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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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국에서 교과서를 한번이라도 들춰본 사람이라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대한 이야기나 일부 내용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자, 그때 인상이 어떠했는가? 유쾌함, 혹은 웃음, 아니면 역설, 이런 것들을 느껴본 적이 있었는가? 단연코 없었을 것이다. 극히 일부의 내용만 보여주거나 짤막한 촌평을 하는 정도니 <열하일기>는 교과서에 의해 지나간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억될 뿐이다. 물론 재미는커녕 지루한 것으로 말이다.

그러나 고미숙은 <열하일기>가 그렇게 치부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당당하게 열하일기에 빠져있노라고 말한 지은이는 열하일기 속에 중세 시대를 엿볼 수 있는 흔적들은 물론이거니와 웃음과 역설이 무궁무진하게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열하일기는 유쾌한 시공간과도 같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일종의 열하일기 해석 판이라고 할 수 있는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열하일기>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럼 구체적으로 <열하일기>에는 무엇이 있길래 지은이는 그렇게도 찬사를 던지는 것일까? 특히 교과서의 일부 지식 덕분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의 제목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볼 수 없는 많은 이들에게 어떻게 <열하일기>의 가치를 설득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그 의문들에 간단하게 답을 주고 있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을 알 수 있고, 박지원의 생각을 알 수 있으며, 변화하는 시대상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변화하는 시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도 그렇거니와 지금도 많은 이들은 <열하일기>의 가치를 평가 절하한다. 왜인가? 이유는 온갖 가지인데 흥미로운 것은 그 중 대다수가 읽어보지도 않고 시류에 떠도는 말로 비판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현재에도 해당된다. 아주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 아니면 당시의 일반적인 평가를 보고 <열하일기>를 아는 양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알다시피 읽어보지도 않고 평가한다는 것은 위험스러움을 넘어 우매한 결과를 자초한다. 지은이도 그것을 지적하는데 그 과정에서 답은 간단히 나온다. 원래 가치가 있는데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 그렇기에 읽어만 본다면 그 가치를 알 수 있기에 자연스럽게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연암 박지원. 김탁환의 소설 등 문학작품에서 여러 번 등장했던 그는 노론계열이었지만 실학자로 불리며 조선시대 영정조 시대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주인공 중 한명이기도 하다. 출세를 하지 못했다고 알려진 박지원은 사실 집안이 명문가인지라 충분히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허나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과거 시험을 보러 가서 이상한 답안지를 제출하거나 그 후에 왕이 불러도 온갖 핑계를 대며 나가지 않았다.

이러한 행동은 박지원을 이해하는 동시에 <열하일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초가 된다. 박지원은 왜 권력 중심부에 나아가지 않았는가? 박지원은 '형식'적인 것을 싫어했다. 과거의 것을 끌어들여와 논하는 과거시험은 물론이거니와 그 과거시험을 거쳐 형성된 정치인들의 무리, 그리고 그것에서 나타나는 온갖 현상들을 혐오했다. 지은이는 그것과 관련해 박지원이 시 짓기에 인색했던 것도 당시 한시의 형식이 '동아시아 엘리트 집단의 공통 문법이자 문화적 징표'이기에 견디지 못해서 그랬다고 말할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대신에 박지원은 우정을 중시했고 인간을 하나의 벌레와도 같은 존재로 보는 생각 때문에 많은 이들과 어울릴 줄 알았다. 한마디로 고관대작들이 끼리끼리 어울리던 시대에 박지원은 이 사람이든 저 사람이든 마음이 맞으면 웃으며 술한잔 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덕무, 홍대용, 박제가 등 그 유명한 이른바 '연암그룹'도 그렇게 해서 역사의 한 자락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게다.

그런데 이러한 권력의 주변부라는 것, 그리고 많은 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성격 덕분에 박지원은 뜻밖에도 청나라에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된다. 실상 오늘날 <열하일기>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이들 중에는 박지원이 정식으로 사신의 자격을 얻어 중국에 갔다고 여기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박지원은 지인 덕분에, 얼렁뚱땅,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존재로 행렬에 끼게 된다. 요즘 은어로 이야기하면 '꼽사리' 같은 존재인 것이다.

홍대용 같은 이들에게 중국 이야기를 들어서 가슴 한 곳에 부러운 마음이 가득했던 박지원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더군다나 있는 듯 없는 듯 한 존재니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으니 박지원은 중국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행동하는 건 당연하다. 덕분에 소중화 의식에 갇혀있던 조선 사대부들을 비꼬는 것에서 오는 유쾌함, 그들이 비판하는 것을 갖고 역으로 그들을 비판하는 역설까지 한바탕 늘어놓을 수 있게 된다.

본래 박지원이 낀 조선의 사신들이 갈 곳은 열하가 아니었다. 연경(북경)이 본래 목적지였는데 그곳에 가보니 황제가 명목상의 피서로 열하에 있다하여 어쩔 수 없이 멀고 먼 열하까지 가야 했던 것이다. 조선 사신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다시 발길을 재촉하는데 그 가운데서 박지원의 행동은 단연 돋보인다. 악동기질을 발휘해 조선 사실들에게 "황제가 열하에 거동하여 연경이 비어서 몽고 기병 십만 명이 쳐들와 왔다오"라고 말해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드는가 하면 이별하는 하인들을 보며 온갖 폼을 잡고 이별론을 펼치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야 하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 박지원이 보여주는 행동들은 웃음이 가미된 한편의 시트콤 같이 보이기도 한다. 더군다나 무지하다고 깔보던 오랑캐라 하여 청나라 사람들 앞에서 근엄한 포즈 취하던 조선 사신들 사이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걸 생각해보라. 상상만 해도 유쾌하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박지원은 본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기에 자연스럽게 생긴 본 목적, 그것은 무엇이든 알고 더 많이 보고 와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었다. 그래서 박지원은 밤늦게 홀로 돌아다니고 중국의 인사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려 한다. 그 덕분에 <열하일기>에는 그 당시에 볼 수 없었던 내용들, 예컨대 코끼리와 같은 기이한 동물들이나 불교,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과 그것을 대하는 조선 사대부들의 편견과도 같은 고집들이 다양하게 나타난 것이다.

자, 이쯤만 알아도 <열하일기>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지 않은가?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교과서의 <열하일기>에 감춰진 매력을 들춰내는 기회가 된다. 덕분에 매력적인 인물 박지원은 물론이며 당시 사회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으니 어찌 이 기회를 마다하랴. 특히 지은이가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을 비교한, 둘 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서로 만난 적이 없는 동시대의 두 인물을 다룬 보론 '연암과 다산'까지 실려 있으니 어찌 기회가 매력적이지 않을까.

박지원이 코끼리를 보고 놀랐듯이 지루해보였던 그 <열하일기>를 보고도 놀랄 수 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즐거움과 감탄으로 말이다. 자, 백문이불여일견이라, <열하일기>의 진면목을 보자. 다만 그 전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으로 충분한 뜸을 들여 보자. 그러면 열하일기와 박지원에 매료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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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하루살이 > 울리고 웃기고, 삶은 마술이었다
아담을 기다리며 - 개정판
마사 베크 지음, 김태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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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왕국 코리아.  새삼스런 사실은 아니다. 새삼스럽재 않은데 이런 얘길 꺼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렇다고 지금 낙태반대 운동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낙태를 할 수밖에 없었던, 생명을 없애야만 했던 나름대로의 절박한 사연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개인적인 사연들을 일일이 들춰내자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아니다. 시대적으로 낙태를 허용하는 어떤 흐름을 말하고 싶을뿐이다. 예전엔 남자 아이를 중시해서 뱃속의 아기가 여자아이라면 과감히 메스를 들이댔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남아 있긴 하지만 대세는 아닌 듯하다. 현재 낙태를 했거나 할 계획인 사람들은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아이를 셋 이상 낳거나, 40대 이후에 아이를 가지면 으례 '살만하군' 이라는 말을 건넨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지만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거꾸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거나 그다지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겐 아이라는 것이 결코 축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생명보다는 경제적 여유가 보다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세상이다.(과학의 발전으로 이젠 아이의 상태를 미리 알뿐만 아니라 조건을 맞춰서 가질 수 있는 세상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대가 왔을땐 사람들은 또 어떤 조건에 맞추어 아이들을 가지려 할 것인지 생각만으로도 두렵다.)



그런 세상을 향해 생명의 잉태가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를 말하는 책이 있다. 아이를 갖는 것이 때론 힘이 들지만 그것이 삶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그 무엇임을 보여주는 책이 있다.  <아담을 기다리며>라는 바로 이 책이다.  책의 저자는 하버드 대학을 다니는 캠퍼스 커플이다. 이미 아이 하나를 가지고 있으며, 또 다시 임신 상태임을 알게된다. 그런데 그 뱃속에선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라 다운증후군이다. 주위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아이를 없앨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일류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 인생의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쉴 틈 없이 달려온 하바드 인들은 그런 아이는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하바드 인뿐만이 아니라 의사들, 친척, 심지어 남편마저도. 그러나 이내 남편은 아내의 뜻을 이해하고, 친구라고 말할 수 없었던 얼굴만 아는 사이의 사람들이 힘이 되어준다. 교통사고에서 살아남고, 화재에서 살아남으면서 겪게 된 이상한 현상들. 저자는 그것이 뱃속의 아기, 아담이 천사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담을 잉태하고 나서부터 찾아온 비논리적 경험들. 그리고 한없이 따뜻한 주위의 사람들. 하바드로 이루어진 자신의 울타리는 여전히 차가운 마음과 지성으로, 성공을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차 있다. 그러나 점차로 하바드인으로 성장하며 닫힌 자신의 마음을 열어제끼자 주위는 한없이 밝고 따스했다. 그녀는 그것을 천사의 도움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마음에 가두고 있던 천사가 어느 순간 튀어나오는 순간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친절한 순간이라고.



자가면역질환까지 앓고 있는 저자에겐 임신이란 큰 부담이다. 그녀는 이런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면서 그 고통의 크기만큼이나 자신의 아들에게 크나큰 사랑을 느낀다. 그 과정의 일들이 그녀의 필체속에 잘 녹아나 때론 웃음을 때론 눈물을 자아낸다. 왜 아이를 지켜야만 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다. 그러나 그 설명할 수 없는 상황들이 이해가 된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불가사의한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마냥 이해가 되는 순간순간들.



그래서 서두에 말했던 이 시대가 용납하고, 오히려 강제했던 낙태의 이유들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살리느냐 죽이느냐의 순간에서 선택한 그 결정들이 정말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는지 자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시대적 사고에 파묻혀 위로하고 쉽게 망각해버린 그 순간들. 더 행복해질 수 있었던 순간들을 놓아버린 끈일 수도 있음을 이 책은 감동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삶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폭주기관차나 고속철이 아니라,  쉬엄쉬엄 사람들과 정을 싣고 내리는 완행열차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머리에 짐을 한보따리 이고 타기도 하고, 젖먹이 아기를 등짝에 포대기로 싸고 두손엔 짐보따를 가득 든 아낙내가 타기도 하는 바로 그 완행열차 말이다. 마치 시골 장터에 와 있는 듯한 분주함. 그리고 추운 겨울 창안으로 스며드는 따뜻한 햇빛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한가로움이 공존하는 곳.  체온으로 가득한 그 완행열차. 내 몸을 싣고 달리고 있는 이 기차의 속도는 지금 이 순간 내가 결정하고 있음을 깨닫고 어떤 속도로 내달릴지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겠다. 지금까지의 성공에 대한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아담은 지워졌어야만 할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아담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감을 맛보고 있는가? 아담은 정말 천사였다. 아담이 이 세상에 나온걸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나도 이렇게 축복해마지 않는다. 삶은 마술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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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드무비 > '나의 집은 백만 평'이라니!
건축가는 어떤 집에서 살까 - 특별하지 않게 특별하게 사는 집 스토리
김인철, 김진애 외 지음, 김재경 사진 / 서울포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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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는 세 종류의 집에서 동시에 거주한다.
유년 시절을 보냈던 기억의 집, 현재 살고 있는 집, 그리고 우리가 아직 용기 있고 열정이 있다면
살아보고 싶은 꿈속의 집.
(본문 90쪽)


‘우리가 아직 용기 있고 열정이 있다면...’이라는 대목에서 나는 잠시 울컥한다.
용기와 열정이 남아 있지 않아서냐고? 아니다.
나는 용기와 열정을 내 것으로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새삼스럽게 사무친다.


이 책을 맨 처음 발견했을 때 ‘건축가들이 사는 집이라고 뭐 특별한 게 있으려고?’ 하는 마음이
반, ‘아니 그래도 집에 관한 전문가들인데 뭐라도 하나씩은 특별한 게 있지 않겠어?’ 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느낌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 한 명 한 명, 그리고 그들의 집들은 자기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되 또 어찌 보면
그 개성마저도 지극히 평범하다.

건축가들의 사는 집의 특색은 몇 가지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고쳐 사는 집이 의외로 많다는 것, 집과 일터가 같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
느린 삶과 오래된 시간을 즐긴다는 것,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며 나름대로의
정신적인 사치를 부리는 부분이 있다는 것.


통일연수원을 지었다는 김원이라는 건축가의 집을 살펴보자.
반포아파트에 오래도록 살던 그는 어느 날 문득 북촌 근방에서 살기로 결심하고 집을 나선다. 
여러 날 인왕산 근처를 맴돌다가 마음에 쏙 들어오는 오래 된 한옥을 발견, 복덕방에 들어가 앞으로 그 집을 주인이 내놓으면 자기에게 꼭 연락을 달라고 청을 넣어놓고 온다.

2년 뒤, 그 집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달려와 집주인과 계약을 체결한 그.
그는 아주 오래 된 한옥을 전부 헐지 않고 고쳐야 할 부분만 고쳐서 살고 있다.
매일아침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인왕산을 변기 위에 앉아 느긋하게 감상한다니

세상에 이런 호사가 또 있을까!


건축가 김원의 인왕산 밑 한옥


열세 명의 건축가 중 내가 제일 매료된 이는 ‘느낌표’ 도서관 프로젝트를 맡았던 건축가 정기용.

‘나의 집은 백만 평!’이라고 호기를 부리는 그는 명륜동의 허름한 다가구주택에서 혼자(!) 살고 있다.

--눈 내리는 날, 초라하던 한옥들이 갑자기 눈에 띄게 그 실존적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본다.
반복하는 기와골들이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흑백의 대비들은 다가구집들을 압도하고,
새벽녘 푸르스름한 도시 풍경은 사랑스럽다.
(...)나는 내가 사는 곳이 집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나의 방’이라고 여긴다.
나의 집은 공용면적을 포함해서 임대계약상 31평이 아니라 50~ 100만 평이 넘기 때문이다.
나는 또 나만의 정원을 가지고 있는데 내 방에서 10분을 걸어가야만 한다.
그곳은 다름 아닌 성균관, 즉 문묘인 명륜당 앞마당이다. 500년 묵은 은행나무 두 그루와
느티나무 한 그루, 마로니에와 단풍나무가 몇 그루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명륜당은
사계절 나의 벗이기도 하다
.(본문 82쪽)

 


 건축가 정기용은 다가구주택을 하나 얻어 살며 명륜당 문묘가 자신의 정원이라며
아침마다 저 나무 밑에서 신문을 읽는다.


한옥 골목에 살아보지 못한 이라면 절대 모를 ‘눈 오는 날 갑자기 눈에 띄게 그 실존적 모습을
드러내는 한옥’들. 마루에 쪼그리고 앉거나 문지방에 팔을 괴고 앉아 바라보는 한옥 마당의 하늘,
아파트보다 열 배쯤 큰 소리로 내리는 빗소리.....
그 풍경 속에 한 3년 남짓 살아본 것이 나는 지금도 그토록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그러니 이 책에 나오는 각양각색의 멋진 집들 중에서도 건축가들이 고쳐서 살고 있는 몇 채의
한옥에 온통 마음을 빼앗길밖에......


집은 아침마다 일어나 내가 눈곱을 닦는 곳이다.

내가 가장 방만한 자세로 드러누워 책을 읽고 놓친 영화를 보는 곳이다.

조물락조물락 내가 만든 음식들과 내 가족의 상긋하고 콤콤한 냄새가 벽지마다 서랍장 구석마다 배여 나의 집의 냄새를 완성한다.

열세 명의 건축가는 이 책에서 자기 사는 집을 보여주되 전망 좋은 곳, 깨끗하게 청소된 곳,
자신의 안목과 독특한 취미를 자랑하는 정도까지만 자신의 집들을 공개했다.
좀 인색한 듯하게  보여주는 전망과 인테리어를 흘깃대는 재미도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자기 사는
집을 통하여 13인의 건축가의 철학의 일단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 제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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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걸레질을 하는 동안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 깨달음의 노래, 이현주 시집
이아무개 (이현주) 지음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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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기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이라는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내놓는 저의 시들은-이런 걸 시라고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제가 저를 찾아 떠난 길에서 보고 들은 대로 옮겨본 것입니다. 그러니 이건 제가 쓴 것이 아닙니다.”

이현주(이 아무개)님에게 있어 시는 “깨달음”이다. 실제로 그는 그의 글에 ‘깨달음의 노래’라는 이름을 붙인다. 자신이 무엇을 깨달았다고 해서 붙이는 이름이 아니라 깨달음이라는 언덕에 닿고 싶은 나그네의 노래라는 뜻이다. 그에게 있어 시는 곧 그 그러한 열망이다. 누가 현대의 시어를 화려한 시의 시대라고 했던가. 방법론의 아나키즘이 아니라 감동의 여운이 없는, 실험도 진보도 없는 이상한 시대. 과도기라고 부르기에는 방종적인 자유의 허용이 많은 시들이 골목마다 돌아다닌다. 자극적인 단어, 또는 서정성을 잔뜩 품고 있는 프리마향. 내면적 갈등을 형식의 연속감 속에서 표현한 것이 시의 역사라면 현대는 시의 풍년이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큰 종처럼 울림이 남아있는 시가 적다는 것은, 시어를 온전하게 짓지 못하는 시 없는 시대라는 말이다. 대나무의 마디처럼 한 마디를 만들어 갈 때마다 텅 빈 공간을 형성하는 몸부림이 적다는 것일까. 요즘 시가 아프지 않음은 왜 일까. 시는 왜 아파야만 하는가. 그것은 버리고 씻겨내기 때문이다. 너덜해진 사유의 찌꺼기들을 여과수처럼 걸러내는 시. 시의 숙명이다.


유리창 걸레는 유리창보다 깨끗하고/마루 걸레는 마루보다 깨끗하고/똥 걸레는 똥보다 깨끗하니/똥을 만나면 똥보다 조금 더 깨끗하고/마루를 만나면 마루보다 조금 더 깨끗한/유리창을 만나면 유리창보다 조금 더 깨끗한/오, 걸레만큼만. 이 세상사는 동안에/걸레만큼만 깨끗했으면 좋겠네/(걸레만큼만 中)


어느 걸레인들 걸레로써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걸레의 더러움은 ‘먼지’ 또는 ‘때’라는 어둠의 잉여물을 통해서 생성된 것이다. 욕망의 찌꺼기들이 뭉쳐서 걸레에게 전이된다. 걸레의 전생은 얼굴을 닦는 깨끗한 수건이다. 그것의 노후한 몸으로 걸레로 신분이 변한다. 평가절하의 순환. 즉 걸레는 수건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의 몸으로 세상을 씻겨내는 세례자 요한으로 나아간다. 수건(얼굴은 몸의 1등급 부위다)=>유리창 걸레(세상을 보는 눈)=>마루 걸레(발바닥은 몸의 출발이자 마지막이다)=>똥 걸레(모든 것의 종합적 공간)을 거치는 동안 걸레는 나를 씻어낸다. 깨달음의 언덕에 얼마나 가까워졌을까.


자고 나면 마음이 아픈 날이 있다. 밤 새 내 마음에 상처가 생겼던 것인가. 마루 한 귀퉁이에 말없이 앉아 있는 걸레 한 조각. 저것이 나를 보고 있다.


남대문 시장/옷가게 앞/오늘도/옷을 사러/몰려들 오는구나, 저렇게/많은 옷들이/예배당 뾰족탑은/높기만 하고/(오늘도 中)


서로의 어둠을 부비지 못하느라 사람들은 밤에도 상처를 입는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옷들을 계속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옷은 불교식으로 해석하면 ‘집착’이다. 상처를 감쌀 그 무엇이 필요해서 사람들은 옷을 사러 남대문 시장으로 몰려온다. 나에게 옷을 가져다 달라. 나도 상처를 입은 하나의 걸레다. 예배당  높은 탑 위에 올라가면 상처 입은 세상 사람들이 보일까. 모두 나의 영혼의 혁명 동지들. 아찔하다. 걸레는 낮은 데로 임해야 하느니.

 

강물한테는 바다로 흐르는 이유가 없다/그냥 강이니까 흐르는 것일 뿐이고/그 끝에 바다가 있을 뿐인 것이다/내가 고무신을 신는 데는/그래서 아무 이유가 없다/(내가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이유 中)


뭐 이런 심심풀이 땅콩도 아닌 맹물 같은 시가 다 있냐. 이것인가, 저것인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할 판에 아무 이유가 없다니. 맹물도 이런 식이면 맛이 없다. 그런데 이현주님의 시는 대개 이런 식이다. 쿨한것도 아니고, 뜨거운 것도 아닌. 최승자식의 ‘마약’이 무서울 지경이다. 꼭 무언가 얄미운 여운이 남는다. 그의 시에는 무언가 ‘감춘’것이 많다. 걸레의 소망은 자신의 몸으로 세상을 닦아내고 나면 장렬히 버림받는 것이다. 그렇게 걸레처럼 되고 싶다하면서 거기에는 아무 이유가 없단다. 왜? 이유 없음의 이유를 말로 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드러냄의 질문은 그 앞에서 거두자. 깨달음의 언덕으로 향하는 길에 언어도단의 위험성에 빠질 수 있다. 우리가 표현 할 수 있는 언어라는 것이 사실, 몇 가지나 온전한가. 할 말은 숨어 있어서 드러나지 않지만 그의 시에서 이유가 없음과 깨달음의 소망은 결국 같은 동의어다. 그래서 그의 시어는 쉽지만 그가 쓰는 시의 방법과 태도도 쉽지만, 그 ‘숨김’을 어떡하든 캐 보려는 독자는 점점 더 골머리를 앓다가 지친다. 이쯤 되면 시인은 말한다.


종일, 바우를 풀어놓았다/땅에 코를 박고 자는 모습은/묶여 있을 때나 마찬가진데/그런데 달리 보인다/내가 가까이 가면 얼른 몸을 비켜/도망을 간다/묶이는 게/싫다는 말씀이시다/나도 묶는게 싫다/그런데 왜 묶어 놓는가?/내가 자유롭지 못해서다/인간이 아무리 개판을 쳐도/그냥 두시는 것은/하느님이 자유 그 자체이신 때문이다/(개와 자유)


다시 처음의 걸레로 돌아가서 걸레의 본성은 자유다. 무엇을 닦는지 모두 다 접수한다. 열린 코드. 그게 걸레의 만능이다. 그가 자유로운 만큼 그의 영역은 무한대다. 늙은 목회자 시인은 말한다. 그러므로 ‘내 시를 재단하려거든 너를 풀어놔라!’하고. 본질 앞에 춘삼월 물빛처럼 정직하고 싶다.  

 

비를 만나면 비가 되고/바위를 만나면 바위가 되고//....모든 것 만나 모든 것 되면서/그 어느 것에도 묶이지를 않는다//....민들레를 만나면 민들레 되고/나비를 만나면 나비가 되고/(하늘꽃 中)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걸레질을 한다. 닦이는 것은 방바닥인데 머리통이 시원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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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연잎차 > 성숙한 사랑은 첫눈에 반하지 않는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의 본질을 배신이라고 한다면 반박하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은 존재하되 대상은 영원할 수 없음에 반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사랑의 시작부터 결말까지 일련의 과정들을 일기를 쓰듯 자상하게 1인칭 화자의 입을 빌어 들려주고 있다.

화자는 비행기에서 처음 만난 클로이와의 사랑에 빠지게 되는, 어쩌면 단순한 이야기를 철학적으로 풀어가며 독자들에게 잊혀진 혹은 진행 중인 사랑을 환기시킨다.

가능한 모든 감정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사랑을 느꼈는지, 그리고 그 감정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그녀에게 갑자기 느끼게 되었는지, 그것은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그 과정의 내적 역학을 안다고 주장하고 싶지도 않으며, 살아온 경험이라는 전거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그 말의 타당성을 입증할 수도 없다. ...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구가 해결책을 발명한 것이다. - 본문 중에서

클로이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궁금한, 긴장된 과정들이 묘사되고, 마침내 클로이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 화자는 다른 종류의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클로이는 화자를 위해 일찍 일어나 근사한 아침 식사를 준비했는데, 화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잼이 없다고 괜히 심술을 부린다. 심술의 근거는 무엇일까?

완벽한 존재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약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그녀가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만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그녀의 취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바라던 대로 멋진 사람일 수 있을까?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낫다고 믿어야만 한다면, 상대가 나의 사랑에 보답을 할 때 잔인한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묻게 된다. "이 사람이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 본문 중에서

클로이가 자신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랐으면서도 막상 자신을 사랑하게 되자 클로이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편협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속성이 아닐까. 모든 다른 것과 다를 바 없이 사랑도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걷는다. 다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더 상처받고 덜 상처받는다.

결국 그런 과정들을 거치며 화자와 클로이도 이별을 경험하게 되는데, 표면적으로는 클로이의 배신에 의해서 명백해졌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책임은 둘에게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주어져 있다. 사랑은 자명하지 않지만, 화자는 성숙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숙한 사랑이야기에서는 첫눈에 반하는 일이 없다. 자신이 뛰어드는 물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나서야 그 물에 빠진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 정치, 예술, 과학, 그리고 저녁에 무얼 먹고 싶은지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한 뒤 두 사람은 서로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었는지 판단해야 한다. 이 판단은 상호 이해, 그리고 가정된 것이 아니라 확인된 유사성에 기초하여 이루어진다. 성숙한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상대를 진정으로 알 때에만 사랑이 자라날 기회가 주어진다. - 본문 중에서

사랑이라고 믿었던 애매하고 모호한 감정들은 지나고 보면 사랑을 흉내낸 것도, 사랑이 아니었던 것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성숙한 사랑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비로소 성숙한 사랑이 이르게 될 것이다.

알랭 드 보통 특유의 유머러스함이 배어 있는 이 소설은 신선했다. 채 익지 않은 사과의 신맛 같은 소설이라고 할까? 팍팍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연애소설을 만나기란 좀처럼 힘든 일인데, 그런 의미에서 반가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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