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30.















『기도를 위하여』 읽기. 김말봉의 단편들을 읽을 때에는 흥미롭기는 했으나 아 그렇구나 그때는 이렇게 썼구나 하면서 보았는데, 뒤이어 나오는 박솔뫼의 「기도를 위하여」와 에세이를 읽고난 후에는 이상한 리듬감 같은 것이 몸 안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입말과 글말 사이를 오가는 반점과 온점이 없는 문장들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요상한 리듬을 가지고 읽게 되고 지금 내가 쓰는 문장들도 뭔가 그것을 닮아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필 단편에서 떠나간 순애의 영혼이 비중있게 다뤄져서 그랬나. 묘한 여운도 함께 남는데 괜스레 나는 쓸데없이 혼령과 영혼과 유령의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까 골똘히 고민하였다. 왁자지껄한 소음에 금방 깨어났지만.

24.10.1.

『기도를 위하여』 완독.


24.10.2.















서리북 읽기. 리뷰 파트로 넘어가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의 서평을 읽는다. 세월호의 전사부터 그날에 드러난 켜켜이 쌓여있던 무능함과 보신주의, 이기주의의 복합체를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힘겹다. 거기에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수도 없이 했으면서 학생들의 대피를 도왔다는 이유로 아무 책임도 지지 않은 강혜성까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한탄”(170쪽)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선조위와 사참위의 활동들을 보면서 사법만능주의가 낳은 것과 가리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이 깊어지던 중, 서평의 말미에서 박호진 학생과 정차웅 학생의 이야기를 읽으며 울컥해지는 마음에 책을 잠시 내려놓았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상처는 여전하고, 못난 어른들은 상처에 약을 바르고 새살이 돋게 할 생각조차 않는다.














홍성욱, 「조각조각 꿰매진 '그날'의 슬픈 진실」


가장 큰 차이는 『세월호』(2016)의 2부 "왜 못 구했나"가 『세월호』 (2024)에서는 4부로 가고, 4부 “‘대한민국에서 제일 위험한 배', 어떻게 태어났나"가 2부로 갔다는 것이다. 즉 2부와 4부가 맞바꾸어졌다. 재난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자나 과학기술학 연구자는 재난이 발생하기 전에 '잠복기', '잠재적 조건(latent condition)' , '구조적인 취약성'이 누적된다고 보는데, 『세월호』(2024)는 이런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2014년 4월 16일 아침에 발생했지만, 그 이전에 취약성이 계속 누적되는 잠복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재난에 대해 사회과학적 틀을 적용하고 나니, 세월호의 4월 16일 이전의 전사(前史)를 다룬 내용이 중요해졌다.(157-158)


세월호는 화물보다 평형수를 훨씬 더 많이 싣고 다녀야 하는 배가 되었고,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수지를 맞추지 못했다. 청해진 임원들은 화물을 더 싣고 평형수를 빼서 무게만 맞추자고 결정했고, 세월호는 이런 불안정한 상태로 운항하기 시작했다. 시험 운항과 운항관리규정 심사 모두 접대와 뇌물로 통과했다. 세월호의 운항관리규정은 화물을 최대한도로 싣기 위해 출항 10분 전까지 화물을 적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58-159)


이미 9시 23분경 진도연안해상교통관제센터(이하 진도VTS)-세월호-두라에이스호의 삼자 통화에서 두라에이스호 선장은 빨리 승객에게 구명동의를 입혀서 퇴선시키라고 했지만, 세월호 선장은 묵묵부답이었다.(124쪽) 123정을 타고 온 해경은 도피하는 선장과 선원을 구한 뒤에 한 번 배에 올라갔지만, 구명 뗏목을 떨어뜨리는 일만 했지 배에서 승객의 퇴선을 명령하거나 유도하지 않았다. 배에 달린 마이크로도 충분히 방송을 할 수 있었는데 이마저도 하지 않았다. 배가 점점 기운다는 정보를 받은 해경 지휘부 역시 퇴선을 명령하지 않았다. 구조 현장에 있던 대부분이 배에 사람이 많이 타고 있었고, 바다에 떠다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무도 퇴선 명령이나 퇴선 유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실에서 대기하던 학생 중에서만 200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다(단원고 학생 희생자는 총 250명이었다).
123정이 도착한 시간은 9시 34분이었고, 선미 쪽에 모여 있던 기관부 선원과 조타실에 모여 있던 선장과 선원이 123정을 타고 도주한 시간은 9시 39분 이후였다. 9시 50분에서 9시 58분 사이에 학생들이 주로 머물던 4층이 침수되었다. 3층은 그보다 일찍 침수되었다. 9시 52분에 123정 정장 김경일은 서해지방해양경찰청(이하 서해청)에 승객 반이 못 나오고 있다는 무전을 했고, 이를 들은 서해청과 해양경찰청(이하 본청)은 123정 승무원이 배에 올라가서 승객을 동요하지 않게 하라고 요청했지만, 123정 정장 김경일은 배가 기울어져서 올라가지 못한다면서 헬기에 요청하겠다고 하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9시 59분에 목포해양경찰서(이하 목포해경) 서장 김문홍이 승객들에게 배에서 뛰어내리라고 외치거나 마이크로 방송을 하라고 김경일에게 요청했지만,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후 선원 김영호의 제안에 따라 세월호에 접안해서 승객 6명을 구조했지만, 그 뒤로는 다시 세월호에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서 고무보트가 구해 오는 승객만을 배에 실었다. (161-162)

날씨 좋은 날 기기 고장을 일으킨 여객선이 왜 급하게 기울면서 침몰했는지는 세월호의 전사가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구하지 못했는가는 이와는 또 다른 문제이다. 123정이 배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조에 소극적이었던 모습은 사진과 영상으로 잡혀서 국민의 공분을 샀다. 신고를 받고 세월호와 30분 이상 통화를 유지한 진도VTS, 현장에 출동한 123정, 현장에 출동한 세 대의 헬기, 이들을 지휘한 목포해경, 서해청, 본청 구조본부는 왜 적극적으로 승객 퇴선 유도를 하지 않았을까? 세월호 참사를 두고 음모론이 횡행했던 것은 배가 갑자기 넘어간 이유가 납득이 안 되기도 했기 때문이지만, 해경의 행동이 '못 구했다'라기보다 '안 구했다'는 것에 더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선원과 해경이 담합해서 희생자들을 수장시켰다는 음모론이 횡행했다. (162)

해경은 자신들이 퇴선 명령을 했다가 사망자가 생길 경우에 자신이 민형사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도 한 해경 간부는 같은 상황이 반복되더라도 면책 특권이 주어지지 않는 한 해경은 역시 퇴선 명령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해경 지도부는 '큰 배는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상식을 믿고 있었다. 세월호 같은 배는 적어도 몇 시간, 심지어 며칠 동안도 바다에 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큰 여객선이 침몰한다는 얘기를 듣고, 해경들은 '승객 다 구하고 특진하겠다', ‘123정 상 받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165)

유가족과 시민들은 자신들은 도망가면서 승객에게는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한 선원에 분노했다. 그런데 사실 방송을 한 사람은 3층 안내 데스크에 있던 여객부 직원 강혜성이지, 조타실에서 모였다가 도주한 선원이 아니었다. 9시 22분에 2등항해사가 강혜성에게 연락해서 해경이 오니까 대기하라는 방송을 하라고 했지만, 강혜성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자신의 판단에 따라 승객들에게 그 자리에 있으라는 방송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있던 3층에 물이 들어 오던 시기까지 강혜성은 열 번 넘게 선실에서 대기하라고 방송했다. 9시 28분에는 "선실이 더 안전하겠습니다"라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방송까지 했다.(462-466쪽, 793쪽) 학생들의 대화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보면 갑판으로 나가려다 이 방송을 듣고 선실에 머문 사례가 있다. 기록으로 남지 않은 경우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3층의 일반 승객은 주로 성인들이었고, 이들은 강혜성의 방송을 무시하고 바다에 뛰어들어 살았다. 반대로 사망한 학생 대부분은 방송 내용을 공유하면서 선실에 물이 들어올 때까지도 방송을 믿고 해경의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물은 서서히 들이친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한 층을 삼켜 버렸다. (169)

세월호 이후 젊은 세대는 '어른의 말을 들으면 죽고, 안 들으면 산다'고 자조적으로 얘기하고는 하는데, 이는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낳은 참사 때문이었다. 선원 재판에서 검찰은 강혜성이 명령에 따라 한 번 방송을 했고, 목숨을 걸고 승객의 대피를 도왔다는 점 때문에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469-470쪽) 그러면서 그 책임은 파도 속으로 흩뿌려졌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한탄만이 남았다. (170)

기본 대신에 담합, 눈 감고 아웅 식의 대충주의, 관료주의, 무사안일, 낙관적인 선입견, 방관적 태도, 객실이 더 안전하니 가만히 있으라 방송하는 월권, 법적인 책임만 피하려는 보신주의가 참사를 낳았다. 대한민국은 3만 불 소득에, 세계인이 선망하는 K-문화를 자랑한다. 이 화려한 얼굴 반대편에 곪아 터지는 추한 이면이 있는데, 세월호 참사는 이런 이면의 슬픈 자화상이다. (172)

세월호 참사 조사위원회의 위원 구성은 다른 정치적 성격이 강한 위원회처럼 여야가 위원을 추천하는데, 참사의 전모를 밝히는 위원회의 경우 이런 정치적 구성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기에 (우리나라의 다른 위원회처럼) 위원장을 명망 있는 변호사가 맡고 위원 중에 변호사가 포함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위원회의 흐름을 사법 정의를 구현하는 쪽으로 몰고 가는 경향을 강화하는 문제가 있다. 즉, 구조적인 원인을 밝혀 참사의 전모를 드러내면서 사회적 위험을 경감하고 안전 사회를 구현하는 것보다, 책임자를 색출해서 처벌하는 것이 우선시된다. 형사 재판에서의 유죄와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것은 매우 다르다. 세월호 재판에서 자주 드러났듯이 사법주의는 법원에서 무죄를 받으면 아무 책임도 없는 것처럼 되어 버리는 문제가 있다. 위원회 내에서 조사위원과 조사관의 역할이 분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에 전문성을 가진 조사위원이 실제 조사를 할 수 없고 조사관이 수행한 조사에 대해서 평가하기만 하는 문제도 생긴다. 조사하려는 문제는 잘게 쪼개지고, 참사의 전체 구도를 보지 못한 채로 각 사안에 대해서 티끌만큼의 의문이라도 있으면 이를 의혹으로 부풀려서 다시 조사를 하는 관행이 계속되는 것도 문제다. (173-174)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하나의 정합적인 서사를 갖는 데 실패했다. 왜 책임져야 할 사람들에게 면죄부가 부여되었는지, 왜 아직도 어딘가 의혹투성이 같은지, 왜 진실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어찌 보면 우리 자신이 '잊지 않겠다'라고 되뇌면서, 진실이 떠오르기만을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세월호』(2024)가 보여주듯이 "진실은 대체로 모호하고 복잡한 형태로 떠다니고 있어 한 손에 꽉 잡히지도 않는"(809쪽) 것임에도 말이다. 진실은 아름답다는 말이 있지만, 복잡한 세상에서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아름다운 그림보다 조각보와 비슷할 것이다. 금방 연결이 안 되는 증거와 자료를 분석하고 검증해서 사실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이를 다시 커다란 그림으로 꿰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174-175)

"받아요! 애기요, 애기!"를 외치며 박호진 학생이 아이를 먼저 구조대에 건네주었다. 그 학생들에게는 자신의 목숨보다 애기를 살리는 일이 우선이었다. 정차웅 학생은 자신의 구명조끼를 옆 친구에게 양보하고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고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었다. 자신의 구명조끼를 학생에게 건네주고 사망한 교사도 있었다. 세월호에 걸려 침몰 위기를 맞았어도 끝까지 승객을 구한 어선의 선원들도 있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었다. (176)


『불편한 편의점』 서평을 읽다가 그저께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알라딘에서는 편의점에서 택배 받기를 선택하면 적립금을 주는데(처음엔 500원이었으나 200원으로 줄었다), 이 때문에 나는 줄곧 집 근처 씨유로 배송을 시키고 찾아가는 일이 잦았다. 그저께도 택배를 받으러 편의점에 들렀더니 (아마도) 점장님이 택배 단골손님이 오셨다느니, 1년 동안 받기로 해놓은 거를 끊을 수도 없고... 라는 등의 말들을 궁시렁궁시렁하는 것을 들으며 어색하게 하하, 웃고 나와서 민망해졌다(그리고 오늘 또 택배를 받아왔다). 서평에서도 언급한 「나는 편의점이 간다」의 화자가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이런 거였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지지난 주였나 그때에도 택배를 주면서(또 같은 사람이다) 사업하시냐는 질문을 받고 난감한 적이 있었는데..

소위 ‘장소 힐링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K-힐링이 유행하는 현상에 대한 거부감이 나에게 있는 듯하다. 바뀌지 않을 사회에 대한 낙담과 위안의 추구와 같은 현상이 읽혀서 그런가. 서평의 말마따나 “'서민'·‘소시민'의 생활과 도덕을 유지하는 것만도 모험이 돼버린 오늘날, 피로와 불안을 중지시킬 수 있는 '위안'과 '행복'의 가치는 결코 작지 않”기는 하지만, “돌파력을 충전한 소설”을 만나고 싶다는 욕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가득한 책들의 세계를 샅샅이 탐구하기엔 인생이 짧다...














권보드래, 「'K-힐링'과 소설의 노스탤지어」


소설이 근대적 양식으로 자립한 것은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성찰과 실존의 실험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문제를 드러내고 위선을 까발리고 고투 속에서 길을 찾으려는 노력 없이 소설은 존재하기 어렵다. 제1차 대전 후 세계 소설사의 전개가 보여 주듯 이야기보다 성찰과 실험을 중시하는 경향마저 강력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소설이란 '우리'의 모순을 고발하고 '나‘의 심연을 해부하는 글쓰기 양식이었다. 더 나갈 길에 대한 신뢰, 적어도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을 전제로 소설은 소설다울 수 있었다. 길이 막힌다면? '나'와 '우리'의 교차가 사라지다시피 한다면? 소설은 다른 글쓰기로 진화하게 되리라. 소설과 닮았으되 근대 소설과 판이한 무언가로. '사회적인 것'의 종언은 곧 소설의 종언이다. (188)


애초에 '우리'도 '사회적인 것'도 환상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비장애인·이성애자·남성의 좌표를 '우리'로 기만당한 역사가 있을 뿐이라고, 그러니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압력에서 해방돼 저마다의 해방을 교차시키자고, 그러면서 공존의 계기를 증식시켜 보자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환상을 상실한 곳에서 나는 불안하다. 혼란스럽다. 여러 갈래의 시선과 주장 사이에서 찢긴다. 차라리 아우성에 귀 닫고 사소한 관계와 취미와 도락 속으로 물러나고 싶다. 뉴스를 피하고 논쟁을 차단한다. 영화나 드라마가 요구하는 주의력조차 부담스럽다. 매일 10분 치 연재분을 먹는 웹소설의 생리에 익숙해진다. 성찰이나 실험은커녕 긴 이야기를 맛보는 것도 힘들어지고, 그저 일상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무용한 습관을 찾을 뿐이다. (188)


K-힐링과 웹소설은 좋은 짝패 같다. 웹소설의 전형적 주인공은 비인간적일 정도로 월등하다. 로맨스건 판타지건 무협이건 주인공은 실패와 후회로 점철된 1회차 인생 후 n회차 인생을 맞아 무쌍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퀘스트를 성취해 나간다. 시간을 거슬러 어렸을 적으로 돌아가거나(회귀) 다시 태어나는(환생) 건 예사고, 다른 시대를 사는 타인의 몸에 깃드는 일(빙의)도 자주 벌어지건만, 한결같이 과제는 분명하고 전략은 명쾌하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와 의미를 찾을 길 없는 고난과 명분 붙이기 어려운 우울 등은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주인공에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1회 차 인생의 경험이 예지·통찰·역량의 자원이 되는 가운데 그의 새로운 인생은 돈·지위·관계에서 사랑·인정에 이르기까지 오직 성공으로 이어진다. 요즘이라면 SNS로 전시하기 맞춤한 호화로운 일상도 부록처럼 따른다. '의미 잃은 존재'와 '길 없는 편력'이라는 근대 소설의 테마는 웹소설에서는 난센스다. (189)


반면 『불편한 편의점』의 인물들은 누구랄 것 없이 문제투성이다. 고립과 실패와 우울은 보편적이다. 회피하고 화내고 허세 부리지만 그들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계몽적이거나 시혜적인 접근은 질색하면서도 호의적 손길과 변화의 계기를 갈망한다. '바보 현인' 독고 씨는 그런 계기로서 맞춤한 존재다. 그는 우월하거나 열등하거나 또는 잘나거나 못난 위계를 교란하면서 참 투박하게도 친절을 베푼다. 원 플러스 원(1+1)이라며 옥수수수염차를 내밀고 폐기 식품이라면서 핫바를 데워 주고 전깃줄을 낑낑 끌어다 추운 날 야외 테이블 옆에 온풍기를 틀어 준다. 독고 씨, 나도 나도. 내게도 한 조각 관심과 돌봄을. 오래된 동네의 작은 편의점이라면 반쯤은 구멍가게일 수 있을 테니, 편의점과 구멍가게 사이 절묘한 균형을 부디. 궁금해하지 않되 진심으로 친절하게, 매뉴얼대로이면서도 나만은 조금쯤 멋대로 편안할 수 있게끔. 세상이 바뀔 리 없으니 작게나마 숨 쉴 공간을. (189-190)


한국 사회가 최종적으로 고향-농촌과 작별한 지도 오래다. 영화 〈집으로...>(2002)와 〈워낭소리〉(2009), 소설 『엄마를 부탁해』(2008)가 전 국민적 호응을 얻었던 그때쯤일까. 얼마 후에는 '응답하라' 시리즈(2012-2016)가 유행했다. 그것은 곧 작별이자 애도의 과정이었다. 가족과 이웃과 평생 가는 인연이라는 정답고도 지긋지긋한 세계에 대한. 이제 그 세계는 사라지다시피 멀어졌다. 생활이 소비 중심으로 압축되고, 소비는 프랜차이즈화되고만 오늘날, 나의 일상은 표준화 속에서 쾌적하다. 낯선 동네에서도 으레 편의점을 찾는다. 비위생과 비표준과 불친절의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으니까. 내 취향은 글로벌한 유통망과 트렌디한 신상품에 진작 길들었으니까. 그것이 자생적이고 토착적인 다양성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장소'는 사라지고 '공간'만 남겠구나 탄식하면서도. 노스탤지어는 달콤하지만 생활을 바꾸기란 막막하고도 힘겹다. (190-191)


책의 몫도 소설의 몫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그런 만큼 『불편한 편의점』이 100만 부 넘게 팔렸다는 소식은 일단 반가웠다(꼭 망원동에 건물 올려서 사시사철 <망원동 브라더스> 연극을 공연하실 수 있기를!). '서민'·‘소시민'의 생활과 도덕을 유지하는 것만도 모험이 돼버린 오늘날, 피로와 불안을 중지시킬 수 있는 '위안'과 '행복'의 가치는 결코 작지 않다. 그렇지만 동시에, 어떤 방향으로든 돌파력을 충전한 소설을 만나고 싶다. 서민적 위안과 소시민적 행복에 만족한다는 건 타협일 뿐 장기 지속의 해결책일 수 없으니까. 인간은 어리석게도 '삶 밖의 삶'을 포기하지 못하니까. 누구나 '지금·여기‘를 욕구 불만의 무한 연쇄가 아니라 희망의 계기로 살아 내고 싶어 하지 않는가. 다른 지평의 동력으로서 발본적 성찰과 모험이 간절하지 않은가. 나는 여전히 소설의 남은 가능성을 믿고 있나 보다. (194)


24.10.7.














『느티나무 수호대』 읽기. 『모두 깜언』의 주제를 이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다문화나 도시 재개발과 환경 문제 등의 연장선. 느티나무가 선생님으로 변하는 판타지가 가미되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


24.10.10.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가 밤 아홉 시쯤 스마트폰을 켰는데, 잠시동안 거짓말인 줄 알았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고???? 물음표와 느낌표가 순식간에 몰아쳤다가 사라지는 순간. 종종 한국 작가들의 해외 문학상 수상이나 후보작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한강 작가의 문학적 세계가 어느덧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구나... 라는 생각에 감개무량해졌다.















북플 기록을 돌아보면 내가 처음으로 읽은 한강 작가의 작품은 『바람이 분다, 가라』였다. 이상하게도 나는 「내 여자의 열매」를 먼저 읽은 것 같았는데... 제목이 주는 끌림 때문에 처음으로 구입해서 읽었던 것 같고, 이후에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소년이 온다』를 읽을 때는 장면장면이 주는 먹먹함에 책장을 넘기기 힘들었고, 『채식주의자』를 읽을 때는 몇 개의 강렬한 이미지들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도서 관련 팟캐스트들도 열심히 들을 때여서 자주 이야기를 들었던 『희랍어 시간』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뒷전으로 밀렸고, 당시의 나는 오만하게도 ‘이제 한강 작가의 작품은 충분히 읽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나왔을 때 잠시 궁금했던 기억이 있지만 찾아보진 않았었고...

사람들이 너도나도 서점을 찾고, 온라인 서점에서도 한강 작가의 책이 없어 구할 길이 없다는 즐거운 소식들이 들린다. 한강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10여 년 전의 내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돌아보고, 그때 멈추었던 한강 작가의 책들을 들춰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언제나 내 마음에는 쓸쓸한 비관론이 먼저 고개를 들어서 지금의 독서 붐이 순식간에 사그러들 것을 염려하지만, 이번 수상을 계기로 한국에서 독서를 향유하고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일상에 더 자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4. 9. 23.















서리북 15호 읽기. 대전과 광주에 대한 서평을 흥미롭게 읽었다. 왜 대전은 노잼도시로 이미지화되었는지, 왜 광주는 고층 아파트 밀집지역이 되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글들. 인기를 얻게 된 밈들이 도시의 정체성을 납작하게 만든다는 일침에 공감하면서도 어느 순간 나는 소제동이 핫플이구나 하면서 머릿속에 여행 갈 만한 곳으로 저장하고 있었다. 도시 계획과 실행의 역사에서 건설업의 부상과 부패 구조의 견고화의 산물로 만들어진 고층 아파트 단지와 자동차 이동 중심의 도시 광주를 읽으며, 복합 쇼핑몰들의 대거 유치의 과정에서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될 광주의 모습을 상상하며 씁쓸해지기도 했다. 결국 이 글들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지방 소멸로 질주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난장이다. 어떻게든 서울에 뿌리를 내려보고자 발버둥치는 나를 포함해서.















심채경_「당신의 블로그를 파헤쳐 납작한 대전을 만나다」


재미가 없다는 뜻의 키워드 '노잼'이 게임, 사람, 영화가 아니라 대전과 직결되기 시작한 것은 2019년부터다. 아이러니하게도 2019년은 대전시가 출범 70주년과 광역시 승격 30주년을 기념해 대전 방문의 해로 지정한 해다. 대전을 홍보하고 방문을 독려하자 '이렇게 노잼인데 놀러 오라는 것이냐'는 일종의 조롱이 되돌아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벼운 조롱이 혐오나 무관심이 아닌 놀림거리이자 유머 코드로 승화되며 밈으로 확산됐다는 것이다. (17쪽)


성심당을 향해 돌진하는 사람들은 대전의 구석구석을 탐험하지 않고, 오래된 도시가 품고 있는 역사를 탐색하지도 않는다. 새로운 장소에서 자신만의 재미를 찾거나 다르게 보이는 공간의 사연을 묻지 않는다. 그래서 대전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 공간이 지닌 기억과 감정, 그 속의 물질과 사람들의 특성, 그 모두를 복합적으로 느끼는 총체적인 경험을 장소성('sense of place‘ 또는 ’placeness‘)이라 할 때,(52) 성심당과 코레일이 약간의 돈을 버는 동안 대전은 장소성을 잃었다. (18쪽)


대전역 인근에 있는 소제동은 대전의 대표적인 구도심으로, 일제강점기에 철도 노동자를 위한 관사촌으로 번성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을 만큼 오래된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수십 년간 아무도 돌보지 않은 듯 무너진 벽 사이로 잡초와 넝쿨식물이 무성한데, 또 어떤 건물은 내부를 근사하게 리모델링하되 담장과 문패는 그대로 두어 레트로 감성의 카페, 식당으로 변신했다. 100여 년의 시간이 한데 공존하는 듯한 이 동네에는 별명이 있다. 2의 익선동. 오래된 한옥 마을이었다가 힙한 카페 거리로 변모한 서울의 익선동과 분위기가 비슷해서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분기하는 철도 요충지인 대전, 적산 가옥이 들어찼다가 전쟁 폭격으로 일부만 남았던 역사, 빈집이 절반 가까이 되도록 황폐해져 갔던 수십 년의 이야기가 '익선동'이라는 세 글자로 납작해진다. 소제동뿐인가? 봉명동은 대전의 홍대, 둔산동은 대전의 강남으로 불린다. 그러면 핫한 지역이라는 뜻이다. (20쪽)


지방도시의 매력은 서울을 기준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지방도시는 빠르고 확실한, 실패 없는 성공을 위해 지역 고유의 특성 대신 서울과의 유사성에 천착하기도 한다. 서울의 경리단길 같은 성공 사례는 신속히 복사, 붙여넣기 되어 전국 각지에 '리단길'이 조성된다. (21쪽)















박경섭_「전라도와 함께 지역 문제를 이해하고 극복하기」


1980년대 도시 계획의 수립과 1990년대 실행 과정에서 구도심 인구 과밀과 주택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시 외곽 곳곳에 택지 지구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고층 아파트가 대규모로 건축되었고, 호남 기반 건설사들은 급격히 성장해서 전국구 건설사가 되었다. 성장한 지역 건설사들 대부분은 지역 시민사회 단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지역 언론사의 사주가 되었다. 20216월 학동 참사가 자본, 언론, 권력의 결탁, 즉 부패 구조에서 기인한다는 책의 내용은 뼈아프다. 그리고 20221, 학동 참사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발생한 화정동 아이파크 붕괴 사고는 아파트의 도시 광주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32쪽)


광주는 2000년을 전후해 아파트와 자동차의 도시로 급속하게 변모했다. 글쓴이가 밝혔듯이 광주는 계획도시인 세종시를 제외하면 주택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도시다. 광주가 아파트의 도시로 변화하면서 달라진 것은 건설업의 성장과 부패 구조의 강화만이 아니다. 주거지인 아파트 단지와 일터로의 이동을 위해 승용차 중심으로 도로 교통이 구성되었으며, 생필품의 조달은 전통 시장보다 대형 마트가 담당하게 되었다. 아파트, 승용차, 대형 마트의 삼각 동맹이 광주의 새로운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32~33쪽)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 광주의 가장 큰 공장이자 가장 많은 노동자들이 일했던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이 자리 했던 방직 공장 부지에는 화력발전소와 고가수조 등 다수의 근대 산업 유산이 존재하고 있다. 광주의 시민사회 단체는 광주의 역사가 담겨 있는 산업 유산의 공적 가치에 근거해 시민 문화 시설과 산업 박물관이 건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신속한 행정 속에 대형 쇼핑몰 건립에 대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우려의 목소리는 묻혔고, 광주의 도시사와 산업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방직 공장의 공공성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지금도 심각한 교통 체증을 유발하는 유스퀘어(광주종합버스터미널)와 더현대 광주가 들어 설 방직 공장 부지는 불과 1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데, 이로 인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교통 문제 역시 숙제로 남겨졌다. 글쓴이는 민주당의 지지 기반을 흔드는 복합 쇼핑몰 이슈를 지역 지배 체제의 균열로 파악했지만 광주시의 발빠른 유치 작전을 보면 이러한 체제가 흔들릴 것 같지는 않다. (35쪽)

















기도를 위하여를 읽는 중. 김말봉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었는데, 작가소개에서 흥미를 느껴 도서관에 신청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망명녀는 내가 대학생 시절 언뜻 보았던 신경향파나 카프 문학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 아무래도 삼각관계의 구조가 함께 얽혀있어서일까. 작가정신의 소설, 잇다시리즈의 기획은 감탄스럽고, 뒤에 나올 박솔뫼의 작품은 어떻게 김말봉의 작품과 연결되어 있을지 궁금해진다.



다시 서리북 읽기. 밀양의 송전탑 문제에서 시작해 도시를 위해 희생당하는 농촌의 이야기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도시의 편리한 생활을 위해 농촌의 희생을 모두가(국가를 포함해서) 강요하고, 농촌-시골의 정치적 목소리는 적은 인구와 고령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일관된 기준 없는 보상으로 반대하는 이들을 매도하는 폭력성. 그렇다면 송전탑과 기타 시설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떤 과정을 밟는 것이 모두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일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만 남았다.














하승수_「곳곳이 밀양,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도시로 전기를 보내기 위한 발전소와 송전선이 농촌·어촌·산촌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도 농촌·어촌·산촌으로 밀려들고 있다. 발전원은 바뀌어도, 도시와 공장으로 전기를 보내기 위해 시골 사람들은 희생을 감수하라는 것은 똑같다. 도시로 보내는 것은 전기만이 아니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각종 공사에 필요한 토석을 채취하는 곳도 농촌이다. 그로 인해 주민들은 수십 년 간 소음, 진동, 분진에 시달려 왔다. 공장과 도시에서 배출되는 산업 폐기물 처리 시설이 밀려드는 곳도 농촌이다. 전기는 도시로 보내주고, 쓰레기는 농촌이 받아들이라는 식이다.

그리고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존중받지 못해 왔다.(47) 인구가 적고 고령화되었다는 이유로 무시당해 왔다. 주민들이 난개발과 환경 오염 시설에 반대하면 '님비(Not In My BackYard, NIMBY)'로 몰아붙인다. (55~56쪽)


그러나 전국 곳곳에 있는 밀양 할매들은 어렵고 외롭다. 동해 안의 신울진 원전 단지에서 출발하는 50만 볼트 초고압 송전선 때문에 강원도와 경북 일대에서도 밀양 같은 상황들이 발생하고 있다. 한전은 주민들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조장하는 매뉴얼을 들고 이 지역을 휘젓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밀양에서 다 해본 일들이다. 밀양을 봐라. 거긴 그렇게 심하게 반대했는데 결국 우리가 송전탑 세웠다. 우리가 못할 것 같냐. 싸워봤자 어르신만 힘들 뿐이다”(135)라고 얘기한다. (61쪽)


싸우는 이주여성들에 대한 글도 인상적. 결국 필요한 건 선민의식이 아닌 구조의 변화. 신자유주의가 국내 노동자를 이주노동자의 처지와 같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을 인상깊게 보았다.















채효정_「타인의 목소리가 나의 목소리가 될 때」


처음 책 제목을 봤을 때 나는 기록 노동자 희정이 성소수자들의 노동을 추적한 르포인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오월의 봄, 2019)를 떠올렸다. 바로 옆에서 일하는 퀴어를 보지 못하는 건 당사자들이 커밍아웃을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변에서 그들을 '당연히 없는(또는 퀴어가 아닌)' 존재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나는 우리 옆에서 일하는 이주여성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직장 동료, 학교의 교사나 학부모, 옆집 사람 등 시민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관계로 만나지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도시를 지탱하고 있지만 대부분 한정된 특수 직종에 종사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일하고 있다. 지방 소도시나 농촌 지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서울이나 수도권에 비해서는 훨씬 더 잘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삶에 더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농촌 지역에서는 이주 배경 학생이 없으면 학교가 유지되기 힘든 지역도 상당하다. 이처럼 이주에 대한 감각은 지역에 따라서 달라진다. (66쪽)


인력 외주화의 논리는 지금도 여전하다. 개인에게 돌봄의 짐을 지우고 국가와 사회가 돌봄을 돌보지 않은 탓에, 이제 돌볼 사람도 없고 돌봄 비용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니 '비싼 도우미 비용'을 탓하며 '(값싼) 외국인 가사도우미 수입'을 해법이라고 내놓는 것도 그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오도 가도 못하고 발이 묶여 돌봄 대란을 치러야 했던 팬데믹을 겪고도 반성이 없다. 이주의 시대가 한 세대를 지나고, 한국은 농촌도, 산업도, 돌봄도,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들이 없이는 지탱할 수 없는 곳이 되었지만 한국 사회는 그들을 그만큼 고마운 존재로 대접하지 않는다. 문제가 생겼으니 다문화 가족 정책도 생겼을 테지만 무엇보다 한국 노동자들에게 시킬 수 없는 일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시켜도 되는 것인지, 한국 여자들이 기피하는 삶을 외국 여자들에게는 강요해도 되는지, 근본적 질문은 제대로 물어지지 않았다. '국민'은 평등해야 하지만 '비국민'은 차별해도 되는 것인가. (68쪽)


자본의 이동과 노동의 이동이 엄연히 다름에도, 마치 자본과 노동자들이 똑같이 이동의 기회를 가진 것처럼, 노동자를 선택할 수 있는 기업의 권리와 회사를 선택할 수 있는 노동자의 권리가 동등한 것처럼, 직업과 직장의 다양성과 선택의 자유를 부추기던 신자유주의의 속삭임에 많은 이들이 속아 넘어갔다. (69쪽)


이주여성이라는 호명에는 '이주여성'으로 범주화되는 특정한 이주의 경로가 내재해 있다.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이주, 자발적이기보다 비자발적인 이주, 빈국에서 부국으로, 남반구에서 북반구로의 이주 경로가 '이주'라는 말에 담겨 있다. 이 경로는 곧 차별과 불평등의 경로이기도 하다. 유럽의 이주노동자는 동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오고, 미국의 이주노동자는 남아메리카에서 오며, 한국의 이주노동자는 주로 중국과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온다. 외국인이라도 미국이나 유럽에서 왔으면 대우가 달라지고, 이주노동자라도 몸집이 크고 외모가 유럽인에 가까운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출신은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인들의 보편 의식으로 깊이 새겨져 있는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민낯을 마주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식민지로, 해방 후에는 미국에 종속된 나라로, 인종주의적 차별과 폭력을 끔찍하게 경험한 곳임에도, 왜 우리는 그 차별의 기억을 차별하는 자의 우월감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일까. 가해자의 위치에서 차별당한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는 책의 전반부는 부끄러움과 슬픔으로 점철된다. (69~70쪽)


신자유주의화가 불러온 노동계급의 파편화, 고립화, 내부 난민화는 국내 노동자의 상황을 이주노동자와 점점 유사하게 만들었다. 임노동 체제의 바깥으로 내밀어진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은 오랫동안 무가치화되고 비가시화되었던 여성 노동의 형태와 점점 유사해졌다. 이런 양상을 두고 북반구 산업 선진 국가 내부의 노동 형태가 남반구 노동과 유사해지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국내 노동자들도 이주노동자화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젠더와 국경을 가로질러 증대되는 이주와 노동의 취약성은 그 취약성을 공유하는 이들의 공통성이 되기도 한다. 파편화되고 고립된 삶에 맞서 커뮤니티를 만들어 내고, 서로의 취약성에 공감하고 필요한 요구의 공통성을 확인하며 연대하며 싸워 나갔던 이주여성들의 이야기가 지금 파편화되고 고립되어 있는 수많은 노동자 민중들에게 필요한 영감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면 좋겠다. "나중엔 이주노동자들도 돕는 공간이 되고 싶어요. 처음엔 우리 힘든 것만 보였는데" (143)라고 부티탄화 옥천군결혼이주여성협의회 회장은 말했다. 그 말은 자신이 겪은 차별에 저항하는 싸움을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그 싸움이 자신의 것만이 아님을 깨달아 가는 사람의 말이었다. (75쪽)


24. 9. 24.

기도를 위하여읽기. 단편 고행을 읽었다. 흔한 치정 이야기지만 등에와 오줌의 서스펜스가 주는 코미디.



알라딘에서 주문한 책을 받으며 문지 스펙트럼 에코백을 이미 주문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또 골랐다는 것을 깨달았다산 책을 깜빡하고 또 산 적은 없는데 굿즈를 또 사다니.



서리북 읽기. 김홍중의 글을 오랜만에 보았다. 유머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코엔 형제의 영화와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통해서 풀어낸 점이 인상적. 이전에 읽으면서 김홍중의 '이마고 문디' 코너가 난해하다는 느낌이 종종 있었는데 이번에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유머가 지닌 힘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던 계기.















바로 이 지점에서 코엔 형제는 자신들의 철학을 전면화한다. , 문제는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문제의 외부로 나갈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새로 다가오는 문제는 불길하고 무시무시해 보이지만, (이미 지나간 모든 문제들이 그러했듯) 언젠가 슬그머니 소멸할 것이라는 사실을. <시리어스 맨>의 이념은 이것이다. 문제가 인간의 불가피한 존재 조건임을 깨닫고 나면,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랍비들이 충고하듯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 인생은 문제들의 영겁 회귀야. 끝없이 밀려오는 문제들을 그냥 살아 내라고. 이 내재적 세계의, 생성의 영원함을 믿으라고." (111쪽)















발터 벤야민에 의하면,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가 상례임을 가르쳐 준다." 패배자들과 약자들에게 파국은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다. 파국 이후의 번영에 대한 믿음은 승자들의 안이한 시간 감각이다. 약자의 입장에서 보면, 파국 이후에는 또 다른 파국이 올 뿐이다. 그들이 반복되는 역사와 인생의 고난을 통해 배운 교훈은 이것이다.

그들은 문제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헐벗을' 뿐이다. 더 강해지거나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지고 부서지고 다치고 고장 난다. 약자들에게 문제는 기회가 아니라 순수한 위험이다. 생존의 위험, 파멸의 위험, 치유 불가능한 상처의 위험. 이런 위험들 속에 던져진 채 그들은 '구원 가능성'을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구원 가능성은 밝은 미래에의 낙관이 아니라 그런 낙관이 불가능할 때 솟아나는 부조리한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환각처럼 지금 눈앞을 휙 지나가는 순간적인 느낌. 웃음이라고 해야 할까? 깨달음이라고 해야 할까? 마음속에서 뭔가가 저절로 내려놓아질 때, 꽉 차 있던 존재에 텅 빈 자리가 만들어질 때, 그때 비로소 내려 오는 빛이나 숨결 같은 것. 작고 미약한 힘. (112쪽)


하여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는 낙관주의자가 아니라 파국주의자의 언어다. 파국주의자는 안다. 긍정적인 자들이 그리는 장밋빛 미래는 허구라는 것을. 언제나 행복한 종합으로 귀결되는 변증법은 가진 자들의 오만한 논리라는 사실을. 패자들, 약자들, 떠도는 자들은 안다. 삶은 그저 파국이며, 그 밖으로 가는 기적적 출구는 없음을. 이런 순수한 내재성을 긍정하는 자들만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다. 슬픔과 웃음이라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교차하는 불가사의한 공간. 유머는 그 공간에서 솟아 나온다. (112~113쪽)
















1905년의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두 명의 '유머리스트' 사형수 이야기를 제시한다. 첫 번째 실례는 월요일에 교수대로 끌려가는 도둑이 ", 이번 주는 시작이 좋군"이라 말하는 경우다. 이어 프로이트는 "처형장으로 가는 도중 감기 들지 않도록 목에 두를 머플러를 달라고 요청하는" 사형수를 거론한다. 유머란 이런 것이다. 유머를 말하는 자는 "현실적인 이유들 때문에 마음 상하고 고통받기를 거부하며 외부 세계로부터의 외상(外傷)이 자신에게는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정신승리적' 주체다. 유머를 통해 주체는 "자아의 불가침성을 만방에 천명한다. (113~114쪽)


1923년의 논문 유머에서 프로이트는 유머리스트의 주체성에 대해 좀 더 상세한 분석을 시도한다. 그에 의하면, 유머리스트의 자아는 두 상이한 심급으로 쪼개져 있다. 한편에는 문제적 상황에 처해 있는 (곧 사형을 당하게 되어 있는) 자아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이 자아를 굽어보면서 마치 자신에게는 결코 죽음이 도래하지 않을 듯이 말하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 프로이트는 이 두 번째 자아가 사실은 '초자아(超自我)‘라고 본다.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위대한 부모의 이미지를 모델로 형성된 초자아는 자아가 마주하고 있는 리얼리티의 위중함 따위는 손쉽게 부정한다(성인의 눈에 아이들의 문제가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프로이트는 말한다. 유머란 초자아가 자아에 대해 취하는 이 고압적 태도에서 나오며, 유머 속에서 초자아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보아라, 이것이 그렇게 위험해 보이는 세계다. 그러나 애들 장난이지. 기껏해야 농담거리밖에는 안되는 애들 장난이지!" (114쪽)


비극의 주체는 (오이디푸스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처형하는 권력 앞에 침묵하며 법의 심판을 수용한다. 하지만 처형을 통해 역설적으로 비극의 주인공은 불멸의 개체성을 획득한다. 이런 점에서 비극은 숭고를 동반한다. 하지만, 유머의 주체는 침묵도, 불멸도, 부활도, 숭고도 알지 못한다. 사형수는 법에 의해 곧 목숨을 잃을 존재다. 그런데, 그는 지금 감기를 걱정하고, 날씨를 생각하고, 계단을 이야기한다. 목에 머플러를 둘러 달라 말한다. 육신에 대한 이런 본능적이고, 즉물적이며, 유물론적인 관심은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결코 약화되지 않는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살()의 욕망과 감각을 잃지 않는다. (115쪽)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유아적이고 생리적인 집착이 법의 권위를 흔드는 효력을 발휘한다. 처형장 유머에 웃음을 터뜨리는 자는 이렇게 묻게 된다. 저처럼 처절하게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의 목을 자르는 ''은 과연 정의로운 것인가? 유머가 "심판 없이 행해진 정의"이며 "심판 없는 처형 행위"라는 벤야민의 통찰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유머에 "괴물적인 것"이 있다면, 이 괴물성은 생명의 종식 불가능성, 기괴한 불멸성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유머 안에는 죽여도 죽지 않는 것, 죽일 수 없는 것, 죽음을 알지 못하는 것, 우리 인격 속에서 부단히 움직이는 괴물적 생명성, 그러나 언제나 상처와 박탈과 소멸의 위협에 시달리는 생명성의 절박한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살고 싶다, 나는 불멸이다, 이렇게 외치는 목소리가. (115~116쪽)


유머는 죄인들을 심판한다고 주장하는 법의 맹목성, 추상성, 형식성, 자의성을 폭로한다. 법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묻게 한다. 법의 정당성에 균열을 낸다. 경찰, 검사, 판사의 권력은 유머 속에서 도리어 심판의 대상이 된다. (116쪽)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분열 분석이 명철하게 드러낸 것처럼, 프로이트는 욕망을 오이디푸스 삼각형(아빠-엄마-아들) 속에 가두어 버리고, 그 가공할 힘을 순치하고자 했다. 유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절차가 수행된 듯이 보인다. , 프로이트는 유머를 사회적 권위(초자아)에 귀속함으로써, 유머에 잠재해 있는 불온성과 비판성을 은폐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유머 이론도 수정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유머의 참된 발화자는 초자아가 아니라 '이드(ld)'인 것이다. 죽음도 부정(否定)도 시간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 욕망의 흐름으로 기계 작동하는 '이드'가 바로 유머리스트의 숨은 실체다. 따라서, 유머리스트는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하는 '고아=무신론자=탈주자'. 다스릴 수 없는 민중의 근원적 저항성이다. 비인간적·반사회적 생명력, 진압할 수 없는 욕망 기계다. (116~117쪽)


바로 이런 점에서, 유머는 구조적으로 슬픔과 분리할 수 없다. 유머는 웃긴 만큼이나 슬픈 것이다. 모든 것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자가 주는 웃음이 유머기 때문이다. 상실의 깊이가 유머의 통렬성과 비례한다. 풍자나 농담이나 위트와 달리 유머에는 비탄의 날카로운 편린이 박혀 있다. 영화사에서 이런 유머리스트의 주체성을 가장 탁월하게 형상화한 존재는 찰리 채플린이 연기한 '떠돌이 찰리'. 그의 유머는 언어를 넘어서 몸짓 전체로, 존재 전체로 확장되어 있다. 가는 곳마다 곤경에 빠지지만 좌절하는 일 없이, 찰리는 부단히 움직여 나간다. 어떤 권력, 폭력이나 악의, 간계도 손상을 입힐 수 없다는 듯, 어떤 고난이나 문제도 생명을 해칠 수 없다는 듯, 찰리는 유머리스트 특유의 불굴의 무사태평함을 유지하며 미국 자본주의의 정글부터 파시스트 소굴까지, 서커스 무대에서 컨베이어 벨트까지, 서부 탄광으로부터 권투 경기장까지 천연덕스럽게 횡단한다. (117쪽)


카우리스마키의 스타일은 '미니멀리즘'으로 대표된다. 초기작부터 그는 "금욕주의, 간결성, 생략주의(ellipticism), 무표현적 연기"를 추구해 왔다. 대사는 최소화되어 있고, 인물들의 표정도 가면을 쓴 듯 내향적이고 검약적이다. 한 인터뷰에서 카우리스마키는 자신이 오즈 야스지로를 매우 좋아하며, 일본 영화 특유의 장식 없는 정직성을 높게 평가한다고 토로한다. 이것은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예술적 원리가 "축소""단순성"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119쪽)


이들이 보여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것, 죽일 수 없는 것, 파괴할 수 없는 것, 손상시키거나 굴복시킬 수 없는 것. 비인간적이고 맹목적인 생명의 충동. 인간-너머의, 목숨-너머의 생명성이다. 언데드(undead). 20세기 정신분석학은 인간 정신에 내재하는 이 괴물적 힘을 '죽음 충동'이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다. 우리가 흔히 잘못 이해하는 바와 달리,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죽음 충동은 자살에의 의향, 죽고 싶다는 생각, 소멸을 향한 자연적 경향, 혹은 엔트로피 같은 것이 아니다. 죽음 충동은 죽음과 무관하다. 반대로 그것은 생명의 끈질기고 강렬한, 유기체가 결코 체험할 수도 없고, 인지할 수도 없는 '-유기체적 생명성'을 지시하는 용어다. 주체를 무의식적으로 강박하여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행위마저도 끝없이 반복하게 만드는 마성적 힘. 바로 그런 의미에서 죽음 충동은 "생명이 항상 그 자신을 초과(exceed)하는 방식"이자 "살아 있으라는 순수한 압력"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124쪽)


코엔 형제의 영화적 이념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로 집약될 수 있다면, 카우리스마키 시네마의 이념은 "인생은 영원히,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 항상 다시 시작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진정하고 유일한 리듬이다. 실업에 빠지면 다시 직장을 구하고, 헤어지면 다시 만나고, 빼앗기면 다시 획득하면 된다. 다치면 회복하고, 또 다치면 또 회복한다. 하지만, 도저히 다시 시작할 수 없을 정도로, 도저히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도저히 다시 시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파괴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랍비 마샥이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가사를 빌려와 래리의 아들에게 물었듯이, "진실이 거짓으로 밝혀지고,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놀라운 해답을 제공한다. (125쪽)


당신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 그래서 다시 시작할 어떤 힘조차 없을 때, 바로 그때 타인들이 나타난다는 것. 누군가 나타난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다. 실제로, 그의 영화에서 누군가 다쳤을 때, 누군가 버려졌을 때, 누군가 곤경에 처했을 때, 누군가 아플 때, 어김없이 사람들이 나타난다. 누군가 비열하게 폭행을 당할 때, 사람들이 꾸역꾸역 나타나 폭력에 맞선다. 붕대를 감아준다. 밥을 준다. 노래를 부른다. 손을 내민다. 악인들이 약자들을 파괴시킨다는 점에서 이 세상은 일종의 지옥이다. 하지만 불멸하는 생명의 힘이 약자들로 하여금 계속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세상은 '유머러스한' 지옥이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그 유머러스한 지옥에는 언제나 선인(善人)들 이 있다. 착한 사람들이, 그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뻗는 손들이 있다. ()은 악()의 발생을 막지는 못하지만, 악이 극단으로 흘러 가는 것을 어느 지점에서 끊어 낸다. 중지시킨다. 그렇다고 지옥이 천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느냐라고 수많은 철학자들이(가령 C.W.L. 라이프니츠) 물었다. 하지만, 카우리스마키 영화는 그 질문을 뒤집는다. 세상은 늘 지옥인데, 왜 지금까지도 악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는가? 왜 선은 이토록 완강하게 잔존하는가? 왜 착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타나는가? 선은 왜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가? (125~126쪽, 강조는 인용자)


사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최근에 <사랑은 낙엽을 타고>만 보았는데, 잔잔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심상하게 다루는구나 정도의 느낌만 받았고 깊은 인상을 남기진 못했었다. 이번 글을 통해 다시 찾아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24. 9. 25.

다와다 요코의 글자를 옮기는 사람읽기. 단어들의 파편에서 길을 잃고 정처없는 번역가의 발길에서 또 길을 잃는다. 오래전 배수아의 뱀과 물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책도 다 읽지는 않았다. 몇 가지 이미지만 강렬하게 남았을 뿐).
















단어들이 이어지지 않은 채 원고지에 흩어졌다. 모두 이어서 문장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생각만 들고 거기에 필요한 체력은 최소한도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체력보단 폐활량이 모자랐다. 하나의 문장을 천천히 숨을 쉬며 읽고 거기서 꾹 하고 한 번 숨을 멈춘 다음 머릿속에서 뜻을 풀이하고 어순을 정리할 것, 그리고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면서 풀이한 문장을 쓰는 것이 요령이라고 번역가 에이 씨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단어 하나를 읽는 데도 숨이 차서, 힘들어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다음 단어에는 거의 도달하지도 못한다. 그래도 적어도 나는 단어 하나하나의 낯선 감촉에 충실한 편이고 지금은 그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단어 하나 하나를 조심스럽게 건너편 강변에 던지는 느낌이 있었 다. 그래서인지 전체가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전체를 다 생각할 여유는 없다. 전체는 아무럼 어떠냐는 생각까지 들었다. 번역이란 것이 '건너편 강변에 건네는 것'이라면 '전체'쯤은 잊어버리고 이렇게 작업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어쩌면 번역은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변신 같은. 단어가 변신하고 이야기가 변신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그런 모습인 양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늘어선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나는 분명히 서투른 번역가다. 나는 말보다 내가 먼저 변신할까 봐 몹시 무서울 때가 있다. (22~23쪽)


24. 9. 28.

글자를 옮기는 사람완독. 단조로우면서 고요하고 요상했던 일상이 갑자기 초현실적인 추격극으로 바뀌었을 때 느껴진 이야기의 낙차. 번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창의적인 대답처럼 느껴진 소설이었다. 요약하면 번역은 변신이다’? 낯설게 하기의 변신 버전 같은 답변으로도 느껴진다. 작가의 여행하는 말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책. (그리고 곧 구매했다)


즉 번역은 원본이 다른 언어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원본이 변신하는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번역문은 원본과 전혀 다른 새롭게 태어난 글이고 그 이질성만으로 충분히 원본과 다른 가치가 있다. 또한 번역은 글만 변신하는 움직임이 아니라 글을 쓰고 있는 사람도 변신하는 움직 임이라는 말이 읽는 사람을 사로잡는다. 익숙치 않은 외국어를 나의 익숙한 언어로 옮기려면 단어 하나를 두고도 수없이 대조하고 연상해야 하는데, 대조와 연상은 글을 쓰는 사람의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행위다.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거나 손가락으로 사전이나 참고 서적을 뒤적거려 보는. 따라서 변신은 이 행위를 하는 동안 번역가가 어떤 곳에 도달했을 때의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92~93쪽)


주인공이 성 게오르크 전설을 번역한다는 점 그리고 주인공이 머무르는 카나리아 섬이 15세기에 스페인이 식민지로 점령하고 기독교 개종을 강요했던 나라라는 점은 모두 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상대화하고 이 소설을 문명 이면의 이야기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섬을 머나먼 자연의 풍경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경계한다. 문명이 휩쓸고 지나간 장소를 무해한 자연으로 대하는 태도 역시 그 장소에서 벌어지는 삶들을 지우는 일이다. "무심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을 뿐인데 관광객의 시선으로 바다를 보는 것 같아서 창피했다."(11), "아름다운 청년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자유 침해지만 내가 그런 관광객이나 할 법한 말을 하려고 섬에 온 것도 아니고 설사 내가 아이스크림을 판다 해도 관광객이 그런 말을 했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54) 햇볕이 내리쬐고 바다가 너울거리고 사람들이 농업과 무역에 의존해서 사는 아름답고도 각박한 섬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는 주인공의 고민일 뿐만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도 던져지는 고민이다. (95쪽)


비록 단어가 뚝뚝 쉼표로 끊기고 뜻이 불분명한 번역이지만 바꿔 말하면 우리에게 상상의 여지를 많이 남긴다. 이렇게 언어의 마찰 속에서 상상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바로 다와다 요코가 추구하는 번역이다. 위의 인용에서 번역을 변신에 비유했듯이 번역은 한 단어를 비슷한 뜻의 다른 단어로 교체하는 것이 아닌, 다른 뜻, 다른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 다른 형태의 글자, 다른 소리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다른 느낌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어쩌면 원문 단어에 대응하는 비슷한 뜻의 번역문 단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와다 요코는 이렇게 번역이 맞아떨어지지 않아 틈새가 벌어지는 곳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려고 한다. 옮긴이가 이전에 옮겼던 문학 에세이에서도 그러한 자기의 작품 세계를 밝힌 바 있다.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다리를 건너는 것보다 빈틈을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빈틈에서 하는 새로운 발견이란 이를테면 출발어와 도착어의 최초 모습을 찾아내는 발견이다. "[일본어의] '나날[月日]'[독일어의] '해와 달[Sonne und Mondl]로 풀이하듯, 오역으로 느낄 정도로 직역을 하는 것은 우리를 말의 원점으로 되돌린다. 또 오랫동안 비유로만 쓰여서 원점에서 멀어진 노쇠한 말을 다시 살려 낸다.” (96~97쪽)


하지만 주인공이 달려가는 마지막 모습에서 불안이나 위기보다는 탈출의 기쁨과 안도감이 느껴진다. 번역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서 탈출한 기쁨이고 번역을 다 끝낸 뒤의 안도감이다. 그리고 바다로 들어갈지 말지 망설이는 모습에서 옮긴이는 주인공이 여전히 번역 작업 속에 머무르고 있음을 느꼈다. "번역은 내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작업"(45)이기 때문이다. 후반부 소동은 주인공이 자고 난 뒤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 주인공의 꿈으로 읽을 수도 있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주인공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품은 환상 속 변신으로 읽을 수도 있다. 꿈이라면 주인공은 꿈속에서도 망설이고 있는 것이고, 글자를 옮기는 사람은 그렇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작업"인 번역을 상징하며 끝나는 소설이다. (10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자들의 삶의 태도를 길잡이 삼아 떠나는 인생 성찰기. 누구에겐 깊이가 없다고 생각될 수 있겠으나 철학자들을 이렇게나 친근하고 가깝게 풀어낸 책도 드물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여정 끝에 얻은 결론들이 흔한 말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를 삶에 체화하는 건 또다른 문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4. 9. 18.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읽기. 책의 마지막에 늙어감과 죽음을 배치하다니 전략적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읽는다. 보부아르와 몽테뉴에 대한 이야기들.



보부아르는 젊었을 때부터 노화에 집착했다. 죽음보다도 노년을 더 두려워했다. 보부아르는 죽음은 “절대적 무"이기에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년은? ”노년은 삶의 패러디"다.
보부아르의 오래된 파트너이자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는 노년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 만 절대로 온전히 내면화할 수 없는 상태, 오직 다른 사람들만이 이해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가 늙어 보이고, 늙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누가 봐도 늙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자신이 늙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노화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자기 나이와 충돌하고 12년이 지났을 무렵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예순셋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 사실이 낯설다."



고대 그리스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두 개 있었다. 바로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다. 크로노스는 일반적인 시간이다. 시계 속의 분, 달력 속의 달이다. 카이로스는 딱 맞는 적절한 때를 의미한다. 무르익은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카이로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키케로는 말한다. “모두가 오래 살고 싶어 하지만, 막상 나이가 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한다." 왜일까? 노년은 그리 나쁘지 않다. 나이가 들면 우리 목소리는 더 듣기 좋아지고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더욱 즐거워진다. "지식과 배움에 시간을 쏟는 한가한 노년보다 인생에서 더 만족스러운 것은 없다." 키케로는 결론 내린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한다. 개소리. 보부아르는 키케로의 쾌활한 평가를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노년을 똑바로 바라보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가 바로 읽기 쉽지 않은 585페이지짜리 책, 《노년》 이다.




보부아르가 보기에 노화는 타인이 내리는 문화적·사회적 판결이었다. 배심원이 없으면 판결도 없다. 무인도의 여성은 생물학적 노쇠를 경험하겠지만 나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역할과 자신의 본질을 혼동한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타인에게 사로잡혀 있"으며 타인의 시선대로 스스로를 바라본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진정성이 없다(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단어는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이우텐테스authentes에서 나왔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한다. "노년이 이전 삶에 대한 터무니없는 패러디가 아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목표를 추구하는 것, 즉 개인과 집단에, 대의명분과 사회적•정치적•지적•창의적 작업에 헌신하는 것이다."




그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무가치함 때문에 자신의 일에 스스로를 던지면 된다. 카뮈는 이렇게 말한다. "시시포스의 운명은 그 자신에 게 달려 있다. 그의 돌은 그 자신의 것이다. ····•돌 속의 작은 원자 하나하나, 어둠이 내린 산의 작은 광물 조각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의 꼭대기로 향하는 그 투쟁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보부아르는 카뮈의 부조리주의에 온전히 동의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열렬한 영웅주의"라 부른 것을 받아들이고 일 자체가 가진 마법을 즐거움으 로 삼았다. 보부아르는 괴물로 가득한 방 안에 서서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더 많은 괴물을 만들어냈다.



몽테뉴 읽기.



죽음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든다. 가장 생각 없는 사람도 어느 시점에는 반드시 궁금해한다.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음은 두려워할 일인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지? 죽음은 진정한 철학을 가리는 테스트다. 인생에서 가장 중대하고 겁나는 사건에 대처할 수 있게 도와주지 못한다면 철학이 다 무슨 소용인가?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지혜와 이론의 핵심은 결국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





몽테뉴는 자기 철학이 아닌 자기 자신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스인들은 "너 자신을 알라"고 간청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몽테뉴는 알려준다. 우리는 시도하고 실수하고 시시포스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함으로써 스스로를 알 수 있다.



프랑스어로 에세이assay는 '해보다'라는 뜻이다. 에세이는 실험이자 시도다. 몽테뉴가 쓴 에세이들도 하나의 거대한 시도다. 무엇에 대한 시도냐고? 스스로를 더 잘 알기 위한 시도다. 몽테뉴는 삶을 잘 살아내지 않고서 잘 죽을 수 없었고,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지 않고서 삶을 잘 살아낼 수 없었다.



24. 9. 19.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완독. 몽테뉴 관련 장의 나머지 부분과 나가는 말을 읽었다. 몇 군데에 더 밑줄을 쳤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한 생각들. 뻔하다면 뻔한 내용일 수 있지만 삶에 체화시키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니까. 철학자들의 삶과 태도를 이토록 친근하게 풀어낸 것만 해도 성공적.






24. 9. 22.
















보난자커피에서 겨우 자리를 잡고 『아무튼, SF게임』 읽기. 책에서 나온 게임들을 잠시 정리해본다. 보더랜드, 폴아웃 뉴베가스, 호라이즌 제로 던, 바이오쇼크, 투 더 문-파인딩 파라다이스-임포스터 팩토리, 디트로이트:비컴 휴먼, 스탠리 패러블, 디스코 엘리시움, 하데스, 스타듀 밸리, 스텔라리스, 스펙 옵스:더 라인, 엑스컴, 매스 이펙트.


성공한 덕후가 자신의 취향을 소개할 때의 들뜬 기분이 글의 저변에 흘러서 즐겁게 읽었다. 오랫동안 폴아웃 시리즈의 팬으로서 거의 모든 결말과 컨텐츠를 속속들이 알아내고자 수십 번 플레이를 했던 입장에서 더더욱. 마냥 가볍게 읽히는 것은 아니고 후반부로 가게 되면 오랜 플레이어로서 게임의 폭력성에 대한 딜레마의 문제, 게임 내 다양성 문제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4. 9. 4.














『아가미』를 읽다가 우리가 점점 쓰지 않아 잊혀져가는 단어들에 대해 생각한다. 구병모 작가의 책을 읽다보면 사전을 검색할 일이 많은데, ‘도스르다’, ‘해토머리’와 같은 단어들을 보고 낯설음을 느낄 때가 잦다. 오래 전 김연수 소설을 읽을 때 느꼈던 감각. 오늘날 이런 단어들을 탐색하는 작가는 내 좁은 독서 범위에선 더 이상 없는 듯하다. 사라지는 것들을 눈으로 마주했을 때의 쓸쓸함.















서리북 ‘고전의 강’ 코너를 인상 깊게 읽었다. 진화심리학 분야 대중과학서의 고전을 뜯어보며 진화심리학이 갈 길은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서평. 『센스 앤 넌센스』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서평이었다. 서평 도서는 로버트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


24. 9. 5.















크레마를 꺼내 놓았다가 그대로 두고 퇴근하는 바람에 카페에 왔지만 읽을 책이 없다. 알라딘 이북앱으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읽기. 공자의 테마를 친절로 설정한 것이 흥미로운 지점이다.


24. 9. 9.

『아가미』 완독. '이게 이렇게 끝난다고?'라는 생각에 당황. 축축하고 때로는 동화적인, 때로는 섬세한 상황 묘사를 특유의 만연체로 건조하게 서술해 순식간에 읽게 되지만, 정작 곤의 심리를 깊게 탐구할 기회는 적다. 아가미를 가지게 된 곤보다 그 주변 인물들에게 더 시선을 주는 이야기.


24. 9. 10.














더 늦기 전에 스캔론의 계약주의를 정리하자.


하버드대학교에서 스캔론의 제자로 수학한 히에로니미는 계약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동료 중 한 명이 또 다른 동료와 울창한 숲속에서 뒤엉켜 싸우는데 서로 30미터 정도 떨어진 참호에서 서로를 향해 총을 쏘며 몇 년째 전쟁 중이라고 해보자. 심각한 교착 상태다. 둘 중 어느 한쪽에게도 유리한 상황이 아니며 앞으로도 희망은 없다. 결국 지친 나머지 휴전 협정을 맺고 둘 다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로 한다. 양쪽의 관점이 얼마나 다르든(전쟁이 끊이지 않은 것을 보면 그 관점이 얼마나 심하게 달랐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규칙이 필요하다. 여기서 스캔론은 이렇게 제안한다. 양쪽 모두에게 지금까지의 모든 규칙을 거부할 권한을 준 다음 규칙을 새로 만들게 한다. 모두가 규칙을 만드는 일에 적극적이라 가정하되 (둘 다 합리적이라는 전제) 한번 통과한 규칙은 다시 거부할 수 없다. 이 경우 상대를 위한 규칙을 만들지 않으면 규칙으로 통과할 수 없으므로 결국 모두가 서로 다른 사람에게 정당한 규칙을 설계한다. 모두를 하나로 묶는 사회적 기본 끈끈이를 찾는 간단하고도 우아한 방법이다. (123~124쪽)



그런데 여기에는 모든 사람이 '합리적이라는’ 커다란 전제가 있다. 이는 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점으로 철학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여기서 확실히 정의하고 넘어가야 한다. 스캔론은 '합리적'이라는 부분을 쉽고 간단하게 정의하지 않는데…,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본질은 이러하다. 나와 누군가가 서로 동의하지 않을 때 상대방이 자신의 이익 추구를 억누르거나 조절하는 만큼 내가 내 이익 추구를 억누르거나 조절하려 한다면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모두를 위한 규칙을 만들고자 한다면 자신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서로의 필요를 충족해주는 세상을 만들기를 원하며, 무언가를 놓고 모두의 생각이 같지 않을 때도 모두가 조화롭게 공존할 방법을 찾는 걸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긴다. 스캔론은 "사람들이 상대방도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정당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필요를 바꿀 의지를 공유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려면 모든 사람의 의지가 같아야 하는데 스캔론은 이 계약서에 모두가 서명하기를 바랐다. (124쪽)



그렇다고 갈등이 있을 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결정을 맡겨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스캔론의 세계에서는 다른 사람 역시 갈등을 마주했을 때 반대편에 있는 우리에게도 상황이 정당하도록 자신의 이익을 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이로써 끊임없이 변화하는 팽팽함이 조성되며 모든 사람이 타인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과 동일시한다.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고 똑같이 중요한 상태가 된다. 이제 히에로니미가 내게 스캔론 사상을 설명하며 왜 비참하게 끝없이 교착 상태에 빠진 전쟁을 예로 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양쪽 모두 지쳐서 다른 길을 모색하려는 욕망이 생길 때라야 모든 사람이 진퇴양난의 수렁에서 빠져나가고자 하는 목적의식을 갖고 다른 사람 역시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모두가 합리적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124~125쪽)



계약주의에는 전제가 있다. 바로 모든 사람이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한 최소 기준을 정하기 위해 적극적일 거라는 전제 아래 모두가 동의하고 따르기로 한 기준을 설정한다. 스캔론은 저마다 다른 사람들로 가득한 이 세상을 둘러보고는 모두가 따를만한 행동 기본값을 설정하려 한다. 스캔론 이론은 사람들이 확실히 싫어하고 동의하기 어려울 만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둔다. 예를 들면 쇼핑 카트를 훔치거나 망가뜨려 다른 사람이 쓸 수 없게 만들거나, 결혼식에서 술에 취해 길가에 버려진 카트에 올라탄 뒤 친구 닉에게 카트를 밀어달라고 해서 인도를 엄청 빠르게 달리다 카트 밖으로 떨어져(닉도 많이 취해 제대로 미는 게 불가능한 탓에) 길바닥에 나뒹구는 행동이 있다. 따라서 쇼핑 카트 사용을 위해 제안한 저 규칙들은 모두 합리적으로 거부될 것이다. (130~131쪽)



남아프리카의 우분투(ubuntu) 개념 정리하기.


우분투는 스캔론의 계약주의와 같지만 한층 강화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우분투는 단지 타인에게 의무를 지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타인이 건강한 것이 내가 건강한 것이고 타인의 행복이 내 행복이며 타인의 관심사가 곧 내 관심사다. 누군가가 다치거나 상하는 것은 내가 그렇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치학자 마이클 오니예부치 에제 Michael Onyebuchi Eze가 우분투의 특징으로 인용한 덕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대함, 나눔, 친절'을 떠올리게 하지만 우분투에서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강조한다. 2006년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우분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어렸던 그 옛날, 우리나라로 여행을 온 한 사람이 내가 사는 마을에 당도했다. 그 사람은 음식이나 물을 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마을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음식을 가져다주고 보살폈다. 이것은 한 단면일뿐 우분투는 다양한 형태를 지닌다. () 우분투는 스스로 부유해지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주위 공동체도 함께 성장하도록 하고 있는가?" (137)




이것은 수백 년간 남아프리카 철학의 중심 사상이었다. 하지만 서양 철학에서는 인간의 도덕적 삶은 다른 사람과의 상호 관계에 달려있다는 계약주의 개념을 어느 정도 아웃사이더로 취급한다. 이 책에서는 르네 데카르트를 따로 다루지 않지만 서양 사상에서 가장 기본 사상 중 하나인 그 유명한 데카르트 철학의 제1명제, '코기토, 에르고 줌 Cogito, ergo sum'(앞서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원문)을 잠시 생각해보자. 이를 우분투 사상, 즉 '우리가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와 비교하면 세상에나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니 하는 생각이 든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단일 의식으로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 우분투를 실행하는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정의할 때 다른 사람의 존재를 조건으로 한다. (139쪽)


24. 9. 11.















출근길 지하철에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읽기. 출퇴근길에 짬짬이 읽는 습관을 좀 들여보자. 버스-지하철-버스의 반복이지만.. 세이 쇼나곤은 처음 듣는 이름이다. 불확실성,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작은 것들,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기.


















50년 대여는 무엇을 위한 상품일까? 50년 뒤면 나는 80대가 되는데... 그 전까지는 갖고 있으면 읽을 수 있지 않겠냐는 유혹일까? 흥미로운 책들이 보일 때마다 주머니 사정은 생각 않고 결제해버리는 나를 보며 잠시 들었던 생각.


24. 9. 12.














『교수처럼 문학 읽기』를 읽기 시작. 여행은 하나의 원정이라는, 어쩌면 뻔한 이야기 같은 것에서 시작. 하지만 그 예시로 핀천의 작품을 든 것이 흥미롭다. 원정의 다섯 가지 요소에 대한 이야기. 탐구자/탐구 장소/그곳에 가야 하는 표면적 이유/탐구 중 겪는 도전과 시련/그곳이 가야 하는 진짜 이유.


원정의 진정한 목적은 언제나 ‘자각’이다. (29쪽)


식사는 언제나 친교 행위communion이다. 성찬식(communion)의 의미만이 아님.




24. 9. 13.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읽기. 니체 부분을 읽는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사랑하지 말라고, 바로 그 고통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사랑하라고, 니체는 말한다.”

에픽테토스 읽기. 아우렐리우스에 이어서 스토아 철학, 스토아 캠프 이야기가 나온다. 통제할 수 없는 요소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기. 이해는 되지만 와닿지 않는 건 나의 나이 때문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