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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억원 이상의 제작비를 들인 ‘태풍’ ‘청연’ ‘야수’ 등의 블록버스터와 44억원을 들인 사극 ‘왕의 남자’의 명암이 엇갈리고 있다. 이미 500만 관객을 돌파한 왕의 남자는 파죽지세로 800만명 고지까지 넘보고 있는 반면 ‘태풍’이 초반에 선전하다가 개봉 3주차에 급속히 관객이 떨어져 420만명으로 마감됐고, 친일 논란으로 곤욕을 치른 ‘청연’은 일찌감치 나가떨어졌다. ‘야수’ 역시 첫 주 60만명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 요즘 블록버스터를 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80억원 이상을 들인 영화들이 잇따라 부진하면서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대한 회의의 목소리가 영화계에서 나오고 있다. 한국 블록버스터,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 한국 블록버스터의 시작, 그 후
한국 블록버스터는 강제규 감독의 ‘쉬리’(1998)에서 그 시작을 찾을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평균 제작비에도 못 미치는 35억원을 들인 영화지만 차량 폭발, 대형 전투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장면과 남북 문제라는 민감한 사안을 다루면서 한국 영화의 한 획을 그었다. 비주얼 면에서는 할리우드의 화려함에 못 미쳤지만 한국 정서에 맞는 서사가 결합하며 620만명이라는 기록적인 성과로 한국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을 열었다. 이후 40억여원을 들인 박찬욱 감독의 ‘ 공동경비구역 JSA’(2000)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쉬리’가 남녀의 사랑이 결합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남북 대결 구도를 그렸다면, ‘공동경비구역 JSA’는 그 안에서 화합을 끌어내 ‘쉬리’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거액을 들인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필승 전략으로 떠오르자 수십억원씩의 돈이 남발됐고 이후 블록버스터들의 성과는 참담했다.
 ‘ 아 유 레디’(2002) ‘ 예스터데이’(2002)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 ‘튜브’(2003) 등이 100억여원의 거대 제작비를 쏟아부었으나 극장 수익은 현저하게 낮았다. 특히 2002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실패는 한동안 충무로에 투자 위축 현상까지 나타날 정도로 파장이 컸다. 이런 충무로의 재앙을 씻어낸 것이 2004년 개봉돼 1000만 관객 돌파라는 기록을 세운 ‘태극기 휘날리며’다. 1174만명이라는 국내 최고 기록을 작성한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후 한국 블록버스터의 표준이 됐다.
 그러나 2005년 ‘남극일기’ ‘형사’ ‘천군’ ‘무영검’ ‘태풍’ ‘청연’ 등이 줄줄이 고배를 들면서 한국식 블록버스터는 희망이 없다는 말까지 영화계에서 나오기도 했다. 80억원에서 많게는 150억원을 들인 영화들이 본전도 찾지 못한 채 관객의 외면을 받으면서 2006년에 새롭게 기획에 들어가는 영화들은 저예산으로 꾸려지고 있다. # 성공한 블록버스터, 실패한 블록버스터 성공의 기준으로는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이냐는 관객 동원, 새로운 영화적 시도와 기교라는 작품성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최근 SF와 판타지, 무협, 액션 등 블록버스터 내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면서 비록 관객에게는 외면받아도 새로운 스타일의 창조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작품들이 있다.
 관객 동원에서는 태극기 휘날리며(1174만명)가 압도적이며, 실미도(1108만명)와 웰컴 투 동막골(800만명) 등이 성공한 영화이다. 반면 이명세 감독의 ‘형사 듀얼리스트’는 관객은 들지 않았지만 평단의 극찬을 받은 대표적인 경우다. ‘형사’는 2005년 영평상(한국 영화평론가협회상) 에서 감독상과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튜브’와 ‘ 내츄럴시티’ 등도 영화 관계자들의 아쉬움을 낳는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과 흥행 어느 쪽도 잡지 못한 영화들도 많다. ‘아 유 레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등은 개봉 당시 “100억원 어디에 썼냐”는 악평을 감수해야만 했다. 산만한 구성과 현실적이지 못한 화면이 관객들의 영화 몰입에 방해가 됐기 때문이다. 영화계의 한 관계자는 “블록버스터라도 기본적인 서사를 무시하면 100억원이 아니라 1000억원을 갖다 쓴다고 해도 잘될 수가 없다”며 돈으로 가름되는 블록버스터에 대한 회의를 내비쳤다. 실제로 2005년을 기준으로 한국 영화 평균 제작비는 45억원에 이른다. 불과 5년 전, 당시 블록버스터로 불린 ‘쉬리’가 35억원, ‘공동경비구역 JSA’가 40여억원을 들였지만 이제는 80억원 이상을 써야 블록버스터 소리를 듣는다. 물가 상승을 감안하더라도 한국 영화 평균 제작비가 40억∼50억원에 이르는 현실은 납득하기 힘들다는 것. 한 영화 평론가는 주먹구구 제작이 내실 없는 블록버스터를 양산한다고 비판했다. “계획성 없이 촬영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면서 부대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나 제작비가 뻥튀기되고 있다”며 한국 블록버스터의 진정한 성공은 역설적으로 제작비 줄이기에서 시작된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정진수 기자 yamyam198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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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청연 성냥팔이 소녀 재림, 예스터데이, 아유레디 |
[영화관계자가 꼽은 ''태풍'' 실패원인]
420만,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100만명도 동원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영화들이 많은 현실임을 감안하면 ‘태풍’이 실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영화계에서는 제작비 150억원, 화려한 배우진, 남북 문제 등 소위 흥행 요소를 모두 갖추고도 성공하지 못한 ‘태풍’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않는다.
영화 관계자들은 실패 요인으로 크게 남북 문제에 대한 피상적 접근과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감정선, 끊기는 스토리를 들고 있다.
강성률 영화평론가는 “남북에 버림받은 최명신이 한반도의 파괴 세력으로 변해 테러를 감행한다는 설정 자체가 2005년의 관객의 공감을 받을 수 없다”며 곽경택 감독의 전작 ‘친구’와 비교했다. 동시대를 산 사람들의 모습을 세밀하게 잘 담아내 향수를 자극한 ‘친구’에 비해 ‘태풍’은 교감이 안 됐다는 것이다. 50대 이상 전후 세대의 관심을 영화에 대한 호감으로 끌어내지 못한 것은 한국민의 공통적 정서 ‘남북 문제’를 다뤘으되 교감할 수 없었다는 이유가 컸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영화의 볼거리가 로케이션으로 만들어진 볼거리였을 뿐 블록버스터로서 내세울 장면이 없었다”며 “제작비는 블록버스터급이었는데 영화는 진정한 의미의 블록버스터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태국과 러시아를 오가는 화려한 배경은 좋았지만 영화 ‘쉬리’에서 수족관이 깨지는 장면처럼 한국 블록버스터의 획기적인 선을 긋는 장면이 없었다는 것이다.
한 배급사 관계자는 “돈을 많이 들여 찍은 장면을 버리지 못하고 사족처럼 붙여 놓아 영화 몰입을 방해하고 서사를 끊은 문제가 가장 크다”고 지적했다. 돈을 많이 들여 만들었다는 점이 ‘불필요한 장면’까지 밀어넣게 만들어 오히려 ‘독’이 됐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또 “아직은 탈북자가 영화 흥행요소가 되지 못한다”며 소재 자체가 시기상조라고 귀띔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남북 문제가 연관됐지만 익숙하지 않고, 화려하되 할리우드식이고, 배우들의 감정은 너무 갑작스럽게 북받쳤다”며 2%씩 부족한 스토리와 캐릭터 문제가 모여서 총체적인 문제를 낳았다고 말했다.
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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