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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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에서 다뤄지는 워킹 푸어의 현실은 2000년대 초반이지만, 현재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 뿐더러, 책 속의 현실보다 지금이 더욱 악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생활 곳곳에 공기처럼 스며든 신자유주의는 빈곤은 나태함과 태만의 소치라는 관념을 주입하고, 인성 검사와 약물 검사, 오리엔테이션과 같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모멸감과 자괴감을 안기기도 한다.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그들은 중산층과 고위 계층의 눈에 띄지 않도록 분리되고 배제되며, 그들이 버는 돈으로는 최소한의 생계조차 유지하기 힘들다(에런라이크의 위장 취업기는 이 명제를 증명하는 과정이다). 아직은 호황기를 누리던 2000년대의 미국 경제에서도 왜 그들은 부당한 임금과 노동 조건에서 탈출하려 하지 않았는가? 그 답은 우리가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제적 인간이 아니라는 데 있다.


처음에 나는 동료들이 적극적으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지 않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왜 그들은 내가 허스사이드에서 제리스로 옮겼던 것처럼 급여가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기지 않는 걸까? 그 해답의 일부는 인간은 구슬과 다르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구슬과 달리 거취를 결정할 때 적지 않은 마찰을 경험하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가난할수록 기동성이 더 떨어지기 마련인데, 차가 없는 저임금 노동자들은 흔히 차가 있는 친척의 도움을 받아 출퇴근을 한다. 이것은 매일 반복되고 어떤 경우에는 출퇴근길에 보모의 집이나 탁아소에 들르도록 부탁해야 한다. 따라서 일자리를 옮기게 되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지형학적 난관에 봉착할 수도 있고 어찌 됐든 이제껏 차를 태워주던 친척에게 새로운 직장에 맞춰 경로를 바꿔 달라는 미안한 얘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276)

 

저소득 노동자들이 경제적 인간과 다른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경제학 법칙이 제대로 적용되려면 우선 선택을 하는 주체인 개인이 자기에게 주어진 선택의 범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 그러나 저임금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조언을 구할 곳이 없다. 손에 들고 다니는 기기도, 케이블 방송을 볼 수 있는 채널도, 컴퓨터 웹사이트도 없다. 이들에게 구직 정보를 제공하는 유일한 소식통은 직원 구함이라는 안내문과 구인 광고뿐이며, 그나마 급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듣지 못하기 일쑤다. 따라서 누가 어디서 얼마를 받고 일한다는 정보는 입소문을 통해 듣는 게 다인데, 그마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문화적인 이유로 전파 속도가 아주 느리고 다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277~278)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이하 리얼리스트)에서 결핍은 시야를 좁혀 자신의 즉각적인 부족함, 5분 안에 시작하는 회의, 내일 지불해야 하는 청구서에만 초점을 맞추게 한다.”(리얼리스트, 66)라고 이야기한다. 빈곤층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에는 정신적 대역폭의 수축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에런라이크가 레스토랑과 청소 업체, 월마트에서 만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금 조건의 불합리성을 견디는 이유에는 누구라도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맥락(리얼리스트, 66~67)이 존재한다. 차가 이 되기도 하는 상황”, “몸이 아프거나 부상을 입어도 이를 악물고 참고 일해야하는 상황”, “병가 수당도 의료보험도 없으니 오늘 하루 일을 못하면 당장 내일 식료품을 살 돈조차 없는 절박함(288)이 산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더 나아졌을까?

 

노동의 배신2001년에 나왔고, 한국어판에는 10년 후에 에런라이크가 덧붙인 후기가 함께 실려있다. 저자는 일자리마저 줄어든 현실, 가난을 범죄로 만들고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 학대와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현실을 보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로부터 10년이 더 흐른 지금도 상황은 그리 변한 것 같지 않으며, 여전히 임대료는 그들이 받는 임금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고, 사회는 그들을 가장 비민주적이고 자유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작업 공간에 몰아넣어 선택의 폭을 한없이 축소시킨다. 그들이 자신들이 받아 마땅한 임금을 달라고 요구할”(296) 때에 경제가 휘청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우리의 머릿속에 주입되어 있지만, 노동의 대가에 무관심하고 이를 평가절하하는 사회의 종말은 더욱 빠르지 않을까?

 

에런라이크는 말미에서 우리가 느껴 마땅한 감정은 수치심(296)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생계의 필수조건을 충족하며 살아가는 삶의 기반에는 그들의 노동이,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하고 행해지는 노동이 있기 때문이다. 워킹 푸어의 양산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일조한 것이 없더라도(죄책감은 흔히 특정한 행위(behavior)에 대해 느끼는 감정으로 설명된다), 그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지 않아야 우리의 생활이 유지되는 현실의 방조자로서 우리는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는 뜻일 테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사회 구조는 우리가 불합리함에 의문과 분노를 갖지 못하도록 노동의 흔적을 감춰버리는 데 능숙하다. 청소 업체가 다녀간 집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워킹 푸어를 우리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박애주의자(296)라고 지칭한 것은 워킹 푸어가 있어야 작동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에 대한 조소로 읽힌다. 빈곤에 대한 비난의 시선을 담은 안경을 벗고 그들과 함께 연대할 때, 그들의 저항에 지지를 보낼 때 하늘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마침내 우리 모두가 더불어 더욱 잘 살게(296) 되지 않을까. 나는 그들과 다르다며 눈감을 수도 있겠지만, 언제고 그들이 곧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지난 20년 동안 노동을 대하는 자본주의의 모습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경제적 불평등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극단적인 불평등을 향해 치닫는 일종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노동력을 확보하려면 너무 적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도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들, 심지어 더 메이즈의 사장 같은 피라미 경영자들도 노동자들에게서 몇 킬로미터는 떨어진 과하게 높은 경제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경영자들은 자신을 위해 일할 노동자를 특정 범주의 사람들 중에서 뽑아야 하지만 그 범주의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실제적인 경험보다는 계급 또는 인종에 관한 편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앞서 설명한 억압적 경영을 해야 한다고 믿고, 개인의 영역을 침해하는 약물검사와 인성검사를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하지만 이 모든 일에 드는 비용이 엄청나고(매니저 한 사람을 쓰는 데 1년에 2만 달러 이상, 약물검사 한번에 100달러 정도 든다), 이렇게 억압하는 데 비용을 많이 쓰다 보니 임금을 낮게 유지해야할 수밖에 없다. - P285

가난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빈곤을 일반적으로 어렵지만 어찌어찌해서 넘어갈 수 있는, 생존 자체는 위협받지 않는 상태로 이해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곁에 늘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 빈곤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의 심각성은 더욱 짐작하기 어렵다. 점심을 과자나 핫도그 빵으로 때웠다가 근무 시간이 끝날 때쯤이면 현기증이 나 기절할 지경이 되는 것을, 차가 ‘집‘이 되기도 하는 상황을, 몸이 아프거나 부상을 입어도 이를 악물고 ‘참고 일해야’ 하는 상황을, 병가수당도 의료보험도 없으니 오늘 하루 일을 못하면 당장 내일 식료품을 살 돈조차 없는 절박함을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 같은 경험들은 지속할 수 있는 삶, 심지어는 만성적 결핍에 시달리는 삶의 일부라고도 할 수 없으며 낮은 수준의 처벌을 끊임없이 받는 것이라고밖에는 말할수 없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어떻게 정한다 할지라도 이들이 처한 상황은 응급 상황에 해당한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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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일이 돌아올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여러 문장들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자주 떠올리는 문장은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의 한 대목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연민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함을 일깨우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다소 길지만 인용하면 이렇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154)


이 대목은 연민에서 그치는 것이 침묵하는 권력에 동조하는 것이기에 공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로도 읽히지만, 불의와 폭력에 맞서 끊임없이 행동하고 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연민에 머무르며 자신이 힘을 쓸 수 없다는 무력감으로 숨는 것은, 개인을 '비-존재'의 영역으로 몰아가는 세계를 묵인한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일인시위용 피켓을 만들어주기도 했던 동생에게 그 자리에 같이 가자고 말하자 단번에 싫다, 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곰곰 생각하더니 "내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용산이 참혹하게 고립되어 있다는 점을 알며 그러한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기는 무섭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여러 가지 처지가 있을 수 있다.

한 가지만 생각해보자. 광장에 모인 오십만, 칠십만의 촛불을 향해 촛불을 들지 않은 나머지 사천 몇 백만의 손이 있다라고 말하는 이들의 시절에, 당신의 침묵과 부재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 황정은, 입을 먹는 입(문학동네 61-2009.겨울, 51-52(쪽수는 전자책 기준))















6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세월호에서 우리가 (프리모 레비가 줄곧 말해왔던) 세상에 대한 수치심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여전히 변화해야 할 지점들과 기억해야 할 이름들, 그리고 발화해야 할 언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공공연하게 세월호를 깎아내리는 발언이 전파를 타고, 탄핵 이후 청산될 줄 알았던 적폐의 정치는 산재해 있고, 진상조사는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촛불이 광장을 가득 채웠던 혁명의 시기를 지났음에도 세계의 움직임이 너무나 미미해서 변화하는 것 같지 않아 눈을 돌릴 때, “침묵과 부재는 권력이 과거를 되풀이하도록 만들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또다시 우리에겐 세상을 바꿀 힘이 없었다며 면죄부를 줄 것인가.
















니체의 입장에 우리가 난감해하는 것은 그가 수치심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펼쳐서가 아니라 고결한 자의 수치심과 선한 자의 연민을 대비시키며 후자를 집요하게 비난하기 때문이다고결한 자와 비교했을 때 연민의 정을 지닌 선한 자는 사실 자기 역량의 최소치만을 사용한다그들은 고통의 상황을 그대로 두고서 아주 소량의 도덕적 선행만을 반복한다. 니체는 이런 도덕주의자들을 마비되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그런 무기력한 앞발을 갖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 그런 겁쟁이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앞발을 들어 약자를 해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느라 분주한 통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그들은 자신의 역량즉 진정으로 행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연민이란 참으로 게으르고 뻔뻔한 감정이다.’

진은영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눈먼 자들의 국가, 72-73)


6년 전 오늘의 나는 사건의 존재마저 알지 못했던 무지하고 침묵했던 이였다. 6년이 지난 오늘은 총선 결과가 도래했고, 앞으로 도약할 것인가 후퇴할 것인가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나는 다만 6년 전의 수치심을 간직한 채 감각을 곤두세우고, 침묵하지 않고 끊임없이 발화할 따름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호명하는 것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한 걸음일 것이다. 여전히 발화되어야 할 목소리들은 우리와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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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3 23: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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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9 17: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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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구왕 서영
황유미 지음 / 빌리버튼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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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의 설정과 치밀하게 파고들어 몰입하게 만드는 심리묘사는 표제작에 그쳤고, 다음 작품들은 결말이 흐지부지되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야기들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참지 말고 저항할 것. 개인을 옥죄며 불편을 감내하도록 강요하는 모든 부당함에. 그것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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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드릴게요 - 정세랑 소설집
정세랑 지음 / 아작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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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을 처음으로 읽은 게 20187월이었는데, 이후 나는 정세랑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궁금해하고 찾아보는 독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초기작들이 개정판으로 꾸준히 나온 것도 한몫을 했겠지만. 목소리를 드릴게요도 마찬가지여서 처음 출간되었을 때 구입하고 띄엄띄엄 읽다가 이제야 다 읽게 되었는데,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재미와 흡입력 있는 이야기가 모두 충족된 독서 경험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정세랑의 작품세계, 특히 SF나 판타지의 세계를 요약하면 상상력에서 발아하여 관계에 다다르는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 소설에서도 정세랑의 독특한 발상은 작품에 재미를 주는 요소 중 하나였으며, “SF 소설집이라는 소개에 걸맞게 그녀의 상상력은 여전하다. 지렁이가 세상을 리셋해버리는 이야기부터(리셋) 살인 충동을 일으키는 목소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감금되어 살게 된 선생님의 이야기까지(목소리를 드릴게요). 다만 이 작품들은 상상력에서 출발한 세계를 구축하고 진행시키는 것엔 그리 관심이 없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들의 관계에 초점을 둔다(리틀 베이비블루 필이 예외적이다). 이들이 서로의 차이와 감정을 받아들이고 함께 나아가는 연대가 작품의 주된 정서를 이루며(이는 정세랑의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이를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이 작품에 온기를 부여한다. 차갑고 냉정하게 서술하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인물을 대하는 작가의 시선, 즉 그대로 마무리해도 좋을 결말에 헬기 하나를 보내는 따뜻함(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에 기인한다. 이러한 따뜻함이 때로는 군더더기나 작위적인 서술을 부르기도 하지만(피프티 피플), 인물들을 사랑스럽게 만들고 독자들을 끌어모으는 작품의 힘이 아닐까 싶다.

 

다채로운 상상력을 특장으로 지닌 작가이지만, 어떻게 우리는(또는 인류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지구를 포함한)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할까에 대체로 수렴하는 경향 탓인지 나는 단편을 읽으며 종종 정세랑의 다른 작품을 떠올렸다. 11분의 1을 읽을 때는 지구에서 한아뿐,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읽을 때는 보늬알다시피, 은열(옥상에서 만나요에 수록)을 떠올리는 식으로. 이는 작가가 지향하는 인간형을 뚜렷이 드러낸다는 측면에선 장점일 수도 있겠으나, 작품세계를 좁아지게 만든다는 한계점도 존재한다. 하지만 자신이 쓰고 싶은 상상력의 이야기가 있고, 우리가(또는 인류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독자들이 생각해볼 수 있도록 그들 앞에 가볍게 쏘아올릴 수 있는 걸로 작가는 만족하지 않을까.

 

상대적으로 뒤쪽에 실린 단편들이 더 좋았고, 나는 정세랑의 작품에서 괴짜들이(너드(nerd)한 사람들이) 함께 우왕좌왕하며 함께하는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차별, 환경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가볍고 재치 있는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 역시 작가의 필력일 것이다. 앞으로도 정세랑의 작품을 읽으면서 인간 존재의 치열한 투쟁이나 세계의 묵직함을 느끼게 될 일은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앞으로도 나는 그녀 특유의 재미와 발상, 그리고 따뜻함을 기대하며 책장을 펼치리라. 이는 나 역시 작가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며, 인물들 사이에 느껴지는 온기를 현실에서도 마주하길 바란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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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이라는 가치 판단

본래 이 인용은 페이퍼의 아래에 적을 예정이었으나, 밑줄긋기 분량에 제한이 없는 북플과 달리 알라딘서재는 밑줄의 분량이 500자로 한정되어 있어 굳이 먼댓글 기능으로 올려둔다. 정리하는 입장에서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다...


에이즈는 체제 전복에 대한 공포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환경 오염이나 제3세계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이민자들을 향한 공포처럼 최근에 표면화된 공포처럼 수세대에 걸쳐 계발되어 왔던 친숙한 대중적 공포를 조성하기에 쉬운 도구인 까닭에, 에이즈가 이 사회의 문명을 총체적으로 위협한다는 식의 망상을 품는 것도 당연하다. 더군다나, 에이즈의 확산이 일촉즉발에 있으며 감염되기도 아주 쉽다는 식의 공포를 계속 조장해 이 질병을 은유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다고 할지라도, 에이즈를 불법 행위(또는 경제적·문화적 퇴행)의 귀결로 보는 견해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에이즈는 비정상적인 행위에 내려진 심판이라는 관념, 에이즈는 무고한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관념에이즈를 둘러싼 이 두 관념이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역병이라는 은유의 놀라운 능력이자 효험이다. 역병이라는 은유는 어떤 질병이 (실질적으로) 모든 이들의 질병인 동시에, 병에 걸리기 쉬운 타인들이 초래한 그 무엇이라고 여겨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201-202)


우리는 끔찍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그렇지만, 사람들이 꽤 일어날 만한 일이라고 말하는재앙을 주기적으로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의 삶에 익숙하다. 이미지(카메라가 발명된 1839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지금의 현실을 꼭 닮은 옛날의 망령)는 대부분의 주요 사건들을 재현할 뿐만 아니라 사로잡는다. 사진이나 전자 기술을 통해 사건들을 모의해볼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이 가져올 결과를 산출하기도 한다. 현실은 실제의 것과 실제를 대신하는 변형물로 두 번 이상 분기된다. 사건이 있고, 사건의 이미지가 있는 셈이다. 게다가, 사건과 사건의 투영(投影)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흔히 사람들에게는 실제의 사건이 이미지처럼 현실적으로 보여지지 않을뿐더러, 사건의 이미지를 통해 사건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정신에 각인된 윤곽을 적절히 사용해, 즉 우리의 정신에 투영된 가장 오래된 사건의 형상을 통해 현재의 사건을 확인하려는 반응을 보인다. (232-233)


물론, 질병이나 질병을 치료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모든 은유가 도덕적으로 불미스럽고 왜곡되어 있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없어지는 꼴을 보고 싶은나는 에이즈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랬으면 하고 생각해 왔다은유는 군사적 은유이다. 군사적 은유가 뒤바뀐 형태, 즉 공공의 행복을 운운하는 의학적 모델이 아마 군사적 은유보다 훨씬 더 위험스럽고,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빚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모델은 권위주의적인 법률을 강제적으로 정당화해 줄 뿐만 아니라, 국가 주도의 억압과 폭력(정체(政體)라는 신체의 불건전한부위와 해가 된다는 부위를 마치 외과수술하듯이 제거하거나, 화학 약품으로 통제하려는 것과 같은 행위)을 은연중에 수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질병과 위생 상태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군사적 이미지가 가져올 결과가 전혀 중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군사적 이미지는 지나치게 선동을 일삼고, 상황을 지나치게 왜곡하며, 환자들을 고립시키거나 환자들에게 낙인을 찍는 데 단단히 한몫을 한다. (239)


절대화되는 것은 의학을 위해서도, 심지어는 전쟁을 위한 것일지라도 전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에이즈가 야기한 위기도 절대화같은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우리는 침략을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육체는 전쟁터가 아니다. 환자는 어쩔 수 없이 생길 수밖에 없는 사상자도 아니고, 적군도 아니다. 우리의학, 사회는 어떤 상대가 됐을지라도……모든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맞서싸울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지 못했다. 다음과 같은 식으로 루크레티우스의 말을 바꿔 쓸 수 있다면, 나는 저 은유, 저 군사적인 은유에 대해서 한 마디 하고 싶다저 따위 군사적인 은유는 전쟁광에게나 돌려줘라.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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