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스타일
디자이너라면 디자이너다워 보일 의무가 있다

 



현대 건축물의 상징이 되어버린 노출 콘크리트. 하지만 이런 물성도 주인을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김부곤씨.메탈 냄새 강한 모던 디자인에서 손떼 묻은 골동품까지,자신의 감성과 취향이 담긴 소품들을 한자리에 풀어놓아 자기 식의 노출 콘크리트 공간을 창출했다.

빨간 지붕과 높다란 담장으로 무장한 주택가. 그 사이에 네모반듯한 3층짜리 노출 콘크리트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사무실일까, 집일까…. 문패를 보니, 인테리어 디자인 사무실. 벨을 누르니 ‘쪽문’으로 들어오란다. 큰 대문 옆에 나 있는 쪽문은 인심 좋게도 활짝 열려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니 느티나무 아래 있는 전통 석상 두 내외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낯설 법도 한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한다. 실내화로 갈아 신고 들어선 1층은 커다란 옹기 하나만 놓여 있을 뿐, 여백의 미 그 자체다. 철제 난간이 있는 시멘트 계단을 올라 당도한 2층. 사무실이라고 하지만 전형적인 사무용 가구는 찾아볼 수 없다. MDF로 단촐하게 짜 맞춘 파티션과 가구 그리고 빨강, 노랑, 검정의 세 가지 색상이 마치 현대 구상화처럼 칠해져 있다. 누구나 꿈꿔보는 스튜디오 형식의 사무실이다. 3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디디는 순간, ‘여기서부터는 신발을 벗으세요’라는 문구가 발목을 잡는다. 이곳의 맨 꼭대기 층은 여느 건물에서나 볼 수 있듯 ‘주인집’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현대적인 단순함이 돋보이지만 이곳은 벽면은 물론 와인바의 테이블까지도 한지로 마감하여 은은한 한국적 분위기가 감돈다.

남향으로 난 통창에서는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이 빛은 뻥 뚫린 공간을 따스하게 감싼다. 무채색의 단순한 모양의 소파가 놓인 거실과 수십 개의 와인 글라스가 천장에 걸려 있는 와인 바, 그리고 전통 다기와 평상을 갖춰놓은 한국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서재….

책꽂이에는 건축 전문 서적부터 인테리어와 패션 잡지까지 다양한 책자가 자리하고, 반대편에는 향수 어린 포크 음악 레코드판이 빽빽이 꽂혀 있다. 서재 책상 위에는 세련된 컴퓨터를 중심으로 재기 발랄한 모던 디자인 소품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한참을 구경하고 있다 보니, 거실 저 너머에서 한 남자가 걸어온다.



집에서 입는 옷이라고 보기엔 세련된 검은색 옷차림에 맨발, 그리고 짧은 머리와 헤르만 헤세의 지적인 이미지가 담긴 동그란 안경을 쓴 그는 이곳을 디자인한 집주인,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강인한 인상과 달리. 그는 천천히 마음껏 둘러보라며 녹차 한 잔을 건네고, 기꺼이 침실 문까지 열어주더니 푸근한 포크 음악을 틀어준다. 도무지 한 가지 스타일로 정의할 수 없는 이 모든 것,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묘하게도 이들은 눈과 귀, 코 그리고 손끝을 통해 이내 편안함이라는 조화를 이룬다. 오감을 자극하는 살아 있는 공간,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김부곤의 ‘작품’이다.

한지로 표현한 한국적 정서로 물든 공간 산세 좋은 서울 평창동 주택가에 자리한 이 3층짜리 노출 콘크리트 건물은 김부곤 씨가 운영하는 설계 사무소 코어핸즈corehands 사옥이자 그의 삶터, ‘앳더몬at the morn’이다. 빛을 주제로 만든 이곳은 싱그러운 아침 빛을 담는다는 뜻에서 아침 녘(at the morning)이란 의미의 이름을 갖고 있다.
네모반듯한 노출 콘크리트 실내. 잿빛 시멘트의 삭막함이 느껴질 법하지만 오히려 따스한 느낌이 든다. 벽면에 한지(전주 육배지)를 발라 은은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나기 때문이다.

회의실이 되기도 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방이 되기도 하는 서재. 이곳은 거대한 구름 모양의 한지 조명등과 고색창연한 반닫이를 놓아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 풍긴다. “공간은 일상을 담는 그릇입니다. 따라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행위와 감정까지 고려하여 디자인되어야 합니다. 이곳은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어졌기 때문에 무엇보다 작업과 휴식을 병행할 수 있도록 편안함을 강조했죠. 그리고 그 편안함은 우리네 전통 공간에서 찾았습니다. 열린 구조의 전통 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문을 생략하고, 벽은 영역만 구분하도록 최소화하여 공간과 공간이 소통하게 되었죠.” 소박한 무명 천으로 세련된 슈트를 만들었다고 할까. 볼수록 정감 있고 편안한 공간이다.

하지만 이 집의 진짜 묘미는 각 공간마다 차이를 보이는 소품 컬렉션 장식. 실무가 이뤄지는 사무실의 널찍한 책상에는 명함꽂이, 온도계, 재떨이, 액자 등 미니멀 디자인 소품이 퍼즐 조각처럼 놓여 있고, 2m는 족히 넘는 긴 선반 위에는 5백여 개의 다양한 와인 스크류(병따개)가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다. 거실에는 심플한 무채색 소파 하나, 그리고 단순한 조형미가 돋보이는 아프리카 쇼나 조각 한 점이 조용히 놓여 있다. 각기 다른 모습과 스타일을 지녔지만, 이 모두 김부곤이라는 한 사람의 감성으로 선택된 것이기에 묘하게도 하나의 조화를 이룬다.

패션 스타일리스트를 울린 고집 센 블랙 패션 그가 지금의 외모를 고수한 것이 올해로 10년째.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월의 무게로 다져져 한층 그 분위기가 농익었을 뿐. 이렇듯 개성을 확고히 굳히다 보니 CF 모델까지 하는 영예(?)도 얻었다.


1층부터 시작하는 중정은 3층까지 이어지며 전체 공간에 숨통을 트여준다. 난간 너머 보이는 그래픽 작품은 싱그러운 나뭇잎과 과일의 이미지를 조합하여 새를 형상화한 것으로 김부곤 씨가 직접 제작한 것이다.

‘직선 운동을 하는 모터를 장착한 힘 있는 프리미엄 냉장고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되 전문 디자이너여야 할 것’. 수십 명의 후보 명단이 거론되었지만 그처럼 제격인 모델이 없었다. 하지만 광고를 촬영하면서 뜻하지 않은 난관을 맞았다. 시안을 따르자면 그는 흰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야 했다. 참고로 그는 단순히 검은색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상의는 꼭 라운드 네크라인을, 바지는 일명 프라다 천에 주름 없는 스타일만 고집한다. 스타일리스트가 수 없이 많은 옷을 가져왔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쯤 어울리는 게 있지 않을까, 이후 몇 번 더 옷을 가져와봤지만 소용 없었다. “그냥 제 옷 입고 하면 안 될까요?” 그의 제안은 카메라 테스트 결과 만장 일치로 오케이 사인을 받았고, 이는 광고계를 통틀어 유래 없는 일화로 남게 되었다고.

그의 블랙 스타일은 공간을 디자인하듯, 철저히 그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마른 체격, 작고 날렵한 얼굴.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수컷 동물들의 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결국 살아남는 것은 덩치 크고 힘센 놈들뿐이더군요. 그걸 보면서 디자이너로서, 또 남자로서 살아남은 듯한 강자의 이미지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민했었죠.” 그 결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작정’하고 변화를 주었다. 그중 블랙을 메인 컬러로 정하게 된 데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이탈리아로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갔을 때였다. 당시 짧은 머리에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런 그를 보고 현지인이 ‘마피아’라고 말했던 것. ‘아! 마피아처럼 블랙 패션으로 강인한 인상을 주면 되겠구나.’ 한번 보면 절대 잊혀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인상의 외모는 이렇게 탄생된 것이다.

2평 남짓한 그의 드레스룸은 불을 밝히지 않고는 옷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온통 새까맣다. 수를 헤아릴 수 없지만 짐작하건대 티셔츠만 1백 벌은 족히 넘을 듯. 그리고 그 검은색은 어느 하나 큰 차이 없이 순도 높은 ‘까망’이다. 이렇게 짙은 검은색이라야 극명한 인상을 만들어준다고. 디자인은 모두 ‘미니멀’ 일색이다. 특히 얼굴형과 잘 어울리는 라운드 티셔츠에 장식이 없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로부터 ‘그 옷이 그 옷 아니냐’는 말을 듣지만, 사소한 디테일만으로도 디자인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 미니멀 스타일이다.


길다란 그의 책상 위에는 제도판과 제도용 자 대신 컴퓨터 모니터를 중심으로 수 백개의 소품들이 늘아서 장관을 이룬다. 그의 창조 작업, 공간 디자인은 여기서 출발한다.

어떤 옷은 라운드 부분에 박음질이 두 줄로 되어 있고, 어떤 옷은 솔기를 살린 커팅이 돋보인다. 블랙은 옷뿐만 아니라 신발, 가방, 모자 등 패션과 관련한 모든 것에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다. 옷과 함께 10년 이상 유지하고 있는 동그란 스타일의 안경 또한 1백 개가 넘는다. 이쯤 되고 보니, 그의 옷과 안경은 단순한 패션으로 보아 넘기기 힘들 듯하다. 고집 그리고 신념이라고 하면 맞을까?

내 개성을 지키는 만큼 다른 사람의 스타일도 존중한다 그의 일관된 고집, 알고 보니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1992년 그는 회사를 차리면서 국내에서는 유래 없는 ‘사건’을 터뜨렸다. 외국처럼 설계와 시공이 분리된 시스템을 도입, 오로지 설계 디자인만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시공을 하지 않으면 돈을 벌지 못하는 국내 인테리어 실정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한 것. 하지만 공사에 드는 노력과 수고를 디자인에만 쏟으면 그만큼 좋은 디자인이 나올 것이라는 신념은 오래지 않아 빛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그가 늘 주장하는 ‘철저히 사용자 중심’의 공간 디자인이 더해져 ‘정말 원하는 공간’을 만들어주었으니…. 그의 디자인은 대기업 임원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공간’을 넘어 많은 사람들이 가볼 수 있는 레스토랑, 대형 할인마트 등으로 나아갔고, 이제는 주택과 브랜드 아파트 등 개인 공간 속으로 들어왔다.

내 삶의 원동력은 포크 음악과 와인, 그리고 사람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성공한 디자이너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하지만 그가 이런 평을 얻기까지 포기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음악이다. 어려서부터 그림과 음악에 소질이 많았지만, 특히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작한 기타 연주는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해 동상을 수상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여기에 3년의 라이브 가수 경력을 더하고 보니 진로를 고심할 수밖에. 40대 중반을 훌쩍 넘겨버린 지금, 이제 음악은 디자이너로서의 삶에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든든한 친구가 되었다.

“70~80년대 포크 음악에는 영혼이 살아 있어요. 포크 음악을 처음 들어본다는 한 친구는 이내 눈물을 흘리더군요.” 그의 서재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6천 장의 레코드 판 중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포크 음악. 그가 선뜻 음반 하나를 꺼내 들더니 들어보라 권한다. 이연실의 ‘찔레꽃’. 미안하게도 듣는 이의 나이보다 오래된 그 음악은 애절한 음색에도 불구하고 그저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이 세련된 디자이너가 소박한 음악에 취해 눈을 감기까지는 불과 몇 분.

그의 자동차 트렁크와 사무실에는 늘 기타가 놓여 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기타를 연주하며 호흡을 가다듬고, 일을 끝낸 밤이면 신촌 라이브 카페에서 선후배들과 함께 모여 연주도 하고 노래도 부른다. 포크 뮤지션 김의철 씨가 결성한 포크 부활 모임 ‘청개구리’의 멤버로 활동하며 2003년에는 가수 서유석 공연에 게스트로 참여하는 등 프로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도 하고 있다. 음반을 내자는 제의도 있었지만, 그저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를 오가는 게 좋단다. 그리고 앞으로는 기타 연주와 포크 음반을 감상하고 모으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이루지 못한 꿈은 늘 삶을 설레게 하는 법.

음악 외에 그에게 삶의 기폭제가 되는 것은 와인. 10년 전, 토스카나 지방을 여행하다가 와이너리를 방문했는데 1950년산 빈티지 와인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수확한 포도로 담근, 내가 살아온 세월보다 오랜 시간 동안 병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와인! 원시 상태의 와인을 접하던 감동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와인과 친해지기 위한 ‘구애 작전’이 시작되었고, 와인 스크류 수집을 시작으로 와인 셀러를 갖춘 완벽한 바까지 만들었다. 아직 와인은 짝사랑의 대상일 뿐. 하지만 와인으로 인해 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안게 되었다. 작업이 없는 날 밤이면 그는 이곳에서 지인들과 함께 와인 잔을 기울인다. 음악, 연극, 무용을 망라해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함께 문화적 교류를 나누고 감성을 충전한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또 하나의 결실을 거두었다.

매월 셋째 주 토요일, 이곳에서는 한국 실험 예술정신KOPAS에서 마련하는 공연과 김부곤 씨가 제공하는 와인이 어우러지는 예술 파티가 열린다. 건물 입구에서부터 옥상 정원까지, 공간과 공간이 중첩하고 소통하는 이곳에서 무대와 객석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한 무용가는 1층부터 3층 사이를 오르내리며 춤사위를 펼치는가 하면, 숨은 그림 찾기를 해야 할 듯, 의외의 곳에 미술 작품이 전시되기도 한다. 관객은 공연의 흐름을 따라 자유롭게 감정의 궤적을 그어나간다. 자신이 만든 공간 안에서 다채로운 사람들의 감성과 문화가 교류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 순간, 김부곤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행복을 맛본다.

물성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디자인하는 사람. 그 물성을 위해 김부곤 씨는 자신의 감성과 고집과 지인들까지도 디자인한다. 지직거리는 레코드 판에서 흘러나오는 이연실의 ‘찔레꽃’ 한 소절에 심취해 디자인 영감을 얻고, 그 매력에 한번 빠진 후에는 블랙 셔츠를 ‘김부곤의 패션 컬러’로 만들어낼 정도로 우직한 고집으로 똘똘 뭉쳐있으며, 정말 좋아하는 와인과 공연은 늘 지인들과 함께 나누며 개인적인 취향마저 공유할 줄 안다. 이렇듯 듣고 입고 마시고 보는 일분일초의 상황마저 디자인에 대해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울 줄 알아야 ‘진짜’ 디자이너라는 그의 말, 아직까지도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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