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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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거실에서 나는 이 책을 읽고 있었고, 부모님은 '미세스 캅'을 보고 있었다. 드라마에는 말을 드럽게 안 듣는 가출 청소년과 초등학생 꼬마가 나왔다. 하는 짓이 얼마나 얌체 같았는지, '쟤 진짜 왜 저러냐...'하는 생각으로 드라마를 봤다. 그리고 책에는, 더 울화통이 치미게 만드는 영훈이의 엄마가 나왔다. 나는 어느새 남자의 편에서 '이 아줌마 진짜 해도해도 너무한 거 아냐?'하는 분노로 가득 차 이 책을 보고 있었다. 현실이었다면, 아마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아주머니를 연민의 눈으로 보았을 텐데.

 

골드만은 소설을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한 개인이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다 패배하는 형식'이라고 정의했다.(타락한 개인이었는지 문제적 개인이었는지 헷갈리긴 하지만) 여기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개인은 세계의 무참한 힘 앞에 무너지고, 우리는 어느새 그의 편에 서서 세계를 욕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사는 세계를 다시 한번 보게 되고,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타락한 개인은 소설에서는 내 편이지만, 현실에서는 소외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저씨>의 아저씨는 영화 속에서만 멋있는 구원자일 뿐, 현실에서 우리 눈 앞에 나타나면 정말 무서운 범죄자인 것이다. (현실 속 아저씨는 원빈의 외모가 아니라는 점도 있겠지만...) 그러니까 결국에는, 소설은 다 읽은 뒤 불편함이 와야 한다는 뜻이다. 문제적 개인을 열심히 지지하다 문득 돌아봤을 때 드는 불편함이.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하 <그믐>)을 읽으면서 술술 넘어가는 책장에 놀랐고, 이야기가 주는 몰입도에 놀랐고, 소설을 읽은 뒤 오랜만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 불편함이, 나를 미소짓게 했다.

 

   머리에 난 혹이 문제가 아니었다. 뒤죽박죽으로 흩어진 종이들에는 쪽 표시가 없었다. 게다가 묘하게도, 어떤 문장이 한 페이지에서 다른 페이지에 걸쳐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일부러 그렇게 쓴 건가 싶을 정도로 매 페이지의 끝이 어떤 문단의 끝이었다. 어떤 장이 앞이고 어떤 장이 뒤인지 쉽게 구분하기 어려웠다.

   여자는 종이 뭉치를 책상 위에 놓고 한 장 한 장 천천히 원고를 살폈다. 조금 읽다보니 원래 원고 자체가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시간 순서대로 정렬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몇 배로 골치 아파진 셈이었다.

- '작두/홍콩/교지' (25-26쪽)

 

<그믐>의 시간은 뒤죽박죽이다. 마치 원래도 시간 순서가 아니었는데 엎질러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식이다. 그런 뒤죽박죽의 모습이 시공간연속체의 모습과 닮았다고 볼 수 있을까. 그리고 각 장의 제목을 그 장에 나오는 세 개의 단어로 해 놓은 것은, 소설의 제목처럼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혹은 우리가 세계를 인지하는 하나의 패턴인 것일까.

 

처음에 우주 알에 대한 남자의 설명을 보면서 내가 떠올린 것은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에 나오는 트랄파마도어 인이었다. 그 외계인들도 인간과 달리 시공간을 통합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런 비슷한 얘기가 앞부분부터 나와서 나는 그런 류의 소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나... 하는 삐딱한 눈으로 책을 읽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이 작품이 가진 매력에 빠져들었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주머니의 서사가 얽히고 풀리는 모습에 몰입하면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이 소설은 많은 이야기를 다룬다. 진정한 속죄의 의미, 남녀의 운명적인 사랑, 학교 폭력 등등. 하지만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이러한 이야기들, 즉 현실이 이루고 있는 패턴에 대한 것일 테다. 우주 알의 이야기대로라면, 인간은 각자가 주어진 패턴 속에서 살아가는, 변화가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이루고 있는 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전시관을 감상하는 단체 관람객처럼. 소설은 남자와 여자, 아주머니를 중심으로 과연 인간이 패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나 역시 읽으면서 끊임없이, 이 소설에서 말하는 패턴이라는 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졌지만, 답을 얻지는 못했다. 어쩌면 패턴은 세계 그 자체일 지도 모른다. 인생이라는 패턴, 학교라는 패턴, 윤리라는 패턴, 세계의 가치관이라는 패턴... 그리고 이러한 패턴들의 원자이자 가장 중요한, 인간이라는 패턴.

 

과연 인간은, 패턴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소설을 보았을 때는, 우주 알을 품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작품 말미에 작은 희망을 남겨두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남자의 모습을 통해. 언젠가 인간이 우주 알을 품게 되는 그날, 우리에겐 좀더 나은 패턴을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 지도 모른다. 과연 언제쯤 '당신 패턴이 마음에 드는데.'하며 우주 알이 인사를 건넬까.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거짓말들은 다 잊더라도,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진심으로.

   그러고 나서 남자는 화면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여자에게 하는 말이 너무 짧아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더 보탤 단어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말들은 거짓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잔인한 진실도 안 되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거야. 같은 말들. 사실 남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시공간연속체 속에서 그 모든 일을 몇 번이고 다시 겪고 있는 중이었다.

- '복권/유서/너는 누구였어?'(148쪽)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남자와 여자의 운명적인(사실 남자가 시공간연속체를 보고 선택한) 만남과 사랑을 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고, 아주머니와 남자의 모습을 보며 어떤 것이 윤리적일까, 속죄란 무엇일까, 남자에게 주홍글씨를 평생 동안 새기는 아주머니의 행동이 옳은 걸까 하는 질문에 고통스러웠으며, 여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현실의 핍진함이 주는 상처와 폭력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우주 알을 보면서, 우주 알이 인간이 이 지긋지긋한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이제는 남자를, 중간에 '강'자가 들어가는 남자를 떠나보낼 때가 되었다.

 

   제가 소설을 쓰는 첫번째 이유가 돈인 것은 아닙니다. 세번째 이유쯤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인생을 걸고 어떤 일을 할 때, 세번째 이유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

   그러나 저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 세번째 전장이야말로 진정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는 폭력이 충만합니다. 외교 따위는 없습니다.

   저는 첫번째, 두번째 전장과 달리 이곳은 현실의 싸움터라고 느낍니다. 이 밥벌이의 싸움을 피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현실에 참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원조를 받으며 시장 밖에서 피난을 다니지 않고, 시장 안에서 싸우며 시장가치를 인정받고자 합니다. 그것이 첫번째, 두번째 전장을 가벼이 여긴다는 의미가 아님을 잘 알아주시리라 믿습니다.

- '수상 소감' (165-166쪽)

 

장강명 작가의 <한국이 싫어서>가 한창 유행할 때도 나는 그를 찾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믐>을 읽고, 수상 소감과 수상 작가 인터뷰까지 읽은 후, 나는 이 작가가 좋아졌다. 팬이 될 것 같다. 오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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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5-08-26 0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멋진 리뷰에요^^

아무 2015-08-26 07:3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마음이 뿌듯하네요 ㅎㅎ

보물선 2015-08-26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리뷰대회 있는거 아시죠?

아무 2015-08-26 13:48   좋아요 1 | URL
아 정말요?? 지금까지 몰랐는데.. ㅎㅎ 찾아봐야겠네요^^

스윗듀 2015-09-02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나도 get

아무 2015-09-02 16:04   좋아요 0 | URL
전 다음 기회에.. ㅠㅠ 분량 꼭 확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