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이매지 > 이루마의 특별한 인연 때문에 명작이 된 책 한 권

요새는 예전보다 책을 덜 찾게 되지만 시나 소설, 따뜻한 이야기가 있는 책을 좋아합니다. 글자가 빡빡해서 내용에만 집중해야 하는 어려운 책보다는 읽고 나면 여운이 남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을 좋아합니다. 아버지께 받은 윤동주 시집도 좋아하고요. 아무래도 음악 관련 책을 많이 보는데 어머니도 좋아하셔서 함께 읽는답니다.
<어린 왕자> <얼굴 빨개지는 아이>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 같은 책도 좋아해요.




근데 <좀머 씨 이야기>는 보다가 말았어요.
류시화나 원태연의 시도 좋아요. 달달하고 서정적이라서 제 감성에 맞는 것 같아요.

아, 그리고 특별한 인연으로 기억에 남는 책이 한 권 있어요.
<연어>라는 책인데요, 아마 많이들 아실 거예요. 등이 검푸른 연어들 속에서 유독 은빛으로 빛나는, 은빛 연어의 이야기.
연어들이 태어난 곳으로 가기 위해 떼 지어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데 은빛 연어는 몸이 은빛으로 빛나기 때문에 눈에 잘 띄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동물의 습격을 잘 받아요. 당연히 다른 연어들은 은빛 연어를 싫어할 수밖에요. 어쨌거나 태어난 곳으로 회귀해가는 은빛 연어의 로드 성장 무비 같은 이야기가 정말 인상적이에요. 참 좋았어요. 그 책.

그 책은 아주 특별한 분에게 선물 받은 거랍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때였어요. 영국에서는 에이 레벨이라는 대학 입시를 치르는데 시험에 합격하려면 자기가 선택한 과목에서 일정한 점수를 받아야 되거든요. 과목 수가 많지는 않지만 정말 심도 깊게 배워요. 저는 입시과목 중 하나로 미술을 선택했고,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조금 특별한 주제를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회탈’을 주제로 삼았어요.
마침 누나 결혼식이 있어서 연구 자료도 얻을 겸 한국에 잠깐 들어왔었어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안동으로 내려갔어요. 안동대 민속학과가 유명하니까 무작정 그 학교로 찾아간 것이지요. 민속학과 교수님을 찾아가면 뭔가 필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물어물어 민속학과 사무실에 찾아갔어요. 조교인 듯한 분에게 “저, 하회탈을 연구하러 온 학생인데요, 자료를 좀 얻을 수 있을까요?”라고 말했더니 “누구 찾아오셨어요?”라고 되묻더라고요. “사실, 아무도 몰라서요, 하회탈에 대해서 잘 아는 분을 소개받고 싶은데요”라고 했더니 난감해하더라고요. 그리곤 교수님은 지금 바쁘다고 하면서 안 알려주시는 거예요.
하지만 하회탈 자료를 얻기 위해 영국에서부터 장장 12시간을 날아온 제가 거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죠.
“잠깐이면 되거든요. 자료 사진 촬영 좀 하고 참고 자료 추천만 해주시면 돼요.”
더 이상 실랑이를 해봤자 소용없다고 느꼈는지 마지못해 저를 교수 연구실로 안내해주더군요.

교수님은 사무실에 계셨던 분보다 더 더욱 무뚝뚝하셨어요. 제가 연구실에 들어왔는데도 쳐다보지도 않으시더라고요. 인사를 하고 뻘줌하게 서 있으니 여전히 고개도 들지 않으시고는 “어떻게 왔어요?”라고 물으셨어요.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교수님이 저를 한번 쓱 보시더니 딱 한마디 하셨어요.
“저기, 저거 가져가면 될 거예요.”
어디에 어떤 자료가 필요한지 전혀 물어보지도 않고 책 한 권 가져가라고 하시고는 다시 업무를 보시더라고요.
순간, 사람을 너무 성의 없게 대하는 교수님의 태도에 속에서 욱! 하고 뜨거운 것이 올라오더라고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그냥 꾹 참고 나왔습니다. 어른한테 대들 수도 없고. 나름대로 알아서 주신 것이겠지 하면서 교수실을 빠져나왔습니다.
내 딴에는 독특한 소재를 다룬다는 데에 나름 뿌듯한 마음도 있고, 더구나 영국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한국적인 소재를 다룬다고 하면 한국 민속학계에서 기특하고 어여삐 여겨 발 벗고 나서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물심양면으로 협조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리라 기대했거든요. 그런데 고작 책 한 권 받은 게 전부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심했겠어요. 다리에 힘이 쫙 풀리고 지쳐서 복도에 있던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키 작은 한 남자가 저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제 앞에 그 남자가 섰을 때, 창을 통해 들어오는 옅은 노을을 등지고 있어서 그랬는지 남자의 실루엣에서 은빛 오라가 번지고 있었어요.
“자료 찾으러 오셨다면서요?”
아마도 난감한 표정을 짓던 분이 과선배인 그분에게 제 이야기를 했던가 봐요. ‘영국에서 계집애 같이 생긴 남자애가 와서 하회탈 자료를 달라는데 줄 게 없더라’ 이렇게.
“그런 자료라면 하회 마을을 직접 가야 될 텐데, 가는 길은 알아요?”
남자가 괜스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어요.
“모르는데, 찾아가봐야죠.”
그러자 남자는 더욱 미안한 기색이 짙어지면서 “잘 데는 있어요?”하고 물어요.
그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안동으로 내려온, 안동이라는 도시와의 연고라고는 어머니가 안동 권 씨라는 것밖에 없는 제가 잘 데가 있을 리 만무했죠. 해는 이미 서쪽으로 져버린 후였고, 주위에는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어요.

“지금 찾아가긴 힘들 테고, 오늘은 일단 우리 집에서 묵고 내일 일찍 가요.” 그는 흔쾌히 말했어요. 그렇게 해서 그날 밤 한국의 낯선 소도시에서 처음 만난 형이랑 난생 처음 닭똥집도 먹어보고 맥주도 마시고 길거리를 밤늦도록 배회하면서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어요.
우리 둘은 하룻밤 만에 금세 정이 들어버렸어요. 형이 말도 아주 재미있게 잘했고 여성스러워서 다정다감했거든요. 하루만 지내려고 했는데 형이 아쉽다며 하룻밤 더 자고 가라고 붙들어서 이틀을 안동에서 묵었죠. 그리고 헤어질 때 형이 선물로 준 책이 바로 <연어>예요.
제가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저에게 편지도 보내주고 우편으로 자료도 보내주고 했었어요.
<연어>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세상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연어만이 사랑에 빠질 수 있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틈에 그래도 아직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보석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것이겠죠. 난생 처음 본 사람에게도 따뜻한 친절을 베풀어준 그 형처럼요.
제가 <연어>라는 책에 담긴 이야기를 더 아름답고 따뜻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 형 때문일 거예요.

글 : 이루마│사진 : 한향란

이루마 1978년 서울 출생.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접목한 세미클래식,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 독특한 음악 세계를 구축해온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무엇을 이루다’라는 뜻의 순 한글이름을 가진 그는 5살에 누나들 어깨 너머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11살에 영국으로 음악 유학을 떠났다. 이후 음악 영재의 산실로 알려진 퍼셀 스쿨(The Purcell of Specialist Music School)을 거쳐 런던대 킹스 컬리지(King's College of London University)에서 현대음악 작곡을 전공했다. 퍼셀 스쿨 시절부터 각종 음악 페스티벌에 참여해 가능성을 인정받았으며, 세계적인 레이블 데카(DECCA)에서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Rhee라는 이름으로 작곡 작품을 선보임). 국내에서는 2001년 첫 앨범 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작곡과 연주, 프로듀싱 작업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며 현재까지 4장의 정규 앨범과 애니메이션 <강아지똥 O.S.T.> 국내 최초의 이미지 앨범 등을 발표하였다. 현재 런던과 서울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음악 등에서 색다르고 깊이 있는 연주곡을 선보일 계획이며 나이가 들면 시골에 작은 음악학교를 세워 가난하지만 재능이 넘치는 뮤지션들을 키우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본 칼럼은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과 함께 합니다.
이루마의 작은 방 | 이루마 지음 | 명진출판 펴냄
"저는 음악이란 자고로 편안해야 하고, 편안한 음악이란 사람의 심장박동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심장박동보다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이루마(28)의 음악론이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착해진다'고 하는 관객들에 대한 대답이다. 그의 첫 산문집 '이루마의 작은 방'은 그의 음악을 빼닮았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결코 분노하지 않는다. 물 위에 이는 잔물결처럼, 나뭇잎을 간질이는 미풍처럼 차분하고 침착하다.
드라마 '겨울연가''여름향기'의 삽입곡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이루마가 마음을 열어보였다. 열한 살 어린 나이에 영국에 유학을 떠날 때부터 남녀노소 관계없이 고른 인기를 얻고 있는 현재까지를 잔잔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렇다고 재능이 특출한 '천재 아티스트'의 자기 자랑으로 오해하지 마시길…. 많은 좌절과 절망 끝에 오늘에 이른 그의 부단한 노력이 감성적 문체로 펼쳐진다. 첫사랑의 애틋한 추억, 단돈 4만원으로 한 달을 버텼던 사연, 음악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 등이 이어진다. 전망 좋은 곳에 작은 음악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소망도 내비친다.
글 중앙일보 | 박정호 기자 | 2005.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