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뉴스에서 '밥값내기' 비슷한 제목의 칼럼을 보려고 했는데, 우연히 황현산 문학평론가의 칼럼이 눈에 띄었다. '여성혐오'라고 번역되는 '미소지니(misogyny)'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온 역사에 대한 것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단어가 사회학자보다 문학연구자들이 먼저 사용해왔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물론 내가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나 기타 책들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문학사는 작가들의 이런 태도를 총괄해서 ‘미조지니’라고 불렀으며, 그 말을 한자 문화권에서 ‘여성혐오’라고 옮겨서 잘못될 것은 없다. 그러나 번역 이론가들이 오랫동안 고민해온 주제 하나가 이 번역어와도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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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작가들을 스탕달과 비교할 때 그들이 어떻게 여자들을 삶에서 소외시켜 종속적 존재로 만들었는지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미조지니’라는 말은 저 작가들이 여자를 현실에서 소외시킨 모든 태도와 방법과 의식을 함축하게 된다. 그 의미의 폭이 이렇게 확대된다. [링크] '여성혐오'라는 말의 번역론
한창 논란이 뜨거울 때(지금도 물론 뜨겁지만) '여성혐오'라는 번역어가 적절한 번역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읽었던 적이 있었다. '혐오'가 연상시키는 'hate'라는 단어가 어떤 극단적인 감정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비판도 있었고,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남성혐오'라는 대립항을 상정할 수 있는 것으로 인지될 수 있기에 문제가 된다는 의견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번역어로 적절하다는 의견도 있어서 당시에 작은 논쟁이 있기도 했다. 정희진의 경우 번역의 정치성을 지적했고, 제대로 번역이 되지 않는 말을 번역하면서 남성 중심적 문화가 반영되었다며 '미소지니'라는 말을 그대로 쓸 것을 주장했다. (정희진의 견해는 예전에 스크랩해둔 미디어오늘의 기사[링크]를 참조했다) 내가 처음에 미소지니라는 말을 영어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았을 때 그 해석이 매우 포괄적이어서 번역어가 적절한지에 대해 호기심을 항상 갖고 있었고, 황현산 평론가의 이번 칼럼은 내 궁금증을 자극해주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네이버 메인에도 안 올라와 있었기에 우연이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번역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 내가 어떤 의견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나는 1개 국어 이용자인데다 국어를 전공했다..) 딱히 덧붙일 말은 없지만, 요즘 종종 불편하게 다가오는 부분은 이런 내용의 칼럼을 본 사람들이 '당신 같은 기성세대가 문제를 키웠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가부장적 구조에서 그들이 받은 수혜를 무시할 순 없겠지만, 이런 식의 댓글들은 '당신만 깨끗한 척하지 마라', '수혜자였으면 닥치고 있으라'는 말로 보여 불편하다. 얼마 전 문유석 판사의 칼럼(링크)에 대해서도 페이스북의 '자유주의' 페이지에서 반박하는 게시글(링크)을 올렸는데, 게시물에 달린 댓글의 반응도 판사라는 직함을 가진 당신 같은 사람이 그런 말할 자격 있냐는 둥, 당신 같은 기성세대가 어떻다는 둥하는 반응이 대다수다(게다가 저 칼럼은 대단히 일반적인 내용만을 다뤘다. 지면상의 문제 등이 있었겠지만..). 그 사람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수혜자들의 반성도 분명 필요하지만, '기성세대 책임'이라는 식으로 그들 모두의 목소리를 막는 행위, '너는 깨끗한 줄 아냐'는 식의 반응은 생산적인 논의를 가로막을 뿐 아무 도움도 안 된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바꾸려는 생각이 있는지,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이 있는지도 나는 의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