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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장경섭 지음 / 길찾기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며칠 전 구로동 금남의 집 '복지아파트'에 사는 여성 근로자들의 생활 모습이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소개되었다.
28세 미만의 혼자 사는 여성 근로자들이 삼삼오오 기거하는 곳인데
남자는 절대 반입(!)이 안되고 택배로 도착하는 물건들도 전부
경비 아저씨가 받아서 처리해 주고 있었다.
십몇 년 전 나는 그 복지아파트에 손님으로 초대받아 가본 적이 있다.
1년에 단 하루, 남자들도 입장이 가능한 손님초대의 날이 있었는데
내가 다니던 작은 민중교회의 청년 세 명이 복지아파트의 주민들로
몇 안되는 교인을 초대한 것이다.
달콤새콤한 화장품 냄새가 낯간지럽게 풍기던 그 좁은 방을 기억한다.
우리는 그 방에서 궁둥이를 딱 붙이고 앉아 치킨과 떡볶이와 김밥을 먹었었다.
그렇게 좁은 방에서 룸메이트랑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 내 눈엔 조금도 재밌어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사는 게 아무리 경제적이라고 해도 나는 나 혼자 쓸 수 있는 옥탑방을 택했을 것이다.
거리를 떠도는 아저씨들이 어떤 시설에 입소하는 걸 거부하고 칼바람을 맞으며
지하도 구석자리나 공원 벤치를 사수하는 것처럼.
<'그'와의 짧은 동거>라는 만화를 읽으며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본 복지아파트와
십몇 년 전 내가 직접 가보았던 경옥 씨의 그 방이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역시 나라면, 장모씨의 옥탑방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책을 읽었다.
방바닥에 뒹굴던 치약을 발로 밟은 날, 장모씨는 외로움에 진저리를 친다.
외로움의 도가 지나친 날이라고.
그리고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외로움과 방만한 자유가 좋다.
사람은 누구나 젊은 시절 옥탑방에서 혼자 살아보아야 한다고까지 생각한다.
치약을 한 번 밟아봐야 한다고.
누구나 어느 한때 그렇게 외롭고, 가난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인간을, 인생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외로움의 정도가 지나쳐서 바퀴벌레와의 동거를 선택한 장모씨와,
술 마신 다음날 콩나물국까지 끓여 대령하는 바퀴벌레의 사는 모습이 그렇게 기괴하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도 이 만화의 이상한 매력일 터.
<조의 아파트>였나? 바퀴벌레가 득시글대는 영화가 있었는데 만화와 영화의 차이겠지만
그 영화를 보고 나서는 변기 뚜껑을 여는 것이 무서울 정도였다.
막연하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품고, 의욕도 인생에 대한 비전도 없이 무력감에 시달리는 청춘에게
이 만화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단,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당신의 인생에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앞으로도 이러고 살 것 같아요."
책 뒤에 실린 대담 중 작가의 이 말이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