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04.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의 표제작을 읽음. 대학생 때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와 『7번국도 Revisited』를 읽었지만 기억이 아예 없고, 나에게 김연수 단편의 최고치는 「뿌넝숴」로 남아있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가 마지막 독서였기 때문. 표제작은 「뿌넝숴」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김원이라는 사람의 깨달음의 연결고리가 특이해 실소하면서 읽었다. 카지노에서 모든 돈을 잃고 얻은 시간에 대한 깨달음이라니. 과거와 미래 모두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21세기형 ‘카르페 디엠’과 같은 느낌.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는 최근에 읽고 있는 『소설가의 일』이 떠오르기도 했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29)

"아까 김원이라는 사람 이야기를 했잖아. 둘 중 하나를 계속 선택하는 도박에서는 지면 질수록 그다음에 이길 확률이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면서. 그 남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 약간 안됐다는 듯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지금 일층 큰방에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인생들이 모여 있어요. 두 분 다 학생인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오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메이저리그 투수가 한 말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이기면 조금 배울 수 있지만 지면 모든 걸 배울 수 있다. 지기만 하는 인생도 나쁘지 않아요. 중간에 선택을 바꾸지만 않는다면." (32)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1999년에 내게는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이 있었다. 미래를 기억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과 일어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34-35)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그런 세계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이 병은 낫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이 불안을 모두 떠안겠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오지 않는 것인지 한 번 더 알아보겠다. 이게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가 아닐까. 자신의 불안을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는 용기, 미래에 대한 헛된 약속에 지금을 희생하지 않는 마음, 다시 말해서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태도. (『소설가의 일』, 50-51쪽)


24.11.05.

「난주의 바다 앞에서」 읽기. 황사영의 아내 정난주의 이야기와 손은정이 아닌 손유미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와 주제가 겹쳐져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비에도 지지 않고 KO 당하기 직전까지 버티고 버티며. 미야자와 겐지의 「목련」 이야기가 어려웠는데, ‘부처의 선’이란 무엇인가 골몰했지만 결론을 내리진 못했다.















『죽이고 싶은 아이』 재독. 2편을 읽기 위한 복습의 느낌으로 읽었다. 작년 겨울에 읽었던데 두 인물의 이름부터 가물가물한 이 기억력... 서은과 주연을 둘러싼 인물들의 말들에서 매정하고 무서운 세상의 민낯이 보여 종종 서늘해지는 느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억울한 사연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 있고 한껏 그에게 몰입시키다 반전에 반전을 마지막에 남겨두는 이꽃님 작가의 스타일은 여기서 출발한 건지도(『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에도 반전이 중요하게 작용하긴 한다). 『죽이고 싶은 아이』에서는 마무리가 갑작스럽고 매끄럽지 못하다는 느낌, 반전을 위한 성급한 끝맺음의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에서 좀더 정교해져서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역순으로 작품을 읽었으니, 『죽이고 싶은 아이』에 더 낮은 평가를 줄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과연 2편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지.


24.11.06.















『죽이고 싶은 아이 2』 완독. 1권에서 이어지는 살인사건의 스토리는 초반부에 바로 밝혀지며 마무리되고, 남은 사람들의 상처 회복기가 주를 이룬다. 2권이 나오게 된 것은 주연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1권에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황폐해진 주연이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상처와 죄책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아이를 둘러싼 소문과 입방아와 말없는 동조가 얼마나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놓는지에 대한 이야기. 사람을 둘러싼 사람들의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몸서리치면서, 주연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오랫동안 쌓여왔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 감정적으로 흔들리면서 읽었다. 다만 1권에 비해 작가의 직접적인 목소리가 자주 개입되는 것 같다는 부분은 아쉬운 점. 작가도 인물에게 감정적으로 몰입해있어서일까.


24.11.07.

『소설가의 일』 2부 읽기 시작. ‘인생이라는 게 뭐 그따위’이니 처음에는 닥치는 대로 인생을 살고 그 후에 서사적으로 인생을 두 번 사는 것. 언제가 돌이킬 수 없는 다리, 또는 불타는 다리인지 모르니 살아봐야 한다는 것. 20년 동안 좋아할 밴드의 곡을 미리 알고 찾아 들을 수 없으니 지금 좋은 노래를 열심히 듣는 것. 이런 이야기를 플롯 포인트와 3막 구조에 연결시켜 풀어내는 방식이 재치 있다. 김연수 작가의 글을 몇 편 읽어보지 않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야기 작법에서는 예상치 못한 결론으로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이런 지점들을 플롯 포인트Plot Point라고 부른다. 플롯 포인트는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키는데, 대개의 이야기에는 두 개의 큰 플롯 포인트가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3막 구조인 셈이다. 시드 필드 같은 시나리오 작가는 모든 영화는 시작하고 삼십 분이 지날 무렵에 첫번째 플롯 포인트를 지난다고 말한다. 대개 백이십 분짜리 영화라면 첫 플롯 포인트는 삼십 분에, 두번째 플롯 포인트는 구십 분쯤에 있다. 이 지점을 지나면 이야기의 방향이 크게 바뀌면서 주인공은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특히 첫번째 플롯 포인트를 가리켜 '돌아갈 수 없는 다리' 혹은 '불타는 다리'라고도 부른다. 1막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어떤 사건을 경험하는데, 그러고 나면 다시는 예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91)

서사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산다. 처음에는 그냥 닥치는 대로 살고, 그다음에 결말에 맞춰서 두 번의 플롯 포인트를 찾아내 이야기를 3막 구조로 재배치하는 식으로 한번 더 산다. 인생이 그렇다면, 소설도 마찬가지겠지. 그렇게 해서 소설은 원래 두 번 쓰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강연에서 이런 말을 하자, "처음부터 잘 쓰지 그랬냐?"라는 사람도 있더라. 그런 말을 들으면 그런가 싶어서 그 사람 얼굴을 쳐다본다. 인생 처음 살면서 ‘지금이 내 인생의 첫번째 플롯 포인트로구나. 이 불타는 다리를 지나면 돌이킬 수가 없으니 최선을 다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기 있구나 싶어서. 처음부터 잘 쓰지 그랬냐고? 아직 결말을 모르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잘 쓰나? 마찬가지다. 내 인생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처음부터 잘 살겠나? 소설을 쓰는 일은 ’인생이라는 게 원래 뭐 그따위'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 하는 일로 시작한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처음부터 잘 사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그건 소설도 마찬가지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소설은 시작된다. (91-92)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반영한다. (한번 더 여러분들을 괴롭힌다면, 그래서 좋은 이야기일수록 핍진성이 풍부하다.) 그러므로 이야기 작법에서는 행동은 반드시 갈등을 일으키고 이 갈등은 주인공을 감정적으로 좌절시킨다고 말한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법구경』을 들춰보면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마라. 미운 사람과 만나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그 다음에 나오는 “사랑에서 근심이 생기고 사랑에서 두려움이 생긴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이야기 작법 중 행동/액션의 운용원칙을 말하는 것 같다. 행동은 갈등을 낳고, 이 갈등은 주인공을 감정적으로 좌절시킨다. (102)

내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이 '행동한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행동한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면, 소설을 쓰는 나 역시 ‘쓴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쓴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소설 쓰기의 절정으로 올라가야만 하리라. 그러니까 먼저 소설가가 되라고 말한다면 순서가 잘못됐다. 소설가라면 플롯의 시작점이 행동이라는 걸 알아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삶이 '쓰기'에서 시작한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그러니 먼저 소설가가 되어야만 소설을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먼저 뭔가를 써야만 소설가가 될 수 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소설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리에 따라 먼저 뭔가를 쓰고 좌절하고 다시 쓰고 또 좌절하고 그럼에도 다시 쓰는 그 과정을 반복하다가 죽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104)


24.11.09.















지하철에서 『사랑이라니, 선영아』 읽기. 아직 앞부분까지만 읽어서 팔레노프시스와 <얄미운 사람>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까지는 파악을 못하고 있다. 삼각관계인가? 김연수 특유의 고유어들과 사변적인 문장들은 여전하고 이젠 익숙해진 편.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읽기. 소위 말하는 덕질을 ‘구애가 필요치 않은 사랑’으로 정의한 것이 흥미롭다. 사회 제도와 공간이 둘이어야 안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도 그렇고.















쭉 읽으면서 자주 등장하는 책은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아픈가』이다. 『에로스의 종말』에서도 다뤄진 적이 있는데, 어떤 내용일까 잠시 궁금해하며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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