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화가.
황금빛의 화려한 화면과 장식성.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은 화폭에 담겨진 화려함에 금새 매혹되고 만다. 세기말과 세기초, 낡은 전통과 새로운 도전이 혼재된 이 시기에 클림트는 벌거벗은 여성들을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킨 화가였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파괴하고자 비엔나 분리파의 선구자를 자처하며 시대정신을 대변했던 클림트를 만나 보자.
후기 상징주의 회화의 대표 화가가 뭉크라면 구스타프 클림트는 전혀 다른 양상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상징주의는 모더니즘의 선구이자 제1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유럽 문명의 마지막 꽃이었다. 그리고 클림트의 상징주의적인 요소는 이 같은 시대적인 흐름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의 근교였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난 클림트는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데생 솜씨를 눈여겨 보았던 친척의 도움으로 그는 미술의 길에 들어선다.
클림트는 스물 한살이 되던 해부터 화가로서의 명성을 구축해 나갔지만,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은 서른 살이 될 무렵이었다. 이 때부터 그의 작품은 강렬한 느낌을 자아내며 관객들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1891년부터 1910년까지의 10여 년 동안 그의 작품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며, 구상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작품에서 보이는 부분 부분의 양상이 때로는 환상적이고, 때로는 평면적인 면으로 혼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 1897년 비엔나 분리파가 형성되고 그가 회장으로 임명되면서 그는 국제적인 평판을 얻으며 화가로서의 명성을 떨친다.
클림트의 작품에는 유난히 많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리고 클림트에 의해 표현된 여성상은 ‘요부'인 동시에 ‘어머니'라는 대조적인 상징성을 동시에 부여한다. 이는 클림트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었던 어머니에 대한 고착 현상과 여성을 통한 시대정신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당시 프랑스에선 최초의 여자중등학교가 등장했고, 독일에서도 여성 교육기관이 생기는 등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서양 문명의 오랜 관습을 서서히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다나에> 1907~1908년경
캔버스 유채 22×83cm 개인 소장
달콤함, 퇴폐로 가는 길 - 다나에 -
참으로 고혹적인 아름다움이다. 여인의 풍만함은 터질 듯 화면을 장악했다. 그녀의 반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나온다.
달콤하지만 뭔가 퇴폐적인 분위기가 물씬거리는 그림. 죄악의 냄새가 있고 절망적인 죽음의 그림자마저 엷게 드리워져 있다. 농밀한 에로티시즘을 담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의 이 그림 '다나에'를 보고 있으면 우리는 어느 새 몽환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여인의 누드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해 낸 거장
인체 표현, 그 중에서도 다양한 연령층의 여인누드를 서양미술사 안에서 가장 완벽하게 표현해 낸 작가로 알려지고 있는 클림트는 유겐트스틸 운동을 주도했던 오스트리아의 거장이었다. (유겐트스틸 운동이란 독일어 문화권에서 아르누보 양식을 호칭한 것으로서 아르누보의 특징인 식물을 모티브로 하는 화려한 장식효과를 보다 극적으로 연출하는 점이 색다르다.)
그는 여인을 사랑하고, 여체에 탐닉했던 자신의 성 의식을 그림으로 남기고 있다. 한편 에로티시즘을 바탕으로 시대정신의 나락과 자본의 발흥에 따른 인간(여성으로 대치되어)의 상품화를 죽음이라는 세기말적 분위기에 녹여 표현한 작품을 상당수 보여준다. '다나에'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에로틱한 분위기는 여체를 묘사해내는 독특한 작가의 개성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클림트는 여성의 작은 심리변화를 절제된 표정으로 여인의 나신에 숨겨 둠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분위기를 즐기도록 배려한다.
여성의 심리변화까지 화폭에 담아
이 작품에서도 그의 이런 팬서비스(?)는 예외 없이 드러난다. 살포시 감은 눈과 대조를 이룬 벌어진 입술. 무엇을 살짝 감아쥐는 듯한 긴장된 손의 표정 등은 분명 한 여인의 심리묘사와 연관된 구체적 표현이다. 몸을 크게 오므리고 흐벅진 여인의 허벅지 를 화면 중앙으로 배치한 클림트의 의도는 섹시한 분위기의 연출과 함께 이 여인의 포즈를 태아의 그것과 유사하게 보임으로써 상반된 두 가치의 합일과 원초적 모습을 담아두려 했다.
다나에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에게 겁탈 당한 여인. 그녀를 작가는 화려한 장식에 둘러 쌓이게 하고 뽀얀 나신을 그 속에 묻어 겁탈 당한 여인의 슬픔과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병치시키고 있다. 이는 당시 인문학이 관심을 기울인 인간 내면세계에 대한 관점- 본능적 충동(이드)에 의존하는 새로운 인간상에 대해 보내는 이 작가의 지지로 보인다.
<마이클럽에서>
구스타브 클림트의 영원한 에로스
클림트와 여인들展 2000.9.20∼2001.1.7 오스트리아 갤러리 벨베데레
〈클림트와 여인들전〉은 클림트의 여인 초상화의 도상과 상징의 변천사를 검토해 봄과 동시에 비엔나 모더니즘기에 묘사된 여성 이미지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모색한다는데 의의가 있다.
구스타브 클림트 〈다나에〉 77×83cm 1907
언젠부턴가 클림트는 모네, 반 고호, 피카소 등과 함께 미술상품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기작가의 대열에 서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에 대해 잘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196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첫 구스타브 클림트 회고전에 이어, 1986년 뉴욕 모마(MoMA)에서 비엔나 모더니즘 미술을 총정리한 〈비엔나 1900전〉을 계기로 19-20세기 전환기 비엔나 모더니즘 운동은 다시금 미술사적 조명을 받기 시작했고, 그에 힘입어 구스타브 클림트(1862-1918)는 금빛찬연한 장식성과 관능성 짙은 회화작품으로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2000년을 맞아 갤러리 벨베데레는 근대 비엔나의 간판적인 화가이자 세기전환기 빈 분리파(Wiener Sezession) 운동의 선두지휘자 클림트의 작품들을 한데 모은 〈클림트와 여인들전〉(2000.9.20∼2001.1.7)을 기획했다.
클림트 미술의 평생 핵심주제는 여성이었다. 콧대높은 상류계급 귀부인에서 청순한 시골 소녀에 이르기까지 클림트 미술의 모델이 되었던 여성들은 금색찬연한 장식과 화사한 색채를 한 몸에 받으며 캔버스 위에 재현되곤 했다.
방년 14세되던 해인 1876년, 비엔나 미술공예학교(Kunstgewerbeschule)에 입학할 만큼 일찌기 특출난 재능을 인정받았던 그는 특이하게도 작가 자신이나 작품에 관한 문서상의 기록을 일체 남기지 않았다. 문자언어에 대한 병적 거부감을 지녔던 구스타브 클림트의 미술인생은 그래서 오늘날까지 상당부분 규명되지 못한채로 남아있는 형편이다. 체코계 중하급 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예술적 재능이 풍부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성장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줄곧 모친과 친여동생들의 집에서 동거했다고 알려진다. 또 평생 미혼이었으면서도 14명이 넘는 사생아를 낳은 아버지였다는 사실에서 그가 여성을 향한 오묘한 애증과 긴장으로 갈등했던 인물이었을 것임도 짐작케 해 준다.
동시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심리분석학을 빌어 클림트의 창조적 성과는 개인사적 배경과 성(性)을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예술적 통로로 대리 충족되어 발현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클림트가 즐겨 사용한 여성 도상이 탄생하게 된 사회적 배경에는 19∼20세기 전환기 근대사회로의 이행기 가부장적 부르조아 비엔나 사회 속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여권의식이 크게 기여했다.
자아의식이 강해지는 신여성을 바라보던 당대 남성들이 여성혐오증과 거세강박증을 토로했던 시대현상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클림트의 평생 반려자 겸 후원인 역할을 했던 장본인들도 여성이었다. 클림트가 <철학>(1900), <의학>(1901), <법학>(1903∼7)이란 제목으로 비엔나 대학에 제시한 천정벽화들이 선정성 시비에 휘말렸을 때 여류 언론인 베르타 추커칸들(Berta Zuckerkandl)과 패션디자이너 에밀리에 플뢰게(Emilie Floege)는 클림트의 충직한 후견인 겸 지지자가 되어 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번 전시는 1900년도 전후기 모더니즘 전개와 더불어 여성 후원자와 클림트의 관계를 고찰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닐수 없다.
1901년 비엔나 대학 천정벽화 논쟁은 여성의 누드와 도덕성이라는 이슈를 겉으로 내세워 시작된 정치적인 논쟁이었다. 클림트의 근대적 미학을 지지하는 빌헬름 폰 하르텔과 미술사학자 프란츠 비코프 대(對) 보수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요들이 불붙인 미학적 논쟁은 곧 사회주의 대 보수 및 우익주의자들 간의 정치적 스캔들로 번졌다. 예술가적 자존심과 독립성에 크게 상처입은 클림트는 정치적 소용돌이로부터 후퇴하여 자신의 입지를 재정립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이른바 클림트 미술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1910년대 동안에는 알레고리와 상징이 양식화된 장식성으로 중화된 작품이 주목할만 하다. 빈 분리파 운동과 발맞추어 공예분야에서 전개중이던 비엔나 공예운동(Wiener Werksttaete)에 참여하면서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습득한 금속공예 기술을 환기하게 되었던 한편, 이탈리아 라벤나를 여행하면서 산 비탈레 교회당의 비잔티움 미술을 재발견하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유딧 II>(캔버스에 유채와 금박, 178×46cm, 1909, 베네치아 근대미술 갤러리아)는 기하학적 문양의 아르데코 양식이 유난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보다 이미 8년전 완성된 <유딧 I (유딧와 홀로페르네스)>(캔버스에 유채와 금박, 84×42cm, 1901년 경. 오스트리아 갤러리 벨베데레 소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뼈가 앙상한 얼굴과 올가쥔 손아귀를 한 살로메는 쾌락을 선사한 댓가로 파멸과 죽음을 몰고오는 공포의 에로스로 정교하게 묘사된 한편, 인물 주변에 양식화되어 나타난 기하학적 장식은 금속공예와 비잔틴 양식의 산물이다. 한편 <다나에>(1907)의 여성상에는 복수심과 남성혐오적 이미지는 오간데없이 사라진 대신 사랑과 온기에 목말라하는 감미로운 젊은 여성으로 형상화됐다. 클림트가 드디어 여성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칼 E. 쇼스케는 해석한다. 이를 더 뒷바침이라도 하듯, 클림트의 말년작인 <아담과 이브>(캠버스에 유채, 1917-1918년, 갤러리 벨베데레 소장)는 에로스, 고통, 죽음을 향한 화가의 공포가 일시에 해소된 듯 평온하고 아늑한 분위기만을 풍기며 2차원적으로 처리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클림트의 1890년대 고전적 도상과 포즈로 그려진 여성 초상 작품과 동시대 마네, 마카르트, 쉴레, 호들러, 뭉크, 코코시카의 대표적 여인 초상을 나란히 한자리에 전시하는 이번 전시는 클림트의 여인 초상화의 도상과 상징의 변천사를 검토해 봄과 동시에 비엔나 모더니즘기에 묘사된 여성 이미지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모색한다는 의의를 내걸고 있다. 인기 화가의 미술전시회를 찾는 일반 대중 관객들 못지않게 모더니즘 시대의 여성 예술후원인과 예술인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미술사학도들에게도 영감을 제공할 만하다.
박진아 | 미술사
클림트는 고귀한 명분속에 교묘히 숨겨졌던 에로티시즘이라는 주제를 세상밖으로 내놓은 최초의 화가였다. 그에 대한 당시의 비난은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의 상품화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제 현대사회에서 에로티시즘은 사회와 문화전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슈로서 자리잡았다. 우리는 부정적으로 왜곡 되지 않은 건강한 성문화, 건강한 에로티시즘은 그 사회에 건전한 문화성을 부여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에로티시즘의 횃불을 드높인 클림트의 관능의 이브들은 우리에게 당당히 말하는 듯하다..
"나는 아름답다."고..
1862 빈 교외의 바움가르텐(오늘날의 14구역)에서 7월 14일 출생. 아버지 에른스트 클림트(1834-1892)는 보헤미아 출신의 금 세공사였고, 어머니 안나 핀스터 클림트(1836-1915)는 빈 출신으로 결혼 전에는 가수였다. 클림트는 그들의 일곱 자녀 중 장남이었다.
1864 클림트와 함께 미술가의 길을 걷게 될 동생 에른스트 탄생.
1867 가족이 빈으로 이사. 구스타프는 이듬해 학교에 입학. 클림트 가족은 빈곤한 생활을 했으며, 1873년의 경제 공황은 그들을 경제적으로 힘든 상태로 몰아넣었다.
1874 8월 30일 에밀리 플뢰게 출생.
1876 우수한 성적을 보이던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미술산업 박물관(현재의 오스트리아 응용미술 박물관)에서 새로 설립한 미술공예학교(쿤스트게베르베슐레)에 입학하였다. 동급생 프란츠 마치(1861-1942)와 일년 뒤 입학한 동생 에른스트(1864-1892)와 함께 2년간의 준비반을 거친 후 미술 학교로 옮겨가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1829-1881)와 빅토르 율리우스 베르거(1850-1902)의 지도를 받았다
1879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는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에게 자신이 맡은 일을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예술사 박물관 장식을 도왔고, 한스 마카르트(1840-1884)의 지휘아래 황제와 황후의 은혼식 축하연 준비작업에도 참가하였다.
1880 극장 건축가 펠너와 헬머로부터 최초의 주문을 받아 카를스바드의 온천장에 천장화를 그림.
1881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는 학생 때부터 함께 작업실을 사용하였다. 그들의 "미술가 조합"은 최초의 주문으로 마르틴 게를라흐가 1882-84년과 1895-1900년에 편집한 작품선집 <알레고리와 상징(Allegorien und Embleme)>을 위한 디자인 준비작업을 했다. 그들은 다음해까지 계속해서 그 작품선집을 위한 작업을 했다. 또한 펠너와 헬머로부터도 극장 장식(천장화, 커튼, 등)을 위한 주문을 수차례 받았다. 그들은 세명 중 누구도 개인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적인 양식을 개발하지 않는다고 공언했다. 이 말은 서명이 되어있지 않은 작품이 그들 중 누구의 것인지 확실히 밝히는 일이 불가능함을 뜻한다.
1883 학교를 마친 그들 미술가 조합은 6구에 있는 Sandwirtgasse 8번지로 작업실을 옮겼다. 개인의 양식적 차이가 허용되지 않는 역사적 양식으로 작업하며 한쪽이 완성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쪽이 맡아서 해줄 수 있다는 그들의 특징은 더 중요한 주문을 얻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무렵부터 오랫동안 클림트 형제가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게 되었다.
1885 빈 예술가들의 왕자 한스 마카르트의 죽음 이후, 미술가 조합은 Lainz 교외에 있는 헤름스빌라에 천장화를 그리기 위해 그가 준비해둔 스케치들을 기반으로 그림을 완성하였다.
1886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는 빈에 새로 건설된 부르크 극장의 층계에 천장화를 그리는 최초의 중요한 주문을 받았다.
1888 부르크 극장 장식화들이 완성되었다. 미술가 조합은 오스트리아 제국 왕실로부터 금메달을 받았다. 프란츠 마치와 구스타프 클림트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옛날의 부르크 극장 실내 전경을 그렸는데, 클림트는 무대에서 바라본 관람석의 모습을 그렸다.
1890 <빈, 구 부르크 극장 관람석>으로 400길더의 상금이 수여되는 상을 받아 그 돈으로 뮌헨과 베니스로 첫 여행을 떠났다. 그 후 미술가 조합은 빈 미술사 박물관 층계의 기둥 사이나 세모꼴 공간에 40점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대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그의 그림 <타나그라의 소녀>는 그의 양식적 변모를 드러내는 최초의 징후를 보여준다. 그림 중앙에서는 멀리 떨어져 왼쪽에 위치한 인물은 고대사 속의 인물이라기 보다는 현대적인 인물의 느낌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1891 예술사 박물관 장식을 완료한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는 빈의 다른 화가들과 연합을 결성하였고, 빈의 유명한 화가들 중 일원이 되었다.
에밀리 플뢰게의 언니 헬렌이 구스타프의 동생 에른스트와 결혼하였고, 구스타프는 에밀리의 첫번째 초상화를 그렸다.
1892 미술가 연합은 요제프슈타터스트라스로 작업실을 옮겼다. 풀이 우거진 정원이 있는 그 건물에서 클림트는 1914년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에른스트와 헬렌의 딸 헬렌 탄생. 12월 9일에 에른스트가 죽고, 구스타프는 조카딸의 보호자가 되었다.
1894 구스타프 클림트와 프란츠 마치는 빈 대학 대강당 벽화를 위한 스케치를 준비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클림트의 양식적 변모는 미술가 연합의 점진적인 해체로 이어졌다.
클림트는 에른스트의 이젤화 <로텐부르크의 임시무대에 오른 광대>를 완성하였다. 그는 그 그림의 중심인물들 중 한명의 얼굴에 에밀리를 그려넣었다.
1895 새로 준비된 <알레고리와 상징> 시리즈를 위한 디자인 작업을 했고, 그의 그림 <사랑>에서 그가 상징주의로 변모하는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플뢰게 자매들의 장녀 폴린(1866-1917)이 의상 관련 교육기관을 열었고,
거기서 헬렌과 에밀리도 일한 것으로 보인다.
1896 클림트와 마치의 작품이 더 이상 양식적인 공통점이 없었지만 여전히 빈 대학의 학과들을 다루는 그림을 함께 맡았다. 클림트가 의학, 철학, 법학을 맡고, 프란츠 마치가 그 나머지를 맡았다.
1897 클림트는 20여명의 다른 화가들과 함께 빈 분리파(제체시온)를 결성하였고, 그 초대 회장을 맡았다. 관학적인 미술 아카데미로부터 이탈하여 근대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결성한 전시 동인이라 할 수 있는 분리파는 기존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관영화 되어있던 전시회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전시회를 기획하고 조직하였으며 이듬해부터 월간지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이란 뜻)>을 출간하였다.
4월 14일 에밀리 플뢰게에게 최초로 엽서를 보냈고 이후 계속해서 서신을 교환하였다.
1898 빈 분리파의 첫 번째 전시회가 개최되었는데, 회원들의 그림 뿐 아니라 뵈클린, 크레인, 클링거, 리버만, 로댕, 세간티니, 슈툭, 토마 등 잘 알려진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들도 전시되었다. 클림트는 팔라스 아테네의 보호 아래 미노타우로스와 싸우는 테세우스를 그린 전시회 포스터를 디자인했으나 테세우스의 나신이 검열에 걸려 테세우스의 성기를 식물을 이용하여 가려야 했다. 또한 빈 대학 대강당 벽화를 위해 제출한 스케치로 인해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고 완성된 그림을 심사 받아야 한다는 단서가 붙게 되었다. 에밀리와 함께 여름휴가를 보낸 Hallst tter 호수의 St Agatha에서 최초의 풍경화를 그렸다.(최근에 발견된 1881년작 풍경화 두점을 제외하고서이다. 이 그림들은 1992년 취리히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볼 수 있다.)
1899 빈의 링스트라스에 있는 둠바 빌라의 음악실 실내장식 완성. 클림트는 이 음악실 장식을 위해 <피아노 앞에 앉은 슈베르트>를 그리기도 하였다.
1900 제 7회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클림트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림 <철학>을 선보였다. 이 그림은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87명의 교수들이 이 그림을 대학 대강당에 두는데 반대하는 서명을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클림트는 이 그림으로 금메달을 수상했다.
1901 제 10회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클림트는 <의학>을 선보였는데, 이 그림은 임신한 여인을 누드로 그렸다는 까닭으로 또 다른 물의를 불러일으켰다. 클림트를 교수로 지명한 빈 순수미술원의 제안은 거절되었다.
1902 분리파는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상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거대한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 때 클림트는 베토벤 프리즈를 제작하였다. 이 그림은 열광과 반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에밀리의 마지막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1903 클림트는 라벤나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의 초기 기독교 모자이크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것이 그의 "황금빛 양식"에 반영되었다.
5월에 요제프 호프만(1870-1956)과 콜로만 모저(1868-1918)는 빈 공방을 설립하였다.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과 공예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설립된 빈 공방은 재료의 존중, 구조의 간소화, 기능성을 기본 조건으로 삼아 분리파의 이념에 부합하는 공예품의 생산과 기술자의 양성에 노력하였다.
가을에 빈 분리파는 그때까지 열린 클림트의 전시회 중 가장 대규모인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여기서 80여점의 그림이 전시되었다. <베토벤 프리즈>는 이 전시를 위해 그 장소에 남겨져 있다가 전시회가 끝난 후 개인 수집가에게 매매되었다. (현재에는 다시 분리파 전시관에 있다) 빈 대학 대강당을 위한 세가지 "학부" 그림이 최초로 다같이 전시회에 전시되었다. 그 그림들이 현대 미술관에 전시되야 할지 여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플뢰게 자매는 11월에 카사 피콜라 건물로 이사했고, 이듬해 그곳에 패션-하우스를 열었는데, 그 가구와 장식은 빈 공방에서 맡아 제작하였다.
1904 요제프 호프만과 빈 공방은 실업가 아돌프 슈토클레트의 주문으로 브뤼셀에 저택을 짓고 가구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클림트는 그 저택 식당에 설치할 대리석 벽화의 디자인을 맡게 되었다.
1905 클림트는 학부 그림들을 완성했지만, 후원자의 도움을 얻어 비용을 지불하고 전시를 포기했다. 빈 분리파 회원들을 인상주의와 아르누보라
는 서로 다른 양식으로 나누어 놓았던 오랜 의견 대립 끝에 아르누보 계열의 예술가들이 분리파를 떠났다.
1906 슈토클레트 저택을 보기 위해 브뤼셀로 여행했고,이어 런던을 여행함. 최초의 사각형 초상화 제작. 클림트는 새로 설립한 화가연맹의 회장이 되었다.
1907 "학부 그림"이 완성되어 베를린에 전시되었고, 에곤 쉴레와 만남.
1908 "클림트 그룹"은 쿤스트 쇼를 기획하였고, 여기서 다양한 유형의 아르누보 작품들이 54개의 전시실에 전시됨. 전시의 중심은 <키스>를 포함한 16점의 그림이 전시된 클림트의 전시실로서 이 그림은 현대 미술관에 팔림. 클림트의 도움으로 아직 신인이던 오스카 코코슈카도 그림을 전시할 수 있었다.
1909 두 번째 쿤스트 쇼에서는 당대 유럽 회화에 대한 탐색이 행해졌다. 코코슈카의 그림뿐 아니라 에곤 쉴레의 그림도 포함되었던 이 전시는 클림트가 기획한 마지막 전시회였다. 가을에 그는 파리로 여행했고, 계속해서 스페인으로 갔다. 클림트의 "황금 양식" 시기가 막을 내렸다.
1910 클림트는 제9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작품을 전시했고, 프라하에서 독일의 화가연맹과 함께 전시했다. 슈토클레트 저택의 벽화를 위한 스케치를 완성하였고, 빈 공방이 이를 제작하였다.
1911 로마에서 열린 국제 미술전에 참가하였고, <죽음과 삶>으로 일등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업실이 헐리게 됨에 따라 빈 13구역의 Feldm hlgasse에 새로운 작업실을 얻었다.
1912 드레스덴에서 열린 미술 대전에 참가하였다. 에곤 쉴레는 자화상을 그렸고, 클림트는 <은둔자>를 전시했다. Arpad Weixlg rtner가 클림트에 대한 장문의 글을 썼고, 잡지 <> 35호에 실렸다.
1913 부다페스트, 뮌헨, 만하임 등지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가함.
1914 브뤼셀로 가서 슈토클레트 저택의 벽화가 완성된 것을 직접 봄. 거기서 콩고 미술관을 방문하였고, 원시 조각에 강한 인상을 받음.
1915 바르바라 플뢰게의 초상화를 그림.
1916 쉴레, 코코슈카, Faistauer와 함께 베를린 분리파 전시관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의 전시회에 참가.
1917 뮌헨과 빈 순수미술원의 명예회원으로 선출됨.
1918 1월 11일 발작을 일으킨 클림트는 회복되지 못하고 2월 6일 사망, Hietzing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작업실에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그림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클림트 사후에 그의 재산은 클림트 자매와 에밀리 플뢰게에게 나누어졌다. 에밀리는 그에게 부친 편지들을 대다수 태워버렸다고 한다.
1938 플뢰게의 아파트에 화재가 발생하여 클림트의 스케치북 50권이 소멸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클림트의 작품. 1907-1908년. 캔버스에 은박, 금박, 유채. 180 x 180cm. 빈미술사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