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시를 읽지 않고 인생의 의미를 알수있을까
과연 시를 안읽는 사람과 연애 할수 있을까

- 해질녘에 아픈 사람을 쓰고 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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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겨울 > 나의 일요일은
일요일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오유리 옮김 / 북스토리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은 일요일이다. 많고 많은 일요일 중의 하나지만, 누군가에겐 특별한 하루일 수도 있는 일요일이다. 늦은 아침에 일어나 넘어가지 않는 밥을 한 숟가락 밀어 넣고, 컴퓨터의 전원을 넣어 부팅을 시킨 후, 대강의 청소와 쓰레기를 분리수거 했다. 그리고 겉잡을 수 없이 자란 화단의 무성한 풀들을 두려운 시선으로 노려보다가 역시나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무시무시하게 뜨거운 햇살을 보니 커튼을 걷어 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세탁기를 돌리고, 내친 김에 욕실도 세척락스를 분무기로 뿌려가며 매끈하게 닦아주고, 마침내 컴퓨터 앞으로 돌아와 앉았다.


나의 일요일은 할머니의 전화 한통으로 시작을 했다. 건강하신지 식사는 하셨는지 잘 지내시라는 안부전화는 부쩍 아파진 다리를 끌고 청소며 빨래며 밥을 홀로 챙기는 그 쓸쓸함에 미치면서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대개의 경우 나의 일요일은 방콕이다. 밀린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온종일 컴퓨터를 붙잡고 있다. 한마디로 대문 밖으로는 한발자국도 떼놓지 않는다. 일요일에 누가 온다거나 간다거나 하는 걸 아주 싫어하기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하게 홀로 보내는 이런 시간이야말로 행복의 극치다.


요시다 슈이치의 ‘일요일들’이란 소설을 화장실에 두고 읽기 시작한지 일주일 만에 끝낸 일요일 아침이다. 손에 가벼운 두께의 하얀 책을 보노라니 그렇다면 나의 일요일들은 어떤 그림일지가 궁금해졌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로부터 와서 미래의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한사람의 평범하고 단순해 보이는 삶에는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담겨있는지는, 나란 인간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다.


소설가는 마술사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작가는 매력적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무엇이 어째서인지는 불분명하다. 뚜렷하게 이 소설의 무엇이 좋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닌데, 이 작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정도를 넘어선다. 그는 나의 무언가를 건드렸고 절묘하게 글로서 표현했다. 무엇이지? 무엇일까.


‘일요일들’의 마지막 이야기를 읽으면서 급기야는 눈물도 몇 방울 흘렸다. 엄마를 찾아 떠난 형제가 등장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 하더니, 일요일의 어느 날 도쿄의 어느 호텔에서, 입양되어간 동생과 만나는 형을 따라간 노리코의 이야기는 절정이었다. 세상의 끝에 다다른 듯 낙심해 있던 노리코도 생각하지 않던가.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라고. 인생이 막다른 골목에 왔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다시 일어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어영부영 개기고 있던 일요일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그런 날들은 수없이 많았고,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기억이 되고 만다.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요일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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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드무비 > [퍼온글] 詩와 알콜

 

여름 저녁

 

이승훈

 

글자 하나 남기지 않고

여름이 간다

술잔 들면 더 춥고

사는 건 하염없고

술마시는 일만 남았다

여름 저녁 술

흐린 저녁 술

이 저녁에 내가 늙는다

옷깃 펄럭이며

누가 지나간다.

 

한동안 시를 읽지 않았다.

물론 한 때는 내가 죽치고 있던 인터넷 카페에 날마다 시를 골라 올리던 시간도 있었다.그러다 난 시같은 걸 더이상 읽을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어느 날인가 툭 실이 끊기듯 시를 읽지도 올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제 이 시가 도착했고 (시가 도착하다니!)  난 이 시를 읽는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알아 버렸다.  그동안 내가 시를 읽지 않은 건 시를 읽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를 통해 위로받지 않아도 될 만큼 도리어 여유가 삶의 평안함이 그리고 자신감이 있어서 였다는 걸.

어제는 갑자기 만난 지 11년이나 된 남편사촌이 도쿄로 출장을 왔다며 집에 오기로 했고 난 그를 위해 근사한 저녁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우리 집에 가면 늘 근사한 식사를 대접받을 수 있다는 시댁에서의 내 명성에 걸맞게..

그런데 난 이 시를 읽고는 그냥 맥주 한 캔을 따 잔에도 따르지 않고 마시기 시작했다. 밖에는 하염없이 비가 내렸고 옛 남자가 편집해다 준 가요씨디는 딱 입에 맞는 안주가 되어 나만의 즉석 술상이 차려졌다.

그리곤 명성따위야 무슨 상관이냐 그가 오면 근처 레스토랑으로 가야겠다고 혼자 결정을 했고 남편에게 그 사실을 통고했다.  그러고나니 명성도 내 팽겨칠 수 있는 스스로가 어찌나 마음에 들던지.환영주를 한 잔하고 바깥에 나가 식사를 하고 또 집으로 와 한 시반이 되도록 셋은 술을 마셨고 준비하지 않아 치울 것도 없는 그 저녁은 좋았다.

 

난 알콜중독이다. 그 사실을 스스로 깨달은 건 얼마되지 않았는데 별로 기분좋은 이름은 아니지만 아직은 치료 가능하다고 믿는 관계로 크게 걱정을 하진 않는다. 늘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아님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에대해 피터지게 고민하는 나는 언젠가 알콜중독 테스트를 받으러 간 적이 있다. 그 때 그 의사는 내게 어마어마한 양의 설문지를 내밀었고 당신은 알콜중독의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습게도 다분했던 내가 진짜 알콜중독이 된건 작년에 만났던 한의사의 영향이 크다. 그는 내 맥을 짚어보더니 알콜분해능력이 무진장 뛰어나다는 말을 하는 실수를 해버렸고 그게 보증(이건 남편표현이다)이라도 된 듯 난 마음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사실 술을 끊을 생각은 없다. 난 술을 좋아하고 술을 마시는 사람을 좋아하고 더 나아가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에게 인간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서, 날마다 누군가가 개처럼 죽어가고 수만명의 시민의 목숨보다 군인 2천명의 목숨이 훨씬 중요하게 보도되고, 천이백만명이나 되는 에이즈고아가 에이즈가 걸린 줄도 모르고 죽음을 기다리는, 그리고 가짜가 진짜인 척하는 (아니 척은 아니다 가짜들은 자신이 가짜인걸 모르니까) 이런 세상에서 술을 마시지 않고 견뎌내는 건 왠만한 강심장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지 않느냔 말이다.

물론 세상이 중요한건 아니다. 그런 뉴스를 보면서도 커피를 마시고 향기가 좋다고 생각하고 2초간 울분했다 삼십분이면 잊어버리는 내가 아파 술을 마시는거지. 도저히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면서도 세상을 향해 울분을 감추지 못하는 그저 그런 인간.

어제도 난 이 곳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 흥분했지만 곧 그게 사실은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으니 되는거 아니냐고 자기합리화를 해버렸고 오늘은 그 사실이 더이상 나를 흥분시키지 않는다는 걸 다시 확인했으니 말이다.  

난 정신과의사도 찾아갔었는데 절대 세금을 내지 않았을게 분명한 하얀봉투 속 빳빳한 돈을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받아 챙기던 그 유명한 의사는 제발 내 문제를 좀 이 남자에게 설명해달라고 끌고간, 지금은 내 남자가 되어버린 당시의 남자친구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성의없이 내려 나를 허무하게 만들었다.

말이 되느냐고 뭔가 말을 해줘야할거 아니냐는 항의에 그는 막내라서 의존성이 좀 있는게 문제라면 문제일까라는 말을 남겼다. 나처럼 독립적인 인간에게 의존성이 문제라니 돌팔이의사라고 열을 내고 더이상 결혼을 반대할 이유가 없어진 나는 이 남자와 결혼을 해버렸다. 솔직히 이유야 왜 없었겠냐 백여덟가지나 더 있었지만 나 역시 이 남자와 결혼을 하고 싶었겠지.

그 돌팔이 의사가 돌팔이가 아니고 진짜 유능한 의사였다는 걸 인정하게 된 건 그 후 십년이 훨씬 지난 최근의 일이다. 내가 십대 후반에 그 중요한 공부마저 내 팽개치고 전형적인 사모감이라는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명성까지 들어가며 ( 그러고보니 자자한 명성도 엄청 많았던 인간이군) 신에게 올인했던 것도 따지고보면 그 의존성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말이다.

다시 알콜얘기로 돌아가 내가 요즘 스스로 알콜중독임을 선언하면서까지 술을 마시는건 나이 마흔때문이다. 고통스런 이십대를 보내고나니 삼십대가 너무 좋았고 사십대는 더 좋으리란 막연한 생각으로 살았다. 그리고 그 막연한 생각은 마흔을 두 달 밖에 안남긴 지금도 유효하긴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지금은 마흔도 중반인 친구가 마흔이 될때 편지를 보내왔다. 누군가 '마흔이 되면 자기는 이제 여자가 아니라 인간이 되는 거라고 촛불인가를 키고 축하를 하다보니 자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늙은 년이 되어있더라'던가 그런 내용의 글이 인용되어 시작되던 편지. 물론 당사자인 그녀는 마흔을 넘기면서부터 점점 이뻐지더니 마흔 다섯인 지금  내가 그녀를 알던 14년 중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구가하고 있다.

나는 여자가 아닌 인간이 되겠다 뭐 이런 목표같은 건 없다. 남자로 태어나 본 적이 없기에,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자라서 차별을 받아 본 적도 없기에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그저 여자인 내 삶이 만족스럽다. 아이를 낳아보지 않아서, 젖을 물려보지 않아서 아직도 내 몸은 곧 마흔이라기엔 너무 탱탱하다 요즘은 운동도 하고 있으니 내년엔 마흔기념으로 누드사진을 찍어야겠다는 황당한 생각도 하고 있다.

사실 샤워를 마치고 젖무덤이 이십대보다 나을거라고 스스로 만족스러워하는건 곧 내 몸이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되리란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젠 그런 모습에 익숙해지도록, 몸따위가 내게 자부심이 되지 못하는 걸 인정하도록 그렇게 늙어가는 준비가 필요하다.

달리의 영원한 뮤즈였던(영원에 과거형이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갈라는 나이가 들어서는 늘 어둑한 방에서 자신의 모습을 가리고 지냈다던데 그런 늙음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나는 보톡스를 주사하거나 주름살 제거 수술 같은 건 받지 않고 늙어갈 수 있어야 한다.

소설속에 자주 등장하던 '삼십대중반의 아주머니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던 그 나이보다 더 많은 서른 아홉.

이제는 조금씩 세상을 알 것 같고 나를 알 것 같고 또 자신과 조금씩 화해하기 시작하는 그런 나이가 내겐 지금의 서른 아홉이다.

그러니까 나이가 들어간다는건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들에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거라는 걸 알아가는 요즘,  사실 오만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신감 하나만으로 여태 벼텨온 나같은 인간에겐 생각보다 훨씬 충격적인 깨달음이다

더이상은 자신있게 의견을 내지 못하겠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까지 마구 이해가되니 당황스럽다.  이젠 어떤 책도 그 이면까지 보여 온전히 감동하고 온전히 존경하고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은 서글프기도 하다. 때론 말 몇 마디 글 하나만 읽어도 어떤 인간인지가 보이는 게 고통스럽기도하다. 물론 가장 고통스러운 건 나란 인간의 한계를 하나 하나 인정해 가는 것. 더이상은 싸움의 대상이 외부가 아닌 자신이라는 걸. 그 싸움을 외롭게 지켜보는 것도 나라는 걸.

그래서 나는 오늘도 포도주를 따른다 그리고 이제 시를 읽는다. 승자를 알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하면서

얼마나 걸릴 지 알 수 없는 그 기간에 대비책을 짜며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위로가 필요해서. 어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잘 늙어갈 수도 있을거라는 희망이 필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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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드무비 > 일본의 차세대 여성작가들

드라마와 영화는 한류(韓流), 소설은 일류(日流)’라는 말이 있다.
90년대부터 문화의 아이콘이 되어온 일본 소설은
이제 대형 서점의 주요 코너로  자리잡을 만큼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상문학상이나 동인문학상 수상작은 보지 않아도
일본의 양대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 수상작은 꿰고 있을 정도다.
2001년 처음 소개된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은 지금껏 7권이 번역 출간되면서
각각 2만 부 이상씩 팔리고 있다.
1999년 30만 부 이상 팔려나간 <키친>으로 ‘바나나 돌풍’을 몰고 온 요시모토 바나나 역시 최근작 <불륜과 남미>까지 10여 종이 평균 10만 부 이상 팔리면서
대학가의 독서층을 꾸준히 장악해 왔다.
심각한 한국 소설과 달리 10∼20대의 일상을 섬세하게 전달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이들 일본 소설의 강점.
최근에는 20대 초반의 작가들이 대거 등장, 2세대 일본 문학의 인기를
이어나갈 전망이다.
이제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이후 새로운 문학 아이콘이  될
차세대 여성작가  5인을 소개함으로써 일본 소설의 인기 비결과 향방을 가늠해 본다.


비일상적인 캐릭터가 전하는 촉촉한 웃음
,
다이도 다마키

주요작:  <불량소녀> <이렇게 쩨쩨한 로맨스>

대형 서점에 가면 일본 문학은 외국 문학과 따로
분류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독 일본 소설이 한국의 독자에게 사랑받는
비결은 뭘까?
‘부담없고 쿨한 캐릭터와 재미있고 공감 가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다이도 다마키의 작품을
읽어봐도 좋다.
2003년 <이렇게 쩨쩨한 로맨스>로
제128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그녀의 작품에서는 유머와 인간미가 잔뜩 묻어난다.
이 작품은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나이 예순이 넘은 노인네 쓰쿠모와 서른네살짜리
여자 미호의 로맨스를 그린 쿨한 소설이다.

주인공 미호는 ‘자신보다 키도 작고 머리는
천연 파마 머리에, 목에는 갈색 검버섯이 피어 있고, 피부는 탄력이 없어 쭈글쭈글한
구운 어묵 같은’ 쓰쿠모와 사랑에 빠진다.


쓰쿠모는 면사무소에서 근무하다 퇴직해 이런저런 소일거리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으며
이혼한 경력이 있는 노인.

그러나 미호에게 그런 조건은 안중에도 없다.
이들의 로맨스는 시종일관 귀엽다. 잠을 자던 미호가 왼쪽에 쏠려 있던 쓰쿠모의 머리를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오른쪽으로 빗어 넘겨주는 장면이나, 생선가시 사이의 흰 살까지
한 점도 남김없이 깨끗이 발라 대가리 부분까지 파먹고 있는 쓰쿠모를 보며
‘보면 볼수록 어린 왕자같이 생겼네요’라고 하는 장면 등에선 웃음이 터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누굴 때린 적이 있냐는 질문에 ‘내가 좀 멍해서 말이야’라고 태연히 대답하는 쓰쿠모는
마치 허무 개그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다이도 다마키는 이처럼 비일상적인 만남을 일상적으로, 특이하면서도 공감 가는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묘사하는 데 수준급의 기량을 갖고 있다.

단편에서는 거구의 스모 선수 아즈마와 사귀는 열네 살 이즈미가 등장한다.
그녀는 등교를 거부한 적이 있으나 아즈마와 사랑에 빠진 뒤 그의 스모 시합 구경도 하고
그와 함께 섹스도 하는 비일상적인 캐릭터다.
그러나 두루뭉술하고 밋밋한 얼굴의 아즈마를 두고 ‘M자형 이마를 경계로 반들반들한
머리는 눈이 부시다’라고 표현하는 그녀를 두고 ‘어디서 중학생이 감히?’라고 하는 말은
좀처럼 내뱉기 어렵다.

<민들레와 별똥>에서 주인공 미치루의 오랜 친구 마리코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친구라고는 하나 자신에게 ‘사회에 민폐를 끼치는 히피족’이라고 막말을 한다거나
불필요한 간섭을 한다는 점에서 마리코는 미치루에게 천적과 같은 존재다.
미치루가 ‘썸씽’이 있는 남자 유지와 전화를 하는 것을 보고, 다짜고짜 수화기를 빼앗더니
사귈 건지 말 건지 똑바로 하라고 참견할 정도다.
이처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껄끄러운 친구의 손길에서 떠나고 싶어하면서도,
그 친구만의 특별한 매력을 이해하는 평범한 미치루를 통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손바닥의 땀처럼 촉촉이 배어 있는 작가의 모습을 만난다.
전화로 쉴새없이 재잘거리는 친구 마리코의 모습을 보면 마치 ‘고등학교 때 수학(선생님)
있잖아’로 시작하는 우리의 일상을 스스로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경천동지할 큰 사건도 없고, 황당한 결말도, 밑줄을 긋고 싶은 부분도 별로 없지만,
왠지 캐릭터만큼은 뚜렷이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 다이도 다마키의 최고의 장점이다.

일상 탈출을 통한 일상 찬가,
가쿠타 미쓰요

주요작: <납치여행> <사랑이 뭘까> <대안의 그녀> <공중정원> <인생 베스트 텐>

<대안(對岸)의 그녀>로 2005년 나오키상을 수상한 가쿠타 미쓰요의 작품은 과거와 현재가 장마다 교차하는 형식으로, 세명의 주요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우선 현재에는 남편과 세살 난 딸을 둔 가정주부 다무라
사요코와 플래티나 플래닛 회사의 여사장 나라하시 아오이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 출신이지만, 자라온 환경은 전혀
다르다. 가사 대행업을 해주는 회사에서 만난 아오이는
모험심과 독립심이 강해 보이는 당당한 커리어우먼.
야경이 멋지고 벽에는 추상화가 걸려 있고 거대한 관엽식물이 놓여져 있으며, 와인과 치즈를 즐기는 아오이에 반해,
사요코는 방 세 개짜리에 애가 있어서 늘 어질러져 있는
35년 할부짜리 집에서 5년간 가사에만 매달려 왔다.

한편, 과거에서는 아오이의 고등학교 시절이 등장한다.
아오이는 어린 시절엔 늘 왕따를 당했다.
전학 간 군마의 여고에서 노구치 나나코를 만나기 전까진. 그녀들은 케이크와 레모네이드, 바닐라 아이스 크레이프 등을 찾아다니며 순수한 감성을 나눈다.
언덕에 앉아 도넛 구멍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맥주를
마셔대며 하세가와의 케이크 세트, 설날의 하늘, 빌리 조엘, 고치야의 포테이토칩 등 두서없이 그냥 좋아하는 것들을 서로 이야기하는 그들.
열아홉 살 생일에 서로에게 은반지를 선물하자던 이들은 방학 동안 러브호텔을 전전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오이가 눈을 떠보니 나나코는 온데간데 없고 잡지에는
‘여고생, 이상 성애 뒤 마지막으로 동반 투신 자살’이란 기사가 떴다.
하지만 나나코는 실제로 죽지 않았고 전학을 갔다는 소식만 들려온다.

어른이 된 아오이는 혼자가 되는 것에 공포를 갖고 있으며 아이가 자라서 상처받을까봐
아이 낳는 게 두렵다고 사요코에게 털어놓는다.
한편, 새로운 일을 통해 아오이를 만나고, 아오이가 언젠가 가십난을 떠들썩하게 했던
두 여고생 동반 자살 미수 사건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사요코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특히 고등학생인 나나코가 아오이에게 보낸 편지를 읽은 사요코는 본 적이 없는 경치가
실제 기억처럼 선명히 떠오르는 경험을 갖는다.
두 명의 여고생이 대안(對岸)에 서서 고등학생인 사요코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
제목의 ‘대안’(강 건너 기슭)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벼운 일상의 이야기에
자연 묘사가 더해지고 따뜻함이 묻어나는 마지막 장면은 강물의 파문처럼 온몸을
은근한 감동으로 적셔준다.

온화하고 잔잔한 장편에 비해, 가쿠타 미쓰요의 단편들은 좀더 유쾌하고 발랄하다.
6편으로 구성된 단편집 <인생 베스트 텐>은 고독하고 쓸쓸한 일상에 비일상적인 해프닝이 일어난다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화장실에 문제가 생기고 나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407호 여자와 도배업 견습생의
만남을 그린 <바닥 밑의 일상>이나, 남자친구와의 갈등을 이탈리아에 여행 온 한 모녀의
싸움을 통해 풀어간다는 <관광 여행> 등은 그 옛날 유행했던 단편드라마 <드라마 게임>처럼 소소하고도 유머가 묻어나는 일상을 보여준다.
특히 표제작인 <인생 베스트 텐>은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주는 듯한 빛나는
단편이다.
자기 인생의 가장 큰 이벤트 10가지를 꼽아보기로 한 마흔 살의 하토코는 동창회에서
중학교 때 3주간 사귀었던 남자친구 기시다 유사쿠와 만난다.
그날 바로 그와 잠을 자고, 그에게서 고급 냄비 세트까지 사버렸는데, 알고 보니 그는
가짜 기시다 유사쿠였음을 알게 된다는 내용이다.
일상 탈출을 통해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가쿠타 미쓰요의 소설들은 마치 가끔씩
온몸을 간질이는 여행 욕구처럼 당신의 일상을 건드릴 것이다.

이런 쿨한 순애보도 있다,
이토야마 아키코

주요작: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

이토야마 아키코의 책은 현재 국내에 단 한권만 번역되었다. 그러나 한 해에 발표된 가장 완성도 높은 단편소설에
수여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 수상작(제30회)인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만 읽어보아도 알 수 있다.
이것이 일본식 순애보의 결정판이란 사실을.

누군가를 짝사랑하면 반드시 괴로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표제작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의 여주인공은
고독감에 밀려 절절한 심정을 토로하거나 혼자 훌쩍이는
류의 우울한 여자와는 거리가 멀다.
‘나’(오타니 히나코)가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나 반해버린 남자 오다기리 다카시.
그와 함께 재즈바 ‘엑시트 뮤직’에도 자주 가서 맥주도 당당히 마셨지만, 정작 남자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
늘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오다기리를 12년째 바라보며
다른 남자들과 사귀었던 나. 나가 가장 원했던 것은 오다기리의 마음과 단 한번의 섹스였다.
그러나 남자는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고 만날 때마다 친구란 사실을 강조하며, 매번 낙방하기만 하는 소설 응모와 K-1에만 열중이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나에게 “‘너 말이야, 나랑 결혼하려고 해봐야 안 돼’라는 식의
거친 말투조차 좋다”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보통의 순애보와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가 술이랑 약을 먹고 겨우(?) 이층짜리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등뼈가 부러진
오다기리를 보며 이렇게 읊조리는 장면이 있다.
‘꼴사납다. 너무 꼴사납다. 당신이 가진 최후의 담보는 멋있다는 거, 그거 하나인데,
심하다, 배신이다.’
드라마 대사처럼 문체는 단조롭고,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에 나올 법한
소소한 이야기들은 ‘애절’과는 최대한 먼 거리에서 펼쳐진다.
오다기리를 가질 수 없었던 나는 그가 자신을 싫어하기 위한 방법으로
섹스를 택하겠다는 기발한(?) 발상을 하고 메일을 보낸다.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같이 자주세요.”
당황스러울 정도로 직접적이다. 머뭇거림도 없다.
내가 오다기리의 손가락을 건드렸던 느낌을 ‘손 안에 들어온 십엔짜리 온도로,
당신의 손이 따뜻한 것을 알았다’라는 식의 감각적인 문장들도 쿨함에 한몫한다.

연작 단편인 <오다기리 다카시의 변명>에서 히나코는 오다기리에 12년간이나
연정을 품어왔다면서도, 회사의 과장과 살짝 바람을 피우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딱 한번 자고 임신까지 하며 그 사실을 오다기리에게 다 털어놓는다.
머리로 이해는 가지 않지만, ‘Cool is good’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만큼 매력적인 순애보도 없다.
주류를 이루는 주인공이 오다기리를 쿨하게 대하듯이, 일본의 미식가형 순애보 역시
독자를 막다른 골목 안쪽으로 몰아세우지 않는다.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 봤을 법한 ‘어중간한 관계’,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애인 미만 가족 이상”의 관계에 대한 불안과 괴로움을
진토닉과 파스타, 에스프레스가 등장하는 미식가형 소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여자들의 삶에 관한 질펀한 수다,
유이카와 게이

주요작: <어깨너머의 연인> <점점 멀어지는 당신> <백만 번의 변명> <매리지 블루>

일본 소설에서는 취향이 굉장히 중요하다.
혹시 당신이 카페에서 어젯밤에 본 월화드라마에
관한 수다를 떨더라도, 테이블 위에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라도 한권 놓여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면
유이카와 게이의 소설을 살짝 들여다보자.
마블 시폰 케이크와 밀크티, 피부 마사지와
완벽 메이크업… 이런 것들이 마치 미용실의 여성 잡지처럼 소설 속을 장식하고 있으니까.
그녀의 소설은 다분히 허영적이고도 도회적인
느낌의 20∼30대 여성들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장편 <어깨너머의 연인>의 루리코와 모에가
대표적이다.
스물일곱 살 동갑내기인 그녀들은 다섯살 때부터
친구로, 유유상종이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루리코는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나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가 이 세상에 있다고는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어제 있었던 일은 깨끗이 잊어버리는 '고양이과'의 여자.
그녀에게 ‘사람이 좋다는 것은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는 뜻’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굼뜨다는 뜻’이다.
살아 있는 것들의 내장은 그로테스크하고 외설스런 먹을거리라고 여기는 그녀에게
남자란 내장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다.
한편 남자, 사랑, 결혼 어느 것도 믿지 못하는 스물일곱의 직장 여성 모에는 입이 거칠고
고집이 세고 삐딱하고 따지기를 좋아한다.
그녀는 루리코의 세 번째 결혼식에서 만난 유부남 가키자키와 호텔에 간다.
‘상어는 잠시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죽어버린대. 나 역시 늘 사랑에 우롱당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그녀.
가키자키의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며 집을 나가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모에는
‘싱글인 내게 부부 사이의 문제는 최고의 재밋거리’라며 좋아한다.

루리코는 모에의 애인 노부유키를 빼앗아 결혼까지 했지만, 이내 그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불륜녀으로부터 남편 노부유키가 ‘20년 전에 유행하던 얼굴’이라는 소리를 듣고 열받은
루리코는 그런 남자를 자기한테 붙여줬다고 모에한테 오히려 따지기까지 한다.
루리코의 매력은 이런 황당함이다.

돈을 벌기 위해 청과물 시장에서 재고 조사 일을 하면서도, 남편의 불륜녀에게 따지러
갈 때도 상대를 압도하기 위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브랜드 제품으로 완벽하게 몸을 감싸고 나서야 한다는 식이다.
한편, 루리코와 모에는 17살짜리 가출 소년, 즉 ‘친척 동생 비슷한 관계’랄 수 있는 다카시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그런데 모에가 단 한번의 섹스로 다카시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다카시는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되자, 루리코는 셋이 함께 살자고 한다.
남자와 결혼에 얽매이지 않고서도 대안 가족 형태를 만들게 된다는 내용이 마치
영화 <싱글즈>를 연상케 한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내용이 아니냐고? 루리코의 말로 대신 답해주고 싶다.
“불행을 생각하는 것은 현실이고, 행복을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란 말인가요?”

신화와 설화적 상상력이 토해낸 우화,
가와카미 히로미

주요작: <선생님의 가방> <뱀을 밟다> <니시노 유키히코의 연애와 모험>
<빛나 보이는 것, 그것은>

가와카미 히로미의 별명은 ‘우화의 마술사’다.
그녀의 세계는 근래 일본 문학에 크게 유행하고
있는 쿨한 연애 소설들과는 외따로 떨어져 있다.
그녀의 소설은 전통적이고 우화적이며 설화적이며
몽환적이다. 실제로 자신의 꿈 일기를 근거로 소설을 쓰기도 한다는 그녀는 교훈적이거나 메시지를
호소하는 글을 쓰지 않는다.

115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뱀을 밟다>의 표제작 <뱀을 밟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알레고리 소설이다.
소설은 ‘미도리 공원 가는 길, 덤불에서 뱀을 밟고 말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여학교 과학 선생을 4년 하다가 관두고(저자 역시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5년간 과학 교사를 했다), 불교 용품점 가나카나 당에서 일하는 30대 여성
사나다 히와코.
그녀는 그냥 가게에 앉아 있는데 난데없이 뱀을 밟는다. 그 이후로 그녀의 곁에는 자꾸 뱀의 세계로 유혹하는 뱀이 따라다닌다.

뱀은 쉰 살가량의 여자로, 히와코의 엄마라고 우기기 시작한다.
히와코는 자꾸 뱀의 세계로 오라고 유혹하는 뱀을 향해 “뱀의 세계 따윈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자 전기가 방전을 하고 방이 물에 잠기고, 나와 여자로 둔갑한 뱀은 서로의 목을
졸라대고 방은 엄청난 속도로 물에 떠내려가기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원죄 의식과 본성에 관한 이 우화 같은 이야기는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편이다.

사라진 큰오빠가 눈에 계속 보인다는 내용의 <사라지다>는 황당하면서도 마력적이다.
그녀가 상상하는 세계는 가족 정원은 다섯 명이라는 규정이 있다거나, 그런 집에
‘통여우’라는 대나무 통에 사는 상상의 여우가 산다.

큰오빠가 약혼녀의 입에 키스하자 그 부분이 벌레에 쏘인 것처럼 부풀어 오르고,
졸도한 그녀는 두루미 울음소리를 듣기 시작하고, 이내 점점 몸이 줄어들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겨자씨만해지고, 내 몸은 자꾸 부풀어 오른다.
밤의 세계를 열아홉 개의 연작으로 구성한 <어느 날 밤 이야기>에는
‘아무리 부어도 컵이 가득 차지 않는다 싶더니 커피라고 생각했던 액체가 어느샌가 밤으로 변해 있었다’라는 식의 문장이 천연덕스럽게 씌어 있다.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처럼 초현실주의적인 이 이야기 혹은 설화 속에는
등을 파먹는 어둠과 머리카락이 한없이 자라고 질량이 없어지는 소녀, 일본 원숭이,
두더지, 키위, 두목 등 존재 원인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녀의 소설은 이즈미 교카에서부터, 가깝게는 요시모토 바나나에 이어져 내려오는
일본식 환상소설의 바통을 이어받고 있다.
그렇다고 그녀가 반드시 환상소설만 쓰는 것은 아니다.
쿨하고 건조한 문체로 씌어진 장편 연작 연애소설 <니시노 유키히코의 연애와 모험>은
열 명의 여인이 사랑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또 고교 선생과 여제자 사이의 잔잔한 사랑이 담긴 <선생님의 가방>은
<간장선생>의 에모토 아키라와 <음양사>의 고이즈미 교코 주연으로 드라마화하기도 했다.

글: 권민성 (<씨네21>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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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드무비 > [퍼온글] 더바디샵과 아니타 로딕, 그리고 삼성

더바디샵과 아니타 로딕, 그리고 삼성

 

 

▲더바디샵이 광고모델로 써 온 인형 '루비'

 몇 해 전 일이다. 롯데호텔에서 농성중이던 노동조합에 대한 경찰의 진압작전이 정도를 넘었다. 경찰은 10여명의 임신부를 구타하는 등 무차별 폭력진압을 자행했고, 당연히 여론이 들끓었다. 여직원에 대한 상습적 성희롱 사건까지 불거지면서 민주노조 진영에서 이끄는 롯데제품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어느 날, 한 후배 교사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롯데 물건밖에 없어서요……."


나는 빙그레 웃었고,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부도덕한 기업을 응징하기 위해 불매운동을 벌이자면, 아마 우리가 아무 고민 없이 살 수 있는 상품이 얼마나 있을까?" 나는 그때 아마 좀 니글니글한 표정이었지 않나 싶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의 소박한 실천이 무의미하다고 생각지 않으며, 그것이 그 대상 기업의 매출에 털끝만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실천의 진정성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서가에 꽂힌 전여옥이나 조갑제의 책을 찢어 폐지함에 넣거나 이문열의 책을 꾸려서 반납운동에 동참하는 행위는 저명 정치인이나 언론인, 작가의 명성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권력'을 갖지 못한 시민과 독자로서 '권력'을 가진 대상의 발언이나 표현에 대한 명시적이고 적극적인 반대와 비판의 의사 표시로 이해되는 게 마땅하다. 따라서 그것을 단순한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폄하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것은 정치적·문화적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시민과 독자의 주체적 판단과 비판의식을 능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 또는 대기업의 부도덕성은 이 땅만이 아니라 전지구적 현상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른바 국적을 초월하는 자본의 공세는 지구화와 자유무역의 이름으로 제3세계와 가난한 나라를 초토화하고 있다. 이 땅의 대기업들 역시 자본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지극히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노동과 노동자들을, 나아가서는 그들의 삶까지도 제어한다.


기업이 이윤 동기에 따라 움직이고 기능한다는 데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 방식은 최소한의 법적·도덕적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 노동조합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주요한 기둥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조를 금기시하고 있는 삼성의 경우는 현대와 전근대가 뒤섞여 있는 이 땅의 천민자본주의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삼성의 '노무관리‘는 정평이 나 있다. 그 방식은 철저하게 전근대적이고, 철저하게 비인간적이고 철저하게 목적관철적이다. 그들은 그들 회사 안에 '노동'이나 '노동자'나 '노동조합' 따위의 형식이나 내용이 존재하지 않게 하는 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불온(?)한 노동자 감시를 위해 휴대폰 불법복제와 위치 추적 같은 탈법 행위를 기꺼이 감행(재벌과 그 돈의 힘은 너끈히 그것을 조장하고 보호한다)하는 그들 기업의 '글로벌 스탠더드'는 의심할 나위 없이 '무노조 경영'인 것이다.


휴대폰 위치 추적을 통해 노조설립 노동자를 감시했다며 삼성 관계자들을 검찰에 고소한 삼성 일반노조 위원장은 지금 감옥에 있다. 검찰이 삼성관계자를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한 6일 후, 법원이 김 위원장에게 명예훼손죄로 실형 10개월을 선고한 까닭이다. 이는 어쩌면 '휴먼테크'(!) 삼성전자의 노무관리 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상식으로 통용되는 21세기 한국판 민주주의의 미니어처일지도 모른다. '승자독식'은 '신자유주의와 경쟁'이 유일한 시장의 원리로 추앙받는 한국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된지 오래인 듯하다.

 

  더바디샵의  창업자  아니타  로딕

 

노동자로서의 계급적 각성에 이른 한 무력한 노동자 개인의 삶과 생활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 버리려는 집요한 그들의 노무관리 방식은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무관하게 '야만적'일 뿐이다. 자신의 삶을 옥죄어 온 추적과 미행과 감시의 거미줄 앞에 맨몸으로 선 그 노동자들의 얼굴에 드러난 절망과 공포의 표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더 이상 삼성의 상품을 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도덕한 기업의 제품을 사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행위가 아니라, 훨씬 더 정치적인 행위다. 그것은 소비자로서의 자기 소비에 대한 윤리적 선택일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실질적으로 엄청난 힘을 소유한 생산자에게 저항하는 정치적 발언인 것이다. 그런 행위가 그 거대 공룡에게 털끝만한 상처조차 입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특정 기업의 제품을 사는 대신 경쟁적 기업의 제품을 삼으로써 우리의 윤리적 선택은 완성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숱한 경쟁 기업, 경쟁 제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이유'만으로 어떤 상품만을 구매할 수 있다면, 그것은 즐겁고 유쾌한 일일 터이다. 그것은 숱한 이성들 가운데서 나의 사람을 선택하는 행위나 여러 명의 후보자 가운데서 특정한 한 사람을 선택하는 총선이나 대선에서의 선택과 동질적인 행위인 까닭이다.


"정치적 실천은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의무다."

"우리는 산성비, 재활용, 시골의 몰락, 녹색 소비자와 인종청소에 대해 발언해 왔다."

이건 정치인이나 시민운동가의 발언이 아니다. 이윤을 목표로 기업을 운영하는 영국의 한 화장품 기업 더바디샵(The Body Shop) 창업자 아니타 로딕((Anita Roddick)의 주장이다.(독일의 토마스 바이덴바흐 감독은 이 히피 출신의 여성 기업인의 헌신적 인생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아니타 로딕-바디샵 아줌마'를 서울환경영화제에 출품하기도 했다.) 그녀는 소비자들에게 '자사의 제품을 사는 것은 윤리적인 선택'이라는 이미지를 굳히는 데 성공한 기업인이다.


"여성들이 몸에 불만을 갖도록 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여성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다이어트나 여성미를 강조하는 광고에 대한 여성운동가의 발언이 아니다. 화장품을 만드는 기업인 더바디샵은 이러한 인식 아래, '당신의 몸을 긍정하고 사랑하라'는 이념을 실현해 왔다. 그녀의 이러한 인식은 굵직한 허리에 배가 볼록 나온 '평균 체형'의 여성 인형 '루비'를 자사의 홍보 모델로 삼고, 소비자를 오도하는 '뷰티'라는 단어는 아예 쓰지 않으며, 직원 중 여성의 비율을 80% 안팎으로 유지하고, 탁월한 보육시설이나 복지제도 등 여성적 경영 방식을 취하면서, '동물 실험 반대', '용기 재활용' 등 적극적 환경 보호에 참여하고, '자유무역과 세계화 반대'로 이어진다.

 

 

 

더바디샵코리아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기업 이념

 

반전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 등을 전개해 온 아니타 로딕은 "우리는 화장품 회사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기업으로 기억되고 싶다."며, 직원의 3분에 1에 달하는 거대한 홍보조직을 통해 각종 정치적·사회적 사안들에 대한 포스터를 만들고 집회 등 캠페인을 조직하곤 한다. 그녀는 "광고보다 정치·사회적 실천에 대한 우리의 홍보방식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탈리아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로딕은 2차 세계대전 중 어머니를 통해 근검절약의 정신을 배웠고, 지역거래·재활용·재사용·리필링과 같은 '바디샵'의 환경보호 운동을 탄생시켰다. 오늘날 더바디샵의 사회 활동은 방대하다. 인도에서는 바디샵의 코끼리가 몸통에 에이즈 예방법을 광고하며 걸어다니고, 영국에서는 버스 12대가 반전 포스터 등을 붙이고 운행한다고 한다. 기업 활동을 정치적·사회적 발언과 실천의 일부로 만들어 가고 있는 더바디샵은, 아니타 로딕은 행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디샵은 전세계 1,800개 매장에서 24개 국어로 운영되며, 8,400만의 고객을 가지고 있는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겨레에 실린 더바디샵의 이야기를 읽은 딸애는 자신이 쓰던 바디샵 제품을 보여주면서 들뜨고 즐거워했다. 자신의 단순 소비행위가 윤리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즐거운 일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통사고로 숨진 조각가의 배상을 두고 예술인 경력을 인정하지 않고 도시 일용직 노임과 60살 정년을 기준으로 보상하겠다는 삼성 계열 보험사의 결정과 이어진 소송 소식을 바라보는 기분은 씁쓸하기만 하다. ('호암아트홀'이나 '삼성 리움'은 삼성이 운영하는 공연장, 미술관이다. 아마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 투자와 지원이 이 땅의 문화를 한 단계 높이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윤리적 도덕적 기업 운영의 본보기를 따로 들지 못하는 것은 그 방면에 과문한 탓이라 여기고 싶다.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을 모범적으로 실천해 온 유한양행이나 노사상생을 위한 경영전략으로서 뉴패러다임 모델 운영의 귀감이 된 유한킴벌리는 해마다 존경 받는 기업과 기업인의 으뜸으로 꼽히는 삼성전자와 이건희의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삼성이나 그 총수가 쌓아올린 거대한 성이 드리운 그림자는 꼼짝없이 우리 경제의 취약점이며 전근대성의 표지라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 자주 잊어 버리는 듯하다.


더바디샵이 행복하고, 아니타 로딕이 행복하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정말 행복한 것은 여러 개의 동종의 상품 중에 꼬집어 한 제품을 고르면서, 자신의 선택이 갖는 윤리적 의미를 즐거워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선량한 소비자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 2005. 12.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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