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진진 > [퍼온글] 알랭 드 보통의 시대가 온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아멜리 노통브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한동안 이 셋이 절대 '강호'처럼 사랑받는 외국작가 그룹을 형성하던 때가 있었다. 한국 문학과는 차별화된 맛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을 지녔고 그 매력을 잊지 않도록 자주 작품을 내놓기에 이들의 이름은 하나의 '대명사'가 됐다.
하지만 지금 이들의 자리는 크게 위협받고 있다. 아니, 어쩌면 자리가 없는지도 모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얼굴이 잊혀져가고 있으며 아멜리 노통브와 무라키미 하루키는 예전 같지 않다는 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절대 강호가 없는 춘추전국시대인데 흥미로운 사실은 심상치 않은 파괴력을 자랑하는 이가 독주체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알랭 드 보통이다.
알랭 드 보통의 등장은 연애소설과 함께 시작됐다. 불치병과 숨겨진 가족사 등 뻔하고 뻔한 방식으로 눈물샘을 쥐어짜는 연애소설들이 억지스럽게 시대를 이끌어가던 때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등장은 이색적이었다. 불치병 따위의 소재를 촌스럽게 만들며 등장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정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는 기발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왜 기발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동안 뻔한 연애소설들이 '첫 눈'에 반해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을 한다는 정말 소설 같은, 믿기지 않는 주장을 계속하는 동안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정말 왜 사랑하는지를 심층적이고도 철저하게 물고 늘어졌다. 때문에 이 작품을 연애소설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어쨌거나 이 기발함은 열광적인 반응으로 불멸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하지만 불멸의 베스트셀러를 남긴 작가는 많고 그것만으로는 강호가 될 수 없다. 알랭 드 보통도 마찬가지. 전작만큼이나 화려한 후속작이 있어야 하는데 그 면에서 알랭 드 보통은 놀라울 정도로 기대치를 만족시켰다. 기대치를 채운 첫 번째 주인공은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었다. 여자친구의 전기를 쓰는 것을 연상케 하는 이 소설 또한 이색적이었다. 빠른 사랑이 '작업의 대세'로 자리 잡은 시대에 '느리지만, 깊게' 사랑하려는 주인공의 시도는 이색적일 수밖에 없던 것이었는데 이 작품으로 알랭 드 보통은 자신만의 신선한 연애소설의 계보를 이어갔다.
후속작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는데 특히 요즘 개정판으로 등장한 <우리는 사랑일까>는 알랭 드 보통의 이름을 연애소설의 영역에서 하나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사소한 버릇이나 좋아하는 책의 장르 등에 따른 남녀의 자잘한 갈등까지 확대 조명한 <우리는 사랑일까>는 '사랑의 힘!'으로 어떤 갈등도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하던 세상의 연애소설들을 단번에 고루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랬다. <우리는 사랑일까>는 '낭만'도 보이지 않고, '환상'을 만들어주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특별했다.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현실을 너무나 쏙 빼닮은 나머지 <우리는 사랑일까>는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연애소설은 이렇듯 달랐다. 시대와 달랐고 그 세계의 관습과도 달랐는데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차별성은 모두가 인정하지만 말하지 않으려는 인간 사랑의 행태를 공개한다는 것이다. 사랑을 할 때 사람들은 '영원'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영원하다고 생각할까? 영원한 사랑 운운하고 그 다음날 다른 사랑을 말하면 어떤가? 친구들 반응은 "급했구나?"로 나올 뿐 그렇게까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진실이었던 것인데 연애소설은 이런 사실을 꺼렸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당당하게 이 사실을 공개했다. 덕분에 그의 연애소설은 특별함 속에서 확고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고 이제 그의 연애소설은 앞뒤내용 가리지 않고 구입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작품 세계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이 다르다는 건 연애소설에서만 국한 이야기다 아니다? 글쓰기의 세계도 달랐다. 알랭 드 보통은 소설이 아닌 다른 것도 썼던 것이다. 다른 것을 썼다는 걸 무슨 뜻인가? 다른 이들처럼 수필을 썼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는 정말 다른 것을 썼다. 철학 입문서로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쓴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은 소크라테스, 니체, 쇼펜하우어 등 여섯 명의 철학자들과 그들의 철학을 다루며 그것들이 어떻게 현실의 삶에서 쓰일 수 있을지를 말하는데 요즘 등장한 철학 입문서로 이만한 작품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나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알랭 드 보통은 <프루스트에게 물어보세요>에서 마르쉘 프루스트의 삶을 갖고 인생 상담을 해줬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이 작품은 인생 상담서는 아니다. 일종의 평전으로 볼 수 있는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어차피 작품의 중요성의 그 효능일 텐데 알랭 드 보통은 언제 죽을지 몰랐던 프루스트, 친구가 많았으며 아픈 몸에도 놀라울 정도로 긴 장편소설을 쓴 프루스트의 삶과 철학을 통해서 오늘날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제해줬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끝이 아니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불안에 떠는 이유들을 콕콕 찍어 설명하더니 예술 등을 갖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까지 내놓았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알랭 드 보통은 소설가라기보다는 예술가, 예술가라기보다는 대중적인 지성인으로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3대 강호로 군림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 아멜리 노통브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공통적인 특징을 떠올려보자. 기존의 것과 차별성을 보여야 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을 선보여야 하며, 그 매력이 잊혀 지지 않도록 자주 작품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알랭 드 보통은 어떤가? 모두 충족한다. 뿐만 아니라 알랭 드 보통은 세 명보다 한발 더 앞서나갔다. 정보화시대에 인터넷이 제공할 수 없는 유용한 정보까지 책임지는, 지식의 즐거움까지 선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어떻게 강호 대열에 합류하였는가? 이 질문은 의미가 없다. 이렇게 다재다능한 활약을 보인 이가 강호가 아니라면 세상에 누굴 두고 강호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알랭 드 보통의 시대, 그것은 이미 현재진행형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