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진진 > [퍼온글] 그 슬픔의 바닥에 들어간 적이 있다

 노향림,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보루라는 게 있다. 그건 인간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고 신념일 수도 있고 어쩌면 환상일 수도 있다. 대개 그 환상이 깨지는 순간 어린이는 어른이 된다. 철이 드는 것이다.

신을 믿는 사람이 신을 믿지 않는 사회주의자가 되거나, 히틀러를 존경하는 중학생이 커서 운동권 학생이 되고 청년이 되서 노사모 회원이 되고 장년이 되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 되는 것..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정치인이야말로 이런 케이스가 너무 많다. 나는 그런 정치인들을 미워할 수가 없다.

환상이 깨지는 순간 상처받은 낭만주의자는 염세주의자가 된다. 시를 쓰기 위해 파리로 간 아르띄르 랭보가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상이 되는 것처럼 그런 예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태어나 한번도 남자와 손을 잡아본 적 없다는 전직 미스코리아가 부모님 잘 모시고 남편을 존경하며 현모양처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빛나는 커리어를 다 버리고 결혼했는데 육 개월만에 헤어지고 돌아와 이혼녀로서 카메라 앞에 서는 것.. 나는 이 여자를 싫어할 수는 있어도 미워할 수는 없을 거 같았다.

그다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은희경의 '새의 선물'을 보면 철없는 이모가 집에 놀러온 대학생 오빠를 사랑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 산부인과에 들르는 얘기가 나오는데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영양보충을 위해 우적우적 삶은 계란을 먹을 때..

나는 철없는 어른이 철이 드는 그 통과의례가 너무 가슴 아파서 아, 이 작가는 상처받은 낭만주의자구나 그래서 하나 둘 셋 그 다음부터는 많다, 라고 그 이상의 숫자는 세기를 포기하는 염세주의자가 되었구나 그래서 이렇게 뒤틀린 방식으로 밖에는 소설을 쓸 수 없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희경의 냉소를 좋아하지는 않아도 이해할 수는 있을 거 같았다.

어린이는 자신의 환상이 깨지면서 자아가 완성되지만 환상을 잃어버린 어른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 주변에서도 가끔 그런 순간들을 본다.

태어나서 한번도 혼자 영화를 본 적 없는 한 착한 남자가 쓸쓸히 영화를 보는 것, 한번도 남자친구를 먼저 차 본 적 없는 착한 여자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고 집에 돌아와 우는 것, 한번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쓸개빠진 인간이 무표정해지는 것, 그런 것들을 보면 나는 너무 슬퍼진다. 그건 아마 이 비루한 세상에서 나만큼 환상을 지키고 싶었던 인간이 없었기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나는 혼자서도 잘 논다. 달리 놀 사람도 없지만.. 혼자 밥도 꾸역꾸역 잘 먹고 혼자 영화도 잘 보러 다니고 혼자 여행도 훌쩍 잘 떠나지만 태어나서 여태 혼자 못했던 게 하나 있는데 혼자 술 마시는 거였다.

이상하게 집에서도 혼자 술 마실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과 함께 술 마시고 취해서 헤롱헤롱하는 게 좋았지 인생이 슬퍼서 술을 푸고 싶다는 생각은 못 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스트레스를 겪다보니 나 같이 낮짝 두꺼운 인간도 맨정신으론 견딜 수 없어서 올 해 들어 처음 혼자 술을 마시러 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3번 쯤 혼자 술을 마시러 갔나? 심지어는 집에 맥주캔을 싸들고 와서 홀짝홀짝 마시다 잠들었다. 그런 식으로 한 달을 살다보니 몸무게가 기하급수적으로 너무 느는 바람에 혼자 술 마시는 건 포기하고 요즘은 우아하게 커피나 홍차 따위를 마셔주지만 이미 내 작은 환상은 깨어졌다..

너무 슬퍼서 아무나 술 좀 사달라고 칭얼댔는데 아무도 사주겠다고 나선 사람이 없는 바람에 이미 내 환상이 부서져 버린 것이다. 두둥~~~ (잘 나가다 여기서 코미디가 되는군 ^^;)

어제 저녁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꺼내고 돌아왔다. 너무 피곤해서 열 두시 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어린이날이다. 흐린 하늘을 보며 슬퍼서 명랑한 노래를 듣는다.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당분간은 철이 덜 들었으면 좋겠고 불의의 사고로 애어른이 되는 순간은 없었으면 좋겠다. 소설을 너무 많이 읽는 바람에 꿈과 낭만에 젖어 살게 된 어른들이 나도 한번 현실적인 인간이 되어보겠다고 자기계발 코너에 가서 어슬렁거리는 꼴도 보고싶지 않다.

힐튼 상속녀께서도 계속 그런 식으로 철 따위는 들지 말고 공유도 세퍼트처럼 건빵선생이나 좋아하시고.. 정신 건강에 심히 안 좋은 브릿팝도 계속 들어주시고 싸이의 도토리도 꾸준히 사주시고.. 그렇게라도 살면서 이 재미없는 세상에서 환상을 잃어버리지는 말자.

대부분의 여자들은 일하기 싫으면 시집가고 싶어하던데 나는 일하기 싫으니까 오늘도 네이버 지식인에 '수녀가 되는 법'이나 뒤적이고 있다. 배수아의 말 처럼 이 치열한 약육강식의 시대에 생에 대한 별다른 의지가 없는 나 같은 인간은 도태되는 게 마땅하겠지..

그러나 과연 나는 이렇게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나. 내가 이 삶에서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환상은 뭘까. 다른 사람들은 직업적인 야망이나 연애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라도 가지고 있다지만 도대체 나는 뭘 가지고 있나 도대체 뭘 찾고 있나. 아니 내가 찾는 것들이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나는 늘 뭔가를 잃어버린 속상한 기분이다. 잠깐의 실수로 소중한 그 어떤 존재를 떠나보내고 평생 잊지 못하는 그런 상실의 상태.. 손을 쥐었다 펴본다. 아무 것도 없다. 언젠가 휴 그랜트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에게도 사랑이라는 새가 잠깐 날아와 손바닥에 앉은 적이 있지만 그 행운은 금방 날아가 버렸다고.. 

오랜만에 노향림의 시집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을 꺼내 소리를 내어 읽어본다. '깊은 우물'이라는 시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비밀. 언젠가 나도 그 새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새의 이름은 잊어 버렸지만 잠시 내게 날아온 순간을 기억한다. 바보같이 놓쳐버렸다. 그 새가 바로 내가 찾고 있는 환상일 지도 모르는데..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나도 그 새의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

 

그대 가슴에는 두레박 줄을 아무리 풀어내려도 닿을 수 없는 미세한 슬픔이 시커먼 이무기처럼 묵어서 사는 밑바닥이 있다. 그 슬픔의 바닥에 들어간 적이 있다. 안 보이는 하늘이 후두둑 빗방울로 떨어지며 덫에 걸린 듯 퍼덕였다..                                      

                                                                                                   - 노향림 '깊은 우물' 중에서

 

나는 지금 좀 우울한가보다. 심히 감상적인 글이다 흠흠.. 여기까지 쓰고 시집의 후기를 읽는데 아, 너무 마음에 든다. 이 글도 옮겨야 겠다.

 

나는 늘 혼자다. 이 말처럼 완벽한 말을 나는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로 하여금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고 가르쳐주는 말이기에 그렇다. 내 속에 존재하는 모든 근원적인 고독을 떠올리며 나는 이 시집을, 외로움을 깊이 앓는 독자에게 드리고 싶다.

후투티는 불길한 전조의 새라고 한다. 하지만 후투티가 나의 섬에 날아와서 갇힌 자아를 뒤흔들어 무한대로 풀어놓아주기를 바란다. 나는 그 후투티를 내 생의 행운의 새로 받아들겠다. 영원히 날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 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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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진진 > [퍼온글] 괜찮아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 버릴까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젠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서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詩  한 강





Miyo Nakoj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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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진진 > [퍼온글] 알랭 드 보통의 시대가 온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아멜리 노통브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한동안 이 셋이 절대 '강호'처럼 사랑받는 외국작가 그룹을 형성하던 때가 있었다. 한국 문학과는 차별화된 맛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을 지녔고 그 매력을 잊지 않도록 자주 작품을 내놓기에 이들의 이름은 하나의 '대명사'가 됐다.

하지만 지금 이들의 자리는 크게 위협받고 있다. 아니, 어쩌면 자리가 없는지도 모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얼굴이 잊혀져가고 있으며 아멜리 노통브와 무라키미 하루키는 예전 같지 않다는 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절대 강호가 없는 춘추전국시대인데 흥미로운 사실은 심상치 않은 파괴력을 자랑하는 이가 독주체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알랭 드 보통이다.

알랭 드 보통의 등장은 연애소설과 함께 시작됐다. 불치병과 숨겨진 가족사 등 뻔하고 뻔한 방식으로 눈물샘을 쥐어짜는 연애소설들이 억지스럽게 시대를 이끌어가던 때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등장은 이색적이었다. 불치병 따위의 소재를 촌스럽게 만들며 등장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정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는 기발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왜 기발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동안 뻔한 연애소설들이 '첫 눈'에 반해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을 한다는 정말 소설 같은, 믿기지 않는 주장을 계속하는 동안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정말 왜 사랑하는지를 심층적이고도 철저하게 물고 늘어졌다. 때문에 이 작품을 연애소설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어쨌거나 이 기발함은 열광적인 반응으로 불멸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하지만 불멸의 베스트셀러를 남긴 작가는 많고 그것만으로는 강호가 될 수 없다. 알랭 드 보통도 마찬가지. 전작만큼이나 화려한 후속작이 있어야 하는데 그 면에서 알랭 드 보통은 놀라울 정도로 기대치를 만족시켰다. 기대치를 채운 첫 번째 주인공은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었다. 여자친구의 전기를 쓰는 것을 연상케 하는 이 소설 또한 이색적이었다. 빠른 사랑이 '작업의 대세'로 자리 잡은 시대에 '느리지만, 깊게' 사랑하려는 주인공의 시도는 이색적일 수밖에 없던 것이었는데 이 작품으로 알랭 드 보통은 자신만의 신선한 연애소설의 계보를 이어갔다.

후속작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는데 특히 요즘 개정판으로 등장한 <우리는 사랑일까>는 알랭 드 보통의 이름을 연애소설의 영역에서 하나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사소한 버릇이나 좋아하는 책의 장르 등에 따른 남녀의 자잘한 갈등까지 확대 조명한 <우리는 사랑일까>는 '사랑의 힘!'으로 어떤 갈등도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하던 세상의 연애소설들을 단번에 고루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랬다. <우리는 사랑일까>는 '낭만'도 보이지 않고, '환상'을 만들어주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특별했다.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현실을 너무나 쏙 빼닮은 나머지 <우리는 사랑일까>는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연애소설은 이렇듯 달랐다. 시대와 달랐고 그 세계의 관습과도 달랐는데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차별성은 모두가 인정하지만 말하지 않으려는 인간 사랑의 행태를 공개한다는 것이다. 사랑을 할 때 사람들은 '영원'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영원하다고 생각할까? 영원한 사랑 운운하고 그 다음날 다른 사랑을 말하면 어떤가? 친구들 반응은 "급했구나?"로 나올 뿐 그렇게까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진실이었던 것인데 연애소설은 이런 사실을 꺼렸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당당하게 이 사실을 공개했다. 덕분에 그의 연애소설은 특별함 속에서 확고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고 이제 그의 연애소설은 앞뒤내용 가리지 않고 구입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작품 세계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이 다르다는 건 연애소설에서만 국한 이야기다 아니다? 글쓰기의 세계도 달랐다. 알랭 드 보통은 소설이 아닌 다른 것도 썼던 것이다. 다른 것을 썼다는 걸 무슨 뜻인가? 다른 이들처럼 수필을 썼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는 정말 다른 것을 썼다. 철학 입문서로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쓴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은 소크라테스, 니체, 쇼펜하우어 등 여섯 명의 철학자들과 그들의 철학을 다루며 그것들이 어떻게 현실의 삶에서 쓰일 수 있을지를 말하는데 요즘 등장한 철학 입문서로 이만한 작품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나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알랭 드 보통은 <프루스트에게 물어보세요>에서 마르쉘 프루스트의 삶을 갖고 인생 상담을 해줬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이 작품은 인생 상담서는 아니다. 일종의 평전으로 볼 수 있는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어차피 작품의 중요성의 그 효능일 텐데 알랭 드 보통은 언제 죽을지 몰랐던 프루스트, 친구가 많았으며 아픈 몸에도 놀라울 정도로 긴 장편소설을 쓴 프루스트의 삶과 철학을 통해서 오늘날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제해줬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끝이 아니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불안에 떠는 이유들을 콕콕 찍어 설명하더니 예술 등을 갖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까지 내놓았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알랭 드 보통은 소설가라기보다는 예술가, 예술가라기보다는 대중적인 지성인으로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3대 강호로 군림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 아멜리 노통브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공통적인 특징을 떠올려보자. 기존의 것과 차별성을 보여야 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을 선보여야 하며, 그 매력이 잊혀 지지 않도록 자주 작품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알랭 드 보통은 어떤가? 모두 충족한다. 뿐만 아니라 알랭 드 보통은 세 명보다 한발 더 앞서나갔다. 정보화시대에 인터넷이 제공할 수 없는 유용한 정보까지 책임지는, 지식의 즐거움까지 선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어떻게 강호 대열에 합류하였는가? 이 질문은 의미가 없다. 이렇게 다재다능한 활약을 보인 이가 강호가 아니라면 세상에 누굴 두고 강호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알랭 드 보통의 시대, 그것은 이미 현재진행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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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진진 > 지루해진 청춘의 끝에 만난 구름같은 작가
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지루하여 너덜해진 직장생활. 지친 나에게 마지막 탈출구는 언제나 책이었던것 같다. 마음이 가난해지고, 정신이 녹슬 무렵이면 글자에 눈을 박는 것이 내 오랜 습성이다. 요즘 또한 그러하다. 단순한 이유. 오래 반복하여 지루하다는 것. 직장과 일이 끔찍해졌다는 것.


외근중의 일탈. 오늘 오전 커피숍에서 홀로 ‘청춘의 문장들’을 읽어 내려갔다. 가끔 이렇게 폐쇄적인 모드로 들어설 때가 있다. 특이한 광경이 눈에 띄였다. 내눈엔 말이다. --; 나는 어느 커피숍 창가쪽을 지나가고 있었고 그 안엔 테이블 건너건너 대략 6명이 보였는데 다들 홀로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커피숍에서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이들이 독서하는 광경을 본적은 없는 것 같다. 그렇게 강남의 영풍문고 앞에 있는 ‘Barnesso'라는 커피숍을 우연히 발견했다.


나는 그 곳으로 쑥 들어가 커피를 시키고 자리를 잡았다. 음악이 흐른다. 수다를 떨며 독서를 방해하는 자들은 없다. 다들 책에 심취(?)해 있다. 나는 김연수의 글을 읽는다. 음악이 흐른다. 나는 책에 심취해 있다. 나는 부드러운 김연수의 글구름 속에 두둥 떠있다. 작가는 시로 등단을 해서인지 긴 문장 하나하나가 한편의 시같은 느낌이다. 책한권을 온통 아름다운 문장으로 도배해 놓았으니 그것은 한권의 책이 아니라 여러편의 풍경화인 듯 하다. 귀를 간지럽히는 음악과 두눈에 속삭이는 그의 글 그리고 적당히 푹신한 소파에 앉아 나는 잠시 눈물을 글썽일만큼 감상에 젖게 되었다. 책과 함께한 모든 것이 너무 완벽해서. 글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 곳에 흐르는 음악과 김연수가 고마웠다. 그리 아름다운 글을 써주어 고맙고, 그 글이 나를 충만하게 하여 고맙고, 지리한 일상에서 단 몇분이라도 날 행복하게 하여 고맙다 생각했다.


작가는 나와 같은 70년대에 태어났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없었다. 내가 친구들과 KFC에서 치킨을 뜯을 무렵 작가는 시장통 지하의 음악다방에서 DJ의 강의(?)를 들었다 하고, 내가 사회적 지위가 있지(지위는 무슨 지위 쿨럭) 아르바이트 따위를 해야 하냐며 투덜거릴 무렵 작가는 얼음장 같은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소설당선금으로 기름보일러가 있는 집으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작가는 이렇게 얘기한다.

“다음날, 이삿짐 트럭을 타고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나는 그 언덕에서의 삶이 내겐 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꽃시절이 모두 지나고 나면 봄빛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천만 조각 흩날리고 낙화도 바닥나면 우리가 살았던 곳이 과연 어디였는지 깨닫게 된다. 청춘은 그렇게 한두 조각 꽃잎을 떨구면서 가버렸다. 이미 져버린 꽃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그 부분에서 나의 치열했던 청춘을 떠올릴 수 있었다. 봄꽃처럼 흐드러졌으나 상처도 많았던 내 청춘. 이미 져버린 꽃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물론 이 책의 허점을 발견했다. 작가는 여러번 “어쩌구 저쩌구, 라면 순 뻥일테고 이렇고 저렇다“식의 썰렁한 농담을 던진다. 정말 독자들을 웃기려던 것이었을까. 얼마나 썰렁했는지 나는 그런 부분이 나올때마다 마른 침을 삼키며 ‘제발, 김연수씨여. 당신의 아름다운 글에 찬물을 끼얹지 말아주소서..’라며 찬 농담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랬다. 어쩌면 작가의 의도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좋은 것도 자꾸 보면 물리는 법. 온통 뭉게구름 같은 자신의 글이 거침없이 읽혀지다 단물 빠진 껌처럼 밋밋해지는 것을 염려해 중간중간 맥을 탁 끊어버리는 고단수의 썰렁유머를 구사했음은 아닐런지..ㅎㅎㅎ..나..상상력 풍부..--;


김연수라는 작가가 궁금해질 것 같다. 그의 책을 모두 읽어보고 싶어질 것 같다. 이름하야 전작주의.

누군가 나에게 그가 써 낸 책의 순위를 매겨 말해주면 좋을 듯 싶다. 그러면 나는 가장 저평가된 책부터 읽어나갈 것이다. 한계단한계단 오르며 감동받고 싶으니까. 그렇게 이 작가의 책들이 내 행복의 계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얀 생크림에 초록색을 뭉개면 나올듯한 색깔이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고 이름모를 꽃도 책속에 그려져 있다. 청춘을 담은듯한 색깔이다. 스무살이라는 싱그러운 청춘을 '시작'으로, 한해한해 갖가지 경험들을 하얀 분필로 슥슥 긋다보면, 어느새 그 처음의 싱그러움은 옅어지나 조금더 깊이있는 청춘의 '끝'에 다다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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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진진 > 하나의 질문이 바람되어 나를 흔들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내가 하고 있는것 사랑인가?’ 에 대한 강렬한 의문으로 이 책을 손에 들었다. 하루는 나의 연인.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만약 그의 부모님을 내가 만나게 되어 “너는 내 아들을 왜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어찌 대답할거냐 물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액면 그대로 “저기..잘 모르겠어요.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라고 한다면 결코 내 얕지 않은 사랑을 의심할테고, “마음이 따뜻하고, 저를 현명하게 만들며, 어쩌구..” 대답하기엔 다수의 연인들 모습에 나 또한 평범하게 묻힐 것 같아 괜히 싫었다. 이도저도 개운하지 않다 싶어 대답을 망설이던 기억이 난다.


그 질문의 대답이 스스로도 무척 궁색하던 차에, 특유의 향을 풍기는 책제목이 바람되어 나를 흔들었다. ‘왜 사랑하느냐?’ ‘사랑은 하느냐?’.. 그렇게 나를 흔들어댔다. 책 첫머리에 나오는 아래의 글을 접하며, 이것이 심상치 않은 책임을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함께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언젠가 꿈 속에 그리던 남자나 여자와 마주치게 되는 것을 운명이라고 믿는다면 용서받을 수 없을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그리움을 해소해줄 존재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일까? 우리의 기도는 절대로 응답받을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참한 순환에는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에 하나 하늘이 우리를 가엾게 여겨서 우리가 그리던 왕자나 공주를 만나게 해준다면, 그 만남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한 번만이라도 이성의 검열에서 벗어나서 그 만남이 우리의 낭만적 운명에서 정해진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저자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사랑의 과정에 있는 인간의 심리를 얼음장처럼 차분하게, 타지는 않을만큼만 뜨겁게, 그렇게 부드럽게 잘도 묘사해나간다. 어릴적 색색깔 실을 가지고 놀다 몽땅 얽혀버린 기억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껌이 머리에 눌러붙어 울상을 지어본 적도 있을거다. 대부분의 경우 그저 실을 방구석에 던져두거나, 껌이 붙은 부분을 가위로 싹둑 자르고 말았을텐데. 이 저자는 ‘사물’과 ‘현상의 미세함’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삶’과 ‘시간의 흐름’에 대해 얼마나 진득한지, 밤이 새는줄도 모르고 한 자리에 앉아 그 멋대로 엉킨 실을 한올한올 정리해내고, 수백개의 머리카락을 껌과 분리해내고야 만다. 그런 태도로 사랑을 슥슥 찢어내어 한조각한조각 우리에게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자면, 이제껏 정리되지 않고 엉켜 있던 나의 여럿 사랑놀음들이 한줄로 죽 늘어서 나에게 한들한들 손을 흔드는 것 같다. 켜켜이 먼지 쌓인 내 마음을 청소한 것 마냥 잔뜩 시원해지는 것이다.


저자나이 스물다섯 즈음 이 책을 썼다 하니, 그 전에 최소한 한번의 불같은 사랑은 해봤으리라 추측해 본다. 그것이 아니라면 철학공부만으로 ‘사랑의 깊은 이해’를 얻어낸 저자에게 짝짝짝 박수쳐주고 싶다. 주인공이 클로이와 연애 전,중,후에 하는 생각들을 저자는 똑똑한 수다쟁이처럼 가지런히 한권의 책에 뿌려놓았다. 한두번 사랑해보고 나면 ‘사랑은 **다’라고 정의내리길 좋아하게 되고, 무언가 명확해지는 것 같지만, 사랑이 수어 번을 넘어서게 되면 오히려 정의내리길 꺼리고 그제서야 사랑의 애매함 속에서 헤멘다. 처음에는 ‘너? 잘생겨서. 너? 똑똑해서. 너? 착하잖아’ 이런 식으로 좋아하는 이유를 쉽게 들이댈 수 있지만, 막상 사랑의 깊은 의미를 알아가기 시작하면 사랑의 이유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여자에게 몸무게를 물어보는것, 대화상대에게 무턱대고 재산이 얼마냐 물어보는 것 실례이듯이, 연인에게 ‘왜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 실례가 되겠다. 그것이 궁금하다면 스스로에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질문을 쉽게 툭 던질수 없게 된다.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라는 것은 그저 마음으로 느끼면 되는 것이고, 사랑의 이유라면 결국 머리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사랑은 둘의 첫만남 자체로 우.연.히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우연’에 이유는 없는 것이다. 억지로 짜 낸다면 ‘너를 만나서 우연히’가 되겠다. 조금 씁쓸한가? ㅎㅎ 너가 태어났고 내 앞에 나타났고. 그렇게 우연히 나는 너를..


이 책은 새로 사랑을 시작할때는 에피타이저, 사랑을 끝낸후에는 디저트, 사랑진행중에는 메인요리에 뿌려진 금가루가 될 수 있을만큼, ‘사랑’의 의미를 절묘하게 요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에피타이저, 디저트, 금가루 없어도 배를 채울수 있지만 뭔가 허전하다. 사랑을 끝낸 사람들, 사랑 진행중인 사람들,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 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많이 허전할것 같다. '사랑이라면 나도 왠만큼 해봐서, 사랑 알것도 같다'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가슴 시리게 공감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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