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일이 돌아올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여러 문장들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자주 떠올리는 문장은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의 한 대목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연민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함을 일깨우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다소 길지만 인용하면 이렇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154)


이 대목은 연민에서 그치는 것이 침묵하는 권력에 동조하는 것이기에 공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로도 읽히지만, 불의와 폭력에 맞서 끊임없이 행동하고 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연민에 머무르며 자신이 힘을 쓸 수 없다는 무력감으로 숨는 것은, 개인을 '비-존재'의 영역으로 몰아가는 세계를 묵인한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일인시위용 피켓을 만들어주기도 했던 동생에게 그 자리에 같이 가자고 말하자 단번에 싫다, 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곰곰 생각하더니 "내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용산이 참혹하게 고립되어 있다는 점을 알며 그러한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기는 무섭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여러 가지 처지가 있을 수 있다.

한 가지만 생각해보자. 광장에 모인 오십만, 칠십만의 촛불을 향해 촛불을 들지 않은 나머지 사천 몇 백만의 손이 있다라고 말하는 이들의 시절에, 당신의 침묵과 부재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 황정은, 입을 먹는 입(문학동네 61-2009.겨울, 51-52(쪽수는 전자책 기준))















6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세월호에서 우리가 (프리모 레비가 줄곧 말해왔던) 세상에 대한 수치심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여전히 변화해야 할 지점들과 기억해야 할 이름들, 그리고 발화해야 할 언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공공연하게 세월호를 깎아내리는 발언이 전파를 타고, 탄핵 이후 청산될 줄 알았던 적폐의 정치는 산재해 있고, 진상조사는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촛불이 광장을 가득 채웠던 혁명의 시기를 지났음에도 세계의 움직임이 너무나 미미해서 변화하는 것 같지 않아 눈을 돌릴 때, “침묵과 부재는 권력이 과거를 되풀이하도록 만들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또다시 우리에겐 세상을 바꿀 힘이 없었다며 면죄부를 줄 것인가.
















니체의 입장에 우리가 난감해하는 것은 그가 수치심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펼쳐서가 아니라 고결한 자의 수치심과 선한 자의 연민을 대비시키며 후자를 집요하게 비난하기 때문이다고결한 자와 비교했을 때 연민의 정을 지닌 선한 자는 사실 자기 역량의 최소치만을 사용한다그들은 고통의 상황을 그대로 두고서 아주 소량의 도덕적 선행만을 반복한다. 니체는 이런 도덕주의자들을 마비되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그런 무기력한 앞발을 갖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 그런 겁쟁이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앞발을 들어 약자를 해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느라 분주한 통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그들은 자신의 역량즉 진정으로 행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연민이란 참으로 게으르고 뻔뻔한 감정이다.’

진은영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눈먼 자들의 국가, 72-73)


6년 전 오늘의 나는 사건의 존재마저 알지 못했던 무지하고 침묵했던 이였다. 6년이 지난 오늘은 총선 결과가 도래했고, 앞으로 도약할 것인가 후퇴할 것인가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나는 다만 6년 전의 수치심을 간직한 채 감각을 곤두세우고, 침묵하지 않고 끊임없이 발화할 따름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호명하는 것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한 걸음일 것이다. 여전히 발화되어야 할 목소리들은 우리와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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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3 23: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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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9 17: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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