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걸레질을 하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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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 깨달음의 노래, 이현주 시집
이아무개 (이현주) 지음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여기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이라는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내놓는 저의 시들은-이런 걸 시라고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제가 저를 찾아 떠난 길에서 보고 들은 대로 옮겨본 것입니다. 그러니 이건 제가 쓴 것이 아닙니다.”
이현주(이 아무개)님에게 있어 시는 “깨달음”이다. 실제로 그는 그의 글에 ‘깨달음의 노래’라는 이름을 붙인다. 자신이 무엇을 깨달았다고 해서 붙이는 이름이 아니라 깨달음이라는 언덕에 닿고 싶은 나그네의 노래라는 뜻이다. 그에게 있어 시는 곧 그 그러한 열망이다. 누가 현대의 시어를 화려한 시의 시대라고 했던가. 방법론의 아나키즘이 아니라 감동의 여운이 없는, 실험도 진보도 없는 이상한 시대. 과도기라고 부르기에는 방종적인 자유의 허용이 많은 시들이 골목마다 돌아다닌다. 자극적인 단어, 또는 서정성을 잔뜩 품고 있는 프리마향. 내면적 갈등을 형식의 연속감 속에서 표현한 것이 시의 역사라면 현대는 시의 풍년이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큰 종처럼 울림이 남아있는 시가 적다는 것은, 시어를 온전하게 짓지 못하는 시 없는 시대라는 말이다. 대나무의 마디처럼 한 마디를 만들어 갈 때마다 텅 빈 공간을 형성하는 몸부림이 적다는 것일까. 요즘 시가 아프지 않음은 왜 일까. 시는 왜 아파야만 하는가. 그것은 버리고 씻겨내기 때문이다. 너덜해진 사유의 찌꺼기들을 여과수처럼 걸러내는 시. 시의 숙명이다.
유리창 걸레는 유리창보다 깨끗하고/마루 걸레는 마루보다 깨끗하고/똥 걸레는 똥보다 깨끗하니/똥을 만나면 똥보다 조금 더 깨끗하고/마루를 만나면 마루보다 조금 더 깨끗한/유리창을 만나면 유리창보다 조금 더 깨끗한/오, 걸레만큼만. 이 세상사는 동안에/걸레만큼만 깨끗했으면 좋겠네/(걸레만큼만 中)
어느 걸레인들 걸레로써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걸레의 더러움은 ‘먼지’ 또는 ‘때’라는 어둠의 잉여물을 통해서 생성된 것이다. 욕망의 찌꺼기들이 뭉쳐서 걸레에게 전이된다. 걸레의 전생은 얼굴을 닦는 깨끗한 수건이다. 그것의 노후한 몸으로 걸레로 신분이 변한다. 평가절하의 순환. 즉 걸레는 수건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의 몸으로 세상을 씻겨내는 세례자 요한으로 나아간다. 수건(얼굴은 몸의 1등급 부위다)=>유리창 걸레(세상을 보는 눈)=>마루 걸레(발바닥은 몸의 출발이자 마지막이다)=>똥 걸레(모든 것의 종합적 공간)을 거치는 동안 걸레는 나를 씻어낸다. 깨달음의 언덕에 얼마나 가까워졌을까.
자고 나면 마음이 아픈 날이 있다. 밤 새 내 마음에 상처가 생겼던 것인가. 마루 한 귀퉁이에 말없이 앉아 있는 걸레 한 조각. 저것이 나를 보고 있다.
남대문 시장/옷가게 앞/오늘도/옷을 사러/몰려들 오는구나, 저렇게/많은 옷들이/예배당 뾰족탑은/높기만 하고/(오늘도 中)
서로의 어둠을 부비지 못하느라 사람들은 밤에도 상처를 입는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옷들을 계속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옷은 불교식으로 해석하면 ‘집착’이다. 상처를 감쌀 그 무엇이 필요해서 사람들은 옷을 사러 남대문 시장으로 몰려온다. 나에게 옷을 가져다 달라. 나도 상처를 입은 하나의 걸레다. 예배당 높은 탑 위에 올라가면 상처 입은 세상 사람들이 보일까. 모두 나의 영혼의 혁명 동지들. 아찔하다. 걸레는 낮은 데로 임해야 하느니.
강물한테는 바다로 흐르는 이유가 없다/그냥 강이니까 흐르는 것일 뿐이고/그 끝에 바다가 있을 뿐인 것이다/내가 고무신을 신는 데는/그래서 아무 이유가 없다/(내가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이유 中)
뭐 이런 심심풀이 땅콩도 아닌 맹물 같은 시가 다 있냐. 이것인가, 저것인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할 판에 아무 이유가 없다니. 맹물도 이런 식이면 맛이 없다. 그런데 이현주님의 시는 대개 이런 식이다. 쿨한것도 아니고, 뜨거운 것도 아닌. 최승자식의 ‘마약’이 무서울 지경이다. 꼭 무언가 얄미운 여운이 남는다. 그의 시에는 무언가 ‘감춘’것이 많다. 걸레의 소망은 자신의 몸으로 세상을 닦아내고 나면 장렬히 버림받는 것이다. 그렇게 걸레처럼 되고 싶다하면서 거기에는 아무 이유가 없단다. 왜? 이유 없음의 이유를 말로 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드러냄의 질문은 그 앞에서 거두자. 깨달음의 언덕으로 향하는 길에 언어도단의 위험성에 빠질 수 있다. 우리가 표현 할 수 있는 언어라는 것이 사실, 몇 가지나 온전한가. 할 말은 숨어 있어서 드러나지 않지만 그의 시에서 이유가 없음과 깨달음의 소망은 결국 같은 동의어다. 그래서 그의 시어는 쉽지만 그가 쓰는 시의 방법과 태도도 쉽지만, 그 ‘숨김’을 어떡하든 캐 보려는 독자는 점점 더 골머리를 앓다가 지친다. 이쯤 되면 시인은 말한다.
종일, 바우를 풀어놓았다/땅에 코를 박고 자는 모습은/묶여 있을 때나 마찬가진데/그런데 달리 보인다/내가 가까이 가면 얼른 몸을 비켜/도망을 간다/묶이는 게/싫다는 말씀이시다/나도 묶는게 싫다/그런데 왜 묶어 놓는가?/내가 자유롭지 못해서다/인간이 아무리 개판을 쳐도/그냥 두시는 것은/하느님이 자유 그 자체이신 때문이다/(개와 자유)
다시 처음의 걸레로 돌아가서 걸레의 본성은 자유다. 무엇을 닦는지 모두 다 접수한다. 열린 코드. 그게 걸레의 만능이다. 그가 자유로운 만큼 그의 영역은 무한대다. 늙은 목회자 시인은 말한다. 그러므로 ‘내 시를 재단하려거든 너를 풀어놔라!’하고. 본질 앞에 춘삼월 물빛처럼 정직하고 싶다.
비를 만나면 비가 되고/바위를 만나면 바위가 되고//....모든 것 만나 모든 것 되면서/그 어느 것에도 묶이지를 않는다//....민들레를 만나면 민들레 되고/나비를 만나면 나비가 되고/(하늘꽃 中)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걸레질을 한다. 닦이는 것은 방바닥인데 머리통이 시원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