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달팽이 > 뼛속 글쓰기..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뼛'자와 '써라'자는 큼지막하게 크게 씌어져 있다. 무엇보다도 글쓰기에 대해 아직은 어떤 두려움과 짐을 가지고 있는 내게 '써라'라고 하는 절대명제 앞에 나는 어떤 숙제가 내게 남아 있음을 느낀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매력적인 작가이다. 그의 글쓰기는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다. 자신의 삶이요, 일상이다. 그리고 불교신자로서의 명상, 선이다.

우리는 어떤 글을 대할 때마다 저 글을 쓴 사람은 과연 글에 드러난 색깔대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고 묻게 된다. 그리고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을 대할 때에도 그 작품이 작가와 예술가의 삶의 기준과 이중적인 괴리를 보이게 되면 때로는 실망하기도 하고 그 작품에 대한 감동이 떨어지기도 한다. 골드버그는 그런 글쓰기를 하지 말라고 한다. 자신의 솔직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글, 자신의 일상의 마음에서 솟아난 글, 자신의 삶의 가치와 경험이 녹아난 글을 쓰라고 한다.

나의 글쓰기도 이젠 어느 정도 나의 패턴을 찾아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늘 어떤 책을 읽고 서평을 쓰려고 하면 내 머리속에서 한 번 정리되어지는 절차들이 때로는 글쓰기의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사실 그런 압박감을 가지기 싫어 읽은 모든 책을 서평으로 남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책이 주는 어떤 생각과 느낌들을 정리하고자 할 때에도 늘 그런 욕구와 더불어 글쓰기의 짐같은 것들이 덤으로 나에게 생기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 내 글쓰기 아닌 글쓰기(?)의 반성 속에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골드버그의 글쓰기는 이런 면에서 오랫동안 나의 목에 걸려 있는 가시를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는가에 대해 친절한 충고를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특별한 글쓰기란 알고보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 속의 가시를 제거하는 평범한 방법이었다.

이 책의 핵심적인 단어를 고르라면 나는 "내면적 관찰자, 편집자"를 고를 것이다. 뼛속까지 깊이 내려가서, 즉 자신의 본성과 근원 깊이 도달하여 쓰는 글쓰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자신의 마음 속 관찰자, 편집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실체는 에고이다. 늘 나의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욕구와 욕망이 나의 세계인식을 가로막고 있듯이, 세상을 마음으로 투명하게 담아내는 데 그것은 자꾸만 창에 끼는 성에와 같은 것이며, 따라서 뿌옇게 담아낸 세상은 뿌연 글쓰기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글쓰기는 선이요, 명상이다. 자신의 근원 깊숙히 가닿아 깨어 있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바로 보는 것, 그 마음에서 세상을 담아낸 글들이 만들어내는 글쓰기는 그 자체가 우주의 비밀을 간직한 홀로그램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글쓰기는 화두이다. 내가 어떤 곳에 어떤 사람을 마주하건, 어떤 대화를 하고 있건 그것은 나의 세상과 우주를 만들어내고 또한 그것은 글쓰기로 이어진다. 결국 글쓰기는 자신의 인생에 가장 절실한 문제인 깨달음으로 자신을 인도하게 되는 것이다.

자 이제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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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kleinsusun > 써라, 계속 써라, 쓰고 또 써라!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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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글쓰기 길잡이 책, 그러니까 <유혹하는 글쓰기> 정도로 생각하고  책을 주문했는데,
소포를 뜯어보고 나는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맨 앞장의 저자 소개.

" 지난 25년간 선명상과 접목한 그녀만의 독특한 글쓰기 노하우를 주제로 나탈리는 수많은 세미나를 열어왔다.....
작년가을(1999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는 '나탈리,그녀의 정신세계'란 제목으로 집필,글쓰기 워크숍,명상,그리고 최근에는 화가로서다양한 활약을 하고 있는 그녀의 하루를 동행 취재하기도 했다."

요즘 나의 화두는
'나를 바라보기' 일까?

의도하지 않아도,
찾지 않아도,
'명상', '자아 찾기'와 관련된 책과 사람들이 나타난다.

신.기.하.다.

이 책은 글쓰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찾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책이다.

나탈리는 '글의 쓰는 행위'가 얼마나 본질적인 것인지를 계속적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계속 쓰라'고 한다.

글쓰기의 테크닉 같은 건 이 책에 없다.
'글쓰기의 본질'과 나탈리가 불어 넣는 에너지만으로 가득하다.

글쓰기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사막에 쏟아지는 빗물 같은 책이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나의 마음을 가장 두드린 구절.

"작가가 쓰는 글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재료로 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소중한 존재들이며,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작가가 되려는 당신은 알고 있는가? 덧없이 지나 버리는 세상의 모든 순간과 사물들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주는 것,그것이 우리의 임무다. 만약 우리 인생의 작고 평범한 부분들이 중요하지 않다면,우리는 당장 원자폭탄에 의해 전멸 당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세부 그림은 기록으로 남아야 할 가치가 있다.이것이 바로 우리 작가들이 알고 있어야 할 진실이며 우리가 펜을 쥐고 자리에 앉는 이유이다."(p90)

이 책을 읽으면, 막 글을 쓰고 싶어진다.
쓸데 없는 걱정일랑 집어 치우고, 일단 쓰고 싶어진다.

좋은 글을 써야한다는,
나를 다스리는 글을 써야한다는,
모든 강박 관념을 버리고,
그냥 손 가는대로,
그냥 시간 가는대로,
빠.르.게.

"지금 당장 자리에 앉으라.지금 당신의 마음이 달려가는 곳이 있다면,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대로 적어 내려가라.
제발 어떤 기준에 의해 글을 조절하지는 말라.무엇이 다가오더라도 지금 이 수간의 것을 잡아라.손을 멈추지 말고 계속 쓰기만 하라."
(p37)

수선이의 도서관

www.kleinsu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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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겨울 >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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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말할 때는 오로지 말 속으로 들어가라, 걸을 때는 걷는 그 자체가 되어라, 죽을 때는 죽음이 되어라.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쓰기만 하라.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땐? 와우! 그랬다. 당장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 앉고 싶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쉬지 않고 움직여 장문의 글을 써야할 것 같았다. 그러나 웬걸.........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못해, 안 해, 귀찮아하고 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충격적 약발도 단 하루가 전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놀라움 그 자체라는 것은 변함없다. 누구라도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는 위대한 작가의 자질을 가진 잠재력의 소유자라는 행복한 착각에 빠져드니까. 어쩐지 뭔가가 허전하다 싶은 날, 책꽂이에서 뽑아 들고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곧 기분이 좋아지고 숨어있던 단어와 의미들이 두둥실 머릿속을 유영하리라. 그리고 부족하나마 완성된 한 토막의 에세이가 토해지리라.


일상은 때로 감각을 마비시킨다. 언제 어디서건 쓰라고 하지만 컴퓨터는커녕 펜과 종이도 여의치 못할 경우가 있다. 카페는커녕 어질러진 책상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마음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쓰고 싶다는 욕구가 채워질 리가 만무하다.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온 집엔 물론 컴퓨터도 있고, 펜, 종이는 물론 시간과 여유도 구비되어있다. 그거면 되는 것일까? 정작 제일 중요한 스쳐지나간 영감의 그림자도 희미한데? 어떤 천재는 장소 불문, 시간 불문하고 써내려갈지도 모르지만 보통의 인간에게 그것은 잔인한 요구이다. 겨우 한다는 것이 이러한 푸념뿐.


시의 온기에서는 발을 떼고 시에 ‘대하여’ 말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자. 시에 머물 수 있도록 가까이 다가가라. 작품 그 자체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이 시를 쓰고 배우는 방법이다.


시 속으로 들어가라니 정말로 쉽지 않은가. 아무나 가능하다는 듯, 못 들어가면 바보라는 듯 말한다. 어떤 수단을 쓰든 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닫으면 될 듯 하다. 그러나 문제는 시의 변덕이다. 때때로는 선뜻 열어주던 문도 제 기분이 나빠지면 결코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인 나탈리 골드버그는 글쓰기에 대한 강박증도 에너지라고 말한다. 회피하거나 게으름 피우는 대신 정면으로 문제와 맞서는 방법은 역시 글을 쓰는 것이다? 오, 간단한 치유법이다. 너무 쉬워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당신은 사라진다.  


도대체 어디로? 역시 수행의 부족인가. 나는 느리고 더듬거리며 주저앉아 하염없이 허공을 쳐다보며 시간을 흘러 보내기 일쑤다. 그리고 결국 길을 찾지 못하고 뒤돌아서지만 되돌아 나오는 법도 잊을 때가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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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글샘 > 내가 가장 뼛속 깊이 집중해서 읽은 책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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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마음공부에 대한 책과 틱낫한 스님의 책을 많이 읽었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세상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들의 모임이란 착각이 들었다. 전혀 다른 주제에서 접근했는데 시간이 조금 흐르다 보면, 한 군데서 만나게 되는 '데자부' 현상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나는 데자부(기시현상)을 전생으로까지 연관시키는 것은 좀 억지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데자부를 왼눈과 오른눈의 감각적 시차에서 오는 착시라는 의견에도 불만이 많다. 왠지 데자부는 알 수 없는 현상을 예지하는 초월적 현상으로 믿고 싶은 순진한 아이다.


이 책을 꽤 괜찮은 글쓰기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제목이 너무도 그럴싸하지 않은가. 글을 써 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글쓰기에 껍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글에서 껍질을 벗기려고 한다면 당장 온 몸에서 저항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임을...


요즘 입정하는 수행에 대해 책을 읽다 보니, 책을 읽을 때 다른 데로 튀어 버리려는 생각을 스스로 자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 책은 읽다 보면, '아, 나도 마구 써 갈기고 싶다. 스프링 노트를 사고 싶다. 아 나도 지금 당장 메모지에 이런저런 주제와 소재를 나열하고 시간을 내서 내 잘나오는 볼펜들로 주르르 써내려가고 싶다. 내게 가장 장애가 되는 생각은 무엇인가. 아, 내가 한 시간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어디 있나...' 이런 생각들이 마구 튀어 나와서 사실은 글 읽기에 지장을 초래하고 만다. 그러나, 나탈리가 선에 대해 이야기를 일깨우듯이, 책을 읽을 때는 온 몸이 책이 되어 글을 읽어야 한다. 글을 읽으면서 나탈리의 의견을 듣지 않고 내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은 <반칙>이다. 그런데, 나는 글읽다가 반칙을 너무도 자주 범해왔다. 아마도, 내가 읽은 책 중에서 반칙을 가장 적게 범한 책이 이 책일 것이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읽은 최초의 책. 스스로 고맙게 생각한다. 우선은 틱낫한 스님에게... 그리고 나탈리에게... 그리고 나에게...


이 책을 읽다가, 이 책의 리뷰를 분명히 읽은 적이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 그 리뷰어는 <파란여우>님이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들은 이 책에 대해서 어떻게 느꼈는지 이 책의 리뷰를 뒤적거려 보았는데 막상 파란여우님의 리뷰는 없었다. 아마 달팽이 님의 리뷰를 읽었던 적이 있나보다.


왜 파란여우님의 리뷰를 읽었으리라고 착각했을까... 오래 생각지도 않았지만, 아마도 파란여우님의 글이 솔직하고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혼자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아, 클라인 수선님의 리뷰도 있었다. 난 클라인 수선님의 문체도 좋아한다. 달팽이님의 글도 물론이다. 내가 알라딘에서 찾아가며 읽는 글이라면 이 세 분의 글이다. 다른 이들의 글과는 다른 뭔가를 이 세 분의 글에서는 느낄 수 있다.


우선 파란여우님의 글에서는 쫄깃쫄깃한 <여성 특유의 감성>을 느낄 수 있다. 간혹 페미니스트들은 남녀의 차이는 사회가 문화를 통해 강요한 것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으나,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녀는 근본적으로 많은 차이를 갖고 있다. 아이를 길러본 엄마들은 알 것이다. 사내아이들이 왜 공룡과 자동차와 로봇에 집착하는지, 계집아이들이 왜 소꿉놀이와 인형에 사죽을 못쓰는지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세상에 없다. 파란여우님의 글에서는 낭만적이면서도 시니컬하지 않은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그 감수성의 빛깔은 당연히 파란색이고, 달의 차고 이울어짐과도 같이 리듬을 타는 감수성이다. 알라딘의 매력이라면 이런 글들을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다 하겠다.


그리고 클라인 수선님의 글에서는 톡톡 튀는 <신세대의 개성>을 맛볼 수 있다. 신세대 신인류의 속성을 익명성, 심플함, 자유로움, 무책임... 등으로 기성 세대의 눈에서 부정적으로 바라본 측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클라인 수선님의 안목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톡톡 튀긴 하지만, 그 속에는 기성 세대의 닫힌 문화에 대한 저항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생각>에서 탄생한 이유있는 <자기 주장>이 돋보인다. 클라인 수선님의 글에서는 글로벌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멜랑콜리한 인간 관계와 비판적 사회 읽기를 느낄 수 있지만, 그 글의 문체는 ‘대자보체’를 벗어난 ‘간결한 만화체’라고나 할까. 클라인 수선님의 글은 핑크빛이나 옥색 띤 푸른 빛의 <파스텔톤>을 느끼게 하는 맛이 있다. 이 맛은 꽃이 피고 나뭇가지에서 싱그런 잎새를 피워내는 자연의 조화를 마음껏 음미하는 맛이기도 하고, 무더위에 지친 여름날 톡톡 튀는 청량음료를 주-욱 들이키는 시원함이기도 하다.


그리고 달팽이님의 글은 <명상>에 가까이 가기 위한 수행자의 자세가 성실하게 드러난 글이다. 간혹 선문답의 리플을 달고 있기도 한 님의 글들은 붕붕거리는 자동차 소리, 뿅뿅 삐약거리며 흥청망청 흐드러진 네온사인 밝힌 현대의 소음을 고요히 잠재우는 찻잔이 작아서 오히려 흐뭇한 한 잔의 <차> 맛이라고 할 수 있다. 목마른 길손에게 버들잎을 띄워주던 처자의 배려처럼, 따끈한 차는 후루룩 마실 수 없어서 오히려 갈증을 녹여줄 수 있지 않을까. 더 빠르고 더 높고 더 멀리 가려는 근대 올림픽의 정신이 가져온 <인격의 피폐>를 달팽이처럼 속도감을 잊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나름대로 부지런해 글쓰시는 분들의 글을 내 멋대로 재단한 것에 대해서 혹시 불평이 있으실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이 글을 그냥 컴퓨터 자판이 가는 대로, 오타만 정정해 가면서 일사천리로 적어나가고 있다. 퇴고 없는 글쓰기도 나탈리는 용서해 주지 않았던가.


십사년 전에 내 나이 스물 여섯.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을 가르칠 때, 글재주가 뛰어난 여학생이 있었다. 지금은 글쓰는 일과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아이의(아, 이제 아이가 아니라 스물 여덟 된 처자겠구나)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이 책으로 싹틔워주고픈 생각이 일 정도로 이 책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책을 읽고 그 아이가 <본능에 충실하게> 스프링 노트를 메워갈 수 있다면 십사년 전 <소설 창작반> 선생님으로써 덜 미안할 수 있겠다.


그간 내가 적은 글들이 왜 <독후감>이었나를 이제야 알았다. 나는 나를 발가벗길 수 없었던 것이다. 스프링 노트에 나를 벗기고 적어나가기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지금도 나는 스프링 노트를 장만하게 될지 미지수다. 매끄러운 펜의 촉감보다는 이제 타자가 훨씬 자유자재하니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앞으로는 나를 조금씩 적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은 느낄 수 있다. 내가 적지 않았다고 해서 내 마음 속에 그 생각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 마음 속에 끝없이 떠오르고, 차가운 겨울비가 추적거리고 내리듯이 나를 적실 생각들이라면 내가 적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으리라. 아니, 오히려 적어내는 것이 나를 빨리 해방시키는 길이라고도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작문을 시킬 때, 내가 서투른 작품을 하나 써서 보여주면 아이들이 좋아한다. 내가 이적지 쓴 소설(?)들은 모두 아이들에게 읽히기 위한 것들이었다. 소설창작반 지도교사 시절... 그리고, 문학 선생으로써, 어려운 시를 이야기 속에 녹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들... 가끔 돌아 보면 웃음나는 글들이 되돌아 생각하면 <잘 가르치고 싶다는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라 생각한다.


책상 앞에 꽂아 두고 가끔 아무 페이지나 읽을 수 있는 책이 몇 권 없다. 개인적으로 윤오영 선생님의 수필문학입문, 곶감과 수필, 도종환 님의 시집 정도를 자주 펼쳐 보는데 교생이나 오랜만에 찾아온 제자를 그저 돌려보내기 아쉬운 때면 선뜻 집어 주어버려서 기실, 내 책꽂이엔 일년 가야 한 번 펴볼까 말까한 책들만 수두룩하다. 아, 이제 이 책은 그저 꽂아두어야겠다. 그리고 주고 나도 다시 살 것 같다. 간만에 별 다섯을 헤아리기도 싫은 멋진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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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유관순 > 절절한 글쓰기를 한다는 것은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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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다시 불어온 논술바람과 함께 글쓰기 지도법에 관한 책들이 물밀 듯이 몰려온다. 그런데 글쓰기에 관한 것들은 대부분 ‘그 책’이 ‘그 책’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가끔 현란한 제목들에 유혹되곤 한다. 이 번에 읽게 된 책도 사실은 남편이 건내준 도서목록에서 순전히 제목에 맘이 뺐겨 읽게 된 책이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제목만으로도 맘이 짠하다.

 역시나 익히 알고 있는 사실들의 나열이었다. 그래서 책읽기에 소요되는 시간은 정말 짧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책이 별로라고 말하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쌈빡한 그 무엇을 바란 내가 문제였을 뿐, 평소 글쓰기에 대한 부담으로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유용할 듯 보인다. 내게도 평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놓치고 가는 부분들을 다시 기억해낼 수 있게 해 준 유용한 책이다.


 단, 누가 나에게 “글쓰기는 왜 해야 하나요?” 하고 묻는 경우라면 이 책을 권하진 않을 듯하다. 작가는  “글을 쓰는 것은 외로운 세상을 자기 혼자 헤쳐 나가기 때문이며, 그 누구도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 지를 관통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만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어떤 이유로 인해 글쓰기의 필요성이 절박해진 사람들을 위한 강연을 쭉 해 왔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이 책을 기획했다. 그래서 그 절박함에 몰린 사람이라면 이 책을 보아도 좋을 듯하다. 그래야 그녀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말이 귀에 들어올 테니 말이다.


  그녀의 글쓰기 방법론은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자신이 경험한 인생에 대한 확신을 키워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지만이 자기 마음의 본질적인 외침을 자신있게 적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쉬운 방법론인가? 아니 얼마나 어려운 방법론인가? “자신이 경험한 인생에 대한 확신을 키워 나가야” 한다는 전제는 가치관의 문제이며, 삶을 기반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사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디지털에서 유비쿼터스 시대로 진입하는 지금, 하루 하루 배우지 않으면 ‘현재’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요즘 60대 노인들 사이에서도 “너 언제 어른 될래?”라고 농담을 나눈다는 말을 들었다. 나이 삼 십 쯤이면 어른이라 취급받던 시대는 끝났기에 죽을 때까지 매일매일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우리들이 잠시라도 게으름을 피우게되면 자신의 발은 곧장 공중부양을 하고말 것이다. 특히 어제의 ‘확신’이 오늘의 ‘불신’이 되고, 내일의 ‘절망’이 되고 만 시대를 건너가는 우리들에겐 이것은 어찌보면 참으로 어려운 요구이기도 하다.

 

  ‘나탈리’가 제안하는 글쓰기 기술들은 이렇게 요약 가능하다.

 

  “마음을 열어 두어야 한다”,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이 배울 수 있다”, “세부적인 묘사는 글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준다. 그래서 주변의 모든 것들에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라”, “잘 쓰고 싶다면 잘 들어라”, “현상을 넘어 사물 속을 파고 들라”, “글을 쓰면서 질문을 만들어라”, “글쓰기는 지독히 외로운 것, 고독을 이용하라”, “사무라이가 되어 써라(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라는 듯)” 등등

 

 위의 것들은 그녀가 오랜 글쓰기 지도를 통해 깨달은 것들이다. 그녀가 알려주는 제안들 가운데 특히나 내 맘을 자극한 것은, 세부적인 묘사는 모든 순간에 이름을 붙여주고 기억해주는 일이기에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라는 메시지였다.

 

 바쁜 나의  시간은 언제나 年年年 흘러가고 일상은 아주 자극적인 사건만이 남겨질 뿐이다. 애써 잊고 가는 이름들은 또 얼마나 많으며, 모든 일상에 뻗혀 있는 나의 감수성은 오히려 ‘하나’의 ‘한 순간’에 빠져 들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어떤 기회에 난생 처음으로 철학관에서 사주를 보았었다. 그런데 그때 이런 말을 들었었다. "자네는 감성과 오감이 바깥을 향해 놀라울 만큼 뻗어 있고, 언어에 자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써내진 못하겠어. 그 이유는 죽을 때까지 ‘바쁠’ 팔자야“   그 당시엔  ‘쳇, 이건 무슨 지랄같은 말인가’ 싶었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현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주’를 무시할 일도 아닌 듯 하다.  

 

 모든 사물의 이름을 배우고, 고유성을 만들어 주며, 이야기 목록을 만들고, 사물 속을 파고드는 것이 나이 들어 갈수록 어려운 과제로 와 닿는다. 그것도 부족하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으로 자리잡는 건 어찌할 수가 없다. 

 

 글쓰기는 벌거벗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과정을 통해 자유를 느껴보라고 작가는 권한다. 단,  절절함이 넘쳐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자유로운 글쓰기란 자신만의 솔직한 목소리를 찾아내는 길이며, 궁극적으로 인생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작가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진정한 연민을 키워나가는 끊임없는 훈련”이 바로 글쓰기라고 말한다.

 

  그런데 슈퍼우먼의 옷을 걸치고, 가랑이 찢어지는 줄 모르고 살고 있는 지금의 내게 그녀의 가르침은 버거운 현실 앞에 나를 세운다. 그래서 어쩌면 내게 가장 현실적인 답은 “으악~”하고 당장 비명을 지르며 나의 짐을 내 던져 버리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 순간, 나의 일상은 내 안에 깃들 것이며, 나의 글쓰기는 다시 시작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물론, 그때의 글쓰기가 쭉정이인 지 알맹이인 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시간적인 여유는 찾되  순간순간 내 곁에 서 있는  아릿한 고독감과 외로움은 사라져 버릴 수도 있기에 말이다.  아무튼 나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글을 쓰는 일 뿐만 아니라 “뼛속까지 내려가서” 나를 느끼며 늘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으악" 소리를 뱉어내지 못하고, 내 안으로만 삼키며 사는 가보다. 그것도 글이 되어야 하는데... 바쁜 팔자라니 ... 사실 그것은 속보이는 나의 변명일 뿐이다. "내면의 본질적인 외침에 기울이지"않은 나의 불성실함을 눈가리는 변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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