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가느라 내 몸은 그렇게 힘이 들었나 보다.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어떤 사람과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 선선하게 살갛을 부비는 바람이 그지없이 좋았다. 휴, 한숨 소리가 절로 나는 고단한 시기가 이제 가나보다 생각하니 절로 기운이 난다. 이상한 것이 그 덥던 한 여름도 무탈하게 잘 보냈다고 자축을 하자마자 몸이 이상신호를 보내왔다. 축축 늘어지는 몸과 무거운 머리, 무엇보다 뚝 떨어진 식욕에 반항도 한번 못하고 백기를 든 것이다. 독하다면 독하다는 소리도 곧잘 듣는데 어째 이럴 때는 찍 소리도 못하는 지 모르겠다.

오늘 책을 읽다가 '권태는 모양이 없다. 그래서 우리 내부에 혹은 우리의 밖에 그토록 많은 권태가 우글거리고 있는가?'라는 문장에서 우뚝 섰다. 내가 겪은 이즈음의 시련은 '권태'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에 적합하다. 굳이 병원에 가서 소변검사니 피검사를 받지 않아도 되는 병명 '권태'다. 새삼스럽지도 않다. 애초에 난 권태로운 인간의 대명사였으니. 특별히 집착하는 것도 없고 유난스럽게 호들갑을 떠는 법도 없고 어지간한 유머에는 웃음도 주지않는 인색한 인간인 고로. 소중한 물건이나 사람이 없다는 자각이 왠지 섬뜩하다. 사람에게도 돈에도 마음을 주지 않는 이상한 인간이라는 말을 아주 최근 누군가에게 들을 때도 그런가보다 웃어넘겼는데, 문제라면 문제인가. 그래도 꿈은 아직도 열심히 꾸고 있는데. <삶이 활기를 띠는 것은 그 꿈의 불가능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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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9-02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이 활기를 띠는 것은 그 꿈의 불가능성 때문이다...
님, 권태란 녀석... 한번씩 찾아오지요. 바쁘다고 찾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더라구요^^
님의 글로 진단해보건데^^ 무엇엔가에 혹은 누군가에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까요? 아니, 꼭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닐거에요. 님, '가을맞이'로 힘내세요.

겨울 2004-09-02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이 문제...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무한의 주인 12
히로아키 사무라 지음 / 세주문화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오늘, ‘무한의 주인’을 읽었다. 흑백의 만화에 핏빛이 보일 리 없건만, 이 만화에는 핏빛이 난무한다. 사지절단은 기본이다. 등장인물들이 지르는 비명소리가 지면을 뚫고 나와 아우성을 치는 듯하다. 여자라고 해서 봐주는 것도 없다. 아니 오히려 여자라서 더 눈부시다. 


100인을 죽였다하여 백인자객이라 불리는 만지는 ‘혈선충’이 몸 안에 심어진 불사의 몸이다. 그는 팔다리가 잘리고 심장이 꿰뚫려도 다시 새 살과 피가 돌아 되살아나는 기막힌 운명의 사내다. 애초에 무사는 누군가를 죽이거나 혹은 죽임을 당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설령 그것이 유일한 혈육 여동생의 남편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무사의 가장 명예로운 죽음인 할복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불운의 그에게 한 줄기 서광이 비치니 바로 열여섯의 소녀 ‘린’이다. 


눈앞에서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고 어머니가 능욕당하는 것을 목격한 린은 부모님의 복수를 결심하고 만지에게 호위무사가 되어줄 것을 부탁한다. 삶의 맨 밑바닥에서 허우적대던 만지는 린의 복수에 동참해 1000명의 악인을 죽여 자신의 죄를 씻기로 작정한다. 여기까지는 상당히 고무적인 시작이다.


처음에는 린의 복수가 정당하고 필연처럼 여겨지나 뒤로 갈수록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제의 아군의 오늘의 적이 되거나, 오늘의 적이 내일의 아군이 되는 것은 예사요. 칼을 들고 상대를 죽이고자 하는 명분에는 옳고 그름이 사라지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만 남는다. 만지와 함께 시작된 린의 복수는 점점 그 의미를 상실해 가고 결국에는 적의 수령을 도와 싸우는 지경에 이른다.


이 정도가 되면 진짜 ‘적’이 과연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칼을 품고 달려드는 사내들은 다들 비장하다. 살기를 작정했다면 애초에 칼을 겨눌 이유가 없다. 섬기고 있는 주군을 위해, 사모하던 아가씨를 위해, 옆에서 살육당한 동료를 위해 베고 베이며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팔이 잘리고 눈알이 도려내어 지면서도 겨루기를 멈추지 않는 사내들을 보노라면 머릿속이 일순 텅 비어진다. 


혼례를 치룬 다음날 장인의 목을 베야하고 아내는 그 자리에서 자결을 한다.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인은 저주받은 재능을 비관해 자신의 손을 봉인하고 몸을 팔아 살고 있다. ‘린’이 필사적으로 쫓아가 죽이고자 한 ‘일도류’의 수령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일도류’를 멸하려는 ‘무해류’의 음모가 있다.


여기까지다. 내가 읽은 것은. 오늘밤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만지와 린의 운명은 거센 물살을 타고 있다. 수도 없이 만신창이가 되어 죽었다 살아나는 만지와 그것을 지켜보는 린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과연 어디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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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0-07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가 난무하는 만화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한의 주인>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 무엇이 있는가 봅니다.. 저도 무한의주인을 처음 읽은 날,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비가 좋다

비 소리가 좋다

비에 젖은 사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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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8-16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가 오네요... 비가 와~~~ 하는 노래가 생각나요...

겨울 2004-08-16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부디 건강하세요.

마태우스 2004-08-16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과 몽상님도 건강하셔야 해요! 오늘 전 우산이 있었는데, 다른 술자리 동료-여자죠-에게 우산을 주고 비맞고 왔어요. 하하, 저 착하죠

잉크냄새 2004-08-17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간에 빗소리에 잠이 깨어 서재에 들어왔더니 이곳에도 비가 내렸네요.
가끔이지만 빗소리에 잠이 깨는 것, 괜찮은 기분인것 같아요.^^

겨울 2004-08-17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빗소리에 잠이 깨는 것, 저도 무척 좋아해요.
어깨가 젖어 돌아오신 마태우스님, 정말 잘 하셨어요.
 

 

유명한 만화다. 너무 유명해서 선뜻 손이 가지를 않았다. 사실은 읽기를 시도했다가 진도가 나가지를 않아서 포기했다. 그런데 최근 대충 알던 남자애가 일본에 다녀왔다며 휴가 이야기를 하다가 이 만화로 흘러갔는데 이 만화의 열렬한 독자였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일은 고통이다. 모름지기 대화란 공통적인 분모가 있어야한다.


그래서 읽기 시작했다. 결과는 눈물이 마를 새가 없이 내내 울었다. 호르몬의 이상인지 아니면 이상기후 때문인지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올 때마다 눈물이 쏟아져 훌쩍이고 있다. 무슨 조화인가. 원래부터 감정이입이 빨라서 한번 터진 눈물을 멈추는데 애를 먹곤 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재미있다고 낄낄대고 보는 만화를 왜 나는 질질 콧물 눈물을 쏟을까.


소마가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십이지의 혼령이 깃드는 저주를 받는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고통스런 숙명을 짊어진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버림받거나 잊혀진 채로 어둡고 고통스런 기억을 끌어않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결코 누구로부터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절망감을 심어주는 소마가의 당주 아키토는 십이지의 혼령을 지배하는 신적인 존재로서 모든 불행의 근원이기도 하다.


저주, 돌연변이, 괴물 같은 존재, 유폐나 은폐, 혹은 망각을 선택하는 어머니 혹은 아버지의 애정에 굶주림 아이들. 슬프다. 슬프기가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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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8-21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라? 제목의 경쾌함이나 귀여운 책표지하고는 거리가 꽤 먼 이야기네요.
얼마전 누가 이 책을 참 좋아한다고 권했는데 우울과 몽상님의 글을 보니
꼭 읽어야 할듯합니다.^^

겨울 2004-08-21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 전에는, 저도 이리 어둡고 무거운 내용인지 몰랐답니다. 아동틱한 그림에 대한 선입견으로 오랫동안 외면한 점이 아쉽더라구요.
 

귀뚜라미가 운다. 아, 가을이다. 폭염에 지친 몸과 마음이 비로소 안식을 얻는다. 오후에는 고대하던 소나기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그 여파로 마당은 폭풍이 지나간 듯 어지럽다. 제법 알이 굵어 지붕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한 감과 잎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고 화단에 심은 고추나무는 휘엉청 허리를 꺾고 드러누웠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서둘러 쓰러진 고추나무부터 일으켜 세웠다. 실하지는 않지만 주렁주렁 매달린 푸른 고추를 아직은 오래도록 따서 먹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에 다녀온 시골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너른 마당에 널린 붉은 고추였다. 이번 더위의 혜택을 보는 거라면 고추말리기라며 햇볕과 바람과 먼지로 검게 말라가는 고추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할머니를 보니 덥다고 마냥 푸념을 늘어놓지도 못했다. 한낮엔 너무 뜨거워 마르다 못해 익는 고추를 보호하기위해 햇볕가리개를 덮을 정도란다. 할머니는 새까맣게 타셨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고추를 매만지느라 도통 쉴 생각을 안 하신 탓이다.


고향은 지금 수난시대다. 산의 허리를 뚝 잘라 고속도로를 낸다고 얼마 전부터 공사가 한창인데 반듯하게 포장된 넓은 길 따위는 아무리 좋게 봐도 정감이 안 간다. 머잖아 저 길로 요란한 경적소리를 내며 화물차며 자가용이 달릴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무리 봐도 득보다는 실이 많은 발전이다. 세상의 온갖 해악들이 저 길을 타고 마을로 올 것만 같다. 윗동네에는 벌써 공장이 들어서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있다. 물장구치고 놀던 냇가도 이제 옛날의 그 모습이 아니다. 사람 살 곳이 점점 줄어든다. 그래서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것일까. 늘어가는 빈 집, 아이들이 없는 마을, 분교로 전락한 학교. 차들을 위한 도로는 반듯하게 끝을 모르고 전진하건만 사람이 사는 마을, 집들에서는 어떤 희미한 빛도 새어나오지 않고 점점 몰락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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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8-15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을 읽으니 어디나 시골의 현실은 동일한것 같네요. 저의 고향도 님의 고향보다 조금 빨리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과 인간의 동반자적인 의미를 전혀 두지 않는 무분별한 개발은 곧 비참한 결말을 보게 될것같아 안타깝네요.

겨울 2004-08-17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의 고향도 그러한가요.. 사실 이렇게 불평만 늘어놓을 뿐 적극적으로 고향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못합니다. 과연 농사짓는 법을 배울 가치가 있을까만 회의하죠. 적자인 줄 알면서도 키우던 가축을 버리지 못하고 짓던 농사를 갈아엎지 못하는 우직한 농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