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스트 Axt 2016.3.4 - no.005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엮음 / 은행나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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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을 하자면, 나는 지난 호에서 듀나의 인터뷰를 읽었을 때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었다. 다만 인터뷰에서 '익명성'의 비중이 너무 크지 않나...라고 생각해보았을 뿐이다. 발행 이후의 후폭풍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고, 5호가 나올 때가 되어서야 그런 논란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 다시 생각해보면서 비판의 여지가 충분히 있는 부분이라고 결론짓게 되었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도 소위 '순수'문학의 시선에 길들여져 있었던 건 아닌가, 하고.


이번 호에서 문제의 '4호'를 대상으로 한 서평을 실은 것은, 어떤 비판도 감내하겠다는 일종의 제스처로 보인다. 'Outro'에서도 파스칼 키냐르의 작품을 인용하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아직도 분위기는 싸늘한 듯하다. 사과는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논란이 사그러들기에는 그 시기가 너무 늦었다. '지면을 통해 말할 수밖에 없어' 그랬다지만, 논란이 일었을 때 공식 입장을 밝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 실린 서평들에 대한 인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실망.' 목차를 볼 때부터 의문이 들었던 건 왜 오한기의 『의인법』을 다룬 서평이 세 개나 되는가..였고, 전반적으로 핵심을 찌르는 글보다 개인적인 감상에 머무르는 글이 많이 있었다(콕 집어서 하나만 말하자면, 『은어낚시통신』 서평. 서평의 기본적인 기능이 '소개'라고 했을 때, 이 글은 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줄거리를 알면 '이 부분이 소설의 이 내용을 토대로 한 거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 글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윤대녕 작가가 처음 이 책을 출간했을 때와 비슷한 나이가 된 작가의 소회 그 이상이 아니다). 서평 중에 가장 나았던 것이 『Axt』 4호를 다룬 서평이었으니..


반달 북클럽의 좌담은 반가웠다. 알라딘서재로 보았을 때는 두 번의 좌담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기에는 한 번의 좌담만 실려서 아쉬웠다. 그래도 『Axt』에서 북클럽의 좌담을 실은 이래 가장 깊이있는 좌담이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나는 문학동네판 『페스트』는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


이번 호에서 가장 좋았던 글을 꼽으라면(소설과 서평 전부 포함해서), 나는 주저없이 이우성 시인이 쓴 「'쓱'과 빛」을 고르겠다. 요즘은 좀 뜸하지만, 얼마 전까지 TV만 틀면 나오던 이 광고에 대한 단평이 재미있기도 하고, 인상주의와 함께 묶어 설명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내가 그 광고를 보며 생각했던 건 '색채가 강렬하고 그 대비가 두드러진다', '극단적인 심플함의 추구' 같은 것이었는데, 이우성 시인은 나와 반대로 말한다. 간단명료한 메시지('이거 사세요!')를 명쾌하게 전달하기 위해 셀러브리티가 가장 부각되고 나머지는 단순화되고 있는 시대에, '쓱'은 오히려 복잡함을 추구한다고.


그런데 '쓱'은 복잡하다. 신기하게 복잡하다. 사실 이 광고는 모든 것을 '쓱' 한마디로 요약해버린다. 하지만 미장센은, 헐, 왜 이렇게까지 하지, 라는 생각이 든다. 등장인물은 공유와 공효진이다. 둘은 초현실적으로 꾸며진 방 안에 있다. 대단한 것을 가져다 놓은 것은 아니고, 색감이 독특하다. (...) 이런 식의 작품에서 구도는 중요한 요소다. 색의 배열 역시 신경 써야 한다. '쓱'의 방은 마치 몬드리안 이전의, 이제 갓 추상을 경험하기 시작한 어떤 화가가 화면의 분할과 색의 조화를 신경 쓰며 그린 작품 같다. (...) 특히 빛은 다분히 '인상주의적'이다. 창문으로 오후의 빛이 들어온다. 두 배우는 이 빛과 조화를 이루며 앉아 있거나 서 있고, 필요한 말을 '쓱' 한다. (106-107쪽)


피곤하고 바쁜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쓱'은 "그래서 쓱이 뭔데?'라는 의문을 던지고, 회화적인 광고의 모습에 주목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광고의 인상과 달리 'SSG닷컴에 접속하면 역시 너무 별것 아닌 세상'이 펼쳐져 있다. 시인의 말대로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도 있겠다. 구도의 복잡함과 메시지의 심플함, 그리고 의문까지 품고 있는 '쓱' 광고를 티저광고와 '인상주의'의 결합으로 볼 수 있으려나.


파스칼 키냐르의 작품은 아직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번 인터뷰를 읽고 나니 호기심이 생겨 읽어보고 싶어졌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은밀한 생』부터 찾아봐야 하는 건지.. 인터뷰를 보아하니 장르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하는 작가인 듯 한데, 심호흡을 하고 도전해봐야 할 듯하다.

서면으로 진행된 인터뷰인데도 현장 인터뷰처럼 느껴지도록 애를 쓴 흔적이 보였고, 인터뷰 방식이 조금 바뀐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과거 악스트 편집자들이 작품 얘기를 거의 안 했다면(내 기억이 맞다면 박민규 작가 인터뷰 때 배수아 작가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언급한 것이 전부다), 이번 인터뷰는 작품 이야기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일종의 팬심(?)이 발현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지켜봐야 할 변화인 듯하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실린 단편 중에는 인상적인 작품이 없었고, 읽기 힘든 것이 더 많았다. 특히 정영문 작가의 「유형지 X에서」를 읽으면서 나는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문장들 속에서 헤매었고(1시간 동안이나), 화자가 '엑스프로방스'에서 겪는 일들이 갖는 의미도 도통 알 수 없었다. 「목신의 어떤 오후」 이후 두 번째 만남인데, 정용준 작가의 글로 감상을 대신하려 한다.


이런 예가 또 있다. 정영문이다. 이름과 얼굴과 소설이 딱 영문이다. 내가 왜 이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영문을 모르겠는 그의 소설. 정영문의 소설을 읽으면 나는 혼잣말로 영문을 모르겠군, 이라고 중얼거리며 몰래 웃곤 하는데 이런 말장난이 그의 소설을 설명하는 함축적인 감상이라고 나는 믿는다. (37쪽)


『Axt』가 싣는 단편들에 일종의 경향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리얼리즘에 가까운 소설(지난 호에 실린 윤고은의 「된장이 된」 같은 단편이 예시가 되겠다)보다 '모던한 경향'의 작품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던한 경향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인 서사가 부재하는 작품군을 내 맘대로 표현한 것이다. 서사라기보다 인과라고 해야 할까. 'diary fiction' 같은 경우 그동안 서정적인 소설이 주를 이루었으나, 이번에는 다른 시공간의 '나'가 나타나고, 링 위에서 마지막 펀치를 맞는 순간 시간이 멈추는 이야기로 흘러가 그 경향이 모던함에 가까워졌다, 고 (내 멋대로) 진단해본다. 여전히,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냐'는 의문이 남지만...


서평이 다루는 책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지만(이번에는 인물의 전기, 역사만화에 대한 서평이 실렸다), 예리하게 파고든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특히 한국소설에 대한 서평이 해외문학을 다룬 서평보다 기복이 심하다. 감상을 정리하자면, 내적·외적으로 문제가 많은 총체적 난국이다. 꾸준히 읽어온 독자로서는 안타깝지만, 잘 추슬러서 다음 호를 내주길 기다려본다. 리스트를 증식시켜 줄 수 있는 다음 호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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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은 얄궂다. 물리적으로는 가장 얇은 외피로 덮여 있으며, 가장 깊은 입구이자 출구라 할 수 있는, 이 구(口)가 일단 충족되지 않으면 몸의 나머지 기관들이 제대로 일해주지 않는다. 시험에 떨어지고 사랑에 실패하고 굴욕적인 노동을 하고 불시에 사고를 당해 손발을 잃고 애착하는 이의 죽음을 겪고도, 사람은 밥을 먹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구차하고도 귀한 기관을 통해 먹고 마시고, 나와 남의 사정에 관하여 발설한다. 이러한 입을 얻어맞으면 자존심이 상하고, 수치심을 느끼며, 각별한 모욕을 당했다고 느낀다. 먹는 입을 향한 주먹질은 먹지 말라는 의미이고, 말하는 입을 향한 주먹질은 닥치라는 의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황정은, '입을 먹는 입' (28-29쪽)


특별한 일이랄 것이 없는, 평범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오늘도 독서실에 있었고, 밀린 방학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Axt』 5호를 읽기 시작했고, 『시지프 신화』의 두 번째 장을 읽었고, 『불안의 책』은 200번대에 진입한 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국회의원들이 마지막 유세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이미 누가 당선될지 알 것 같았고, 뉴스는 암담하거나 시답잖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집에 와서 오로지 황정은 작가의 글을 보기 위해 구입한 『문학동네 61호』를 폈다.


언제부턴가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나의 정치적 소견이나 성향을 드러내는 일을 기피했다. 이는 사람들이 정치적 성향이라는 잣대를 내세워(때로는 휘두르기도 한다) 사람을 판단하는 이분법적 잣대가 싫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점점 사람들 사이의 분위기가 그런 화제를 피하는, 그리고 그런 화제에 무관심한 것이 당연한 것 같은 분위기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가끔 나의 입, 누군가의 입을 향한 '주먹질'이 생각났던 것 같다. 이 안에서 흐르는 분위기가 하나의 주먹이 되고, 주먹에 맞기 싫어서 입을 다물고, 주먹은 말이 없어 무용해진 입을 먹었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감옥(監獄)으로 자진해'(이성복, '1959년') 가는 꼴이었다.


무관심이, 침묵이 미덕인 양, 쿨한 것처럼 치부될 때도 있었다.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이 때탄다고 말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도 그것이 유효해 보일 때가 있지만.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희대의 오지라퍼'(구병모, '이창')로 손가락질받던 시기는 지났지만, 이미 먹힌 입은 뚫리지를 않는다.


일인시위용 피켓을 만들어주기도 했던 동생에게 그 자리에 같이 가자고 말하자 단번에 싫다, 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곰곰 생각하더니 "내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용산이 참혹하게 고립되어 있다는 점을 알며 그러한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기는 무섭다고 말한다. (47쪽)


'입을 먹는 입'은 용산 참사를 다룬 일종의 르포다. 글의 말미에서 황정은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침묵과 부재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고. 지금 이 세계에 '침묵으로써 일조했던 것'은 아니냐고 묻는다. 2016년 현재, 내 입은, 안녕하지 않았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넓지 않다. 그리고 깊지도 않다. 그런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쓰기 시작했는데 너무 길어졌다. 손이 가는 대로 써 버렸는데, 어쩌면 주먹보다 무서운 것은 내 입에 주먹이 날아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내 입을 먹은 것은 내 입일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내일 선거가 나의 일상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 나는 집에서 1분 거리에 있는 투표소에 가서 투표를 하고,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하고, 읽던 책을 마저 읽고 잠을 잘 것이다. 없는 입을 앙 다문 채. 당장 입을 되찾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작은 틈이나마 낼 수 있기를 바라며 잠을 청해야겠다. 그리고 내일 내 입에 낼 그 틈이 여전히 '1959년'을 살고 있는 이 세계에도 틈을 내서, 다음에는 불만이 덜해진 선택지를 들고 나를 찾아왔으면 싶다. 물론, 주먹은 사양이다.


질문을 해보자.

그들의 국가와 당신의 국가와 나의 국가가 다른가.

어떤 대답을 고를까.

같아도 문제, 달라도 문제 아닌가.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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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능동적인 시민의 혁명적 활동이 성과를 거두어 국민국가의 틀 속에서 (국민으로서) 시민의 권리가 확립되고, 시민의 대표로 이루어진 의회를 중심으로 정치가 움직이게 되면,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가하고 선거 때 투표할 자격이 주어진다. 그렇게 되면 역설적으로 이미 국내에서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긴장감이 사라진 결과, 정치를 남의 손에 맡겨도 괜찮다고 여기는 수동적인 사람들도 늘어난다. 19세기 후반에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복지와 공공사업이 정비되자, 수동적 시민은 정치의 소비자로 변했다. 이것이 '대중'에 깃들어 있는 일반적 이미지다. (60쪽)


전체주의는 현실 세계의 불안이나 긴장감을 견딜 수 없게 된 대중이 도망갈 수 있는, 그야말로 '총체적' 공상세계를 구축한다. 총체적인 공상적 세계 안에서 대중은 편안함을(at home) 느낄 수 있다. 다만 이 공상적 세계는 전면적으로 현실세계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상당히 왜곡시킨 형태로 가공됨으로써 전체주의적 공상의 기반이 된다. (63쪽)


그런데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그러한 공감의 '정치'는 토론을 활성화하거나 관점을 다양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불행한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것을 인간적이고 올바른 모습이라고 강요하는 배타적 가치관으로 기울기 쉽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하지 않는 자들을 비인간적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배제하려는 경향마저 낳는다. (...)

실제로 프랑스혁명 과정에서는 '공감하지 않는 무리'를 대량으로 숙청하는 공포정치(Terror)가 이루어졌고, 똑같은 일이 20세기 좌파적인 '해방'의 '정치'에서도 되풀이되었다. '공감'을 '정치'의 무대 위로 끌고 들어오면 자신들과 똑같이 공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에 대해 관용이 없어지는 한편, '사이'를 두고 논의할 수 없게 된다. (152-153쪽)


요컨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법정에 들어가는 것은 자연적인 자아가 아니다. 법 앞에 드러내는 모습은 법에 의해 만들어지고 권리와 의무를 가진 인격(person)이다." persona를 벗겨내 버리면 남는 것은 권리와 의무가 없는 개인(individual)이며, 아마도 '자연인'일 것이다. 한마디로 본래적 의미의 인간(human being)이자 사람(homo)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는 노예처럼 법의 영역과 시민의 정치조직 외부에 놓은 사람을 의미하는데,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존재다.

- 한나 아렌트, 『혁명론』(이 책 164쪽에서 재인용)


'자유의지'를 말할 때 우리는 타인의 강제나 압력에서 '자유로운' 의지 같은 것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서양철학사에서 전통적으로 문제 삼아온 '자유의지'는 그 이상의 것, 도는 그것과 다른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자연계를 지배하는 물리적인 인과법칙에서 '자유롭다'는 뜻이다.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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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김경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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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기 시작한 한나 아렌트에 관한 책 중 네 번째 책이다. 이 책의 목적은 저자가 나름대로 이해한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정리하여 '신서', 즉 입문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은 아렌트의 저서 대부분을 다루고 있으며, 아렌트의 사상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 아렌트의 눈으로 본 현대 일본사회(2009년)의 모습을 같이 이야기하고 있어 아렌트 사상의 대략적인 전도(全圖)를 얻을 수 있었다. 각 장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아렌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1장 -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장 - 『인간의 조건』

3장 - 『혁명론』

4장 - 『정신의 삶』, 『칸트 정치철학 강의』


『인간의 조건』의 경우 3장과 4장에도 자주 활용되는데, 아무래도 아렌트 사상의 핵심 중 하나인 '행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상당히 많은 저서를 다루고 있음에도 최대한 쉽게 풀이해서 설명하려는 노력이 돋보였고, 이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같이 언급해 준 점이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 1장과 2장은 전에 읽었던 『정치와 진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으나, 3장과 4장은 제대로 된 설명을 처음 접하는 것이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다 읽고 나면 위에 제시한 아렌트의 저작을 읽은 것 같은 착각도 들 정도..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물론 4장의 경우, 『정신의 삶』이 유작으로 남았기 때문에 '사유', '의지', '판단' 중 '판단'과 관련된 내용은 이전의 저서를 통한 저자의 추론이라는 사실을 유념해 두어야 하겠지만... (그래서 더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아쉽다기보다 궁금했던 부분은, 악의 평범성(banality)과 관련된 부분에서 'banal'이 때로는 '따분한'으로, 때로는 '평범한'으로 번역된 것이다. 저자가 글을 쓸 때 영어를 이렇게 번역한 것인지, 역자가 이를 옮기면서 이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반적으로 '따분함'보다 '평범함'이 통용된다는 점에서 용어가 통일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있다(그리고 '평범함'이 '따분함'보다 그 의미를 더 잘 전달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길사)의 '역자 서문'에 자세히 나와있다). 또 '복수성(plurality)'이 3장에서는 '다원성'(149쪽)이라고 제시된다. 물론 이 앞에는 '가치관의'라는 수식어가 있긴 하지만, 같은 용어가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경우 이 개념이 아까 말한 그 개념이 맞는 건지 혼란스럽다...


아렌트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파면 팔수록 똑부러지게 결론짓는 것이 없구나.. 하는 것이다. '폴리스적인 인간'을 구현하기 위해 '공적 영역'에서 인간의 '복수성'을 근간으로 한 정치 행위를 옹호했지만, 반(半) 공적, 반(半) 사적인 영역인 '사회적 영역'(대표적인 것이 경제다. 이놈의 경제)이 확대되면서 사적 영역이 배제된 폴리스적 공간은 더 이상 불가능한데, 이에 대한 대안은 찾을 수 없다. 하기야, 애초에 복수성을 바탕으로 한 토의를 통해 공공선을 추구하는 정치행위를 강조한 그녀에게 대안을 바란다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겠다. 정치철학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순간 그것이 진리라고 강조하는 꼴이 되고, 그것은 정치가 참/거짓을 가르는 진리의 영역에 떨어지는, 그녀의 주장을 무너뜨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폴리스적인 공간의 재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런 공간을 구축하고 진정한 '정치''행위'를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씁쓸한 뒷맛을 남긴 채, 저자 서문에 나온 말을 곱씹는다...


'알기 쉬움'을 간판으로 내세우는 '정치사상'(또는 '정치사상 연구')은 그럴듯해 보이고 위세가 대단하다. 그래서 '정치'를 스포츠나 게임처럼, 적과 자기편이 싸워서 이기고 지는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반응이 쏠쏠하다. 내용이 '알기 쉬운' 사상일수록 거기에 근거해 '알기 쉬운' 슬로건을 내걸고 '자기편'을 많이 결집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16쪽)


전문적인 정치사상 연구자도 아니고 일상적으로 '정치'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 불특정 다수가 어쩐지 '자기편'이 되어줄 것 같은 '이론'에는 대개 '어딘가'에서 자주 들어본 듯한 대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여기에서 '어딘가'란 말할 것도 없이 신문, 텔레비전, 잡지, 최근에는 인터넷 같은 매스컴을 말한다. 미디어에서 자주 접해 어느샌가 익숙해진 단어와 문구를 그럴듯하게 새겨 넣은 글이 무척 '지적(知的)'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17-18쪽)


+) 아렌트에게 관심을 가지고 관련 책들을 검색해보던 때, 아렌트의 사상과 관련해서 내가 자주 접했던 용어 중에는 '세계사랑'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세계사랑'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 말은 또다른 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녀의 저서 읽기, 아니 구매가 또 미뤄진다는 것을 뜻한다. 일단 내가 이 책을 사기 전에 후보에 올라있던 책은 『아렌트』(홍원표, 한길사, 2011)와 『아렌트 읽기』(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산책자, 2011)다. 또다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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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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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읽다가 잠시 멈추고 생각에 잠기는, 이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궁에서 떠돌 뿐이라 다시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황동규 시인의 해설은 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이미지의 연상 작용에 대한 해석이 항상 들어맞는 것은 아니어서 나의 연상이 끊기기도 하였다. 글을 쓰는 지금에 와서도 나는, 내가 그의 시를 이해했노라, 시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노라, 라고 감히 말 할 수 없다. 나는 결국 <부패에 대한 연구>를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별을 하나 남겨둔 것은 내가 이 시집을 이해했다는 오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작은 표시다.


시집 전체에서 흐르는 비극의 정서와 이미지들, 그리고 '유곽'으로 대표되는 화자의 현실 인식은 처절하다 못해 충격적인 언어로 나타난다.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세계일 것이다. 


(...)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치는 노인과 便桶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그날' 中


화자가 바라보는 세계, 그리고 화자가 머물러 있는 세계는 모두 '유곽'이다. 그냥 유곽도 아닌 '정든 유곽'이다. 아마 자신과 함께 유곽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병들었는데 아프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정이 들었을 것이다. 세계는 때로 '언덕배기 손바닥만한 땅'에 심은 고추나무의 고추를 몰래 따가던 공사장 인부들의 모습으로, 때로는 '집을 지어야겠으니 / 고추를 따가라'는 집 주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화자의 가족을, 작부들을 핍박한다. 그리고 그 핍박은, 도저히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미지의 형태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우연히 스치는 질문── 새는 어떻게 집을 짓는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풀잎도 잠을 자는가,

대답하지 못했지만 너는 거기서 살았다 붉게 물들어

담벽을 타고 오르며 동네 아이들 노래 속에 가라앉으며

그리고 어느날 너는 집을 비워 줘야 했다 트럭이

오고 세간을 싣고 여러번 너는 뒤돌아 보아야 했다

- '모래내 · 1978년' 中


화자는 이 세계에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자기 주변의 사람들보다는 나은 위치에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병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인식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버지 또는 어른스러운 생활과 같은 것으로 대변되는 기성의 가치들(황동규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우상')에 대한 분노다. 하지만 이런 분노와 파괴 행위가 화자 자신을,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시인은 확신이 없는 듯하다. 이 세계는, 우리를 수없이 흔들면서 자신은 흔들려 본 적 없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

를 구할 수 있을까

왼손이 왼손을 부러뜨릴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天國은 말 속에 갇힘

天國의 벽과 자물쇠는 말 속에 갇힘

감옥과 죄수와 죄수의 희망은 말 속에 갇힘

말이 말 속에 갇힘, 갇힌 말이 가둔 말과 흘레 붙음, 얼싸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中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그러나 머물러 흔들려 본 적 없고

돌이켜 보면 피가 되는 말

상처와 낙인을 찾아 고이는 말

지은 罪에서 지을 罪로 너는 끌려가고

-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中


이러한 시적 정조가 시집 전체를 지배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죽음과 폭력, 타락의 이미지들은 얽히고 설켜 마치 초현실적인 장면처럼 나타나기도 하고, 연상 작용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모든 이미지들을 한 번 읽고 해석하는 것은 내 역량을 벗어난다. 아니, 다시 읽어도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여전히 병들어 있는 지금, 아픈 줄은 알고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지막 시,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전문을 적으며 글을 마무리한다. '송곳'보다 '송곳에 찔린 허벅지'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이 시가 마지막에 수록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세계의 '송곳'보다 우리의 상처에 주목하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아닐까 싶다. 나도 이제 내가 병들었음을 알고, 아픔을 알고,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길 바란다. 병들어 있는 것이 이 세계만은 아닐 테니...


이제는 송곳보다 송곳에 찔린 허벅지에 대하여 
말라붙은 눈꺼풀과 문드러진 입술에 대하여 
정든 유곽의 맑은 아침과 식은 아랫목에 대하여 
이제는, 정든 유곽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한 발자국을 
위하여 질퍽이는 눈길과 하품하는 굴뚝과 구정물에 흐르는 
종소리를 위하여 더럽혀진 처녀들과 비명에 간 사내들의 
썩어가는 팔과 꾸들꾸들한 눈동자를 위하여 이제는 
누이들과 처제들의 꿈꾸는, 물 같은 목소리에 취하여 
버려진 조개 껍질의 보라색 무늬와 길바닥에 쓰러진 
까치의 암록색 꼬리에 취하여 노래하리라 정든 유곽 
어느 잔칫집 어느 상갓집에도 찾아다니며 피어나고 
떨어지는 것들의 낮은 신음 소리에 맞추어 녹은 것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떨어진 것들 
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에 
관하여 한 번, 한 번만 부여안고 휘이 돌고 싶음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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