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11.














「진주의 결말」과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을 읽음. 「진주의 결말」은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한 사람을 이해하게 되면서 이 세계가 명료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만, 실상은 카오스일 뿐 우리가 상대를 이해한다는 착각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에 지나지 않는 일이라는 이야기.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85)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 역시 기만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저의 수많은 모습 중에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것들만 모아 저라는 이미지를 만들었으니까요.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앞뒤가 척척 맞겠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그것은 기만입니다. 실제의 제 삶은 앞뒤가 척척 맞아떨어지지 않거든요. 제가 선택한 제가 그럴싸한 이야기였듯이 선생님이 분석한 저 역시 또다른 그럴싸한 이야기겠지요. <사건의 결말> 제작진이 편집한 저 역시 하나의 이야기이고요. 그러나 아시겠지만, 저는 그 어떤 이야기도 아니에요. 저는 혼돈 그 자체입니다. 카오스 그 자체예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87)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 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달을 향해 걷는 것처럼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이라고. 그래서 저는 치매에 걸려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아빠의 마음을,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한 거예요. 그래서 불을 질렀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어요. 이해만 있었죠. 소방관들이 우리집의 유리창을 깨는 걸 보고 제 속이 얼마나 시원했게요, 가슴이 얼마나 벅차올랐게요. 저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거든요. 그 순간 전 모든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워진 거예요." (97)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은 한 사람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시간마저 광대하게 느껴지는 고비사막에서, 시간의 흐름이 바위를 깎아내듯 정미에 대한 그리움도 깎이고 파묻히리라는 깨달음을 얻은 인간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


고비사막에서 보는 하늘에는 시간적인 광대함도 담겨 있었다. 밤이 되자 어둠 속에서 고대의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사시대, 혹은 아직 인간이 지구에 나타나기 이전의 원시적인 하늘. 별들만이 가득한 하늘. 광활하게 펼쳐진 공간처럼 시간 역시 계속 뻗어나갔다. 과거로, 더 먼 과거로, 시간이 시작되던 그 순간까지. 그렇게 시간은 쌓이고 또 쌓여 한없이 깊어졌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사막을 이해하기 위해 읽은 책에서 본 ‘깊은 시간deep time’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깊은 시간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107)

과거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익숙한 아름다움, 무엇인지 그 정체를 잘 알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면 미래의 아름다움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아름다움,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모순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러니까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아름다움이다. 이 미래의, 두렵지만 우리를 매혹시키는 아름다움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건 우리에게 밤이 찾아와 피로해진 우리 육체가 잠들 때다. 과거라는 이름의 유령들은 잠든 우리 곁을 지키지만, 이제 우리는 거기에 없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깨어난다. (108)


"글쎄. 난 세상은 점점 좋아진다고 생각해. 지금 슬퍼서 우는 사람에게도. 우리는 모든 걸 이야기로 만들 수 있으니까. 이야기 덕분에 만물은 끝없이 진화하고 있어. 하지만 난 비관주의자야.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비관주의가 도움이 돼. 비관적이지 않으면 굳이 그걸 이야기로 남길 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걸 다 우리가 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어. 그게 나의 믿음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그것도 자주.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 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버스 안의 고개 숙인 인도 사람들처럼. 그건 그 책을 읽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였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 나는 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이유가 뭔데?"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120-121)


24.11.14.

「엄마 없는 아이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사랑의 단상 2014」를 읽음.
「엄마 없는 아이들」은 대학생 시절 연극 동아리에서 잠시 만나 동질감으로 이어졌던 감정과 상실의 감정이 우연한 만남으로 떠오르게 된 이야기.


태어날 때 엄마가 필요했던 것처럼, 죽을 때도 누군가 필요한 것일까? 기쁨으로 탄생을 확인해준 사람처럼, 슬픔으로 죽음을 확인해줄 사람.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죽 음을 확인할 수 없을 테니까.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음은 인식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유예된다. 죽어가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살아 있는 것이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피에로의 재담 같은 아이러니. (133)

명준이 이제는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얼굴은 유동한다. 흐르는 물처럼 시간에 따라 조금씩 과거의 얼굴에서 미래의 얼굴로 바뀌어간다. 그렇게 우리의 얼굴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거기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게 예술이 하는 일이라고도. 배우는 표정으로 그 시간적 간극을 압축해 조명 아래에서 드러내 보인다. 현재의 얼굴에 과거를, 또 미래를 모두 담고서. 얼굴의 유동적 가능성을 믿지 않으면 연기는 불가능하다. 무대에 오르기 전, 배우의 얼굴은 빈 캔버스와 같아야 한다. 젊음과 늙음, 남자와 여자, 인간과 동물, 생물과 무생물이 공존하는 가능성의 얼굴. 그러다가 번개의 번쩍임에 의해 어둠 속의 얼굴이 일순간 드러나듯이 연기를 통해 어떤 표정이 노출된다. 인식적 클로즈업. 그리고 알아봄. 그 모든 사랑의 발생학. (142-143)

봄의 울음과 달리 슬픈 감정은 전혀 없었다. 물론 상실감 은 있었다. 연극이 끝났다는 것, 더이상의 술자리는 없다는 것. 그리고 엄마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 명준은 그렇게 상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그 울음은, 말하자면 피에로의 재담 같은 아이러니의 울음이었다. 그가 늘 믿어온 대로 인생의 지혜가 아이러니의 형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면, 상실이란 잃어버림을 얻는 일이었다. 그렇게 엄마 없는 첫 여름을 그는 영영 떠나보냈다. (156)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역시 어느 시절 우연히 일본에 가서 남긴 자신의 메모가 어떤 사람의 죽음을 막았다는, 그것을 2014년 4월 16일에 일본으로 가서 공연을 하며 알았다는 이야기.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181) 찰나의 연인이 남긴 사랑과 그 흔적이 누군가의 기억에 남고 그것이 사람을 살게 한다는 이야기라면, 기억한다는 것은 사랑에 더 가까워지는 행동일까? 사랑하고 살아지는.


그러다가 나는 후쿠다 준이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어서, '날개를 주세요‘라고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유복하게 살기도 했고, 고향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자살하려 했다가도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어느 시점부터인가 줄곧 나를,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나를 기억하게 된 일에 대해서 생각했어. 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기억한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181)

「사랑의 단상 2014」는 제목을 보자마자 롤랑 바르트를 떠올렸지만 그것은 아니었고, 사랑의 찌질하고 지난하고 불타올랐던 과정과 결과, 그리고 이후의 영향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의 모음. ‘사랑해’에 대한 검색 기록에 이르면 마음을 울컥하고 울렁거리지만 이 연결이 자연스러운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예전의 나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거기 돌아갈 수 있는, 예전의 나 같은 건 없다는 걸 지훈은 그때서야 깨달았다.
애당초 원해서 빠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원한다고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192)


“언제나 마음이 유죄지."
영원한 여름이란 환상이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사랑이 저물기 시작하자, 한창 사랑할 때는 잘 보이지도 않았던 마음이 점점 길어졌다. 길어진 마음은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미워한다고도 말하고. 알겠다고도 말하고, 모르겠다고도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고, 말만 하고.

마음은 언제나 늦되기 때문에 유죄다. (196)


잊지 말 것. 영화를 보며 지훈은 중얼거렸다. 용기를 낸다는 것은, 언제나 사랑할 용기를 낸다는 뜻이라는 것을. 두려움의 반대말은 사랑이라는 것을. (204)

자신은 이제 새들이 모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210-211)

24.11.17.














군산의 한 카페에서 『희랍어 시간』을 읽기 시작. 언어에 대한 기민한 감각을 가진 주인공의 상념에서 사고와 음성과 언어 사이의 괴리에 대해 생각한다. 사고를 그대로 담기에 음성은 너무 느리고, 이를 담아내야 할 언어는 그릇이 너무 좁다. 한강 특유의 곡진하고 우묵한 감정은 여기서도 여전하고, 종종 읽으며 강렬한 이미지를 사용한 비유에 놀라기도 하며 읽는다. 두번째로 목소리를 읽은 여자와 눈이 멀어가는 남자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질 것인지.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 단편인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를 읽음. 작품집의 첫 작품이었던 「이토록 평범한 미래」와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고독의 삶”을 통해 우리들이 공통으로 가진 시원을 찾는 것, 그리고 과거를 살고 미래를 사는 것. 과거의 우리를 생각하듯 미래의 우리를 생각하는 것은 「이토록 평범한 미래」와 닮았다. 표제작이 개인에 초점을 두었다면 이 작품은 더 넓어진 느낌. 세 명의 바르바라의 이야기가 연결되며 나아가는 결론은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신의 존재를 확장시키고 정신의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러므로 “타인에게 더 다정”하고,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는 것.


"나의 삶이 나의 삶으로 끝난다면야 이 인생은 탄생이라는 절정에서 시작해 차츰 죽음이라는 암흑 속으로 몰락하는 과정이 되겠지. 사실, 인생에 그런 일면이 없지는 않아. 육체에 고립된 삶이 바로 그렇지. 과학이 발달해 새 몸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렇다면 비관 같은 건 없을 거야. 하지만 육체를 가진 우리는 필멸하지. 늙어서 몸이 삐걱대고 병에 걸리면 그 사실을 확실히 알게 돼. 그러니 늙은 몸의 비관주의는 피할 길이 없어. 하지만 인간에게는 또한 정신의 삶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들려줬던 루이 라벨의 말, 고립과 고독의 차이가 생각나는가?"

"예, 여기 노트 맨 앞에 적어놓았어요.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 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바로 그거야. 정신의 삶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고독의 삶을 뜻하지. 개별성에서 멀어진 뒤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은 얼마간 서로 겹쳐져 있다는 거야. 시간적으로도 겹쳐지고, 공간적으로도 겹쳐지지.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삶이 끝나고 난 뒤에도 정신의 삶은 조금 더 지속된다네. 우리가 육체로 팔십 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팔십 년, 미래로 팔십 년을 더 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이백사십 년을 경험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을 거야." (230-231)


우리 정신의 삶이 과거로 팔십 년은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말의 뜻이 여기에 있다네. 나는 1940년대를 기억하고 있어. 그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지금까지 증언했잖아. 지금 만약 내 곁에 열 살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나를 통해 팔십여 년 전의 일들을 역사가 아닌 실제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그렇다면 그 아이의 손자는 이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경험한 시각으로 내가 겪은 1940년대의 일들을 바라볼 수 있을 거야. 거기에 비관이 깃들 여지가 있겠는가? 그렇게 나는 지금 이백 년을 경험한 사람의 시각으로 1801년 신유박해를 바라보고 있다네. 이승훈을, 정약용을, 이벽을. 오직 연민과 사랑이 있을 뿐, 여기에 비관이 깃들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 정신의 삶이 백 년을 넘지 못하고 비관으로 빠져드는 까닭은 인간의 인식은 그 인식만은 대상으로 삼지 못해 그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지. 눈이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234-235)


“그래서 거울이 있잖아요.”

"그래, 거울을 보면 돼. 거울은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쪽으로 되돌리지. 그럼 인간의 인식을 안쪽으로 되돌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거울은 뭐냐? 그걸 알려면 자신이 인식한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해. 각자가 보는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존재의 크기는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크기와 같아. 그렇다면 존재를 확장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이겠어?"

"세계를 더 많이 인식하는 것인가요?"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거지. 그게 바로 사랑의 정의야. 그렇다면 신의 정의는 모든 이를 받아들인 존재,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일 수밖에 없겠지. 가능한 모든 세계를 인식하는 게 바로 신일 테니까. 우리가 신이 되어 모든 세계를 인식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나갈 수는 있어. 우리의 기억은 시공간적으로 겹쳐져 있으니까. 조부의 기억은 증조부의 삶으로 이어지고, 증조부의 기억은 어린 시절에 만난 신유박해를 기억하는 칠십 노인의 삶으로 이어지지. 그리고 증조부가 어릴 때 들은 바르바라 이야기가 내 막내 여동생의 세례명으로 이어진다는 것. 이런 식으로 육체가 죽은 뒤에도 정신의 삶은 계속 되는 것이라네." (235-236)


할아버지의 말대로 과거의 우리는 이토록 또렷하게 생 각할 수 있는데, 왜 미래의 우리를 생각하는 건 불가능한 것일까? 그럼에도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게 할아버지의 최종적인 깨달음이었다. (240)


생각이란 육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걱정과 슬픔,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이어질 뿐이지만, 그 생각이 사라질 때 비로소 정신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그 정신의 삶은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서로 겹쳐지며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 현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는 매 순간 육신의 삶으로 되돌아가 다시 기뻐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화낼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겹쳐진 정신의 삶, 그 기저에 현존하는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노력하기로 했지. 이 삶에 감사하기로. 타인에게 더 다정하기로.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기로. (242)















작가의 말까지 다 읽은 후 과거의 나는 김연수 소설에 어떤 평가를 남겼는지 확인하고자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리뷰를 다시 보았다. 모든 단편의 줄거리가 기억나진 않지만 전반적인 느낌은 기억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전체적으로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더 원숙해진 느낌인데(주제적인 부분도 그렇고 이를 풀어내는 방식도 그렇다), ‘「뿌넝숴」를 넘는 작품이 있었나?’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내 나름대로 세워둔 평가의 바로미터에서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하게 된 작품집. 『소설가의 일』에서 서사적으로 인생을 두 번 산다고 말했던 김연수는 이제 우리는 인생을 세 번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년의 푸코는 '자기 배려'를 위한 주체성에 골몰했다. 1981~1982년에 콜레주드프랑스에서 한 강의를 엮은 책에서 내가 읽은 건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단단한 주체성의 구조를 만들어내 기 위한 그의 끈질긴 사색과 집념이다. 푸코는 강의 내내 ‘내가 누구인지' 묻는 근대의 주체화 방식을 뒤로하고 ‘내가 무엇일 수 있는지' 묻는 고대의 주체화 방식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인 세계관보다는 내 안에 없는 나를 만들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변형시켜가는 실천적인 세계관으로 살아야 한다고 여긴 푸코에게 '영성spiritualité' 은 철학과 대등한 지적 체계였다. 이때의 영성은 나를 변형시키는 정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자기와의 관계 맺기'와 '자기 돌보기'의 핵심을 의미한다.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는 자신을 아는 것보다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아는 것은 딜레마에 빠지게 하지만 선택하는 것은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게 한다. 하지만 이해는 행동하게 한다. (252-253)


푸코가 절실히 매달렸던 주체화 개념은 김연수의 이번 소설들에서 동시대적인 삶이 품고 있는 질문의 형태로 현재화된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묻지 않고 자신이 누구일 수 있는지 물으며 스스로를 변형시킨다는 말이기도 하다. (253)

이들에게 세번째 삶이란 유한한 인간이 영원을 실천하고 낙관을 확신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이다. 미래가 기준이 되어서 현재를 결정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체를 변형시켜나가는 정신의 삶을 살 수 있다.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던 스토아주의자들은 죽음, 질병, 고통 등과 관련된 참된 원칙들을 발견하고 그에 부합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수련하기 위해 '죽음 명상‘을 했다. 죽음 명상은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 죽음을 현재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 수련의 핵심은 하루하루를 생의 마지막처럼 사는 데 있다. 세네카는 죽음 명상을 가장 많이 수행한 사람으로, 세네카가 사람들과 주고받은 서신에는 그가 미래를 살아내기 위해 연습한 죽음 명상의 구체적인 방법이 나온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미래를 현재화해 삶을 회고할 수 있는 시선을 가짐으로써 자신이 자기 삶의 심판관이 되는 것이다. 시간을 겹쳐 보았던 그는 미래를 가져와 현재를 채우고 과거가 된 미래를 통해 전체를 봤다. 심판관의 눈을 통해 미래에 이르기 전에 먼저 미래를 사는 셈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는 건 기억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억이 흐르는 길을 만들어내는 것뿐이지만 기억의 흐름을 만듦으로써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살 수 있다. 그 긴 시간 속에서, 짧은 시간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목도하는 우리는 세상을 낙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56-257)

한동안 괴로운 마음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했다. 마음의 괴로움 앞에서 내가 무기력했던 이유는 그게 두번째 화살이기 때문이었다. 붓다는 세상에서 겪는 고통을 첫번째 화살에 비유했다. 그리고 첫번째 화살을 뽑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 화살이 어디서 날아 왔는지, 누가 쏘았는지, 왜 내가 이런 대접을 당해야만 하는지 따지다가 다시 맞는 화살을 두번째 화살이라고 말했다. 두번째 화살은 뽑고 난 뒤에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거기 여전히 첫번째 화살이 있으니까. 뭔가를 했는데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으니 두번째 화살 앞에서 사람은 점차 무기력해진다.
그와 달리 첫번째 화살을 뽑고 나면 즉각적으로 기쁨이 찾아온다. 그건 고통이 사라지기 때문에 찾아오는 기쁨, 단순한 기쁨이다.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만족스럽지 않고 때로는 고통스러울지라도 지금 이 순간의 세상을 품에 안아야 한다. 그게 바로 첫번째 화살을 뽑는 일이다. 몸은 힘들겠지만 고통과 불만족을 겪어내면 이윽고 단순한 기쁨이 찾아온다. 가을이 되면 가을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싶다. 여기에 단순한 기쁨이 있다. 물론 겨울과 봄과 여름에도 단순한 기쁨은 있다. (27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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