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비오는 날 장화를 신으면 나는 용감해졌다.
걸음걸이도 씩씩해지고 물이 고여 있어도 피하지 않고 철벅거리며 지나 다녔다. 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부러 물이 고여 있는 쪽을 골라 걸어 다녔다.

장화.
오늘도 망설이며 살아가는 당신과 나에게 필요한,
우리들 어린 시절의 장화.
                     박상천. 어린 시절·5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느릅나무나 너도 밤나무나 소나무의 꼭대기에 마치 늙은 원숭이 처럼 높이 앉아서 바람결 따라 살살 몸을 움직이면서 들판과 호수와 그 뒤의 산 등을 쳐다보고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소년, 이마위 오른쪽에 흑 갈색 머리를 핀으로 묶고 다니는 목덜미와 귓볼 밑에 작게 움푹 파인 곳에는 햇빛을 받으면 빛을 발하기도 하는 카롤리나 퀴켈만이라는 여자아이를 좋아했던 소년, 말도 안되는 억지로 누명을 뒤집어 씌우고, 올림 바 음 건반 위에 구역질 나는 코딱지를 붙여 놓은 괴팍한 노처녀 미스 풍켈 선생님께 혼이나서 자살을 결심하고 죽으려고 가문비 나무에 오르던 소년. 
 한 소년의 순수한 눈을 통해 그려낸 잔잔한 에피소드마다 삽화를 곁들인 맑은 동화 같은 소설<좀머씨 이야기>를 읽다보면 내 유년의 뜰 작은 화단의 돌밑에 포개어 숨겨둔 그림들이 함께 떠 오른다. 작은 면 소재지에 있던 성당의 첨탑은 높기만 하고 비 오는 날이면 귀신이 나온다던 자귀나무숲에는 왜 처녀의 귓볼같은 꽃만 피워내는지, 내 어깨에 네 어깨가 스쳤을 그 비밀스러운 날이 새벽빛처럼 앉아 있을 법한 내 유년의 뜰에도 대 숲같은 깊이를 알수 없는 소문만 무성히 남기며 미루나무 강둑을 따라 느릿느릿  사라지곤 하던 검은 옷을 입고 다니던 이가 소설속같이 있었다.
내게 남아 있는 그 비밀스러움처럼
소설 속 화자 소년은
호두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손에 쥔 채 텅 빈 가방을 등에 메고 '이른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마을 근방을 걸어다니나 마을 사람 중에서 '그가 어디를 무엇 때문에 그렇게 다니는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알려하지 않았던 그러나 어린시절 기억 속에 고여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이름도 정확하지 않은 밀폐공포증 환자인 좀머라는 남자와 관련된 혼자만의 비밀을 조심스레 꺼낸다

『좀머 아저씨가 분명하고 확실하며 오해의 소지가 없는 제대로 된 문장을 말하는 소리를 나는 딱 한번 들었다. 나는 그말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고, 아직도 그 말은 내 귓가에 생생하다. 7월 말 날씨가 지독히도 나빴던 어느 일요일 오후의 일이었다...
우박이 떨어진 도로에 이슬비가 내리던 날 좀머 아저씨 옆으로 차를 몰면서 아버지가 열린 창문을 통해 큰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그러다가 죽겠어요'라는 말에 좀머는 '아주 고집스러우면서도 절망적인 몸짓으로 지팡이를 여러 번 땅에 내려치면서 크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나는 온 몸을 떨었다.무릎이 너무나 떨려서 자전거를 타는 것은 고사하고 거의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짐을 싣는 곳에 얹어 놓은 악보책을 잡고 자전거를 옆으로 밀면서 갔다.그것을 밀고 가는 동안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생각들이 내 마음을 짓눌렀다. 오한이 날 정도로 몹시 흥분하게 만들고 참담한 생각들이 마음을 짓눌렀던건 미스 풍겔 선생의 난리법석도 매 맞을것과 집 밖을 나오지 못하는 감금이 무서워서도 뭔가를 두려워 했던 것도 아니었다.그런것들 보다는 이 세상 전체가 불공정하고 포악스럽고 비열한 덩어리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분노에 찬 자각 때문이었다.그리고 그 못된 개의 잘못은 또 다른 문제였다.모든 것이 문제 였다. 어떤것에 대한 예외도 없이 모든 것이 다 그랬다.우선 제일 먼저 내게 맞는 자전거를 사주지 않은 우리 어머니가 원망스러웠고 어머니를 그렇게 하도록 만든 아버지가 그랬으며,선 자세로 자전거를 타야 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몰래 나를 비웃었던 누나와 형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구역질나게 만들었던 하르트라웁 박사님 댁 개의 똥도 그랬고, 호숫가 길을 꽉메워 나를 늦게 도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산보객들도 그랬다.푸가 형식으로 나를 괴롭히고 모욕스럽게 만든 작곡가 헤슬러도 그랬다. 말도 안되는 억지로 내게 누명을 뒤집어 씌우고, 올림 바 음 건반 위에 구역질 나는 코딱지를 붙여 놓은 미스 풍겔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그리고 내가 딱 한번 필요로 하였을 때 도와 줄 것을 간청하였지만 비겁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어긋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모양만 지켜보았을 뿐 다른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세상 사람들이 자비롭다고 하는 하느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그런 모든 것들에게 의리를 지킬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세상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토록 비열한 세상에서 노력하며 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나 그런 못된 악에 질식해 버리도록 두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그런 사람들이나 잘 먹고 잘 해 보라지! 나를 포함시키지 말고 말이다! 나는 앞으로는 결코 그 사람들이랑 같이 어울리지 않으리라!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리라!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겠다!』
미스 풍겔의 야단을 맞고 나오면서 소년이 되뇌였던 다소 길게 인용한 이 부분이 책 <좀머씨 이야기>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건 아닐까 한다, 철저한 은둔생활을 해야만 했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어쩌면 자신의 모습이고. 전쟁 때문이었건 황폐화된 마음 때문이었건 불신이었건 냉담이었건 간에. 하루종일 지팡이를 짚고 제발 날 내버려 달라며 걸어다녀야만 했던 결국 밀짚모자만 남겨두고 호수속으로 사라지게 만든 그 고통과 자유를 어린 영혼의 눈을 통해서 이야기 하려했음인지도 모르는 미궁속에서도

단 하나 짧고도 맑은 동화같은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정곡을 누르는 정갈한 고립감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 고립감이란 프랑수아 플라스의 <마지막 거인>의 한마디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에서 느꼈던 안타까움과는 정 반대의 질감같은, 오히려 손을 놓아버려서 편안해진 그런 느낌을 만나게 된다. 그 끝은 모두 한 길이지만.
 
내가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또 그렇게 철저하게 침묵을 지킬 수 있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이나 죄책감 혹은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무 위에서 들었던 그 신음 소리와 빗속을 걸어갈 때 떨리는 입술과 간청하는 듯하던 아저씨의 말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욕심이 한량없어서 너를 붙잡아 매었던 시절 당신도 내게 그런 말을 했었지...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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