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가 운다. 아, 가을이다. 폭염에 지친 몸과 마음이 비로소 안식을 얻는다. 오후에는 고대하던 소나기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그 여파로 마당은 폭풍이 지나간 듯 어지럽다. 제법 알이 굵어 지붕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한 감과 잎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고 화단에 심은 고추나무는 휘엉청 허리를 꺾고 드러누웠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서둘러 쓰러진 고추나무부터 일으켜 세웠다. 실하지는 않지만 주렁주렁 매달린 푸른 고추를 아직은 오래도록 따서 먹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에 다녀온 시골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너른 마당에 널린 붉은 고추였다. 이번 더위의 혜택을 보는 거라면 고추말리기라며 햇볕과 바람과 먼지로 검게 말라가는 고추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할머니를 보니 덥다고 마냥 푸념을 늘어놓지도 못했다. 한낮엔 너무 뜨거워 마르다 못해 익는 고추를 보호하기위해 햇볕가리개를 덮을 정도란다. 할머니는 새까맣게 타셨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고추를 매만지느라 도통 쉴 생각을 안 하신 탓이다.


고향은 지금 수난시대다. 산의 허리를 뚝 잘라 고속도로를 낸다고 얼마 전부터 공사가 한창인데 반듯하게 포장된 넓은 길 따위는 아무리 좋게 봐도 정감이 안 간다. 머잖아 저 길로 요란한 경적소리를 내며 화물차며 자가용이 달릴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무리 봐도 득보다는 실이 많은 발전이다. 세상의 온갖 해악들이 저 길을 타고 마을로 올 것만 같다. 윗동네에는 벌써 공장이 들어서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있다. 물장구치고 놀던 냇가도 이제 옛날의 그 모습이 아니다. 사람 살 곳이 점점 줄어든다. 그래서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것일까. 늘어가는 빈 집, 아이들이 없는 마을, 분교로 전락한 학교. 차들을 위한 도로는 반듯하게 끝을 모르고 전진하건만 사람이 사는 마을, 집들에서는 어떤 희미한 빛도 새어나오지 않고 점점 몰락의 길을 걷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04-08-15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을 읽으니 어디나 시골의 현실은 동일한것 같네요. 저의 고향도 님의 고향보다 조금 빨리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과 인간의 동반자적인 의미를 전혀 두지 않는 무분별한 개발은 곧 비참한 결말을 보게 될것같아 안타깝네요.

겨울 2004-08-17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의 고향도 그러한가요.. 사실 이렇게 불평만 늘어놓을 뿐 적극적으로 고향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못합니다. 과연 농사짓는 법을 배울 가치가 있을까만 회의하죠. 적자인 줄 알면서도 키우던 가축을 버리지 못하고 짓던 농사를 갈아엎지 못하는 우직한 농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