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께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지금처럼만 사시다가

 

아이처럼

여기 저기 아픈 곳을 가리키고

약 발라 달라 조르고

때가 되면 정확하게

밥 안주냐고 물어보고

좋아하는 포도를 맛나게 드시고

밤이면 세상 모르게

단잠을 주무시고

그러다가, 먼 훗날

더 이상

팔도 다리도 움직일 기력이

다 하셨을 때 

달콤한 잠에 취한

아기처럼

평화롭게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돌아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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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8-23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를 읽으니 님의 할머니 안부가 궁금합니다.

겨울 2006-08-24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런데 좋아지심이 건강하심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하루하루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로 불안합니다.
 

올 여름 이 작가의 책을 세 권 샀지만 아직 한 권도 읽질 못했다. 조급하게 대충 페이지를 넘길 성질의 책이 아니라는 생각에(허겁지겁 읽고 허접하다 팽개치는 책들이 많아 미안해서). 출판된 순서대로 '빅슬립'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고, 맨 마지막 권 '기나긴 이별'을 펼쳤다. 그의 소설 중에서 최고의 찬사를 얻은, 추리문학의 한 획을 그었다는, 어디까지나 남들의 얘기.

그렇게 하여 사립탐정의 하루가 지나갔다. 정확히 전형적인 날은 아니었지만 아주 특별한 날도 아니었다. 한 남자가 이 일을 그만두지 않고 버티는 이유를 아무도 알  수 없다. 부자가 될 수도 없고, 대부분 재미도 별로 없다. 때로는 얻어터지거나 총을 맞거나 감옥에 던져지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죽을 수도 있다. 두 달마다 한 번씩, 이 일을 그만두고 아직 머리가 흔들리지 않고 걸어다닐 수 있을 때 번듯한 다른 직업을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러면 문에서 버저가 울리고 대기실로 향하는 안쪽 문을 열면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여 새로운 문제와 새로운 슬픔, 약간의 돈을 안고 들어온다. (264~265)

첫 페이지를 시작하기도 전인데, 눈과 마음이 솔깃하다. 필립 말로에 대한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도 없다. 떠오르는 이미지도 없다. 단지 전형적인 탐정의 뒷모습 정도? 키는 크지만 얼굴은 알 수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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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난 인물에게 시간은 제한, 부적절한 것, 반복, 단순한 완료의 수단이다.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단순히 그 사람일 뿐이다. 항상 그대로의 사람. 공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벤야민은 형편없는 방향감각과 지도를 볼 줄 모르는 능력 덕에 여행을 사랑하게 되고 헤매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시간은 많은 여유를 주지 않는다. 시간은 뒤에서부터 우리를 뚫고 들어오고, 좁다란 통로를 통해 우리를 과거에서 미래로 밀어낸다. 그러나 공간은 넓고, 가능성, 위치, 교차로, 통로, 우회로, U턴, 막다른 골목, 일방통행로 등이 가득하다. 실제로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다. 토성적 기질은 느리고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칼을 들고 자신의 길을 내며 나아가야 한다. 때로는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려 끝을 내기도 한다. (토성의 영향 아래, 73~74 페이지)

 

책을 빨리 많이 읽기를 당연시하고 우쭐해 하던 허영심이 이제는 어느 정도 고쳐졌다고 생각한다. 단숨에 읽어치우는 소설의 생명력은 짧다. 관심도는 읽기를 마친 그 시점에서 뚝 떨어져 시야에서 점점 더 먼 곳으로 이동하다가 급기야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남의 손에 제일 먼저 떨어지는 것도 소설이다. 속도에 비례하여 빨리 잊힌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래서 천천히 느릿느릿 읽은 자리를 다시 돌아가 읽더라도 내게는 좀 어렵다싶은 책들을 꾸준히 산다. 그 책들은 언제나 시야를 차지하고 기다린다. 일 년이 지난 것도 있고 금방 산 책도 있다. 백 퍼센트 이해를 하지 못했으니 언제까지나 읽지 않은 책들로 남아 있다. 내 집을 떠날 일도 물론 없다.


이 책은 순차적으로 읽지 않는다. 목차를 살펴보고 익히 아는 이름이나 흥미로울 것 같은 장을 찾아 페이지를 후루룩 넘긴다. 그리고 최대한 천천히 느릿느릿 페이지는 망각하고 단어에 문장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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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8-22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 어려운 책은 아예 읽히지를 않으니 점점 멀어져요. 그래도 주변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처럼 천천히 느릿느릿 음미할 책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입니다.

물만두 2006-08-22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치치 못함이 그런데 전 못고칠것 같아서 그냥 볼래요.

겨울 2006-08-22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소설 좋아하는 것은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소설 읽는 중간 중간에 다른 책도 좀 읽어야겠다 뭐 이런 의도예요.

잉크냄새님, 저는 이번에 <더불어숲> 합본으로 다시 사서 읽고 있어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도 새 책으로 조만간. 이것도 좀 버려야할 책욕심이죠?

파란여우 2006-08-23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다닥 읽는 책은 '활자 읽는 기술'에 불과하죠.
느릿느릿 읽는 책은.....거북이가 풀 뜯어 먹는 소리...
아, <젠틀 매드니스> 읽고 있슴다. 무려 1111페이지짜리! 으앙~
 
방화벽 1 발란데르 시리즈
헤닝 만켈 지음, 권혁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메일을 보낼 줄도 받을 줄도 모르는 범죄수사관 발란더의 자괴감이 유난히 짙었던 소설이다. 현 시점에서 흥미를 가지기엔 방화벽이니 해커라는 소재는 식상한 면이 있다. 2004년도 나왔을 당시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추리물은 여타 장르에 비해 유행에 민감하다. 아무리 잘 쓰여 졌어도 흥미를 유발시킬 소재가 아니면 재미는 반감된다. 하지만 여전히 발란더의 고뇌와 사색은 인간미를 물씬 풍긴다.


몇 몇의 미치광이 광신도들로부터 세계를 구하는 발란더의 활약. 무겁고 지친 몸을 던져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오해와 비난. 존재감은 위협받고 당뇨와의 끝나지 않은 전쟁을 치루는 몸은 피폐하고 고독에 사무친 정신은 건조한 사막 같다. 우주공간 너머의 보이지 않는 존재는 결국 그러한 발란더 수사관의 취약점을 파고들어 공격을 가한다. 소설을 읽으며 가장 이해가 안됐던 부분이기도 하다. 교제광고란에 투고할 광고 문안을 두고 고민하는 발란더는 웃음을 유발했다. 그러나 덜컥 진위도 확인하지 않고 편지를 받자마자 만나러 달려가는 모습이라니. 척 보아도 수상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데. 노련하고 노련한 발란더 수사관의 판단력이 단숨에 추락하는 장면이었다. 로베르트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서 헐레벌떡 찾아왔을 때의 그 안일함이란.


이 소설은 불완전한 인간들의 집합소다. 발란더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들이 한 가지 이상씩의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간다. 스웨덴, 북구의 낙원 같은 막연한 이미지를 풍기는 나라. 그 조국에 대한 헤닝 만켈의 불신과 근심은 끝이 보이질 않는다. 만연한 폭력과 부패와 타락, 술과 마약, 성의 문란 등 그가 말하는 스웨덴은 사람이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 만한 곳이 아니다. 그곳은 다른 낙원을 찾아 떠나기 전, 여건이 여의치 않아 하는 수 없이 살아가는 안개 자욱한 음울한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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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8-22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란더 시리즈는 이제 더 못볼 거 같아 안타까워요. 그 딸도 경찰이 된다고 하던데요.

겨울 2006-08-22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요? 출간을 안하는 건가요, 작품이 없는 건가요?

물만두 2006-08-23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을 안하네요.

비로그인 2006-08-23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겨울 2006-08-24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만큼 책이 팔리지가 않은 모양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멋진 작가를!!
님이 홍보 좀 해 주세요.^^
 
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그것은 이상한 버릇이다. 한창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몰입해 있다가 갑자기 결국 이 소설의 끝은 어디일까, 라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마지막 몇 장을 읽어치우는 것. 아마도 열에 다섯 번쯤은 그런 식이다. 결과를 알고 나면 당연히 읽는 속도가 느려진다. 그리고 그 밤을 새워 읽었어야 할 책이 다음 날로 넘어간다. 뻔히 알면서, 어째서 매번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지.


<용의자 X의 헌신>,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중에서 내 입맛에 딱 떨어지는 소설을 만났다. 소설에 관한 어떠한 정보에도 눈과 귀를 막고 읽어서인지 스릴 넘치는 경험이었다. 물론 맨 뒤로 가서 끝을 보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유혹에 시달렸다. 그야말로 전력질주를 하여 읽어치운 뒤, 한동안 책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이시가미, 이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 라는 생각에.


대머리에 가늘게 찢어진 작은 눈의 통통한 남자, 우울한 표정, 책에서는 그런 이미지의 남자에겐 어떤 여자도 사랑을 호감을 느낄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글쎄, 첫인상은 그럴 수가 있겠다. 어디까지나 첫인상, 경험에 의하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말과 행동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상의 만남에서 몇 마디의 대화만 나눠보면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가 판가름 난다. 허우대 멀쩡한 속물들 수도 없이 봤다. 그런 인간은 일단 냉정하게 무시다. 예의상의 미소도 싫다.

 

이시가미의 절대적인 헌신을 받는 야스코와 미사토 모녀에 대해서는 심정이 약간 복잡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싶었고, 그건 이시가미의 선택이자 필연이고 운명일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지만 화가 났다. 대학동기 유가와 마나부의 마음 그대로, 숫자밖에는 인생의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는 한 사내의 지나치게 순수한 마음의 결정이었을 뿐. 동정하고 연민한들 화살은 이미 시위를 벗어나 과녁에 도달하고 말았다.


선입견에 의한 맹점을 찌르고 들어간다. 천재 물리학자와 천재 수학자의 두뇌싸움은 역시나 이 소설의 백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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