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글샘 > 내가 가장 뼛속 깊이 집중해서 읽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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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마음공부에 대한 책과 틱낫한 스님의 책을 많이 읽었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세상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들의 모임이란 착각이 들었다. 전혀 다른 주제에서 접근했는데 시간이 조금 흐르다 보면, 한 군데서 만나게 되는 '데자부' 현상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나는 데자부(기시현상)을 전생으로까지 연관시키는 것은 좀 억지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데자부를 왼눈과 오른눈의 감각적 시차에서 오는 착시라는 의견에도 불만이 많다. 왠지 데자부는 알 수 없는 현상을 예지하는 초월적 현상으로 믿고 싶은 순진한 아이다.
이 책을 꽤 괜찮은 글쓰기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제목이 너무도 그럴싸하지 않은가. 글을 써 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글쓰기에 껍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글에서 껍질을 벗기려고 한다면 당장 온 몸에서 저항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임을...
요즘 입정하는 수행에 대해 책을 읽다 보니, 책을 읽을 때 다른 데로 튀어 버리려는 생각을 스스로 자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 책은 읽다 보면, '아, 나도 마구 써 갈기고 싶다. 스프링 노트를 사고 싶다. 아 나도 지금 당장 메모지에 이런저런 주제와 소재를 나열하고 시간을 내서 내 잘나오는 볼펜들로 주르르 써내려가고 싶다. 내게 가장 장애가 되는 생각은 무엇인가. 아, 내가 한 시간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어디 있나...' 이런 생각들이 마구 튀어 나와서 사실은 글 읽기에 지장을 초래하고 만다. 그러나, 나탈리가 선에 대해 이야기를 일깨우듯이, 책을 읽을 때는 온 몸이 책이 되어 글을 읽어야 한다. 글을 읽으면서 나탈리의 의견을 듣지 않고 내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은 <반칙>이다. 그런데, 나는 글읽다가 반칙을 너무도 자주 범해왔다. 아마도, 내가 읽은 책 중에서 반칙을 가장 적게 범한 책이 이 책일 것이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읽은 최초의 책. 스스로 고맙게 생각한다. 우선은 틱낫한 스님에게... 그리고 나탈리에게... 그리고 나에게...
이 책을 읽다가, 이 책의 리뷰를 분명히 읽은 적이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 그 리뷰어는 <파란여우>님이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들은 이 책에 대해서 어떻게 느꼈는지 이 책의 리뷰를 뒤적거려 보았는데 막상 파란여우님의 리뷰는 없었다. 아마 달팽이 님의 리뷰를 읽었던 적이 있나보다.
왜 파란여우님의 리뷰를 읽었으리라고 착각했을까... 오래 생각지도 않았지만, 아마도 파란여우님의 글이 솔직하고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혼자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아, 클라인 수선님의 리뷰도 있었다. 난 클라인 수선님의 문체도 좋아한다. 달팽이님의 글도 물론이다. 내가 알라딘에서 찾아가며 읽는 글이라면 이 세 분의 글이다. 다른 이들의 글과는 다른 뭔가를 이 세 분의 글에서는 느낄 수 있다.
우선 파란여우님의 글에서는 쫄깃쫄깃한 <여성 특유의 감성>을 느낄 수 있다. 간혹 페미니스트들은 남녀의 차이는 사회가 문화를 통해 강요한 것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으나,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녀는 근본적으로 많은 차이를 갖고 있다. 아이를 길러본 엄마들은 알 것이다. 사내아이들이 왜 공룡과 자동차와 로봇에 집착하는지, 계집아이들이 왜 소꿉놀이와 인형에 사죽을 못쓰는지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세상에 없다. 파란여우님의 글에서는 낭만적이면서도 시니컬하지 않은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그 감수성의 빛깔은 당연히 파란색이고, 달의 차고 이울어짐과도 같이 리듬을 타는 감수성이다. 알라딘의 매력이라면 이런 글들을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다 하겠다.
그리고 클라인 수선님의 글에서는 톡톡 튀는 <신세대의 개성>을 맛볼 수 있다. 신세대 신인류의 속성을 익명성, 심플함, 자유로움, 무책임... 등으로 기성 세대의 눈에서 부정적으로 바라본 측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클라인 수선님의 안목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톡톡 튀긴 하지만, 그 속에는 기성 세대의 닫힌 문화에 대한 저항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생각>에서 탄생한 이유있는 <자기 주장>이 돋보인다. 클라인 수선님의 글에서는 글로벌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멜랑콜리한 인간 관계와 비판적 사회 읽기를 느낄 수 있지만, 그 글의 문체는 ‘대자보체’를 벗어난 ‘간결한 만화체’라고나 할까. 클라인 수선님의 글은 핑크빛이나 옥색 띤 푸른 빛의 <파스텔톤>을 느끼게 하는 맛이 있다. 이 맛은 꽃이 피고 나뭇가지에서 싱그런 잎새를 피워내는 자연의 조화를 마음껏 음미하는 맛이기도 하고, 무더위에 지친 여름날 톡톡 튀는 청량음료를 주-욱 들이키는 시원함이기도 하다.
그리고 달팽이님의 글은 <명상>에 가까이 가기 위한 수행자의 자세가 성실하게 드러난 글이다. 간혹 선문답의 리플을 달고 있기도 한 님의 글들은 붕붕거리는 자동차 소리, 뿅뿅 삐약거리며 흥청망청 흐드러진 네온사인 밝힌 현대의 소음을 고요히 잠재우는 찻잔이 작아서 오히려 흐뭇한 한 잔의 <차> 맛이라고 할 수 있다. 목마른 길손에게 버들잎을 띄워주던 처자의 배려처럼, 따끈한 차는 후루룩 마실 수 없어서 오히려 갈증을 녹여줄 수 있지 않을까. 더 빠르고 더 높고 더 멀리 가려는 근대 올림픽의 정신이 가져온 <인격의 피폐>를 달팽이처럼 속도감을 잊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나름대로 부지런해 글쓰시는 분들의 글을 내 멋대로 재단한 것에 대해서 혹시 불평이 있으실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이 글을 그냥 컴퓨터 자판이 가는 대로, 오타만 정정해 가면서 일사천리로 적어나가고 있다. 퇴고 없는 글쓰기도 나탈리는 용서해 주지 않았던가.
십사년 전에 내 나이 스물 여섯.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을 가르칠 때, 글재주가 뛰어난 여학생이 있었다. 지금은 글쓰는 일과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아이의(아, 이제 아이가 아니라 스물 여덟 된 처자겠구나)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이 책으로 싹틔워주고픈 생각이 일 정도로 이 책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책을 읽고 그 아이가 <본능에 충실하게> 스프링 노트를 메워갈 수 있다면 십사년 전 <소설 창작반> 선생님으로써 덜 미안할 수 있겠다.
그간 내가 적은 글들이 왜 <독후감>이었나를 이제야 알았다. 나는 나를 발가벗길 수 없었던 것이다. 스프링 노트에 나를 벗기고 적어나가기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지금도 나는 스프링 노트를 장만하게 될지 미지수다. 매끄러운 펜의 촉감보다는 이제 타자가 훨씬 자유자재하니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앞으로는 나를 조금씩 적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은 느낄 수 있다. 내가 적지 않았다고 해서 내 마음 속에 그 생각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 마음 속에 끝없이 떠오르고, 차가운 겨울비가 추적거리고 내리듯이 나를 적실 생각들이라면 내가 적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으리라. 아니, 오히려 적어내는 것이 나를 빨리 해방시키는 길이라고도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작문을 시킬 때, 내가 서투른 작품을 하나 써서 보여주면 아이들이 좋아한다. 내가 이적지 쓴 소설(?)들은 모두 아이들에게 읽히기 위한 것들이었다. 소설창작반 지도교사 시절... 그리고, 문학 선생으로써, 어려운 시를 이야기 속에 녹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들... 가끔 돌아 보면 웃음나는 글들이 되돌아 생각하면 <잘 가르치고 싶다는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라 생각한다.
책상 앞에 꽂아 두고 가끔 아무 페이지나 읽을 수 있는 책이 몇 권 없다. 개인적으로 윤오영 선생님의 수필문학입문, 곶감과 수필, 도종환 님의 시집 정도를 자주 펼쳐 보는데 교생이나 오랜만에 찾아온 제자를 그저 돌려보내기 아쉬운 때면 선뜻 집어 주어버려서 기실, 내 책꽂이엔 일년 가야 한 번 펴볼까 말까한 책들만 수두룩하다. 아, 이제 이 책은 그저 꽂아두어야겠다. 그리고 주고 나도 다시 살 것 같다. 간만에 별 다섯을 헤아리기도 싫은 멋진 책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