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이 되면서 내 일상은 또다른 변곡점을 맞았고, 덕분에 항상성을 유지하던 일상은 롤러코스터에 올랐다. 해가 뜨기 전에 집에서 나와 해가 진 후 집에 들어오는 일상, 그리고 잠깐도 눈 돌릴 틈이 없는 일상, 책 한 장도 넘길 수 없이 흘러간 일상. 감히 말하자면 지난 1년보다 몇 배는 힘들고 고되었던 2주였다. 보통 이렇게 바쁘면 아무런 생각도 없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바쁜 와중에도 어딘가 텅 비어 있는 기분, 허전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글의 부제는 '때늦은 애도'이다. 나에게 그동안 애도의 시간마저 없었음을 한탄하면서..
현자들이 점점 세상을 뜨고 있었다. 에코도 죽었고, 존 버거도 죽었고, 바우만도 죽었다. 평균 연령보다 높은 생을 누리다 죽었으니 급작스러운 부고는 아니겠으나, 그렇다고 이것을 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이 너무나 강렬하게 그들의 목소리를 원한다. 하지만 그들은 떠났고, 남은 자들에게는 그들의 책만이 남았다.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남은 자들의 몫이다.
존 버거의 죽음은 새해 들어 처음으로 듣게 된 부고였다.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내가 여태 그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집에 있는 책은 『다른 방식으로 보기』 하나뿐이다. 그의 부고 소식을 듣고 겨우 짬을 내어 작년 EIDF 출품작 <존 버거의 사계>를 보았다. 제목만 보면 존 버거와 보내는 사계절 이야기 같지만, 각각의 계절이 다루는 내용은 너무도 이질적이다. 이 다큐는 존 버거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편린 몇 조각만을 던져준다. 김현우 피디는 "연출자는 사상가로서 존 버거의 생각을 90분 안에 친절하게 설명하는 방식을 택하는 대신, 얼핏 혼란스럽지만 그의 활동을 형식적으로도 대변하는 구성을 택"했다고 썼다. 여태 미뤄두기만 했던 독서를 다큐로 달래며, 나는 『제7의 인간』이라는 책을 리스트에 추가했다. 8호부터 작가-번역가 시리즈를 싣고 있는 악스트는(굳이 설명하면 두 개의 글인데, 번역가가 본 작가, 편집자가 본 번역가 순이다), 이번 호에서 존 버거에 대한 김현우 피디의 글과 함께 존 버거의 「자화상」을 실었다. 밀린 악스트를 얼른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애도하는 마음으로 그의 책을 정리해본다. 일단 가지고 있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부터..
바우만의 죽음이 나에게는 더 크게 다가왔는데, 그것은 이미 그의 책을 몇 권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맨 처음으로 읽었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 나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아서, 그와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액체근대』를 읽으며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했고, 그의 책을 열심히 찾아서 사기 시작했다. 『액체근대』의 문제의식은 2000년에 발표된 책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현재도 유효하다고 나는 생각하며, 그가 21세기에 가장 의미있게 다루어져야 할 사회학자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나온 책들이 줄곧 대담집이어서 그가 직접 저술한 책이 나왔으면 하고 내심 바랐는데, 결국 그 희망은 허망한 것이 되었다.
바우만의 책이 국내에 나온 양도 꽤 많고 독자층이 적지 않은데도, 국내 학계에서는 그리 크게 연구되지 않는 모양이다. 부고 소식을 듣고 내가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를 검색해 보았을 때, 서평을 제외하면 그를 다룬 논문은 열 편이 채 되지 않았다. 혹자는 바우만의 책이 체계를 따르지 않아서 학자들이 외면하는 것 같다고 했는데, 문화비평가 또는 사회비평가 정도로 다루어지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가장 절실한 시기는 바로 지금이 아닐까.
바우만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책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이다. 이 책을 발표했을 때 바우만은 60대였다...(그래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인가) 임지현 교수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테제를 한 걸음 더 밀고 나아간 홀로코스트에 대한 '악(惡)의 합리성' 테제"라고 평했는데, 내가 읽게 될 바우만의 다섯 번째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네 번째 책은 사놓고 여태 읽고 있지 않은 『사회학의 쓸모』이다..
바우만의 책에서 줄곧 강조되는 결론은 비판적 회의주의인데, 이런 대안을 두고 구체적이지 않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나는 지금처럼 비판적 회의주의가 절실했던 시기를 만난 적이 없다... 사유의 부재를 자랑처럼 늘어놓는 시대에 비판적 회의주의만큼 구체적인 대안이 있을까. 그런 점에서도 가장 절실한 생각을 내놓았던 한 현자의 죽음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결국 이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끝없는 회의가 남는 자들의 몫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 내가 처음 『액체근대』를 읽고 남긴 별점은 네 개였는데, 이것은 내가 그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괄호를 닫지 않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엔 번역만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한 바우만의 문체이다. 대담집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바우만의 문체는 긴 만연체를 자랑하고 삽입절도 많이 쓰인다. 특히 삽입절은 한국에 익숙하지 않은 문체여서 바우만 읽기를 주저하게 되는 요인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천천히 곱씹으며 읽으면 다 읽히는 문장이고, 그 고행만 잘 참고 넘기면 현대 사회에 대한 가장 비판적인 통찰을 남긴 바우만과 마주할 수 있다..
사회학을 하는 길에서 `참여`와 `중립`을 선택할 여지는 없다. 참여하지 않는 사회학은 아예 불가능하다. 대놓고 밝히는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부터 철두철미한 공동체주의적 입장까지 오늘날 통용되는 수많은 사회학 상표들 한가운데서 도덕적 중립 입장을 취하려 한다면 이는 헛된 노력이다. 사회학자들은 자신들의 글이 지닌 `세계관`의 효과나, 인간의 개별적 혹은 연대의 행동에 그 세계관이 미치는 여파를 부정하거나 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모든 다른 인간들이 나날이 직면하고 있는 선택의 책임을 저버리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사회학이 하는 일은 그러한 선택들이 진정 자유로운지, 인류가 지속되는 동안 그 자유가 유지되는지, 더욱 더 자유로워지는지 잘 살펴보는 일이다. (『액체근대』,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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