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 출구
표명희 지음 / 창비 / 200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비 인형이라고 할 만한 매혹적인 여자에게 직장 상사를 빼앗긴 광대뼈 여자는 남자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우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도망칠 수밖에 없다. 도망치던 여자는 그 자신을 도망치게 만드는 것이 단지 그 ‘사건’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또 무엇이 있는가? 전문대 졸업생이라는 학벌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의 눈총도 있고, 외모를 중시하는 세상의 차가움도 있다. 그렇다. 어쩌면 세상에서 마주한 모든 것이 여자를 도망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도망치던 여자, 우연히 탈출구를 발견한다. 호랑이에게 쫓기던 남매에게 내려온 하늘의 동아줄처럼 구원의 손길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래동화와 현격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여자가 현실에 사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동아줄은 착한 사람이면 공짜로 받을 수 있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이 어디에 있던가? 돈을 내야 한다. 돈이 없으면 동아줄은 영영 내려오지 않는다.

...이젠 삶도 디자인시대. 당신의 삶을 디자인하세요. 최첨단 의료장비, 5명의 성형외과 전문의의 세분화된 분과별 진료. 찾아오시는 길, 3호선 압구정역 3번 출구...

동아줄의 정체는 성형이다. 이쯤 되면 눈에 쌈지불을 켜고 비판의 날을 세울 사람들 있을 테다. 외모지상주의로 요약되는 비판들이 거세질 테다. 그러나 표명희는 솔직히 말해보자고 한다. 무슨 뜻인가? 문자 그대로다. 예쁜 사람이 예쁨 받는 시대 아닌가. 어쨌든 그 여자는 회사를 그만 두고 받은 퇴직금을 몽땅 구원의 대가로 내고 광대뼈를 고치려 하는데, 아뿔싸! 수술 뒤 여자는 울상이다. 좌우 턱선이 비뚤하게 보이니 그럴 수밖에.

이 대목에서 누군가는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릴지 모르겠다. 그러게 왜 돈 주고 동아줄을 잡으려고, 아니 억지로 만들려고 했냐고. 그러나 표명희 소설집 <3번 출구>의 여자화자들은 그 말에 코웃음을 칠 테다. 그러면서 덧붙이고 말리라. 순진한 소리 그만하시라고.

그런 모습을 보며 당차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영악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다. 아무 말도 필요 없다. 그저 한 가지만 인정하면 된다. 이것이 그녀들이 사는, 혹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방식이라고.

공이 있다. 그것은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태양처럼 빛나기도 하지만 달처럼 어두침침한 색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어떻게 다룬다는 건 무슨 뜻일까? 윤리적으로 착하게 다루면 빛나고 나쁘게 다루면 어두워진다. 공은 <3번 출구>의 첫 단편소설 ‘탑소호족N’을 거칠 때만 해도 밝다. 십년 가까이 모은 전세자금을 하루아침에 날렸지만, 그래도 꿋꿋이 살아가겠다는 의사를 내비칠 때만 해도 공은 적당히 빛을 낸다. 하지만 빛은 거기까지다.

두 번째 단편소설 ‘온이’에 이르면 빛이 있는 듯 없는 듯 깜빡이기 시작한다.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없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단계다. 다운증후군 때문에 장애인이 된 온이를 동생으로 둔 형이 있다. 아직 어리다. 그런 만큼 이기적인 모습이 있는데 그것이 온이 때문에 더하다. 형은 온이 때문에 창피하고, 온이 때문에 엄마에게서 사랑을 덜 받는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온이 때문에’다.

형은 동생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온이’의 끝이 보일수록 궁금증이 깊어지는데 표명희는 덜컥하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의도적으로 손을 내려놓는다. 이제부터 공이 빛을 내는지 안 내는지 알아서 판단해보라는 의도다. 그리곤 곧바로 표제작인 ‘3번 출구’가 나온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빛을 내는지, 안내는지를 판단하는 방식을 ‘윤리적’인 것으로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윤리란 것이 도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현실을 생각한다면, 성형수술을 구원의 손길을 생각해야 하는 여자를 외면할 수 없기에 쉽사리 답이 안나온다. 그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뿐.

하지만 표명희는 강하게 몰아세운다. ‘3번 출구’에 이어 계속되는 소설들, 꼼짝달싹 못하는 어머니를 놔두고 밤에 수영하러 나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인상적인 ‘야경’이나 시어머니의 건강까지 노릴 수 있는 며느리가 등장하는 ‘씰리카겔’ 등이 연이어 그 질문에 힘을 실으며 재차 묻고 있다.

윤리란 것은 도대체, 학벌이나 외모, 본능이나 생존욕구 앞에서 도대체 어떤 쓸모가 있는가, 라고. 이미 공은 독자에게 넘어간 상태다. 어찌 해야 하는가? 기존의 방법에 따라 빛의 여부를 판단할 것인가. 아니면 소설 속 그네들을 따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판단할 것인가.

눈에 보이는 소설의 그림들은 더할 나위 고요하다. 하지만 손을 대면 깜짝 놀라리라. 고요함 속에 숨겨진 예사롭지 않은 강렬함이 감지될 테니 놀라지 않을 도리 없다. 단정한 ‘모나리자’ 뒤에 숨어있던 옷 벗은 ‘올랭피아’들이 우르르 뛰어나오는 것 같다고 할까. 보이는 것과 만져지는 것이 다른 <3번 출구>, 기대할 만한 신인의 등장을 증언하는 자리로 부족함이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