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진진 > ‘나는 작가 *이다’라는 드높고도 아름다운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강석경 외 지음 / 열화당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일흔한 명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처음에 몇 편 몇 편 자꾸 끊어 읽으며 다른 책처럼 단숨에 읽지를 못하였다. 얼마나 재미나는지, 내 귀에 대고 소곤소곤 가려운 곳을 얼마나 잘도 긁어대는지 당장이라도 책 속에 빨려 들어갈것 같았다. 그럼에도 자꾸 방에서 기어나와 다른 일을 하고, 또 방으로 기어들어가 펼쳐보기를 반복하였다. 이 책은 너무 단단했다. 평범한 내 귀에도 익숙한 저자들이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종이 한두장에 넣었으니 얼마나 고심하고 썼을까. 하얗게 새벽이 밝아오는 가운데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왜’라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고, 뒤에서 덥썩 귀신이라도 나올것 같은 거뭇한 밤에 스탠드불 하나 켜두고 커피를 들이켰을 것이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설가가 되고 나서도 처음으로, 일기장에 그렇게 썼다. '나는 작가 공지영이다. 그래서 고맙다, 지영아'라고."

소설가 공지영이 쓴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초등학교 일기장에서 굉장히 잘 어울릴만한 저 문구가 얼마나 치열한 글쓰기 후에나 다다를수 있는 높다란 경지인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내가 만약 '나는 작가 모해짐이다. 그래서 고맙다, 해짐아'라고 일기장에 써놓고는 코골며 흠냐흠냐 자고 있다면. 몰래 일기장을 훔쳐보던 나의 어머니 쿠쿡하고 끄응 웃으시고는 살포시 일기장을 내려놓으셨을 것이다. 내가 하면 비웃음, 진짜 작가가 하면 인정. 뭐 이런거. 그래서 저 문장은 부럽고도 드높고도 아름다운 것일지 모른다.


그런 ‘작가’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인생 마지막에 가서도 마무리짓지 못할 '문학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읊었다면 그 글 하나로도 내 정신을 쏙 빼놓을 카페인 한 컵일진대, 몇십개라면 내가 ‘냠냠’하고 한번에 후다닥 해치울만한 책은 아닌 것이다.


설이어서 알라딘도 쉰다기에 더불어 내 책구매욕까지 쉴리는 만무했기에 사야할 책목록을 정해서 세종문고로 갔다. 처음에는 뒷짐을 지고 유유히 그곳을 거닐며 ‘오호! 이런 책도?’ ‘오호라, 이 책 참’ ‘어허 무슨 책이 이리 두꺼워’라며 거드름을 피워댔고. 신간의 표지들을 보며 책을 홀짝홀짝 들춰보는 것도 지루해질 무렵. 그러니까 서점에 들어선지 20분, 30분이 지나도 내 목록중의 단 한권도 보이지 않게 되자 콧등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냥 눈에 보이는 책 중 흥미로운 것을 사면 되지 않느냐 하겠지만 그건 아니었단 말이다. 솔직히 사고 싶은 책이 아-주 많았기에 서점에 가기에 앞서 나는 일단 사고 싶은 책을 죽 적었다. 그리고 온라인과 오프라인 서점의 차액을 계산했다. 마지막으로 그나마 차액이 적은 목록 중에서 몇권을 골라간 것이기에(손해를 최소화하려는 무서운 본능). 참도 치열하게, 사실 퍽도 할일 없어, 나름대로 머리 굴린 노력을 없었던 것으로 돌릴수는 없었다.


콧등에 땀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나는 보물섬에서 보물찾기를 그만 포기하고 점원 몇명에게 내 목록을 하나씩 보여줬다. 신간인데도 어디 깊숙이 박혀 있어 단번에 찾지 못하는 책, 구간인데도 한번에 꺼내오는 책, 제목이 길어 말하기 민망했던 책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이 책은 없다고 했다. 핫. 아니 이런 대형서점에 이제 갓 나온 따끈한 신간이 없어? 뜨악해질 수밖에 없었고. 차분하고도 교양 있는(?) 나지만 “정말요? 정말 없어요? 이상하네.”라며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저기... 노란 표지 있잖아요. 노란 표지인데. 신간인데 없을리가요.” 나는 이 책과 아무런 친분관계도 없는데 왠지 모를 아쉬움에 자꾸 중얼거렸다. 그 점원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고민을 하더니 몇백권의 책이 꽂힌 책장 제일 아래 천사같은 하얀 문을 열더니 뭔가를 꺼내준다. 노-란. 얇은 비닐까지 씌워져 있다. 처음이다. 이런 느낌. 하. --; 아니아니. 참 힘겨운 책찾기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노란 보물을 찾기 위한 여정이 아니었나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해본다. 누가 보면 내가 무슨 책에 목숨건 사람 같겠지만 사실 내가 읽은 책이 있어? 가진 책이 많아? 다 그 목록을 적은 종이쪼가리에 ‘직’하고 샀다는 빨간줄을 긋기 위함이었으리라. ^^V 결국 오프라인 서점은 참으로 비싸서, 할인되었을 것을 감안하면 책 4권에 내 돈 1만원은 거뜬히 먹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돈이면 책을 또 한권 살수 있었는데’ 라며 가슴을 딱한번 쓸어내려야 했다.


그리하여 일흔한 명의 문학하는 이유, 즉 존재의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가까스로 듣게 되었다. 어느 책보다 진솔하고 애절하다. 붉은 영혼들이 제각각의 색깔로 어우러져 한껏 넘실댄다.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고민하고 쓴 글이라 한자도 버릴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어여쁜 사연과 값진 이야기로 치장하여 그들끼리 한껏 춤사위를 벌이며 나에게 손짓한다. ‘이리로 와. 여기엔 하늘처럼 무한한, 바다처럼 깊은 세상이 있어. 이리와봐. 이리와.’ 그 춤이 어찌나 매혹적인지 나는 어느새 몸을 살짝살짝 흔들어보며 그곳에 다가서는데 '퍽'하고 단단한 유리문에 코부터 박고서 아프기만 하다. 그 곳은 ‘작가’들의 세상인 것이다. 오랜 습작의 고통 끝에 비로소 별빛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그들이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