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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황정은의 소설을 읽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 시작이 <계속해보겠습니다>였고, <야만적인 앨리스씨>, <百의 그림자> 순으로 읽어내려가 여기까지 이르렀다. 어쩌다보니 역주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이 작가가 이런 상상력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을 이 단편집을 읽고서야 알았다(<百의 그림자>에서 그림자가 일어서긴 하지만 그 정도야 뭐...)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만날 준비가 없이 만난 그녀의 소설은,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이었다. 마치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읽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황정은의 상상력은 박민규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작품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예사롭지 않은 작가구나...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황정은은 다양한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지만 그 기반을 이루는 그녀의 현실인식은 등단작 <마더>와 <소년>에 가장 잘 드러나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도 느낀 것이지만(여태껏 읽었던 소설 중 씨발, 이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 나왔던...),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있다. <마더>의 주인공인 오는 자신을 낳은 여자에게 버림받았고, 자살하려는 사람들의 커뮤니티를 접속하고 있다. <소년>에 나오는 소년의 어머니는 낳고 싶지 않은 그를 낳았고, 또다른 남자와 구야를 낳았으며, 지금은 다른 남자와 함께 살고 있다. 2005년에 발표된 이 두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은 보면 볼수록 처참하고, 어떤 면에서는 끔찍하기까지 하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작가의 인식 때문일까.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365일 중에 298일이나 되는 이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은 이런 인물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 이후 나오는 그녀의 작품에는 그런 처절함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있지 않다. 여전히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은 <마더>나 <소년>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 비극성은 환상이라는 옷을 입고 우리에게 나타난다. 초코맨의 모습으로, 오뚝이의 모습으로, 모자의 모습으로, 또는 등에 문을 달고 나타난다. 이런 환상의 차용은 삶과 현실의 비극성을 한층 밝은 이미지로 바꾸어 놓는다. 하지만 아무리 밝게 표현되면 뭐하나. 결국 그들의,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팍팍하고, 건조하다 못해 메말라서 처절한데. 작가가 꿈과 환상을 작품 속에 끌어들인 건 환상이 가져오는 밝음을 통해 현실의 비극을 더욱 부각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이런 환상의 비애는 주변 사람들이 정말 이상한, 말도 안되는 이런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더욱 짙어진다. 별난 존재의 등장이나 변화에 대한 세계의 무관심, 그것이 이 세계를 더욱 폭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잘 쓰여졌다고 생각하는 단편은 <모자>였다. '세 남매의 아버지는 자주 모자가 되었다.'로 시작하는 이 작품에는 시도때도 없이 모자로 변하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이런 설정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변신>이 계속 벌레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그렸다면 <모자>의 아버지는 모자와 사람의 상태를 끊임없이 왔다갔다한다. 이는 아버지가 모자로 변하게 하는 어떤 상황이 있다는 것일텐데, 그렇다면 그 상황이라는 건 무엇일까? 처음에 나는 세계의 불합리성에 직면했을 때 모자로 변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불합리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저항해야 할 상황에 그럴 수 없는 모자로 변한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자신이 초라해지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기력해지는 순간에 모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실직한 자신을 첫째가 외면했을 때, 라디오를 고쳐주지도 사주지도 못한다며 둘째가 울 때, 셋째의 학부모 참관일에 모자가 되었고, 아내와 어머니가 싸우고 있을 때 모자가 되었고, 할아버지가 밥알을 흘렸다며 엉덩이를 때렸을 때 홀로 모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식들을 성추행한 예비군에게 항의하러 간 순간에도 모자가 되어버렸다. 자식이 자신을 외면하고, 서로 다투는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아버지는 모자가 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가족 내의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모자라는 상상력으로 치환한 작가의 감수성은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이래서 황정은의 이름이 이렇게 자주 나오는구나하는 생각도 들고.
별 세 개 반을 주고 싶었으나, 알라딘은 반이 안 되기에 세 개를 준다. 각 작품마다 그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이해력이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문> 같은 경우에는 인물들이 너무 흐릿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곡도와 살고 있다>는 곡도라는 애완동물과 마지막에 나오는 병아리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를 찾기가 너무 힘들었다(사실 지금도 잘은 모르겠다). 이 외에도 몇 가지 아쉬웠던 것들이 있었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이제까지 본 적 없던 색다른 것이며 그것이 그저 기발한 상상에서 끝나지 않고 작품 속에 잘 녹아들어 의미를 이루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작가의 다른 소설들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다음이 기대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북콘서트에서 문예창작과에 다닌다던 한 독자분이 교수님들이 황정은 작가분의 책을 정말 많이 추천한다고(그 분은 '정말'에 강세를 뒀다) 말했었는데, 왜 추천하는지 이유를 알겠다. 이제 <파씨의 입문>만 남았네...
의문점, 왜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는 제목을 이렇게 지었을까? 이 제목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작품 안에서 코끼리열차는 일곱시 이십분이 막차고 작품은 일곱시 십칠분에서 끝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