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마뜨료슈까는요, 라고 무재 씨가 강판에 무를 갈며 말했다.
속에 본래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알맹이랄 게 없어요. 마뜨료슈까 속에 마뜨료슈까가 있고 마뜨료슈까 속에 다시 마뜨료슈까가 있잖아요. 마뜨료슈까 속엔 언제까지나 마뜨료슈까, 실로 반복되고 있을 뿐이지 결국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던 것이 부서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고, 본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이죠.
무재 씨, 그건 공허한 이야기네요.
그처럼 공허하기 때문에 나는 저것이 사람 사는 것하고 어딘가 닮았다고 늘 생각해 왔어요.
라고 말하며 무재 씨는 주먹만 하게 줄어든 무를 쥔 손으로 마뜨료슈까를 가리켜 보였다.

은교 씨, 나는 특별히 사후에 또 다른 세계가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하늘이 굉장하네요.
네.
나는 이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인간은 역시 유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별이요?
시끄럽고 분주하고 의미도 없이 빠른 데다 여러모로 사납고.
……무재 씨, 그건 인간이라기보다는 도시에 관한 이야기 같아요.
도시일까요?
하며 무재 씨가 웃었다.

뒤돌아서다가 무재 씨의 그림자를 밟을 뻔했다. 무재 씨는 여전히 엔진 덮개를 열어 둔 채로 이제는 일어서서 덮개 속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묵묵히 생각에 잠긴 무재 씨의 뒤꿈치로부터 짙은 빛깔로 늘어진 그림자가 주변의 것들과는 다른 기색으로 곧장 벌판을 향해 뻗어 있었다. 불빛의 가장자리에서 벌판의 어둠이 그림자를 빨아들이고, 그림자가 어둠에 이어져, 어디까지가 그림자이고 어디부터가 어둠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마치 섬 전체가 무재 씨의 그림자인 듯했다.

묵묵히 수그러진 무재 씨의 고개 위로 불빛이 번져 있었고 그 너머로 바로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막막하고 두려워 사발 모양의 가로등 갓을 올려다보았다. 여기는 어쩌면 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의 입. 언제고 그가 입을 다물면 무재 씨고 뭐고 불빛과 더불어 합, 하고 사라질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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