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ㅣ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평점 :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에서 다뤄지는 워킹 푸어의 현실은 2000년대 초반이지만, 현재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 뿐더러, 책 속의 현실보다 지금이 더욱 악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생활 곳곳에 공기처럼 스며든 신자유주의는 빈곤은 나태함과 태만의 소치라는 관념을 주입하고, 인성 검사와 약물 검사, 오리엔테이션과 같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모멸감과 자괴감을 안기기도 한다.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그들은 중산층과 고위 계층의 눈에 띄지 않도록 분리되고 배제되며, 그들이 버는 돈으로는 최소한의 생계조차 유지하기 힘들다(에런라이크의 위장 취업기는 이 명제를 증명하는 과정이다). 아직은 호황기를 누리던 2000년대의 미국 경제에서도 왜 그들은 부당한 임금과 노동 조건에서 탈출하려 하지 않았는가? 그 답은 우리가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제적 인간’이 아니라는 데 있다.
처음에 나는 동료들이 적극적으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지 않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왜 그들은 내가 허스사이드에서 제리스로 옮겼던 것처럼 급여가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기지 않는 걸까? 그 해답의 일부는 인간은 구슬과 다르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구슬과 달리 거취를 결정할 때 적지 않은 마찰을 경험하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가난할수록 기동성이 더 떨어지기 마련인데, 차가 없는 저임금 노동자들은 흔히 차가 있는 친척의 도움을 받아 출퇴근을 한다. 이것은 매일 반복되고 어떤 경우에는 출퇴근길에 보모의 집이나 탁아소에 들르도록 부탁해야 한다. 따라서 일자리를 옮기게 되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지형학적 난관에 봉착할 수도 있고 어찌 됐든 이제껏 차를 태워주던 친척에게 새로운 직장에 맞춰 경로를 바꿔 달라는 미안한 얘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276쪽)
저소득 노동자들이 ‘경제적 인간‘과 다른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경제학 법칙이 제대로 적용되려면 우선 선택을 하는 주체인 개인이 자기에게 주어진 선택의 범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 그러나 저임금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조언을 구할 곳이 없다. 손에 들고 다니는 기기도, 케이블 방송을 볼 수 있는 채널도, 컴퓨터 웹사이트도 없다. 이들에게 구직 정보를 제공하는 유일한 소식통은 ‘직원 구함‘ 이라는 안내문과 구인 광고뿐이며, 그나마 급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듣지 못하기 일쑤다. 따라서 누가 어디서 얼마를 받고 일한다는 정보는 입소문을 통해 듣는 게 다인데, 그마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문화적인 이유로 전파 속도가 아주 느리고 다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277~278쪽)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이하 『리얼리스트』)에서 “결핍은 시야를 좁혀 자신의 즉각적인 부족함, 5분 안에 시작하는 회의, 내일 지불해야 하는 청구서에만 초점을 맞추게 한다.”(『리얼리스트』, 66쪽)라고 이야기한다. 빈곤층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에는 “정신적 대역폭”의 수축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에런라이크가 레스토랑과 청소 업체, 월마트에서 만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금 조건의 불합리성을 견디는 이유에는 “누구라도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맥락”(『리얼리스트』, 66~67쪽)이 존재한다. “차가 ‘집‘이 되기도 하는 상황”, “몸이 아프거나 부상을 입어도 이를 악물고 ‘참고 일해야’ 하는 상황”, “병가 수당도 의료보험도 없으니 오늘 하루 일을 못하면 당장 내일 식료품을 살 돈조차 없는 절박함”(288쪽)이 산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더 나아졌을까?
『노동의 배신』은 2001년에 나왔고, 한국어판에는 10년 후에 에런라이크가 덧붙인 후기가 함께 실려있다. 저자는 일자리마저 줄어든 현실, 가난을 범죄로 만들고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 학대와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현실을 보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로부터 10년이 더 흐른 지금도 상황은 그리 변한 것 같지 않으며, 여전히 임대료는 그들이 받는 임금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고, 사회는 그들을 가장 비민주적이고 자유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작업 공간에 몰아넣어 선택의 폭을 한없이 축소시킨다. 그들이 “자신들이 받아 마땅한 임금을 달라고 요구할”(296쪽) 때에 경제가 휘청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우리의 머릿속에 주입되어 있지만, 노동의 대가에 무관심하고 이를 평가절하하는 사회의 종말은 더욱 빠르지 않을까?
에런라이크는 말미에서 “우리가 느껴 마땅한 감정은 수치심”(296쪽)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생계의 필수조건을 충족하며 살아가는 삶의 기반에는 그들의 노동이,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하고 행해지는 노동이 있기 때문이다. 워킹 푸어의 양산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일조한 것이 없더라도(죄책감은 흔히 특정한 행위(behavior)에 대해 느끼는 감정으로 설명된다), 그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지 않아야 우리의 생활이 유지되는 현실의 방조자로서 우리는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는 뜻일 테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사회 구조는 우리가 불합리함에 의문과 분노를 갖지 못하도록 노동의 흔적을 감춰버리는 데 능숙하다. 청소 업체가 다녀간 집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워킹 푸어를 “우리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박애주의자”(296쪽)라고 지칭한 것은 워킹 푸어가 있어야 작동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에 대한 조소로 읽힌다. 빈곤에 대한 비난의 시선을 담은 안경을 벗고 그들과 함께 연대할 때, 그들의 저항에 지지를 보낼 때 “하늘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마침내 우리 모두가 더불어 더욱 잘 살게”(296쪽) 되지 않을까. 나는 그들과 다르다며 눈감을 수도 있겠지만, 언제고 ‘그들’이 곧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지난 20년 동안 노동을 대하는 자본주의의 모습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경제적 불평등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극단적인 불평등을 향해 치닫는 일종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노동력을 확보하려면 너무 적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도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들, 심지어 더 메이즈의 사장 같은 피라미 경영자들도 노동자들에게서 몇 킬로미터는 떨어진 과하게 높은 경제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경영자들은 자신을 위해 일할 노동자를 특정 범주의 사람들 중에서 뽑아야 하지만 그 범주의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실제적인 경험보다는 계급 또는 인종에 관한 편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앞서 설명한 억압적 경영을 해야 한다고 믿고, 개인의 영역을 침해하는 약물검사와 인성검사를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하지만 이 모든 일에 드는 비용이 엄청나고(매니저 한 사람을 쓰는 데 1년에 2만 달러 이상, 약물검사 한번에 100달러 정도 든다), 이렇게 억압하는 데 비용을 많이 쓰다 보니 임금을 낮게 유지해야할 수밖에 없다. - P285
가난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빈곤을 일반적으로 어렵지만 어찌어찌해서 넘어갈 수 있는, 생존 자체는 위협받지 않는 상태로 이해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곁에 늘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 빈곤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의 심각성은 더욱 짐작하기 어렵다. 점심을 과자나 핫도그 빵으로 때웠다가 근무 시간이 끝날 때쯤이면 현기증이 나 기절할 지경이 되는 것을, 차가 ‘집‘이 되기도 하는 상황을, 몸이 아프거나 부상을 입어도 이를 악물고 ‘참고 일해야’ 하는 상황을, 병가수당도 의료보험도 없으니 오늘 하루 일을 못하면 당장 내일 식료품을 살 돈조차 없는 절박함을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 같은 경험들은 지속할 수 있는 삶, 심지어는 만성적 결핍에 시달리는 삶의 일부라고도 할 수 없으며 낮은 수준의 처벌을 끊임없이 받는 것이라고밖에는 말할수 없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어떻게 정한다 할지라도 이들이 처한 상황은 응급 상황에 해당한다. - P2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