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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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과잉의 시대,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라는 말처럼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 중에서도 고통을 담은 이미지들, 특히 샤를리 에브도 사건 이후 유럽과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난 이미지들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상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런 고통의 이미지들을 너무 쉽게 관람할 수 있게 된 현실, 타인의 고통이 전시/상연되는 현실은 기술의 진보로 인해 우리가 윤리적 감수성의 한 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사실 고통이 사진에 찍히기 시작한 순간부터, 즉 고통이 대상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 타인(우리와 타인을 가르는 것은 얼마나 난폭한 행위인가)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고통의 전반부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사진이 얼마나 많이 조작되어 왔는지가 나온다. 흔히 사진에 대해 생각할 때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진실성이지만, 하나의 프레임을 고정시켜 한 순간을 담는다는 행위(shot) 자체가 갖는 폭력성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며, 사진은 그 안에 담긴 피사체를 미학적으로 변형시킨다. 설령 그것이 전쟁을 담고 있다고 해도.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텔레비전, 스트리밍 비디오, 영화의) 이미지가 우리의 주변을 둘러싸고는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진이 가장 자극적이다. 프레임에 고정된 기억, 그것의 기본적인 단위는 단 하나의 이미지이다. 정보 과잉의 이 시대에는 사진이야말로 뭔가를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자 그것을 간결하게 기억할 수 있는 형태이다. 사진은 인용문, 그도 아니면 격언이나 속담 같은 것이다. (44)


전쟁 사진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고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베트남 전쟁 때부터였다. 우리가 베트남 전쟁 하면 떠올리는 닉 우트(Nick Ut)의 네이팜탄 폭격 사진을 비롯한 많은 사진들은 반전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여기까지만 보면 포토저널리즘의 발달이 세계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손택은 고통을 담은 사진들에 내재된 통제와 검열의 문제를 지적한다. “우리의 정신에 깊이 각인되지 못했거나, 남아 있는 이미지가 별로 없는 잔악 행위들은우리의 집단적 기억에서 잊혀지고, 널리 알려져 있는 사진들 역시 특정 사회가 한번쯤 생각해 보자고 선택해 놓은 것(130)이라는 이야기다. 공개된 사진에서도 희생자들은 배경인 장소가 이국적일수록 모습이 선명해지며, 사망한 미군 병사들이나 9.11 테러 직후 발견된 주검 사진들은 훌륭한 감식력에 따라 공개되지 않는다. “미국의 역사를 진보의 역사로 보려는 국가적 합의(134)가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진들처럼 피사체들이 겪고 있는 상이한 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버리는 사진들도 있다. 이런 사진들은 특정 시기에 특정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전 세계적인 것으로 과장하고, 우리는 사진에 담긴 고통의 규모에 위축되어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122) 어떤 식으로 개입을 해도 변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 그래서 포기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정부의 통제와 언론의 자기 검열을 통해 공개되는 이미지들은 전쟁이라는 비극이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나는 안전하다라는 인식이 사람들을 무관심해지게 만든다(손택은 이를 관음증적 향락이라고 부른다). 이와 관련해서 손택이 사라예보의 한 여인에게 들은 일화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자신이 안전한 곳(91년 당시의 사라예보)에 있다고 느끼는 한, 인간은 타인의 고통(세르비아의 크로아티아 침략)에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라는 것. 하지만 손택은 여기서 다른 것을 본다. 타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이미지를 보고 싶어하지 않은 이유는 무력감과 공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폭력의 이미지들이 그들을 무감각하게 만들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폭력을 외면하기도 한다고 손택은 말한다. 이는 사진에 관하여(1977)에서 그녀가 폈던 주장(이미지로 뒤덮인 세계에서 사람들은 무감각해진다)에 대한 이의제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사진들은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 타인의 고통을 더욱 적나라하게 포착해 보여주고, 우리는 움찔움찔하면서도 그런 사진들을 보며 관음증 환자의 위치에 놓인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와버린 이미지들 사이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연민을 보내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손택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가 내놓은 대답은 우리의 특권과 그들의 고통 사이의 연결고리를 숙고해보는 것이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154, 강조는 인용자)


다소 길지만 이렇게 인용한 것은 이 부분이야말로 손택이 말하고 싶어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지난 몇 년간 내가 취해왔던 태도를 반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수많은 뉴스를 일일이 찾아보면서 환멸을 느끼고 무력감을 느꼈던 나에게, 손택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나에게는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167)고 말하는 것이다. 연민이나 환멸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함의 표현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손택은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는 작년에도 들었지만 여전히 무력해지고 있었다.


니체의 입장에 우리가 난감해하는 것은 그가 수치심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펼쳐서가 아니라 고결한 자의 수치심과 선한 자의 연민을 대비시키며 후자를 집요하게 비난하기 때문이다. 고결한 자와 비교했을 때 연민의 정을 지닌 선한 자는 사실 자기 역량의 최소치만을 사용한다. 그들은 고통의 상황을 그대로 두고서 아주 소량의 도덕적 선행만을 반복한다. 니체는 이런 도덕주의자들을 마비되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그런 무기력한 앞발을 갖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 그런 겁쟁이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앞발을 들어 약자를 해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느라 분주한 통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역량, 즉 진정으로 행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 연민이란 참으로 게으르고 뻔뻔한 감정이다.’

-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눈먼 자들의 국가, 72-73, 강조는 인용자)


작년 봄에 읽으면서 접어두기까지 했건만, 나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어떻게든 고통과 마주하기를 피하려는 몸부림 때문이기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염세적 세계관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숙고하지 않으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사진 너머에 존재하는 통제와 검열의 논리를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고, 타인의 고통에 수치심을 느끼고, 나와 그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무엇인지 숙고하고, 어떻게든 변화할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 그것이 내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명심해야 할 것은, 타인의 고통을 사진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손택이 마지막 장에서 제시하는 사진은 제프 월(Jeff Wall)<죽은 군대는 말한다>(1992)이다. 1986년 아프가니스탄 모코르 지역의 소련 정찰군을 담은 이 사진은 사실 작가가 공개적으로 작업장에 만들어 놓고 연출한 것이다. 사진 속 피사체들 중 아무도 살아 있는 자(우리)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관심하다. 무언가를 고발하는 듯한 사진 속에서 설령 그들이 우리에게 말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사진은 우리가 그 고통을 이해하고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타인의 고통을 관람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의 입장에서 유념해 두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현실 감각을 잃지 말 것. 둘째, 사진만으로 그들의 고통을 전부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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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7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NS에 공개되는 사진은 늘 좋은 것만 보여줍니다. 그 사진을 보고 사람들은 ‘저 사람은 참 행복하고 잘 사는구나’라고 착각하죠. 그래서 저는 SNS 사진을 좋아하지 않아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일이 과연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

아무 2016-09-08 00:10   좋아요 0 | URL
자기 과시의 심리죠 사실. 그런 행태의 가장 극단에 있는 것이 인스타그램일 겁니다. 다소 강박적이기까지 한 sns 사진에는 자기 과시의 욕구도 있겠지만 자신의 선택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요새 합니다. 선택의 폭이 지나치게 넓어진 사회에서 내 선택이 맞다고 해줄 사람들이 필요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