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내 나름대로 황정은 소설을 분류하면 크게 둘로 나뉜다. 첫 번째는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하거나(대니 드비토) 땅 밑으로 추락하는 존재들(낙하하다)을 그린 작품으로,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의 그림자, 파씨의 입문이 여기에 속한다(예외가 있어서 단정하기는 어렵다. 마더소년같은 작품들도 그렇고, 파씨의 입문에서도 일탈하는 몇몇 단편들이 있는 까닭이다). 이 존재들은 땅이라는 직선과 삼각형을 이루며 위/아래로 떠돈다(“세 개의 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있지 않고 면을 이루는 평면은 하나 존재하고 유일하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기점으로 황정은 작가의 작품세계가 땅에 발을 딛기 시작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는 비로소 작가가 현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신호가 아니다. 부유하던 존재들이 땅이라는 직선에 잠식당하기 시작해 작품세계 역시 변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번에 나온 신작 아무도 아닌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는 단편집이다.

 

아무도 아닌에서 자주 마주하는 질문 중 하나는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선택한 화자들의 죄책감이다. 진짜 가해자는 얼마나 치밀한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미 당해버린 피해자와 한사코 그 무리에 합류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만 존재한다. 프리모 레비식으로 말하면 구조된 자의 죄책감이다. 그들(그들은 결국 우리다)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고(상류엔 맹금류, 88) 항변하지만, 이런 항변의 강도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세계의 폭력에 비-존재가 되어버린 존재들을 방관한 비정한 목격자. / 보호가 필요한 소녀를 보호해주지 않은 어른.”(양의 미래, 56)이 되었다는 반증이다. 작가는 이렇게 쓴다. “네 탓이라고 누군가 노려볼 때 그게 왜 내 탓이냐고 항변하고 싶은데 생각하고 보면 내 탓인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삶. 멀쩡하게 사는 것 같다가도 불규칙한 주기로 돌아오는 혜성 같은 그런 심정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

 

작가가 생각하는 폭력의 근원 또는 가해자는 상류의 자리로 종종 나타나는데, 거기에는 맹금류, 또는 아래에서 시끄럽다고 하든 말든 무라무라무라(누가, 130)라고 떠드는 자들이 있다. 피해자가 되기 싫어서, 즉 비-존재가 되기 싫어서 우리는 상행(上行)을 꿈꾸지만, 상류로 가는 길에는 월식이 시작되고 길조차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이 드리운다. 우리를 둘러싼 벽이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흉(웃는 남자, 173)하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세계는 가급적 단순한 것이 되(웃는 남자, 166)라고, “조금 더 들어가보자(누구도 가본 적 없는, 154)는 생각도 하지 말고 챙기라는 것들만 챙기며 살라고 요구한다. 똥물을 먹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이, 그 물을 먹지 않을 수 없는 제희의 가족, 진주, 도도의 옆에서 쓰러진 노인은 비-존재가 되어 직선에 파묻힌다.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웃는 남자, 184)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상을 향해 분노의 화살을 똑바로 겨누고 있을까. 벽 너머에 터널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처럼, 세계는 우리의 분노를 엉뚱한 곳으로 돌려버릴 만큼 영악하다. 심지어 우리를 한통속으로 만들어버리는 데도 능수능란하다. 누가에서 가 겨우 이사를 온 집의 이전 세입자인 노인을 보며 정당하게 세를 내고 이 집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노인을 내쫓았다는 기분(127)을 느끼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소음에 고통스러워하며 스스로 계급적 인간임을 인식하는 가 하는 일은 금융권에서 연체금을 독촉하는 상담원이고, 윗집의 소음에 분노하여 취하는 의 행동은 또다른 소음이 된다. 피해자가 되지 않은 화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나지막이 생각하는 것뿐이다. “안됐다······ 거기까지. 그 너머는 벼랑이니까.”(129)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리처드 세넷의 논의(투게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동정은 나는 네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고 있다, 지금 나는 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공감은 나는 너와 다르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주의깊은 관심을 쏟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동정은 같아지면서 멈추는것이고 공감은 다른 채로 나아가는것이다.” 이후 신형철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sym-pathy그 감정과 함께 있음이어서 ()’, 같아져 있음’(상태)이고, em-pathy그 감정 속으로 들어감이어서 ()’, 함께 하려 함’(실천)이다.”(**) 동정(sympathy)과 공감(empathy)에 대한 상투적인 정의에 따르면 안됐다는 동정이지만, 신형철의 정리대로라면 이는 동정도 공감도 아니다. “안됐다는 상대가 나와 다름을 전제로 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상상력을 발휘해 타인과 나를 동일시하려는 노력도, 함께 하려는 실천도 없다. 그러니 우리는 가라앉은 자를 찾고자 자신을 던지는 이들에게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데 내가 왜 누군가를 신경써야 해? 진주요, 아줌마 딸, 그애가 누군데요? 아무도 아니고요, 나한텐 아무도 아니라고요.”(양의 미래, 59)라며 씨르르, 하고 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세계가 우리에게 생존의 윤리만을 들이밀었기에 발생한 태도이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의 잘못은 동정하기 위해 공감하려 노력하지 않은 것에, 구조된 자로서 아파하지 않은 데 있다.

 

그렇다면 이 엄혹한 세계에서 쓴다는 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는 쓰기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작가가 찾은 답은 명실에 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 아래 차갑게 잠겨 있는 이름들(99), 그 일각(一角)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명실은 실리를 기억하기 위해 쓰기를 택했다. 그녀가 가진 것은 파편들이고 메아리들일 뿐이지만, 그 작은 불빛들이 막막한 어둠 속에서 수평선을 만드는 것(109)이다. 그래서 명실은 쓰려고 한다. 실리가 미처 끝내지 못한 작업을.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필요한 것은 기억과 호명이요,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리가 생전에 책을 냈더라면 그녀의 책도 한 권이나 어쩌면 몇 권쯤은 있었을 것이다. 실리가 이름을 적어 선물했을 테니까. 아마도 그 책의 첫 페이지엔 명실아, 하고 적혔을 것이다. 다른 것 없이 명실아. 언제고 자신의 책을 낸다면 첫 번째 증정본엔 그렇게 적을 거라고 실리는 말하곤 했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고맙다거나 사랑한다거나 말하지 않고, 명실아. 그녀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대답했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92)


이 단편집에서 다른 작품과 가장 다른 톤을 가진 작품은 누가복경일 텐데, 나는 복경을 읽으면서 황정은 소설이 다소 무서워졌다는 생각을 했다. 매장을 찾는 고객들에게 항상 웃늠을 지어야 하는 화자는 누군가의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진술하고 있다. 이야기 도중 불쑥 튀어나오는 반말이 주는 날카로운 감정의 기복도 그렇지만, “도게자에 대한 이야기는 읽으면서 정말 섬뜩했다. 이후 그녀는 자존감을 가질 틈도 주지 않는 이 세계에 대고 존귀하다는 것은 존나 귀하다는 의미냐고 묻는다. 이 소설은 소파를 찢지 않았다며 항변하는 그녀의 진술이기도, 살기 위해 똥물을 먹어야 했던 비-존재들의 분노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엄혹한 세계를 고발하고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더욱 엄정(嚴整)하게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악에 받쳐 뜨거운 화자의 목소리와 달리, 이 소설은 나에게 매우 차갑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서론에서 이렇게 쓴다. “사유하지 않음, 즉 무분별하며 혼란에 빠져 하찮고 공허한 진리들을 반복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뚜렷한 특징이라 생각된다.” 우리에게 사유의 중단을 요구하고 생존만이 진리라고 말하는 세계의 폭력. 이 안에서 가라앉은 자, 또는 가라앉고 있는 자에 대한 아픔을 느끼는 것이 존재의 비-존재화를 막기 위한 시작이다. 그래서 황정은 소설의 화자들이 느끼는 죄책감은 소중하다. 아렌트는 인간의 어떤 다른 능력도 사유만큼 약하지는 않다고 썼지만, 그 약한 사유가 어둠 속에서 수평선을 만든다. 그들과 내가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호명함으로써 기억하는 것, 그것이 동정을 향한 공감의 시작이다.


*  황정은, ‘작가노트’, 2014 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34-35.

** 신형철, 감정의 윤리학을 위한 서설 1, 문학동네201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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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1-01 0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광화문에서 시청쪽으로 올라오니 자정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랑곳없이 군가 같은 걸 틀어놓고 태극기를 흔들며 ˝무라무라무라˝ 하는 맹금류 어르신들이 있더군요. 촛불을 든 사람들과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의 대비가 너무 기괴했습니다. 제게 극악스러운 표정으로 태극기를 흔들던 노인을 보며, 저는 당혹스럽고 서글프고...조금 비참한 심정이었습니다.
무수한 평행선들....

아무 2017-01-01 11:55   좋아요 1 | URL
맹금류라기보단 어떻게든 상류에 닿으려 발버둥치는 사람처럼 보이는데요.. 맹금류는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무서운 부분도 있고.. 어떻게 사유하는지, 무엇을 사유하는지도 중요하지만, Agalma님이 말씀하신 장면을 생각하니 일단 정지된 사유를 시작하는 게 더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은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겠지만, 당신들이 믿고 기댔던 가치들은 이제 생명을 다 했다고, 이제 끝장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네요. 그들은 또 듣지 않겠지만..

AgalmA 2017-01-01 12:38   좋아요 1 | URL
성질이 사납고 육식을 뜯는 맹금류와 그들이 비슷해보인다 싶어 본문과 연결해 ˝맹금류˝라 표현했는데 그것은 다분히 외형만의 연결이었고, 맹금류의 서식 속성에 대한 아무님의 말씀 듣고 보니 너무 간단히 연결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적 고맙습니다.
아무님이 쓰신 ˝정지된 사유˝라는 표현은 좀더 정교하게 말씀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그들이야말로 정지된 맹목 상태에 빠져 있으니까요. 그들은 사유가 없다 라고 배제하는 전제를 두더라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민주 정부 때는 사유하는 인간들의 힘이 긍정적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거 같다고요. 지금의 전세계적인 우경화 조짐을 보면 이런 상황은 계속 순환되어 나타나겠죠. 그래서 역사의 반복이란 말도 끊임없이 나오는 걸 테고요. 인간은 변화무쌍할 수도 있지만 또한 단순하며 변질하기 쉬워요...

아무 2017-01-01 13:13   좋아요 1 | URL
Agalma님이 그들을 보고 맹금류를 떠올리신 것도 저는 의미있는 연결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은 맹금류가 되고 싶어 발버둥치는 사람들일 테니.. 구조된 자의 나쁜 예라고 생각합니다. 운이 좋아 가라앉지 않았을 뿐인데, 가라앉지 않은 걸 세계의 덕으로 돌리는 사람들..
말씀을 듣고보니 그들을 ˝정지된 사유˝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쉬운 배제라는 생각이 들어 반성하게 됐어요. 사유의 긍정적인 힘으로 얻은 민주화라는 성취가 무너지는 건 너무나 쉽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말씀처럼 인간은 쉽게 변하죠. 그래서 지금의 우경화 조짐이 심상치 않게 보이고.. 전 요즘 행동이 너무 절실해서 사유가 다시 홀대받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이럴수록 필요한 건 좀더 깊은 사유와 그걸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는 세밀한 언어겠죠..

2017-02-08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27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