 못한채로 남아있는 형편이다. 체코계 중하급 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예술적 재능이 풍부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성장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줄곧 모친과 친여동생들의 집에서 동거했다고 알려진다. 또 평생 미혼이었으면서도 14명이 넘는 사생아를 낳은 아버지였다는 사실에서 그가 여성을 향한 오묘한 애증과 긴장으로 갈등했던 인물이었을 것임도 짐작케 해 준다.

동시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심리분석학을 빌어 클림트의 창조적 성과는 개인사적 배경과 성(性)을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예술적 통로로 대리 충족되어 발현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클림트가 즐겨 사용한 여성 도상이 탄생하게 된 사회적 배경에는 19∼20세기 전환기 근대사회로의 이행기 가부장적 부르조아 비엔나 사회 속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여권의식이 크게 기여했다.

자아의식이 강해지는 신여성을 바라보던 당대 남성들이 여성혐오증과 거세강박증을 토로했던 시대현상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클림트의 평생 반려자 겸 후원인 역할을 했던 장본인들도 여성이었다. 클림트가 <철학>(1900), <의학>(1901), <법학>(1903∼7)이란 제목으로 비엔나 대학에 제시한 천정벽화들이 선정성 시비에 휘말렸을 때 여류 언론인 베르타 추커칸들(Berta Zuckerkandl)과 패션디자이너 에밀리에 플뢰게(Emilie Floege)는 클림트의 충직한 후견인 겸 지지자가 되어 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번 전시는 1900년도 전후기 모더니즘 전개와 더불어 여성 후원자와 클림트의 관계를 고찰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닐수 없다.

1901년 비엔나 대학 천정벽화 논쟁은 여성의 누드와 도덕성이라는 이슈를 겉으로 내세워 시작된 정치적인 논쟁이었다. 클림트의 근대적 미학을 지지하는 빌헬름 폰 하르텔과 미술사학자 프란츠 비코프 대(對) 보수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요들이 불붙인 미학적 논쟁은 곧 사회주의 대 보수 및 우익주의자들 간의 정치적 스캔들로 번졌다. 예술가적 자존심과 독립성에 크게 상처입은 클림트는 정치적 소용돌이로부터 후퇴하여 자신의 입지를 재정립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이른바 클림트 미술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1910년대 동안에는 알레고리와 상징이 양식화된 장식성으로 중화된 작품이 주목할만 하다. 빈 분리파 운동과 발맞추어 공예분야에서 전개중이던 비엔나 공예운동(Wiener Werksttaete)에 참여하면서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습득한 금속공예 기술을 환기하게 되었던 한편, 이탈리아 라벤나를 여행하면서 산 비탈레 교회당의 비잔티움 미술을 재발견하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유딧 II>(캔버스에 유채와 금박, 178×46cm, 1909, 베네치아 근대미술 갤러리아)는 기하학적 문양의 아르데코 양식이 유난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보다 이미 8년전 완성된 <유딧 I (유딧와 홀로페르네스)>(캔버스에 유채와 금박, 84×42cm, 1901년 경. 오스트리아 갤러리 벨베데레 소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뼈가 앙상한 얼굴과 올가쥔 손아귀를 한 살로메는 쾌락을 선사한 댓가로 파멸과 죽음을 몰고오는 공포의 에로스로 정교하게 묘사된 한편, 인물 주변에 양식화되어 나타난 기하학적 장식은 금속공예와 비잔틴 양식의 산물이다. 한편 <다나에>(1907)의 여성상에는 복수심과 남성혐오적 이미지는 오간데없이 사라진 대신 사랑과 온기에 목말라하는 감미로운 젊은 여성으로 형상화됐다. 클림트가 드디어 여성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칼 E. 쇼스케는 해석한다. 이를 더 뒷바침이라도 하듯, 클림트의 말년작인 <아담과 이브>(캠버스에 유채, 1917-1918년, 갤러리 벨베데레 소장)는 에로스, 고통, 죽음을 향한 화가의 공포가 일시에 해소된 듯 평온하고 아늑한 분위기만을 풍기며 2차원적으로 처리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클림트의 1890년대 고전적 도상과 포즈로 그려진 여성 초상 작품과 동시대 마네, 마카르트, 쉴레, 호들러, 뭉크, 코코시카의 대표적 여인 초상을 나란히 한자리에 전시하는 이번 전시는 클림트의 여인 초상화의 도상과 상징의 변천사를 검토해 봄과 동시에 비엔나 모더니즘기에 묘사된 여성 이미지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모색한다는 의의를 내걸고 있다. 인기 화가의 미술전시회를 찾는 일반 대중 관객들 못지않게 모더니즘 시대의 여성 예술후원인과 예술인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미술사학도들에게도 영감을 제공할 만하다.
박진아 | 미술사

클림트는 고귀한 명분속에 교묘히 숨겨졌던 에로티시즘이라는 주제를 세상밖으로 내놓은 최초의 화가였다. 그에 대한 당시의 비난은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의 상품화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제 현대사회에서 에로티시즘은 사회와 문화전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슈로서 자리잡았다. 우리는 부정적으로 왜곡 되지 않은 건강한 성문화, 건강한 에로티시즘은 그 사회에 건전한 문화성을 부여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에로티시즘의 횃불을 드높인 클림트의 관능의 이브들은 우리에게 당당히 말하는 듯하다..
"나는 아름답다."고..

1862 빈 교외의 바움가르텐(오늘날의 14구역)에서 7월 14일 출생. 아버지 에른스트 클림트(1834-1892)는 보헤미아 출신의 금 세공사였고, 어머니 안나 핀스터 클림트(1836-1915)는 빈 출신으로 결혼 전에는 가수였다. 클림트는 그들의 일곱 자녀 중 장남이었다.

1864 클림트와 함께 미술가의 길을 걷게 될 동생 에른스트 탄생.

1867 가족이 빈으로 이사. 구스타프는 이듬해 학교에 입학. 클림트 가족은 빈곤한 생활을 했으며, 1873년의 경제 공황은 그들을 경제적으로 힘든 상태로 몰아넣었다.

1874 8월 30일 에밀리 플뢰게 출생.

1876 우수한 성적을 보이던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미술산업 박물관(현재의 오스트리아 응용미술 박물관)에서 새로 설립한 미술공예학교(쿤스트게베르베슐레)에 입학하였다. 동급생 프란츠 마치(1861-1942)와 일년 뒤 입학한 동생 에른스트(1864-1892)와 함께 2년간의 준비반을 거친 후 미술 학교로 옮겨가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1829-1881)와 빅토르 율리우스 베르거(1850-1902)의 지도를 받았다

1879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는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에게 자신이 맡은 일을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예술사 박물관 장식을 도왔고, 한스 마카르트(1840-1884)의 지휘아래 황제와 황후의 은혼식 축하연 준비작업에도 참가하였다.

1880 극장 건축가 펠너와 헬머로부터 최초의 주문을 받아 카를스바드의 온천장에 천장화를 그림.

1881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는 학생 때부터 함께 작업실을 사용하였다. 그들의 "미술가 조합"은 최초의 주문으로 마르틴 게를라흐가 1882-84년과 1895-1900년에 편집한 작품선집 <알레고리와 상징(Allegorien und Embleme)>을 위한 디자인 준비작업을 했다. 그들은 다음해까지 계속해서 그 작품선집을 위한 작업을 했다. 또한 펠너와 헬머로부터도 극장 장식(천장화, 커튼, 등)을 위한 주문을 수차례 받았다. 그들은 세명 중 누구도 개인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적인 양식을 개발하지 않는다고 공언했다. 이 말은 서명이 되어있지 않은 작품이 그들 중 누구의 것인지 확실히 밝히는 일이 불가능함을 뜻한다.

1883 학교를 마친 그들 미술가 조합은 6구에 있는 Sandwirtgasse 8번지로 작업실을 옮겼다. 개인의 양식적 차이가 허용되지 않는 역사적 양식으로 작업하며 한쪽이 완성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쪽이 맡아서 해줄 수 있다는 그들의 특징은 더 중요한 주문을 얻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무렵부터 오랫동안 클림트 형제가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게 되었다.

1885 빈 예술가들의 왕자 한스 마카르트의 죽음 이후, 미술가 조합은 Lainz 교외에 있는 헤름스빌라에 천장화를 그리기 위해 그가 준비해둔 스케치들을 기반으로 그림을 완성하였다.

1886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는 빈에 새로 건설된 부르크 극장의 층계에 천장화를 그리는 최초의 중요한 주문을 받았다.

1888 부르크 극장 장식화들이 완성되었다. 미술가 조합은 오스트리아 제국 왕실로부터 금메달을 받았다. 프란츠 마치와 구스타프 클림트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옛날의 부르크 극장 실내 전경을 그렸는데, 클림트는 무대에서 바라본 관람석의 모습을 그렸다.

1890 <빈, 구 부르크 극장 관람석>으로 400길더의 상금이 수여되는 상을 받아 그 돈으로 뮌헨과 베니스로 첫 여행을 떠났다. 그 후 미술가 조합은 빈 미술사 박물관 층계의 기둥 사이나 세모꼴 공간에 40점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대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그의 그림 <타나그라의 소녀>는 그의 양식적 변모를 드러내는 최초의 징후를 보여준다. 그림 중앙에서는 멀리 떨어져 왼쪽에 위치한 인물은 고대사 속의 인물이라기 보다는 현대적인 인물의 느낌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1891 예술사 박물관 장식을 완료한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는 빈의 다른 화가들과 연합을 결성하였고, 빈의 유명한 화가들 중 일원이 되었다.
에밀리 플뢰게의 언니 헬렌이 구스타프의 동생 에른스트와 결혼하였고, 구스타프는 에밀리의 첫번째 초상화를 그렸다.

1892 미술가 연합은 요제프슈타터스트라스로 작업실을 옮겼다. 풀이 우거진 정원이 있는 그 건물에서 클림트는 1914년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에른스트와 헬렌의 딸 헬렌 탄생. 12월 9일에 에른스트가 죽고, 구스타프는 조카딸의 보호자가 되었다.

1894 구스타프 클림트와 프란츠 마치는 빈 대학 대강당 벽화를 위한 스케치를 준비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클림트의 양식적 변모는 미술가 연합의 점진적인 해체로 이어졌다.
클림트는 에른스트의 이젤화 <로텐부르크의 임시무대에 오른 광대>를 완성하였다. 그는 그 그림의 중심인물들 중 한명의 얼굴에 에밀리를 그려넣었다.

1895 새로 준비된 <알레고리와 상징> 시리즈를 위한 디자인 작업을 했고, 그의 그림 <사랑>에서 그가 상징주의로 변모하는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플뢰게 자매들의 장녀 폴린(1866-1917)이 의상 관련 교육기관을 열었고,
거기서 헬렌과 에밀리도 일한 것으로 보인다.

1896 클림트와 마치의 작품이 더 이상 양식적인 공통점이 없었지만 여전히 빈 대학의 학과들을 다루는 그림을 함께 맡았다. 클림트가 의학, 철학, 법학을 맡고, 프란츠 마치가 그 나머지를 맡았다.

1897 클림트는 20여명의 다른 화가들과 함께 빈 분리파(제체시온)를 결성하였고, 그 초대 회장을 맡았다. 관학적인 미술 아카데미로부터 이탈하여 근대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결성한 전시 동인이라 할 수 있는 분리파는 기존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관영화 되어있던 전시회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전시회를 기획하고 조직하였으며 이듬해부터 월간지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이란 뜻)>을 출간하였다.
4월 14일 에밀리 플뢰게에게 최초로 엽서를 보냈고 이후 계속해서 서신을 교환하였다.

1898 빈 분리파의 첫 번째 전시회가 개최되었는데, 회원들의 그림 뿐 아니라 뵈클린, 크레인, 클링거, 리버만, 로댕, 세간티니, 슈툭, 토마 등 잘 알려진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들도 전시되었다. 클림트는 팔라스 아테네의 보호 아래 미노타우로스와 싸우는 테세우스를 그린 전시회 포스터를 디자인했으나 테세우스의 나신이 검열에 걸려 테세우스의 성기를 식물을 이용하여 가려야 했다. 또한 빈 대학 대강당 벽화를 위해 제출한 스케치로 인해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고 완성된 그림을 심사 받아야 한다는 단서가 붙게 되었다. 에밀리와 함께 여름휴가를 보낸 Hallst tter 호수의 St Agatha에서 최초의 풍경화를 그렸다.(최근에 발견된 1881년작 풍경화 두점을 제외하고서이다. 이 그림들은 1992년 취리히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볼 수 있다.)

1899 빈의 링스트라스에 있는 둠바 빌라의 음악실 실내장식 완성. 클림트는 이 음악실 장식을 위해 <피아노 앞에 앉은 슈베르트>를 그리기도 하였다.

1900 제 7회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클림트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림 <철학>을 선보였다. 이 그림은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87명의 교수들이 이 그림을 대학 대강당에 두는데 반대하는 서명을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클림트는 이 그림으로 금메달을 수상했다.

1901 제 10회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클림트는 <의학>을 선보였는데, 이 그림은 임신한 여인을 누드로 그렸다는 까닭으로 또 다른 물의를 불러일으켰다. 클림트를 교수로 지명한 빈 순수미술원의 제안은 거절되었다.

1902 분리파는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상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거대한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 때 클림트는 베토벤 프리즈를 제작하였다. 이 그림은 열광과 반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에밀리의 마지막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1903 클림트는 라벤나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의 초기 기독교 모자이크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것이 그의 "황금빛 양식"에 반영되었다.
5월에 요제프 호프만(1870-1956)과 콜로만 모저(1868-1918)는 빈 공방을 설립하였다.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과 공예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설립된 빈 공방은 재료의 존중, 구조의 간소화, 기능성을 기본 조건으로 삼아 분리파의 이념에 부합하는 공예품의 생산과 기술자의 양성에 노력하였다.
가을에 빈 분리파는 그때까지 열린 클림트의 전시회 중 가장 대규모인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여기서 80여점의 그림이 전시되었다. <베토벤 프리즈>는 이 전시를 위해 그 장소에 남겨져 있다가 전시회가 끝난 후 개인 수집가에게 매매되었다. (현재에는 다시 분리파 전시관에 있다) 빈 대학 대강당을 위한 세가지 "학부" 그림이 최초로 다같이 전시회에 전시되었다. 그 그림들이 현대 미술관에 전시되야 할지 여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플뢰게 자매는 11월에 카사 피콜라 건물로 이사했고, 이듬해 그곳에 패션-하우스를 열었는데, 그 가구와 장식은 빈 공방에서 맡아 제작하였다.

1904 요제프 호프만과 빈 공방은 실업가 아돌프 슈토클레트의 주문으로 브뤼셀에 저택을 짓고 가구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클림트는 그 저택 식당에 설치할 대리석 벽화의 디자인을 맡게 되었다.

1905 클림트는 학부 그림들을 완성했지만, 후원자의 도움을 얻어 비용을 지불하고 전시를 포기했다. 빈 분리파 회원들을 인상주의와 아르누보라
는 서로 다른 양식으로 나누어 놓았던 오랜 의견 대립 끝에 아르누보 계열의 예술가들이 분리파를 떠났다.

1906 슈토클레트 저택을 보기 위해 브뤼셀로 여행했고,이어 런던을 여행함. 최초의 사각형 초상화 제작. 클림트는 새로 설립한 화가연맹의 회장이 되었다.

1907 "학부 그림"이 완성되어 베를린에 전시되었고, 에곤 쉴레와 만남.

1908 "클림트 그룹"은 쿤스트 쇼를 기획하였고, 여기서 다양한 유형의 아르누보 작품들이 54개의 전시실에 전시됨. 전시의 중심은 <키스>를 포함한 16점의 그림이 전시된 클림트의 전시실로서 이 그림은 현대 미술관에 팔림. 클림트의 도움으로 아직 신인이던 오스카 코코슈카도 그림을 전시할 수 있었다.

1909 두 번째 쿤스트 쇼에서는 당대 유럽 회화에 대한 탐색이 행해졌다. 코코슈카의 그림뿐 아니라 에곤 쉴레의 그림도 포함되었던 이 전시는 클림트가 기획한 마지막 전시회였다. 가을에 그는 파리로 여행했고, 계속해서 스페인으로 갔다. 클림트의 "황금 양식" 시기가 막을 내렸다.

1910 클림트는 제9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작품을 전시했고, 프라하에서 독일의 화가연맹과 함께 전시했다. 슈토클레트 저택의 벽화를 위한 스케치를 완성하였고, 빈 공방이 이를 제작하였다.

1911 로마에서 열린 국제 미술전에 참가하였고, <죽음과 삶>으로 일등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업실이 헐리게 됨에 따라 빈 13구역의 Feldm hlgasse에 새로운 작업실을 얻었다.

1912 드레스덴에서 열린 미술 대전에 참가하였다. 에곤 쉴레는 자화상을 그렸고, 클림트는 <은둔자>를 전시했다. Arpad Weixlg rtner가 클림트에 대한 장문의 글을 썼고, 잡지 <> 35호에 실렸다.

1913 부다페스트, 뮌헨, 만하임 등지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가함.

1914 브뤼셀로 가서 슈토클레트 저택의 벽화가 완성된 것을 직접 봄. 거기서 콩고 미술관을 방문하였고, 원시 조각에 강한 인상을 받음.

1915 바르바라 플뢰게의 초상화를 그림.

1916 쉴레, 코코슈카, Faistauer와 함께 베를린 분리파 전시관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의 전시회에 참가.

1917 뮌헨과 빈 순수미술원의 명예회원으로 선출됨.

1918 1월 11일 발작을 일으킨 클림트는 회복되지 못하고 2월 6일 사망, Hietzing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작업실에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그림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클림트 사후에 그의 재산은 클림트 자매와 에밀리 플뢰게에게 나누어졌다. 에밀리는 그에게 부친 편지들을 대다수 태워버렸다고 한다.

1938 플뢰게의 아파트에 화재가 발생하여 클림트의 스케치북 50권이 소멸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클림트의 작품. 1907-1908년. 캔버스에 은박, 금박, 유채. 180 x 180cm. 빈미술사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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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vador Dali (1904.5.11~1989.1.23)
살바도르 달리
에스파냐의 대표적 초현실파 화가. 피게라스 출생. 살바도르 달리는 1904년 5월 11일 스페인 카탈로니아 북부의 작은 마을 피게라스에서 공증인의 둘 때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돈 살바도르 달리)는 예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집안도 중류층에 속하는 비교적 좋은 환경을 이루고 있었다.


달리가 태어나기 3년 전에 이미 죽은 그의 형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는 자신에게서 죽은 형의 모습을 찾으려는 데에 강한 반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후일 그는"나는 결코 죽은 형은 아니며 살아 있는 동생이라는 것을 항시 증명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너의 형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귀일 하였노라)고 들려주곤 함으로써 어린 달리를 신비의 혼란 속에 빠지게 하였으며 그의 극히 내성적이며 수줍던 성격이 때로 격렬한 폭발을 보인 것도 이 사실과의 깊은 관련을 보인다. 후일 달리는 종교화에 대해 대단한 집착을 보이는데 그의 대표작 (십자가의 요한의 그리스도)는 이때부터 받은 자극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보겠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하얀 암벽이라든가 심연의 바다 등에 경이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1922년 마드리드 미술 학교에 입학한 그는 학교의 수업에는 만족치 않고 인상파, 점묘파를 거쳐, 미래파, 피카소의 큐비즘 등에 관심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이듬해에는 이탈리아의 형이상 회화의 화가 키리코를 알고 나서 몹시 흥분하기도 했는데 그의 초현실적 성향은 그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것이다.


14세 때부터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과격한 성품 때문에 1926년 퇴학당했다. 그는 보기 드문 조숙아로 일찍이 인상파나 점묘파·미래파의 특질을 터득하고 입체파나 형이상회화파 등의 감화를 받으며 작풍편력(作風遍歷)을 하였다.

강한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적 의식적 태도가 농후하며, 젊어서 받은 프로이트의 영향이 일생을 지배했다.그후 1925년 피카소의 신고적주의에 대한 관심을 가져 실험을 거듭했지만 엄격한 기하학에 이내 싫증을 느끼고 만다. 그 밖에도 베르메르, 벨라스케스, 라파엘로에까지 관심을 보여 달리의 고전화에 대한 집착은 평생 그의 생애를 통해 일관되어진다.


미술 학교 재학 시절 반정부 활동함으로 잠시 감옥에 갇힌 바 있는 그는 차츰 무정부적인 타락된 생활이 심화되어 그로 인해 1926년 퇴학 처분을 받고 귀향케 되었다. 1925년에서 1927년에 걸쳐 마드리드 및 바르셀로나에서 발표된 그림들은 다소 모순된 양식의 그림들이지만 매우 면밀하게 그려져있다. 1927년 그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해가 되었다. 파리로 나온 그는 피카소를 만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그의 그림은 여태까지와는 달리 놀라운 변모를 보인다.

이 시절 그는 피카소의 영향을 직접 받으면서도 그에 구애되지 않았고 미로와의 접촉을 갖고 초현실주의 화가들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드디어 그는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약을 하기 시작한다. 그 외에도 큐비즘, 미래파, 형이상 회화파 등에서 얻은 영향이 그나름의 독특한 회화로 이르는 바탕이 된다.

1929년 카다퀘스의 집에는 많은 손님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들 중 러시아 태생 폴 엘뤼아르의 부인 엘레나(갈라)에게서 운명적인 만남을 직감하고 그녀에게 짙은 연민의 정을 느낀다. 파리에서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는 그들을 카다퀘스에 방문토록 초청한 것이다. 두 번째의 만나마에서 달리는 돌발적인 웃음과 이상한 행동 등으로 그녀의 주의를 끌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녀 역시 그러한 그의 열정에 못이겨 그에게 이끌리고 만다. 극도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려던 그는 (그녀야말로 나를 치유해 줄 것이다.)라고 믿었으며 그녀에게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들은 1929년 말 파리에서의 작품전이 열리는 도중, 홀연히 그곳을 잠적, 사랑의 도피 여행을 더나 갚은 사랑에 빠져들었으며, 달리는 그때 요람 속의 기쁨을 재음미하기에 이른다. 한때, 달리는 기억의 근원은 태아 적부터 시작되었음을 암시하는 듯 그 요람의 세계를, (거기는 정말 성스러웠다. 그야말로 천국이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폐쇄된 그 호텔의 방 속에서 갈라와의 생활을 통해 태아의 아늑한 꿈을 만끽한 것이다.
그들은 곧 카다퀘스로 돌아와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리가크 항에 조그만 방을 구해 새 생활을 시작하였다. 타인의 아내를 가로챈 아들의 부도덕에 노한 아버지는 결국 그에게 절연장을 보내기에 이르렀고 달라는 그 충격으로 삭발하나 채, 먹다 남은 섬게 껍질과 함께 그 깍아버린 머리카락을 흙 속에 묻고 말았다. 그 매장은 곧 그를 낳고 기를 아버지와 가정이었으며 결국 그는 혈연을 잃은 대신 보다 정신적이며 숙명적인 갈라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녀로 친해 참다운 달리로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달리의 수많은 작품 속에는 갈라가 출현케 되고 모든 여성의 모습이 갈라로 변신되었다. 심지어 성모 마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도 갈라의 형상으로 대신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노이로제에서 고통받는 그를 구하고 치유한 것이 갈라였기 때문이다. 아마 수많은 화가들 중 달리만큼 여자의 내조와 영향을 받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또하나 달라의 예술에 큰 영향을 준 것은 그가 성장한 카다퀘스의 해안과 리가트 항이다. 태양이 불타고 바닷물이 섬, 바위들 사이로 넘나드는 곳에서 변덕스로 그의 기분을 억제하였던 것이다. 그의 리가트 하아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불모의 고장이요, 아침은 난폭하고 거친 명랑함을, 저녁은 기분나쁜 비애를 가끔 느끼게 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특이한 환경이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데 그것은 황량한 땅이지만 깊숙히 위치한 마치 자궁 안과 같은 평안함을 주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살바도르 달리는 금세기의 가장 특이하며 괴이한 화가로서 그의 작품 속에는 현대의 작품들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의 회의, 압도하는 무의식의 위력 등이 내재되어 있다. 즉, 그의 작품 속에는 통속적 경험과 상식으로써는 전혀 감지키 어려운 기묘한 것들로써 이루어져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초현실의 세계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한 그들 두고 어떤 비평가들은 병적인 그림, 또는 광인의 그림이라고들 평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과 개성이 무의식적인 내용물의 홍수 속에 빠져들어 잠적하는 현상은 마치 정신 분열의 증세와도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그림을 두고 광인의 그림이라고 평할 수 있었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달리 자신의 언급처럼 광인과 자신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그가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가 광인이라면 그의 작품에서 어떤 공감을 느끼겠는가? 만일 그것을 느낀다면 "그것 역시 모순이 아니겠는가?"라는 문제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식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때 그의 손이 광인의 손이라 친다면 그의 괴이성을 체외하고라도 극사실적인 기법과 기발한 짜임새의 구성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달리는 철저한 자기 본위의 독특한 화가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현대인이 지닌 갖가지 고민, 불안, 모순, 공포, 절망 등이 숨김없이 표현되고 있다. 1928년 파리로 가서 초현실주의 화가나 시인들과 교유하였다. 이듬해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고, 이때 A.브르통에 의해 정식으로 이 파의 일원으로 인정되었다.

그 스스로 ‘편집광적·비판적 방법’이라 부른 그의 창작수법은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환각을 객관적·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하나의 대상을 2중 3중으로 다른 이미지로 보는 병적인 착각을 이용했다. 즉 말이 여인의 나체로 보인다거나 하나의 풍경이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거나 하는 중복상을 교묘하게 화면에 표현했다. 그는 <그림이란 많은 비합리적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천연색 사진이다>라고 정의하고, 이상한 환상을 객관적·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현대는 인간의 내적 상상력을 제어하고 인간의 추억이나 향수, 신앙, 전설, 영웅, 꿈들을 과감히 매도한다. 달리는 그러한 상상력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편집광적 비판 방법을 연마하여 자신만의 자유로운 길을 개척해 나간 것이다.




그의 의도적인 괴이한 언행과 용모 속에는 비상함과 지속성이 내재되어 있고 그의 주위를 맴돌며 그를 고뇌 속에 빠뜨렸던 수수께끼를 탐구하려는 끊임없는 욕망이 감추어져 있다. 달리의 회화성은 같은 초현실주의자들과 비교할 때 혼란성을 띠고 있으나, 마그리트와 같은 분열성은 보이지 않는다. 또 그가 초자연의 세계를 여실하게 묘사하였고 그 대부분이 그로테스크하며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중세의 화가 보시와 곧잘 비교되며, 달리를 현대의 보시라고 단순화해서 말하는 것에 관해 달리 자신은, (그것은 자기 개성에 관한 가장 나쁜 오해 중의 하나이다. 보시의 괴물은 안개 쌓인 유럽의 숲에 의한 것이며 중세에 대한 심한 소화불의 증세를 나타내고 있다.그러나, 보시의 그림은 형언하기 어려우리만치 세밀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달리의 그림은 두 세가지의 요소만으로도 그의 환상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환상 미술의 전례를 살펴보면 보시라던가 브뤼겔, 블레이크, 르동, 앵소르 등이 있지만 그들에 비해 달리는 보다 처절하고 본능적이며 노출증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다. 그에게서는 파라노이아와 페티시즘이 특질로 나타나며, 내부와 외부를 전도시켜 마치 내장을 드러내 보이는 듯한 독특한 사실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이를테면 밤같이 어두운 세계를 밝은 양광 아래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달리가 (비합리성에 도전)하게 된 것은 서구의 각국이 정치적 긴장의 팽배와 대립에 의해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1930년대였다.



즉, 유럽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개혁과 부정, 정치적으로는 혁신과 혁명을, 예술적으로는 재래의 예술 형식을 파괴, 부정하는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무렵이었다. 이러한 양상 아래 전개되는 제 미술 운동에 스페인 태생의 작가들이 많은 활약을 보인다. 이를테면 유기적 환상의 세계를 표줄한 건축가 가우디라든가 20세기의 조형 혁명으로 불리우는 큐비즘의 대표적 화가 피카소라든가 그리스 등이 있으며 초현실주의의 미로, 달리 등이 나타난 것이다.

달리는 회화의 목적은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내적세계와 외적세계 사이의 육체적 장벽을 동시에 제거하고 , 현실과 비현실 및 명상과 행위를 서로합하여 혼합되어전생명을 지배하는 초현실성을 창조하는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스페인은 유럽 중에서도 거구에 속하지 아니하며 역사적으로 동방 문화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인종이나 정치적인 면으로도 파악키 힘든 복합적 요소를 지닌 나라인 것이다. 달리의 말을 빌면 (프랑스은 가장 지성이 풍부하고 합리적인 나라인데 반해 스페인은 가장 비합리적인 또한 가장 신비스러운 나라)라고 한다. 그러한 환경 요인이 그들을 서양 회화의 위기적 상황에서 두드러지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게 한 것으로 보여진다.

1937년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로 복귀하려는 욕구가 커졌으며, 초현실주의 화가 모임에서 제명당하면서까지도 원자과학이나 가톨릭의 신비성을 추구하여 왕성한 제작을 하였다. 40년 미국에 귀화하여 왕성한 제작활동을 하였다. 달리는 (천재의 일기(1964))에서 (미치광이인 채하며 피타코라스적 정확성을 가춘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말하고 잇다. 전후의 달리는 겨우 합리와 비합리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하기에 이른다.
작품으로 《피는 꿀보다 달콤하다(1928)》 《기억의 잔재(1931)》 《불타는 기린(1935)》 《레다 아토미카》 등이 있다. L.브뉴엘과 함께 전위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 《황금시대(1931)》 등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작가 연보
달리 Salvador Dali (1904-1989)

1904년 5월 11일, 프랑스 국경에 가까운 스페인 동북부 지방 피게라스에서 출생. 부친은 공중인.

1908년(4세) 누이동생 아나 마리아 출생.

1913년(9세) 이때부터 유화 등을 그리기 시작.

1917년(13세) 이때부터 19년 까지 피게라스 미술 학교 교사인 호앙 누네스의 지도를 받음. 19세기 스페인 풍속화가 들의 그림을 사랑했고, 또한 인상파, 점묘파의 영향을 받음.

1920년(16세) 이즈음 보나르와, 이탈리아의 미래파화가 카리엘 등의 영향을 병행해서 받음.

1921년(17세) 마드리드 국립 미술 학교에 입학. 프라도 미술관에 자주 다님. 입체파의 영항을 받아, 다다 운동의 주변에 있는 여러 그룹과 광범위하게 접촉, 로루카, 보튀엘과 알게 되었고 이후 친교를 두텁게 함.

1922년(18세)10월, 바르셀로나의 화랑에서 개최한 학생 그룹전에 회화 8점을 출품.

1923년(19세) 이때 이탈리아의 형이상파 , 크레코, 카롤로 카르라의 영향을 받음.

1924년(20세) 학생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1년간 정학 처분을 받았고, 5월에는 반정부 활동 혐의로 단기가 투옥됨.

1925년(21세) 마드리드 미술 학교에 복학. 11월 바로셀로나에서 최초의 개인전. 유망한 신인이란 평을 받음. 이 때부터 27년경까지 헤르에늬 사실주의, 피카소의 신고전주의 큐비즘의 영향을 다분히 받는 작품을 제작.

1926년(22세) 10월. 미술사의 답안 제출을 거부, 마드리드 미술 학교에서 제적됨. 연말에서 연초까지 달마화랑에서 두 번 째 개인전.

1927년(23세) 겨울, 파리로 가서 피카소를 만남. (달빛 비친 정물), (피는 꿀보다 달콤하다) 등 달리의 독창성을 나타낸 최초의 작품을 제작. 학생 시절부터 이때까지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을 열심히 탐독, 그 영향이 일생을 재배한다.

1928년(24세) 짧은 기간 동안 에른스트, 알프, 미로의 영향을 받음. 10 -12월, 피츠버그에서 열린 제 27회 카네기 국제 미술전에 (빵 광주리), (아나마리아)등을 출품하여 미국과의 교류가 열린다. 겨울에서 다음 해 까지 파리 체재. 미로를 통해 초현실주의 그룹의 시인과 화가들을 소개 받음.

1929년(25세) 여름, 달리 숙소에 마그리드 부처, 폴 엘뤼아르, 갈라 부인 등이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달리와 다랄 부인은 사랑에 빠진다. 친구 믜뉘엘과 공도으로 전위 영화(앙타르치아)를 제작, 3개월동안 파리에서 상연. 10월 20일-12월 5일. 코망 화랑에서 파리에서의 첫개인전을 개최했는데, 프루동이 카탈로그에서 문을 씀. 정식으로 초현실주의의 일원이 됨.

1930년 (26세) (보이는 女人)을 출판, 사랑에 빠진 갈라 부인에게 헌증. (편집광적ㆍ비판적)방법을 제창. 이 방법에 의해 윌리엄 텔의 전설을 테마로 한 일련의 작품 제작에 착수. 브뉘엘과 공동으로 영화 (근전시대)를 제작.
1931년(27세) (기억의 영속)등 편집광적인 시각이 나타나는 작품을 그리기 시작함. 33년까지의 파리의 피엘 콜화랑에서 매년 개인전

1932년(28세) 편집광적. 비판적 방법에 의해 밀레의 만동을 테마로 한 일년의 작품을 제작. 영화 (빠빠우오)에 대본을 씀.

1933년(29세) 11월 21일-12월 12일, 뉴욕에서 미국 최초의 개인전 개최. 변형된 두부에 특별한 관심을 표시한 작품들을 제작 (미노트르)지, (카이에 달르)지의 기고가가 됨.

1934년(30세) 로트레아몽의 시집에 삽화를 그림. 스페인 로사스 해안을 주제로 한 일련의 해안 풍경을 그리기 시작. 런던에서의 첫 개인전 개최. 프루동과의 불화로 인해 초현실주의 운동 그룹에서 제명됨.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

1935년(31세) 비합리성 정복출판. 편집광적. 피판적 방법을 정의.

1936년(32세) 런던 에드워드 템즈 저택의 벽화 제작. (서랍이 달린 미로의 비너스), 내란의 예람 제작. 7월, 스페인 내란 발발.

1937년(33세) 내란을 피해 이 해부터 39년까지 세 차레 이탈리아 여행. 르네상스 회화 내지는 바로크 회화의 거장들 작품에 새로운 평가를 하게 됨.

1938년(34세) 7월, 런던에서 프로이트와 만남. 겨울에서 다음 해까지 뉴욕 체재.

1939년(35세) 뉴욕 만국 박람회에 출품할 (비너스의 꿈)을 제작. (상상력의 독립선언)을 출판. 발레 (바카날)대본을 쓰고 무대 장치를 디자인.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파리를 떠나 다음 해까지 아르카숑에서 거주.

1940년(36세)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스페인을 거쳐 8월에 미국 도착.
48년까지 캘리포니아 주에서 삶.

1941년(37세) 발레(미로) 대본을 쓰고 무대 장치를 디자인. 11월 19일에서 다음 해 1월 11일까지 뉴욕 근대 미술관서 첫 대회고전. 이 회고전은 43년까지 미국 8개 도시에서 순회 개최됨.

1942년(38세) (자전 달리의 숨겨진 생애) 출판.

1943년(39세) 뉴욕에서 초상화전.

1944년(40세) (소설 숨겨진 얼굴)출판. 발레 (미친 톨리스탕), (감상적 회화)의 대본을 쓰고 무대 장치. 모리스 산토스의 환상적 기억 삽화를 그림.

1945년(41세) 뉴욕에서 개인전. 원자 및 원재 내부의 세계에 관심을 표시한 작품을 제시. (호메로스 숭배)그림. 모리스 산토스의 (미로)에 삽화를 그림.

1947년(43세)비키니 원폭 실험과 관련이 있는 (3개의 스핑크스)제작/

1948년(44세) 리가트 항으로 돌아와 고전주의적 그리고 종교적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함.

1949년(45세) 칼라를 모델로 (포르트 리가트의 )를그려 교황 피오 12세에게 보임.

1950년(46세) (리가트의 항도의 성모)를 대작으로 다시 그려, 11월에서 51년 1월까지 열린 뉴욕 개인전에 출품.

1951년(47세)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 제작, 파리에서 (신비선언)를 출판. 원자핵 신비주의의 대강을 제시.

1952년(48세) 단테의 (신곡) 삽화 102점을 제작. (시립자적 성모승천), (원자핵의 십자가)등을 제작.

1954년(50세) 로마에서 대회고전. 이 회고전은 밀라노 등에 순회 전시. (초입방체적 인체)제작

1955년(51세) (최후의 만찬)제작. 솔본느 대학에서 (편집광적 ㆍ비판적 방법의 현상학적 측면)에 대해 강연.

1956년(52세) 7월부터 9월가지 벨기에에서 초기 작품을 많이 포함시킨 대회고전, (근대예술론)출판.

1574년(53세) (tossel에고엘 그랑드)제작.

1958년(54세) 브류셀 만국 박람회 스페인관에 (샌디에고 엘 그랑드)출품. 탄화주의라 불리느 방법으로 석판화집(돈키호테)를 제작. 파리에서 출판.

1960년(56세) (셰계공의회)제작.

1962년(58세) (데트앙의 대회전) 제작.

1963년(59세) (밀레 만종의 비극적 신화)출판. 뉴욕에서 전람회.

1964년(60세) 9월에서 11월까지 동경, 명길옥, 경도에서 회고전. (천재의 일기)출간

1965년(61세) 다음해까지 뉴욕에서 대회고전.

1967년(63세) (다랭이) 완성.

1968년(64세) 5월 혁명에 대하여 (나의 문화적 혁명)이라 제한 팜플렛 출판

1969년(65세) 프랑스 국영 철도를 위한 포스터 제작.

1970년(66세) 피게라스에 달리 미술관을 세우기 위한 재단이 창설됨. (달리에 의한 달리)집필. 11월 21일에서 다음해 1월10일까지 로레스탐 보이만스 미술관에서 유럽 최초의 중요한 회고전 개최.

1971년(67세) 3월 7일, 그린란드에 달리 미술관 건립. 피게라스의 달리 미술관 천장화를 제작. (달리 만세)출판.

1972년(68세) 4월에서 5월까지 뉴욕에서 최초의 3차원 작품의 전람회 개최.

1973년(69세) (불사 의 10의 처리법) 출판.

1979년(75세) 11월 80년 4월의 파리 퐁피두 미술과네서 대회고전. 화

1980년(76세) 미국의 Art News 지에 클레 특집 주관.

1982년(78세) 파리에서 작품 활동. 주로 판화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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