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라시보 > 또 다른 사랑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로버트 먼치 글, 안토니 루이스 그림, 김숙 옮김 / 북뱅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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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나는 참 많은 사랑을 했었다. 가족들을 사랑했고, 친구들을 사랑했고 또 가장 흔한 이성간의 사랑도 했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은 거의 다 해 봤고 알고 있다고 자만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가 남아 있었다. 자식을 향한 사랑. 사실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태어나서 꼼지락 거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내 배를 발로 뻥 찰만큼 크지도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아주 어렴풋하게 알것 같기도 하다. 이게 엄마가 아이에게 가지는 느낌이구나 하고 말이다.

모성신화라는 말을 좋아했었다. 모성은 신화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걸 보면서도 나는 그걸 순수하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자기만족. 내지는 이 사회가 마땅이 그래야 한다고 씌워준 규칙을 따르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맹목적인 사랑이라고 말로는 그러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 엄만 나에게도 끊임없이 뭔가를 바랬다. 그게 사랑이건 혹은 물질적인 형태이건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씩 깨달게 된다. 사랑은 이기적이라서 무조건 주기만 하는건 없다는걸 말이다. 내가 주면 나도 받기를 바라는거다. 그게 비록 나를 향해 웃는 미소. 어설픈 옹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단 우린 그걸 댓가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어찌되었건 피드백이 없는건 아니다.

이 책은 모 알라디너께서 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선물한 책이다. 아직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이지만 나는 이 책을 붙잡고 열심히 읽었다. (그에게도 시켰으나 안 들으니만 못했다. 어찌나 목소리가 걸걸하신지) 그리고 왕년에 방송국에서 목소리로 먹고 산 실력을 발휘. 매우 닭살스러운 목소리로 읽었다. (한국어 닭살은 괜찮으나 영어 닭살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내 억양 및 발음에 영 자신이 없어서 소리내어 읽는건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았다. 행여나 나중에 식민지 발음을 할까봐...

아직은 잘 몰라서 뭐라고 말하기 힘들지만. 나는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는건 그런거라고 생각한다. 내 몸에서 열달 동안이나 품고 있던것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물론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목숨과도 같은 사랑일지 아니면 그보다 더 가벼울지는 개인적 차이다. 같은 사랑을 해도 남자가 바뀔때마다 불같이 타오르는 여자들이 있는가 하면 저게 연애질인가 싶을 정도로 밍밍한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자식을 향한 사랑도 그런것 같다. 유난하고 극성스럽고 대단한 무언가만 모성애는 아니다. 낳아서 길러야지 라는 마음. 그 마음을 먹는것도 사실은 참 큰 사랑이다. 사랑 없이는 어떻게 한 인간을 책임지고, 그 인간이 나와 비슷해질때 까지는 돌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겠는가 말이다.

책의 내용은 엄마가 아이를 끝까지 사랑한다는 내용이다. 사랑한다는 노래 부분이 반복된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테이프 레코더가 없어서 듣지 못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벌써부터 CD 천국 아닌가. 영국은 좀 더딘가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약간 서글프기까지 하다던데. 뭐 사는게 다 그런거 아니겠는가. 특히나 엄마가 아이에게 주는 사랑은. 또 다른 누군가의 자식들인 우리들만 봐도 알듯. 그대로 돌려받기는 어려우니까 말이다.

언젠가 아이가 태어나고 한국말을 다 하고, 그리고 나서 이걸 종알종알 읽는날도 올까? 아직은 요원해 보이는데 시간이 흐르면 그런 날도 오겠지? 그때까지는 내가 읽으면서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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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 > 사례가 아닌 이론으로 접근한 페미니즘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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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보면 나는 내 또래 여자아이들 치고는 꽤나 차별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우리 집에는 귀한 아들. 내게는 오빠 내지는 남동생쯤 되었을 그들 대신 나와 내 여동생 이렇게 딸만 둘이었으니까. 가끔 사람들이 아빠에게 정말로 아들을 보지 않을 것인지 물으면 아빠는 말했다. 딸로도 충분하다고. 자식은 아들이나 딸이나 다 똑같다고. 정말로 아빠는 단 한번도 남의 집 아들을 부러워하거나 혹은 아들을 낳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주위에서 보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여동생과 나를 금이야 옥이야 키우셨다. (벌초를 하러 가면 우리의 종아리가 풀에 베일까봐 하나씩 업고 산을 오르셨다. 처음에는 욕을 하던 친척들도 몇 해 그렇게 하니까 자연스러워져 버렸다.)

그래서 나는 다른 집 딸들도 다 나와 내 여동생처럼 자라는 줄 알았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들어가서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인형놀이를 하다가도 우리 집에서 같이 수다를 떨다가도 오빠가 있는 애들은 일정한 시간이 되면 벌떡 일어났다. 나는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지만 그녀들은 말했다. '가서 오빠 라면 끓여줘야 해' 혹은 '가서 오빠 밥 차려줘야 해' 심지어 내 친구 중 한명은 남동생에게 주기적으로 얻어맞기까지 했다. 우리 집에서는 여동생이 나를 때리는 하극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물론 나도 여동생을 때려서는 안 되었지만) 어떻게 동생한테 맞을 수가, 아니 그 보다 그걸 부모님들이 아는데도 왜 그 남동생을 가만히 둘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남동생이나 오빠가 없어서였건 아니면 우리 아빠의 생각 때문이었건 아무튼 집에서는 여자라서 차별을 받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사회는 내게 아빠처럼 해 주지 않았다. 초등학교에서 반장 선거를 할 때. 나는 자격이 되었지만 부반장이 되었다. 반장 선거에는 아예 나갈 수가 없었다. 왜냐면 나는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전교 어린이 회장을 뽑을 때도 나는 나갈 수 없었다. 전교 어린이 회장은 반장만 출마할 수 있는데 그 반장이 되려면 내가 남자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최대한 학교에서 감투를 쓸 수 있는 것은 부반장 내지는 전교 어린이 부회장이었다. 그건 내 실력이나 모자람 때문이 아니라 단지 내가 남자아이가 아니기 때문이었고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유독 힘들었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여자 아이들만 다니는 곳에 있어서 그나마 별 차별을 느끼지 못하며 살았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니 또 다시 초등학교 때 느꼈던 차별을 느껴야 했다. 과대는 전 부 남자였고 여자 후배들은 남자 선배들 앞에서 감히 맞담배를 피울 수 없었다. 술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 후배들은 종종 따귀를 맞기까지 했다.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대단한 남자 선배들 앞에서는 마치 담배를 피우지 않는 여자들처럼 행동해야했다. 나는 남자 선배들 앞에서도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와 뮤직비디오를 만들 때 남자처럼 일했다. 나도 밤을 새우고 40kg 짜리 카메라를 어깨 빠지게 들고 있었다. 그러자 드디어 그들은 내게 큰 인심을 쓰는 양 입에 담배를 물려주고 불도 붙여줬다. 나는 그때 내 노력으로 마침내 나도 남자 선배들 앞에서 담배를 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억지였다. 여자로써 도저히 무리인 4일 연속 밤새기 (낮에 수업 듣고 밤에 편집하고 촬영을 하는데 여학생들은 보통 이틀 밤을 새고 집에 한번 갔다가 온다.) 를 무리하게 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평등이 그런 건줄 알았다. 내가 남자들과 똑 같아지는 것. 그래서 그들이 누리는 것을 나도 누리는 것. 비교적 평등한 환경 속에서 자랐던 나조차도 남녀평등을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젠가 아빠가 그런 얘길 했었던 게 기억이 난다. 페미니스트 중에서 예쁜 여자를 본 적이 있냐고. 전부 페미니스트 아니면 딱 안 될 것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지 않냐고. 내가 기자 일을 할 때 취재를 나가면 사람들이 가장 놀랐던 것은 내가 안경을 쓰지 않고 바지를 입지 않고 머리카락도 길다는 것이었다. 여기자 하면 딱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었고. 그 이미지에 맞지 않는 나를 그들은 매우 신기하게 여겼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이런 편견이 존재한다. 그녀들은 못생기고 뚱뚱하고 자기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그래서 페미니스트이며 페미니스트 일 수밖에는 없을 것이라는 편견. 예쁜 여자들이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은 그녀들은 그냥 예쁜 여자로서의 특권을 누리는 게 훨씬 더 이익일 텐데 뭣 하러 못생긴 다른 여자들과 섞여서 남녀평등을 주장하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여자인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단 한번도 여자로 살아보지도 또 여자의 삶이 어떤지 생각조차 안 해봤을 남자들은 어떻겠는가? 그들은 분명 페미니스트를 못생기고 목소리 큰 여자들로 생각 할 것이다.


이 책 페미니즘의 도전은 제목은 과격하나 내용은 결코 과격하지 않다. 투쟁해서 쟁취하자는 익숙한 구호도 눈에 뜨이지 않는다. 책은 우리에게 여태 잘못 알고 있었던 점들을 조목조목 지적 해 준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썼던 말들. 이를테면 중앙에서 누가 연설을 할 때 뒷자리에서 떠들면 지방방송을 끄라고 하라던가 (엄연한 지역적 차별이다. 중앙방송은 떠들어도 되고 중앙방송이 하는 동안에 지역 방송은 무시되어도 상관없다는 논리에서 나온 말이다.) 국민은 국방의 의무를 지닌다는 말 (여자들은 국방의 의무가 없고 따라서 이 말은 여자는 국민이 아니라 2등 국민이라는 소리가 된다.) 모두가 엄연한 차별적 발언이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물론 여성들이 이 사회에서 차별을 당하는 현실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 뿐 아니다. 우리가 여성이라고 규정지은 속에 장애인 여성, 늙은 여성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도 말하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말을 많이 들어봤지만 그 말 속에 또 다른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 책을 읽어보는 건 처음이라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나도 모르게 여성이라고 함은 당연히 20대 초반에서 30대 후반까지를 말하는 것이며 (그 전은 어리고 그 이후는 너무 늙어서 여자라기보다는 엄마 혹은 아줌마로 대표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은 보통의 아이큐와 정상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여성에 너무 어리거나 나이 들거나 혹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여성은 여성의 범주에 집어넣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사실 차별은 겪어보지 않으면 마음에 확 와 닿기가 힘들다. 내가 겪지 않은 일을 단지 듣는 것으로 똑같이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겪은 많은 일들 중 확실하게 차별은 존재했었고 성희롱도 존재했었다. 다만 그걸 사회생활 하다 보면 혹은 세상이 다 그러니까 하며 어영부영 넘어갔을 뿐이다. 우리가 대단한 폭력을 신체적이던 정신적이던 겪지 않았다고 해서 세상이 여자들에게도 남자들과 똑같은 기회와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사무실이 지저분하면 남자들은 전부 여자 직원을 쳐다본다. 커피를 마시고 싶어도 여자 직원에게 말한다. 좀 상냥한 부탁 어조로 바뀌긴 했지만 커피를 타서 줘야하는 사람이 우리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시키는 방법이 좀 더 부드럽고 좀 더 예의 있게 바뀌었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김 양아 커피 타와라' 나 '미스 김 커피 한잔 부탁해요' 나 결국 자기가 마시지도 않을 커피를 타서 남자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김씨 성을 가진 여자인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많은걸 새로 알게 되었다. 여태 몰랐던 것들 그리고 알았지만 그게 뭐 큰일인가 하고 넘어갔던 부분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 책은 읽고나서 당장 페미니스트가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남자들을 향해 그리고 세상을 향해 외치며 투쟁하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가 너무나 잘못 알고 있었던 혹은 알지만 그게 문제인지조차 몰랐던 것을 알게 한다. 흔히 미술대학을 가면 오직 그림을 그리는 실기만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여동생의 말에 의하면 이론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학교에 과제도 많지만 각 미대를 순방하면서 세미나를 했던 프로그램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나는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구호를 외치고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나는 이론적으로 확실하게 정립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막연하게 여자도 남자와 똑같다고 주장하는 것이 페미니즘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자도 군대를 갔다 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처럼 4일 밤을 새고 그 무거운 카메라를 드는. 평등이란 남자 같아지는 것 이라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이론서로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 물론 더 알아야 할 것이 많겠지만 적어도 이 한권만 읽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여성이 얼마나 차별을 받는지 혹은 피해를 받는지에 대한 사례를 늘어놓아서 분노를 끓게 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여타 페미니즘 관련 서적들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나는 이렇게 차분하게 이론적으로 하나하나 풀어가는 책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또 위에서 언급한 책을 읽을 때 비로소 우리는 페미니즘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 말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과 실천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 끝으로 좋은 책을 선물해주신 마태우스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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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 > 김애란. 당신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집니다.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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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가 컬러플한 옷을 입고 캔디라는 곡을 신나게 불러제낄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내가 오빠 혹은 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연예인들은 점점 줄어들겠구나. 그리고 어느덧 TV속에는 나보다 훨씬 어린 연예인들이 나오는게 당연해졌으며 내게 있어 언니나 오빠였던 우상들은 하나같이 망가진 모습으로 푼수처럼 가끔씩 등장할 뿐이었다. (그들은 그걸 변신이라 불렀지만 나는 한때나마 멋졌던 그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팬으로서 씁쓸함을 감출수가 없었다.)

76년생에 95학번인 나는 8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도 어른이 되어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00학번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영 믿겨지지가 않았다. 예전에 내가 60년대 혹은 50년대 생을 보면서 저 사람들 참 오래되었구나 하고 느꼈던 것을 80년대생이나 00학번이 나를 보면서 느끼겠지 하는 생각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내가 딱 한군데 위로를 받는 곳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책을 쓰는 작가들에게서 였다. 아직까지 그들은 내가 작가님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그러니까 나 보다 단 한살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었다. 76년 이전에 태어난 그들은 내가 좋아했던 연예인들과 달리 살아남기 위해 우스꽝스럽게 변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빛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역시 글은 연륜이 어느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이지. 암. 연예인처럼 몸으로 먹고 사는 직업이 아니잖아 하며 나는 기뻐했다. 그러나 김애란을 만나고 나니 그 기쁨도 접을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김애란은 내가 그때 태어난 사람도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신기한 80년생이다.)

작가를 여자와 남자로 나누어서 생각한다는 발상이 좀 웃긴지 모르겠지만 나는 남자와 여자가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차별의 의미가 아닌 다름의 의미) 자주 작가들을 그렇게 나누어서 생각한다. 남자 작가들에 비해 여자 작가들이 앞서는 것은 디테일과 감정적 표현이다. 물론 아닌 경우나 예외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여자 작가들은 감정을 무척 섬세하게 잘 표현해내고 상황을 디테일하게 설명해준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겪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겪은 일 처럼. 현재 상황처럼 느끼게 한다. 그에 비해 모자라는 점이 있다면 취재력과 유머감각이 아닌가 싶다. 체력적 한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자 작가들의 작품에서 발로 취재를 했겠다라는 느낌을 받은적이 별로 없었다. (역시 아닌 경우도 많긴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전체적인 부분이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머릿속에서 그려내는 능력이 탁월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를 더 들자면 여자 작가들의 작품은 하나같이 다 심각하다는 것이다. 문학이 장난이냐고 말하면 할 말은 없겠지만 나 같이 뭘 모르는 독자들은 가끔 재밌고 가벼운 작품도 읽고싶은 것이다. 이를테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실제로는 심각한 소설을 쓰지만 단편이랄지 산문집에서는 한없이 널널한 모습을 보이는 것. 김영하가 작품과는 달리 소소한 글쓰기에서는 무척 유머러스한 것. 나는 이런 글을 여자 작가들에게도 보고 싶었다. 여자가 남자보다 유머감각이 떨어지지는 않을텐데 어째서 그녀들은 늘 진지하기만 한지. 어쩌면 세상 일이 다 그렇듯 문학판에서도 역시 여자가 살아남으려면 치열해야 하고 그 치열함이 작품속에서도 녹아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김애란의 단편집 달려라 아비를 보면서 나는 드디어 속시원한 여자 작가의 유머러스함을 발견했구나 싶어서 무척 기뻤다. 늘 진지하기만 한 여자 작가들의 작품만 보다가 김애란의, 내가 여태 남자 작가들에게서만 발견했던 유머러스함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 같은) 을 읽었을때 기쁨은 훨씬 더 컸다. 그렇다고 해서 김애란의 작품이 문학적으로 가볍고 할랑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는 유머를 알고 가벼움의 미학을 알며 진지함을 아무렇지 않은척 풀어내는 재주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상황이건 농담이 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누군가와 싸울때도 나는 농담을 해서 상대방을 웃긴적이 있다. 이건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일텐데 아버지는 야단을 치시다가도 우릴 웃겨서 늘 엄마에게 실없는 양반이란 소릴 들으셨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웃음이었다. 어떤 상황이건 유머는 존재해야 한다는 당신의 생각은 곧 내 생각과 내 삶의 방식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나는 유달리 유머와 웃음에 집착한다. 코메디프로의 그 억지스런 웃음이 아닌 인간이 접하는 모든 문화와 예술과 생활에 녹아있는 웃음이 좋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나는 책에서 웃음을 찾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아무리 문학적으로 뛰어나고 좋은 책이라 하더라도 재미. 즉 웃음이 없으면 나에게는 좀 지루하다는 느낌이 든다.

코메디언 흉내를 내거나 유행하는 말을 해서 웃기는 것과 재치가 있고 유머를 알아서 상황을 웃기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웃기는 사람. 웃기는 삶이 좋은 만큼 나는 나를 웃게 하는 책이 좋다. 그리고 아주 간만에 나는 여자가 쓴 책을 보면서 원없이 웃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여자 작가의 책을 보며 운적은 있어도 웃은적은 별로 없었던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김애란의 책은 뻘에서 뜻밖에 진주조개를 잡은것 같은 기분이다. (뻘에서 진주조개 잡는게 가능한지는 나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책이 그저 참 웃기고 재미있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녀는 다른 여자 작가들 못지않게 섬세하며 디테일하고 또 상상력이 풍부하다. 여자 작가들이 가진 장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간 부족한듯 했던 유머러스함을 갖추었다는 것. 이것이 김애란이란 작가를 더더욱 빛나게 하는 이유인것 같다. 앞으로 그녀가 낼 책들이 몹시 기다려진다. 한 작가를 만나고 그 작가를 믿으며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것. 그건 아마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기쁨이 아닌가 싶다. 2005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나는 그런 작가들의 이름에 김애란이란 이름 하나를 즐거운 마음으로 추가시킨다.

덧붙임 : 나는 이 책을 구입하려고 마음을 먹었을때만 해도 아비가 사람 이름인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아버지라는 뜻의 그 아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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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요넘을 정복해 보리라..

댈러웨이 부인을 읽던 그녀의 모습이..눈앞에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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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노포즈 이후 오랜만에 언니 작품을 보러 갔다. 그 후에도 모임에서는 만났지만 무대위의 언니 모습은 오랜만에 만나는것 같다. 여전히 무대를 사로잡는 언니의 카리스마와 위트는 누구도 따라갈수 없었다. 안타까운 점은 언니 혼자 너무 애쓰는 듯한 분위기였다. 전에 선경언니 해미언니랑 공연했을때는 골고루 분산되어 오히려 언니의 유머가 죽는것 같아 보일정도였는데 이번 무대는 많이 버거워 보였다.

공연이 끝나고 분장실로 가 언니를 만났는데 목소리가 많이 갈라져있었다. 지난 10월 뮤지컬 대상 시상식때도 목이 안좋았는데 그 때 걸린 감기가 여전히 낫지 않고 있다는 거였다. 이공..빨리 나으셔야 할텐데..아무래도 쉼없이 지방공연, 서울공연 하고 계셔서 나을 틈이 없는듯했다. 언능 확~~~ 털고 일어나셨음 좋겠다.

많이 힘들텐데 저런 목소리로 무대위에서는 너무나 밝게 관객을 휘어잡으니 배우라는 직업이 참 힘든 직업처럼 보였다. 뭐 다른 직업들도 힘들기야 매한가지겠지만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른 직업은 그다지 많지 않을것 같기 때문이다. 힘든 막노동 하는 사람은 힘드시겠어요..라고 말하겠지만 배우보고 힘드시겠어요 아이고..참 고생하시네요..라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것이기 때문이다.

여튼!! 언니~ 빨리 건강 회복하시구요! 남은 공연도 홧팅하시고 음..전 맘마미아..너무너무 기다려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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