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금동 > 누구에게나 슬픔은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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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공지영-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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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슬픔은 있다. 이것은 자신이 남에게 줄 수 없는 제산이다.
모든 것을 남에게 줄 수 는 있지만 자신만은 남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소유한 비극이 있다.
그 비극은 영원히 자신이 소유해야 할 상흔이다.
눈물의 강, 슬픔의 강, 통곡의 강,
슬픔은 재산과는 달리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 분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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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삼중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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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언니가 마지막에 결국 눈물을 떨구었다며, 권해준 책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공지영님의 소설을 그리 좋아한 편은 아닌지라 빌려온 책을 책상 위에 고스란히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지루했던 시간을 꾸역꾸역 채우려 집어들게 되었다. 아주 심심하고 사소한 이유였다. 그러나 지루한 시간을 채우려고만 사용되는 글은 없다. 지루한 시간을 뛰어넘어 사소함을 뛰어넘어 일상으로 다가온 커다란 문제를 내게 안겨주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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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말하자면, 나에 관해 굳이 말하자면, 나는 엉망이었던 사람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았고,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사랑이라든가 우정이라든가 하는 이름으로 내 생 속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나만을 위해 존재하다가 심지어 나 자신만을 위해 죽고자 했다. 나는 쾌락의 신도였다. 자신을 잃고 감각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나는 언제나 내 견고한 가족의 성곽으로 발길을 내지르곤 했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밤새 춤을 추었다. 그 사소한 일상이 실은 나 자신을 차근차근 파괴해가고 있다는 것을 몰랐고 설사 알았다 해도 멈추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온 은하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야만 성이 차던 존재, 술에 취한 날이면, 닫힌 문들을 발길로 차면서 나는 진실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발음해본 적은 없지만 그때 누군가 내 심장에 청진기를 가져다 대었다면 아마도 이런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왜 태양은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 거야? 왜 니들은 내가 외로울 때만 내 곁에 없는 거야? 왜 내가 미워하는 놈들은 승승장구를 하는 거지? 왜 이 세상은 내 약을 바싹바싹 올리면서 나의 행복에 조금도 협조하지 않는 거냐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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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강의시간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좋아하는 책을 한 권이상씩 제목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뭐라 대답했던가. 나는 그저 아직은, 이란 말로 얼머버렸더랬다. 아직은, 이란 대답을 한 나를 포함한 몇 명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한 권씩 제목을 이야기 하고 작가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나는 그저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은 상당히 부끄러웠는데, 그래도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자부했던 나였는데 나보다 책을 읽지 않는 아이보다 마음 속에 넣어 둘 글 하나 간직하지 못하고 글을 읽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 선생님은 아직 인생에서 좋아하는 책을 정해두지는 말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모든 글에는 각자의 장점과 매력이 있으니 딱 하나를 정해두고 그것에 얽매이지 말고 여러 글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라고 하신 말이었다.
꼭 선생님이 하신 말 때문만이 아니라 난 특정하게 좋아하는 책이 없다. 내가 지루하게 읽은 책이나 재미없게 읽은 책이나 아주 좋아하는 책에도 각자의 글에 매력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는 조금 편협할 정도로 감성적이기 때문에 주인공이나 저자의 생각이 나와 공감대만 형성된다면 무조건 그 글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었다. 나에게『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문유정이 그러했다. 상황이 아닌 마음이 꽤 나와 닮은 그녀에게 나는 그만 눈을 돌릴 수 없게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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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불어가는 바람 소리가 휘익 하고 들리더니 창문이 덜컹거렸다. 바람이 거세지는 모양이었다. 창밖의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사람도 나무처럼 일 년에 한 번씩 죽음 같은 긴 잠을 자다가 깨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깨어나 연둣빛 새 이파리와 분홍빛 꽃들을 피우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았다. (중략)
전화기 너머에서 가늘게 떨리던 여자의 목소리, 뜻밖에도 마주 앉아 커피잔을 잡는 손이 아주 거칠었다. 고운 얼굴이었는데 그 얼굴하고 손이 마치 두 주인을 섬기는 지체처럼 너무 달랐다. 갸름한 얼굴의 윤곽과 솔밋한 눈은 부드러웠지만 전체적으로 창백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사람은 제 모든 것이었어요…… 여자가 입을 열자마다 그렇게 말했을 때 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더구나 여자가 남자를 두고 내 모든 것이 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말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저토록 단호하게 뱉을 수 있는지. 나는, 이게 옳아요, 라는 확신과 신념과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에게 언제나 그랬듯 이 아마도 막연하게 그녀에게 질투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생을 두고, 설사 그것이 유치라고 어리석으며 심지어 우스꽝스러운 결말로 끝난다고 해도, 그렇게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대상을 나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는 힘겨워 보였지만 눈물을 보이지 않았는데, 아직은 이 상태를 다는 인정 못하겠다는 어리석은 희망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 희망이 실은 정말로 어리석은 것이어서 낙담하는 것보다 더 형편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저 여자는 아마 죽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느꼈다. 그렇게 비장하고 위태로운 빛이 그녀에게 있었다는 이야기다.
신기하게도 기억은 그 당시에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보게 해준다. 무대 구석에서 작은 제스처를 하는 엑스트라에게 비추어지는 핀 라이트처럼, 기억은 우리에게 그 순간을 다시 삵 해줄 뿐 아니라 그 순간에 다른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가치는 때로 우리가 우리의 기억이라고 믿었던 것과 모순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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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사형수에 대한 이야기다. 공지영님은 이것을 단순한 소재로써 사용하여 주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소재를 중심으로 이끌어 낸 것 같다. 우리가 알 수 없었던 그 부분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내리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들이 '죄를 지어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낙인 찍은 사형수도 결국 한 사람이었다는 결론이라고나 할까. 하나님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며 주제를 이끌어 낸다.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문유정과 환경에 상처받아 죄를 짓게 되는 한 사형수의 만남으로 하여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것은 이성간의 미묘한 호르몬의 차이가 아니라 정신의 사랑이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책에서는 어느정도 종교의 손을 이끔으로 내비치기도 했지만 결국은 사람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것은 사람뿐이란 것이다. 상처입는 것도 사람. 다정하게 안아줄 수 있는 것도 결국 사람의 사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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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당신이 편지에다 그랬잖아요. 이게 마지막 봄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에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봄날에 지당도사들이 하는, 당연하고 지당한 이야기 같은 거 하지 않고 싶어요. 시간이 없잖아요. 나는 이왕 우리가 이렇게 만난 거, 당신하고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일 년에 봄이라는 계절이 한 번뿐이라는 거 당신 때문에 처음 알았어요. 이 봄을 다시 보기 위해 일 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처음 깨닫게 되었어요. 그러자 당신이 말한 대로 이 봄이 첫 번째이자 마지막 봄처럼 내게도 느껴졌다는 거예요. 한 계절을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죠. 그렇게 늘 오는 계절이, 혹여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계절이 될 수 있다는 거, 그래서 하루하루가 목이 타는 것처럼 애타게 지나간다는 거…… 나문에 물이 오르는 그 찰나도, 진노랑꽃 무더기로 피어서 흔해빠진 그 개나리에게도, 다신은 그 모든 것이 처음 대면하는 기분이고 또 대면하자마자 안녕, 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거 …… 그래서 이 세상에 널려 있는 수많은 사물들이 널려 있는 게 아니라, 가슴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박혀올지도 모른다는 거…… 그거 당신 때문에 알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신 때9문에, 내가 눅나가를 죽이고 싶었는데, 그게 나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중략)
왜 내가 그 이야기를 그 앞에서 꺼냈는지 나는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때 나는 적어도 동요하지 않았고 담담했다. 적어도 그의 태도에서 그의 온 존재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날이어서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내 생애에서 나의 말에 온 존재를 모아 귀 기울여주었던 사람을 내가 가진 적이 있었을까.
사랑했고 믿었던 사람들이어서 더 그랬다. 그런데 큰오빠는 몰랐다고 한다. 그랬을 것이다. 나도 몰랐으니까. 셋째올케를 비웃었으니까. 아무리 돈 많이 못 버는 교수 부인이라지만 옷 입고 다니는 게 그게 뭐니, 어마가 셋째올케를 비웃을 때, 나도 그랬으니까. 큰오빠가 그동안 어떤 아픔을 가졌는지, 둘째오빠와 셋째오빠는 어떤지, 나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 쭉 그럴 테니까. 구치소에 들어갔을 때의 그 놀라움…… 그 사람들 가난해서, 그렇게 거기 들어와 영치금 천 원도 못 가지고 사는지 몰랐으니까…… 사람을 셋이나 죽이고 강간한 파렴치범인 윤수가 그렇게 맑게 웃고, 그렇게 아프게 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몰랐으니까. 몰랐으면 하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말대로 우리는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는, ꡐ저들ꡑ이고, 심지어 우리가ꡐ저들ꡑ인지조차 모르는 것이니까.
그러고 보니 그녀가 신문에 나든 그렇지 않든 나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알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외삼촌이 슬픈 어조로 내게 충고했듯이 깨달으려면 아파야 하는데, 그게 남이든 자기 자신이든 아프려면 바라봐야 하고, 느껴야 하고, 이해해야 했다. 그러고 보면 깨달음이 바탕이 되는 진정한 삶은 연민 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연민은 이해 없이 존재하지 않고, 이해는 관심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관심이다. 정말 몰랐다고, 말한 큰오빠는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를 업어주고,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언제나 나를 걱정한다고 말했지만, 내가 왜 그렇게 변해 가는지 그는 모르겠다, 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모른다, 라는 말은 어쩌면 면죄의 말이 아니라, 사랑의 반대말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정의의 반대말이기도 하고 연민의 반대말이기도 하고 이해의 반대말이기도 하며 인간들이 서로 가져야 할 모든 진정한 연대의식의 반대말이기도 한 것이다.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고모는 정말 꺼져가는 심지 같아 보였다. 오래도록 생각했던 것, 고모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났다. 하지만 이제 한 가지는 안다. 그래도 산다는 것, 죽을 것 같지만, 죽을 것 같다, 이건 사는 게 아니야, 라고 되뇌는 것도 삶이라는 것을. 마치, 더워 죽겠고 배고파 죽겠다는 것이 삶이듯이,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삶이라는 듯이, 그래서 나는 이제 죽고 싶다고 말하는 대신 잘 살고 싶다고 바꾸어 말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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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작가 공지영님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작가 황석영님이 말한 것과 같이 그녀가 너무 글을 쉽게 쓰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 글의 장점이자 단정이었는데 쉽게 읽혀서 좋지만 쉽게 잊혀질 수 있다는 말 또한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다루는 주제들은 늘 쉽지만은 않은 것들이었는데 그것은 늘 그녀가 늘 끊임없이 자신과 대치하여 얻어낸 것들이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그리고 나. 그것은 "존재"라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가치. 그리고 스스로 얻을 수 있는 행복. 그녀는 그것에 대해서 여전히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쉽게 읽히는 글에서 너무나도 쉽게 눈시울을 젖셨다. 한 번이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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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와의 만남을 마치고 나는 구치소 복도를 걸어나왔다. 구치소 앞뜰은, 저쪽에 마지못해 장미가 몇 송이 피어있긴 했지만 여유가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그런 황금빛 밀밭이 아니었다. 이주임이 내가 싸가지고 간 도시락 가방을 들고 나를 따라 걸었다. 구치소 저편에 일찍 시든 나뭇잎들 몇이 벌서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빛깔은 아직 푸르렀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파스스 파스스 하는 소리가 가을이 오는 것을 알린다고, 오늘 만남에서 윤수는 말했다. 보이는 것이 같아도, 소리가 달라요. 똑같은 초록이라도 봄 나무하고 여름나무하고 가을 나무 소리가 다 달라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가봐요.
"울지 말아라. 우리 이쁜 유정이. 네가 이겨냈을 때, 처음 구치소를 따라왔을 때, 윤수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때, 네가 윤수를 살려보려고 엄마에게 찾아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얼마나 네가 이뻤는지…… 고모가 실은 그전부터 가슴 졸이면서 널 몰래 지켜보고 있었는데…… 너는 뜨거운 사람이야. 뜨거운 사람은 더 많이 아프다. 하지만 그걸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
인간은 누구나 공통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며 실은, 다정한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한다는 것, 그 이외의 것은 모두 분노로 뒤틀린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 그게 진짜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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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가족들과 즐겁게 저녁을 먹는 것.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들? 친구와 싸우는 시간? 어쩌면 작가가 말하는 행복한 시간은 지정된 어느 시간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시간일 것이다. 행복한 시간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모든 존재의 시간들. 그 시간들에 대해서 생명의 이유와 삶의 이유로써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기록들 일 것이다.
통속적인 소재와 글쓰기가 때문에 드라마적 요소를 소설적 요소보다 더 많이 가지는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도 이 글의 한 특징이면 특징이랄까. 우리의 모든 삶이 소설과 드라마처럼 아이러니하고 매 한면이 초점화되어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매 순간을 열심히 살자. 사랑하며 살자. 이것이 작가 공지영님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이 우리의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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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도는 그 벌을 당하자는 자들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제도이다.
정신적으로 수개월 내지 수년 동안 육체적으로
생명이 다하지 않는 제 몸뚱이가 둘로 잘리는 절망적이고도 잔인한 시간 동안
그 형벌을 당하는 사형수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른 품위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 오직 진실이라는 품위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이 형벌을 제 이름으로 불러서 그것이 본질적으로 어떤지 인정하자.
사형의 본질은 복수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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