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시선 296
김경미 지음 / 창비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잘 알지 못한다. 난해한 글귀들에 질려 몇편 읽다가 책꽂이에 그대로 꼽혀 있는 시집도 몇권이 된다. 그런데 최근 몇년 전 부터 시들이 읽힌다. 알아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읽기에 따라가는 것이다. 함민복, 신경림의 시들이 그랬고 이제는 김경미의 시가 그렇다. 

그런 말들이1 

저기 등뒤로 가까이 다가서는 저 친구를 조심하세요
오랜 친구를 가리키던 그 혀 실은 사랑이 아니었어 너도
처음부터 아니었잖아 황단보도 앞 낯선 연인의 비겨버린
가슴 단추 자리에 달린 압정들 거기 찔려 신호등 붉어지는
그런 말들


가을 폭우 속 젖은 단풍 같은 전화기 너머 끝내 아무 말
없는 발신인 그 귀에 익은 침묵의 소리 잘못 걸려온 자벌
레의 주판 눈금 같은 매일의 행복과 항복 사이 샛노란 은
행잎 색깔로 떨어지는 달력과 오후 네시 반의 다리 저는
책상과 여름 우유처럼 쉽게 상해가는 여행 티켓과 어느
길에선가 쓰레기처럼 버려질 저녁노을들
그런 말들
 

어디서 끊어 읽기를 해야하는 건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까지 이어진 말인 건지, 대체 무엇을 나열한 것인지 머리가 알려고 노력하기 전에 가슴이 먼저 반응하면서 시어들 사이에 나만의 언어들을 채워넣기 시작했다. 사랑이었는지 아니었는지도 모르게 사랑하다 헤어진 연인과의 추억들이 정지해버린 사고를 비집고  어지럽게 내뱉어 지는 것 같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동생의 손에 들려주고 싶었으나 동생은 <인생수업>을 선택했고 나는 고통을 달래주는 순서를 들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일에 집중한다. 쏟아지는 졸음을 쫒아내기도 하고, 졸음에 몸을 맡겨 상하 좌우로 오지게 흔들어재끼기도 하고, 핸드폰 통화나 문자를 주고 받기도 하고, 일행과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나처럼 주변을 두리번 거리기도 하고... 그들 사이에서 고통을 달래는 순서를 읽으며 시속에 빠져 있다가 어느틈에 정신을 차리니 두정거장이나 지나쳐 있었다. 급하게 내려 반대편으로 건너와 지하철을 기다리며 다시 시 속에 빠져 들었을 때 들어온 시가 바로 <그런 말들이1> 였다. 나는 두 정거장을 거슬러 올라가 6호선으로 갈아 탈 것이다. 원래 대로라면 이 두정거장을 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우리집에 가는 길을 설명하려면 4호선을 타다가 삼각지에서 6호선을 갈아타는 거라고 말한다. 두 정거장 더 온것은 나만의 추억이고, 실수이고, 아무것도 아닌것일수도 있다. <그런 말들이1>에서 빠져버린 시어들을 상상한다. 그녀만의 추억이고, 실수이고,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그 빠져버린 시어들. 그러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었을 시어들, 시간들. 빠져버린 시어들 때문에 독자는 어지러울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어들로 그 사이를 메꾸는 일은 바로 시를 읽는 우리의 역할이 아닐까 한다. 

잠시 정신줄을 놓고 시속에 빠져 두정거장을 더 다녀온 일이 마치  혼자서 무인도에 있었던 경험 마냥 신나고 재미있었다. 돌아오는 길 지하철을 한참 기다릴 때는 지치고 살짝 외롭기도 했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