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해 - 화가 노석미의 북 갤러리
노석미 지음 / 해냄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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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에서 7월초에 걸쳐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노석미 개인전이 열렸다. 제목은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해] 아마도 동일한 제목의 책이 출판되면서 출판 기념회식으로 개인전이 열린게 아닌가 싶다. TV 프로그램에서 노석미의 작품들을 보고 전시회 가봐야겠군! 하고 보니 벌써 끝이 나있었다. 그리하여 내 기억속에서 서서히 잊혀진 노석미와 작품들....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 나는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해를 손에 쥐고 읽었다. 아니 보았다. 아니 감상했다. 이 책은 책 표지에 써있는 말 그대로 정말 [북 갤러리]였다. 나를 2004년 6월의 인사동 갤러리로 데려가고 있었다.

노석미의 그림은 참 재미있다. 삐뚤 삐뚤한 글씨들은 마치 초등학생 글씨 같아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따뜻함이 잔뜩 베어있다. 그러나 노석미의 그림은 쉽지는 않다. 재미있고 따뜻한 공간으로 손짓해 불러놓고는 한번더 생각하기! 좀 더 깊게 사고하기! 를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하면서도 단순하지만은 않은 노석미의 작품세계가 나는 참 좋다.

[나는 니가 행복했으면 해] 라는 글귀와 함게 있는 망사스타킹. 몸통은 온통 지워져 다리만 보인다. 가장 이쁜 다리만 남겨 놓고 이렇게만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건지, 아님 사라져버리고 싶은데 그러면 행복할것 같은 미처 다리가 사라지지 못한것인지... 통통한 다리의 망사 스타킹은 섹시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용기내어 망사 스타킹을 신고 나온 그녀가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고 몸이고 다 가려버린것만 같다. 그래도 그녀의 망사스타킹을 신은 그 용기가 그녀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것 같다.

책 표지와 동일한 글씨체로 쓰여진 [길을 걷다가 나는 줍는다. 그리고,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라는 글은 누군가는 돈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생각을 떠올린다. 나는 길을 걷다가 무엇을 주었을때 운이 좋다고 생각하던가.. 난 그넘이다!  인터넷의 그 수많은 갈림길과 엇갈림길 속에서 나는 그넘을 주웠다. 난 억수로 운이 좋은 사람이다 ^^

생각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그림은 참말 좋은 그림이다. 게다가 나름대로 결론도 낼 수 있는 책이라면 더더욱. 아무리 들여다봐도 몬 소리인지 모르겠는 그림은 내게는 절대 후한 점수를 얻을수 없다. 그러나 노석미의 작품은 내게 언제나 후한 점수를 얻는다! 왜냐면..좀 만 더 생각하면 대답 비스므리한것들을 찾을 수 있으니까! 누군가 그랬다. 이책은 혼자놀때 가지고 있으면 딱! 좋은 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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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다소 > 글쓰기가 두려운가. 당장 교과서로 채택하라.
글쓰기의 전략 - Reading & Writing
정희모.이재성 지음 / 들녘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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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상은 수많은 글들로 홍수를 이루고 있다. 디지털의 발달로 이미지의 활용이 확산되면서, 상대적으로 텍스트가 줄어들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 각종 온라인 게시판과 1인 미디어의 시초라 불리는 블로그가 성행하면서, 오프라인에서는 미처 발휘하지 못했던 역량을 십분 발휘하는 사람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오는게 현실이다. 개중에는 전문가 못지 않은 글을 뽐내는 아마추어 글쟁이들도 상당수다. 적잖이 인터넷을 즐기는 사람으로서, 나도 블로그를 운영하고 간간이 글을 올리고는 하는데 이따금 글이 써지지 않아 말 그대로 OTL(좌절)상태가 되고는 한다. 그럴때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서두는 커녕 글의 소재도 떠오르지 않아 결국은 포기를 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비단 나같은 블로그 운영자 뿐이랴. 중,고등학생이라면 글짓기 혹은 논술과제를 해야할 때, 대학생이라면 리포트를 쓸 때, 취업준비생이라면 자기소개서를 쓸 때마다 겪는 문제일 것이다. 블로그 운영자야 대부분 자기만족을 위해 글을 쓰겠지만 후자의 경우는 그 자체가 입시 및 학점, 취업과 직결되니 글쓰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스트레스의 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글쓰기의 전략>은 그런 사람들의 고민을 적게나마 덜어줄 수 있는 책이다. 기존의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글쓰기의 조언이 아닌, 구체적인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에 이론서이기 보다는 실용서에 가깝다. 책은 총 13장에 걸쳐 이루어져 있는데, 나의 경우 책을 다 읽고나서 자신감과 함께 막연하게 느꼈던 글쓰기의 체계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사실, 글쓰기에 관해 따로 공부를 하거나 일부러 강의를 듣지 않는 이상 그것은 언제나 '멀고도 가까운 당신'인 것이다. 쓰고 싶은 말들은 넘쳐나는데, 그것을 효과적으로 정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많이, 자주 쓰다보면 자신만의 체계가 잡히기는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이 책은 그런 취약점을 보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책은 각 장이 끝날때마다 <알고보면 쉬운 우리글>이라는 코너를 선보이고 있는데, 자칫 틀리기 쉬운 단어나 헷갈리는 맞춤법 및 띄어쓰기에 관해 이해가 쉽도록 설명하고 있다. 이 코너는 얼핏 대단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대수롭지 않게 지나갈 수 있는 것을 되짚어 줌으로써 좀 더 완성도 높은 글쓰기에 기여하고 있다. 아무리 잘 쓴 글도 엉뚱한 곳에서 틀린 단어를 사용하거나 맞춤법이 틀려버리면 글에 대한 전체적인 신뢰도가 떨어지고 만다. 그것은 글을 쓴 사람에게도, 읽는 사람에게도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코너는 작지만 강한 코너이며,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단, 앞에서도 말했지만 책이 실용성에 중심을 두고 있기에 자칫 '고등학교 작문책'처럼 보여서 답답할 수도 있겠다. 잘 쓰여진 글을 예문에 내세우고, 그에 대해 분석하며 이론과 실제적 방법을 내보인 후, 예제를 풀어보라는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교과서의 전형이긴 하다. 그래서 오래 읽다간 지루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야말로 이 책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많이 보고, 많이 이해하고, 많이 쓰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책은 흔하지 않다. 교과서마냥 답답하면 어떤가. 오히려 그렇기때문에 지침서로서 믿음이 가는 것이다.

'전략'의 사전적 의미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여러 전투를 계획·조직·수행하는 방책으로, 그리스어 strategia(將帥術)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 의미는 초기에는 '전쟁에서 적을 속이는 술책'이라는 뜻으로 쓰이다가 현재에는 그 의미가 발전하여 국가 및 경영, 심지어는 입시에도 쓰인다. 그런 '전략'이 이제는 '글쓰기'에도 쓰이는 날이 온 것이다. 이것은 글쓰기가 그만큼 중요해졌다는 것이며, 좀 더 빠른 시간안에 최대의 효과를 창출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알고만 있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예컨대, 영어를 잘 하기 위해 영어학습법에 관한 책들을 수십권 독파한다고 해서 영어를 잘 하게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요는 그 책들의 도움을 얻었으면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것. 아직도 글쓰기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당신, 이 책에서 도움을 얻었다면 차근차근 실행해 보라. 눈에 띄든, 안 띄든 분명히 효과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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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갑산공자 > 학생과 일반인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책
글쓰기의 전략 - Reading & Writing
정희모.이재성 지음 / 들녘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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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에 안방 문 앞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들이 쓴 편지들이 놓여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어서 무척 반가웠고, 감격스런 마음으로  읽었다. 

그런데 읽고 나서는 "아! 이 녀석들의 작문 실력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되겠구나......"라는 걱정스런 마음이 생겼다.  아들들은 부모에 대한 고마움,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미안함, 올해 더욱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을 잘 나타내었지만, 문장의 구성이나 맞춤법 등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특히 인터넷 세계에서 흔이 사용되는 잘못된 문구들이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었다.

큰 아들이 처음 맞게 되는 2008년도 대학 입시에서는 논술이 중요하다는데, 글쓰기 실력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것 같았다. 학교에서도 논술은 제대로 배우는 것 같지 않고, 믿을만한 사교육 시스템도 없는 것 같은데...... 결국 알라딘 인터넷 서점을 찾았고, 30여분 탐색한 끝에 결정한 책이 정희모, 이재성 교수의 <글쓰기의 전략>이다.

주문한 책이 도착한 후,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읽기를 권유하기에 앞서 내가 먼저 읽게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책을 중간에 내려놓을 수 없었다.  내가 겪고 있는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치유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글을 어느 정도는 쓴다고 생각해 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글쓰기가 점점 어려워짐을 느끼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두뇌 회전이 느려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위안이 되기도 하고 씁쓸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은 내가 글쓰기의 기본을 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 책에서는 글쓰기가 제대로 되려면 최초의 구상에서 시작하여 계획 단계, 집필 단계, 교정 단계를 착실하게 거쳐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글을 쓰던 방식은 주제를 정하면 계획단계에서 글의 구성과 논리 전개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지 않고 바로 집필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초고를 일찍 쓴 다음 몇 차례의 교정을 거치면,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글이 만들어져 왔었다. 

그러나 1~2년 전부터는 이러한 과정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  우선 주제를 정한 후 초고가 잘 쓰여지지 않는다.  계속 마음의 부담만 갖고 있다가 시간이 촉박해지면 어쩔 수 없이 글을 적게 되고, 충분한 교정을 보지 못하여 기본적인 표현의 잘못과 오탈자가 흔히 나타난다.  결국 글을 쓰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가 초래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구성"에 대한 내용은 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상당 수준 완화시킬 것같다.  글을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만 하던 시간에 글에 대한 설계도와 구성 아이디어를 좀더 구체적으로 진행시킬 방법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학생들에게 실용적인 글쓰기 책을 제공"하겠다는 저자의 목표를 거의 달성한 것 같다. 본문에서 다루어진 내용이 매우 실제적이어서 독자가 글을 쓸 때 바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20여편에 달하는 예문들은 수준이 있고, 대부분 2000년대에 쓰여진 것들이어서 생명력이 있다.  저자가 강조한 '분석'을 하기에 적절한 글들이라고 본다.

또 하나, 각 장마다 마지막에 배치한 '알고 보면 쉬운 우리 글'은 혼동하기 쉬운 우리말 용법을 참 잘 정리하였다.  기성세대는 감각적으로 알고 있는 맞춤법을 학생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예들이 잘 다루어져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마도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강의하면서 신세대 학생들의 약점을 잘 파악한 결과라고 본다.

글 쓰기 책이어서 그런지 본문 하나하나가 매끄럽게 연결되어 읽기가 편하였고, 오탈자도 거의 없는 것 같다.  지금까지 내 눈에 띈 것은 딱 두 곳이다.

- 197쪽 5째줄: <... 글의 방향에 따라 초점이 달리하여 ...> ==> <... 초점을 달리하여 ...>

- 215쪽 3째 줄: "떡을" 대신 "먹은"에 밑줄이 그어지고, "먹은"의 "은"이 굵은 글씨가 되어야 함.

대학생이나 일반인들은 이 책만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글쓰기 실력 향상을 얻을 것이다. 중고등학생의 경우 지도하는 분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우리 아이들과 같이 읽어 나가려고 한 권을 더 주문했다.

글쓰기 실력 향상은 이론만으로 되거나 글쓰기 책을 읽어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작정 독서를 많이 하라고 한다거나 글을 많이 쓰라고 하는 것도 바른 방법은 아니다.  이 책을 믿고 따라 할 경우 효과적으로 글쓰기 실력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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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달팽이 > 그대, 소요유를 아시는가
옛 공부의 즐거움 - 고전에서 누리는 행복한 소요유
이상국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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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를 따라서 북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새벽,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몰려왔다. 내 여정의 첫발걸음을 먼저 맞은 것은 지리산 자락의 볼을 저미는 차가운 칼바람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어둠 속의 혹한은 시린 손끝을 타고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눈에 덮힌 숲을 바라보다가 문득 추사선생의 '세한도'를 떠올렸다. 이 정도의 추위 속에서 마음마저 얼어붙어서야 선비의 체면이 영... 그 혹한 난세를 이겨갔던 추사 선생의 곧고 강인한 정신력이 가슴 속에서 뜨거운 정신을 살아나게 만든다. 이 땅에 살다 갔던 수많은 옛 사람들, 그들의 그림과 글 그리고 삶 속에서 추구했던 정신적인 경지는 무엇이었을까? 이 여행과 더불어 내가 챙겨왔던 두 권의 책 중 하나가 바로 이 책이었다.

  우리나라와 동양고전의 문턱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던 내게 이 책은 앞뒤가리지 않고 성큼 한 걸음을 내딛어 보라고 권한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보다 복잡해지는 삶의 모습과 온갖 물질과 쾌락적 삶의 향유에 촛점이 맞춰진 삶의 상품화에 대한 선비적인 꾸짖음이다. 비록 수다스럽고 거칠지는 않지만 꼿꼿이 세운 가슴으로 상대방의 눈을 뚫을 듯이 쳐다보면서 꼼짝하지 못할 비수의 말을 묵묵하게 뱉어내고 있는 삶의 스승이자 친구의 충고이다.

  중국 어느 시대인가 왕은 그 나라의 화공들을 불러 모아 과제 하나를 던져 주었다. '꿀먹은 당나귀'를 그리라는 명이었다. 방을 본 화공들은 어리둥절했다. "과연 꿀의 향기를 어떻게 흰 종이에 담아낼 것인가?"가 그들 문제의 핵심이었다. 이윽고 화공들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림들은 하나둘씩 완성되었다. 신하는 장원에 뽑힌 그림을 빼어들었다. 그림을 본 화공들은 무릎을 쳤다. 그 그림엔 당나귀의 그림이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당나귀의 꼬리만 치렁거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 뒤로 많은 벌떼가 꼬리를 쫓고 있는 그림이었다. 이렇듯 옛 그림에는 있는 현실을 포착하되 보이지 않는 것을 담아내는 교묘한 멋이 있었고,  그 기술은 단지 기교가 아니라 나아가 그 시대의 정신을 표현하기도 했고, 난세의 혹한을 이기려는 꿋꿋한 정신과 삶의 지혜를 담아내기도 했다. 따라서 한 폭의 그림이라할지라도 그 속에는 한 시대와 그들의 삶과 정신이 모두 담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 그 난세를 살다간 선비들의 삶이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새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사상과 정신을 체계화했으며 그 속에서 구제도와 모순된 사회구조를 비판하고 개혁하려했다. 또한 추사는 난기류속에 우왕좌왕하는 지식인들에게 확고한 지적 가치관과 기준을 재확정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연암 선생도 당시 선배들의 문란했던 관념적이고 소모적인 이기논쟁에 의한 당쟁의 폐해를 비판하고 실질적인 탐구와 실천을 위한 지행합일의 학문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우리의 옛 지식인들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명에 소홀히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내적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정신적 성숙을 일구어냈다.

接一物則止於所接

應一事則止於所應

無間以他也則心能一

及事過物去而便收斂

湛然當如明鑑之空也

 

어떤 대상에 닿았거든 그 닿은 자리에서 더 나아가지 말고 멈추라

어떤 사태를 만났거든 그 만난 자리에서 더 나아가지 말고 멈추라

다른 무엇이 끼어들 사이가 없도록 해놓으면 마음은 한결같을 수 있다

사태는 끝나고 대상은 지나간다. 지나고 나면 쉽게 마음을 모을 수 있다

마치 깨끗한 거울 속이 텅 비어 있는 것같이 맑아지리라

 

이러한 내적 수양을 통해 대학에서 말하는 격물치지에 닿았던 화담 선생은 자신의 인격수양의 결과 황진이의 육탄공격에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으로서 느끼는 섬세하고도 미묘한 감정들을 벗들과 교우하기도 하는데 추사선생이 제주도에서 유배시절 벗처럼 지냈던 수선화를 보며 지은 시가 그러하다.

 

一點冬心朶朶圓

品於幽澹冷雋邊

梅高猶未離庭砌

淸水眞看解脫仙

 

한 점의 겨울 마음 송이송이 둥글다

성품은 그윽하고 담박하여 차갑고 우뚝 솟았네

매화가 높다지만 뜨락을 못 떠났는데

맑은 물 해탈한 신선을 진실로 보노라

 

자신이 한양에서 관직시절 흔히 보았던 매화보다 관직에서 밀려나 제주의 이름없는 곳에서 추위를 홀로 견디며 피어있는 수선화를 보았을 때 그는 바로 몰입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차가운 눈발을 견디며 홀로 청청했던 소나무와 같은 심정이지 않았을까? 그를 몰라 주는 세상과 몰라 주는 세상에서 한 걸음 초연해진 그래서 편해진 마음 속에 이미 신선의 경지가 있지 않은가?

 

  저자 이상국은 삶을 통한 희노애락의 예술적 승화를 넘어서 이젠 인류의 정신적 유산의 최고봉이었던 경전에까지 달음박질쳐서 간다. 도덕경, 장자, 논어, 맹자, 금강경의 깊은 지혜를 소요유하고픈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역시 경의 말은 이미 말을 떠난 자리이므로 말로써 응대하는 것으로는 뭔가 석연치 않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을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곤과 붕'을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그것은 '여시아문'에서와 같이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가 된다. 듣는 주체의 의식 수준으로밖에 담은 수 없는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경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해야 하는가? '아문'에서 아가 없어야 한다. 여시에서 계합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주의 진리가 뱉는 소리가 그대로 들리게 된다. 어쨌거나 옛 사람들의 정신적 소요유를 넘어 인류의 가장 고귀한 정신적 유산까지 소요유하려는 그의 지적 용기와 모험정신만큼은 배울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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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달팽이 > 현실을 헤쳐나가는 코드, 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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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지금 열하일기인가?

열하라는 공간은 18세기 후반 몽고와 티벳, 아라비아 등의 다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여기서는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어느 한 가치에 머무르지 않는 유목적인 삶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현재 우리 세상은 중심과 주변이라는 '근대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포스트모던한 사회로의 이행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의식은 아직 근대나 전근대에 머물러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들은 세상의 흐름과 의식의 불일치 속에서 더욱 많은 마찰음을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하일기는 바로 200여년 전의 연암 선생의 열하기행문을 통해서 열하라는 공간이 주는 다문화적이고 다양한 가치의 공존이라는 측면과 그런 열하일기를 쓴 연암선생의 삶과 사상을 통해서 우리시대의 현실과 의식의 불일치를 극복해보려고 하는 시대적 코드로써 읽히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

  우선 연암의 문체가 정조때의 '문체반정'이라고 하는 사건을 일으키는 원조가 된다. 그의 문체는 시대의 무거움을 벗어난 역설과 재치, 해학과 웃음의 생생한 필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문체 형식만 보아서는 그의 정신을 얻을 수 없다. 그의 문체 이면에는 그의 문장에 대한 생각을 또한 읽어내어야 한다.

  "진실로 능히 옛것을 본받으면서 변화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면서도 법도에 맞을 수만 있다면 지금의 글이 옛글과 같게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이 비록 오래되었지만 끊임없이 생명을 내고, 해와 달이 비록 오래되었어도 그 광휘는 날마다 새롭다. 책에 실려 있는 것이 비록 방대하지만 가리키는 뜻은 제가끔 다르다. 때문에 날고 잠기고 달리고 뛰는 온갖 생물 가운데에는 간혹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고, 산천초목에는 반드시 비밀스런 영이 있게 마련이다. 썩은 흙에서 지초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딧불로 화한다."   [초정집서]

  따라서 옛글과 오늘의 글을 같게하는 것은 형식에 또는 문체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법도에 맞아야 하며 이는 옛 글쓴이의 마음과 정신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옛 사람의 마음을 잃은 채 문장의 형식만 흉내낸다면 그것은 이미 법도를 잃은 것이 될 것이요. 옛 사람의 마음을 잃지 못하고 행동거지만 따라한다면 그것은 앵무새의 흉내에 다름아닌 것이다.

  열하일기는 text의 미완성이란 점에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결여로써가 아니라 완결된 체계를 넘어 무한히 뻗어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의 작품이 위대한 것은 완결된 멜로디를 구사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다."는 것은 열하일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완결된 구조로서 우리들에게 강요되는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의식의 창조과정을 따라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해가는 과정을 중요시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부러운 점이 있었다. 연암과 그의 친구들이 나누었던 우정이다. 벗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벗은 나를 알아주는 지기요 또한 인생이라는 배움의 장을 함께하며 질책해주고 위로해주고 때로는 경쟁자로서 때로는 스승으로서 때로는 삶의 동반자로서 우리들의 배움을 완성해가는데 필요불가결한 존재이다. 그러한 벗에 대한 인류사의 명문장으로 나는 이덕무의 글을 빼놓을 수 없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빛깔씩 물들인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 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간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 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선귤당농소]

  아, 이덕무의 이 글을 읽고도 마음으로 애타게 그리는 지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정말 아직 친구를 잘못 사귄 것이 아닐까?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고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말없는 말을 교환하며 배움의 길에 있어 서로에게 회초리가 되기도 하고 붓이 되기도 하고 종이가 되기도 하는 그런 친구가 있다면 인생길은 그리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연암선생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박제가가 연암선생과의 첫만남의 인연을 쓴 [백탑청연집서]를 보면 나이를 넘어서도 벗이 될 수 있는 만남에 대해 청연과도 같은 인연임을 말한다.

  "지난 무자, 기축년 어름 내 나이 18,9세 나던 때 미중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뛰어나 당세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 나섰다. 내가 찾아왔다는 전갈을 들은 선생은 옷을 차려 입고 나와 맞으며 마치 오랜 친구라도 본 듯이 손을 맞잡으셨다. 드디어 지은 글을 전부 꺼내어 읽어보게 하셨다. 이윽고 몸소 쌀을 씻어 다관에다 밥을 안치시더니 흰 주발에 퍼서 옥소반에 바쳐 내오고 술잔을 들어 나를 위해 축수하셨다. 뜻밖의 환대인지라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나는, 이는 천고에나 있을 법한 멋진 일이라 생각하고 글을 지어 환대에 응답하였다."

  나이를 넘어서 벗을 만나고 그 귀한 벗을 대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가? 나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일이 있다. 그의 집을 찾아간 날에 몸소 밥을 차려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나에게 밥상을 정성스레  차려 준 밥을 가슴찡하게 먹은 기억이 있다. 그날 나는 밥을 먹은 것이 아니라 벗의 우정을 먹은 것이다. 연암 선생의 벗을 대하는 마음에는 나이의 많고적음을 떠나 벗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또 그 대접을 받고 그 사람됨을 알아보는 박제가 선생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논객들의 만남다웠구나.

  열하일기에서 문장의 빼어남으로 야출고북구기도 있지만 나의 마음을 흠뻑 앗아버린 문장은 바로 [일야구도하기]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 문장은 빼놓을 수가 없다.

  "내가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이 텅 비어 고요한 사람은 귀와 눈이 탈이 되지 않고, 눈과 귀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더더욱 병통이 되는 것임을. 이제 내 마부가 말에게 발을 밟혀 뒷수레에 실리고 보니, 마침내 고삐를 놓고 강물 위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올려 발을 모두자, 한번 떨어지면 그대로 강물이었다. 강물로 땅을 삼고 강물로 옷을 삼고 강물로 몸을 삼고 강물로 성정을 삼아 마음에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고 나자, 내 귓속에 마침내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을 건넜으되 아무 걱정 없는 것이, 마치 앉은 자리 위에서 앉고 눕고 기거하는 것만 같았다. "

  대학의 '격물치지'를 떠올리게 한다. 외부의 현상들이 감각으로 인식되는 생각들을 물리친 다음에야 비로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각에 마음을 빼앗길수록 더더욱 두려움과 공포에 휘둘리어 공연히 제걸음에 발을 헛디디어 물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온갖 감각과 생각을 차단한 자리, 바로 그 자리가 진리의 자리가 아닌가? 그 자리엔 강물소리가 들릴리가 없다. 마치 있는 그 자리에서 아무런 생각이 없으니 자유자재한 자리가 될 것이다.

  연암 선생의 매력은 단지 문장력에 있지를 않다. 혼란하고 무거웠던 시대를 해학과 웃음으로 가볍게 뛰어넘은 그의 삶 속에는 이렇듯 삶을 바라보는 깊은 지혜가 있었다. 오늘날의 시대, 감각과 온갖 사상과 생각의 난무로 너무나도 복잡해져 삶의 정체성을 찾기 힘든 시대에 열하일기는 단지 그런 삶의 회피로서의 웃음과 역설이 아니라 삶의 깊은 관조와 진리를 향한 구도자로서의 방향제시로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나는 이렇게 열하일기를 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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