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침개 두 장에 막걸리 반잔을 마시고 났더니 머리가 핑 돈다. 술에 얽힌 기억들이 워낙 심란한 관계로 술자리도 술을 마시는 것도 즐기질 않지만 술은 제법 마신다. 특히 소주의 씁쓰레하니 쏘는 맛이 좋아서 유쾌하게 권하는 한잔 정도는 찡그리는 법도 없이 넘긴다. 물론 정신을 잃을 만치 취한 적은 불행히도 없다. 대대로 술에 강한 족보이기도 하고 식구들도 할머니를 비롯하여 술을 거절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주변에는 술이 들어가면 인격이 변하는 인물이 있다. 이런 인간을 보면 술의 해악에 소름이 돋는다. 낮술을 마셔 벌건 얼굴을 하고 시비 같은 농담을 던지는 인간에게도 불쾌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술 한 잔의 힘을, 일터에서 쌓인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마법을, 좋아하는 사람과의 허물없는 대화에 등장하는 쨍하는 건배의 술잔을, 울고 웃으며 고뇌하고 후회하는 반성의 술잔을 좋아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죽은 듯이 잠에 빠지는 취한 이를 연민한다.


하루 동안 맹렬히 미워마지 않던 J, 웃으며 다가와 착한 척(?)을 하니 마주보고 웃어진다. J야, 나는 네가 가엽고 애잔하다. 타고난 악인도 아니고 영악하지도 아니하며 마땅히 부려야할 세속의 욕심이란 한점도 가지도 있지 않음이 원통하다. 너의 선량함을 있는 그대로 칭찬만 할 수가 없어 속상하다. 너는 한번도 내 보인 적 없는 네가 받았을 상처들이 나의 상처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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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9-30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는 한번도 내보인 적 없는 네가 받았을 상처들이 나의 상처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사랑니를 빼러갔다가 잡혀서 당분간은 계속 치과에 다녀야 한다. 그래서 우울 중이다. 오래도록 행복하게 사랑스럽게 예쁘게 살기를 소망했는데, 처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후로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 J, 때문에 우울하다. 나쁜 일은 어째서 한꺼번에 밀어 닥칠까. 언제나 그렇다. 감기에 걸리면 몸살이 따라오고, 덤으로 마술에 걸리곤 했지. 설마 하다가 역시나, 엉망진창이 된 고달픈 심신을 붙잡고 하소연 하나마나.


거기다 살면서 절대적으로 상종하기 싫은 인간과의 대면이 있었다. 물론 이전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상식 밖의 저런 인간은 무수히도 만나겠지만, 사는 게 원래 그런 거라고 기분을 토닥여 보지만 바닥까지 떨어진 기분이 영 되살아날 징조가 없다. 난 우울하면 잔다. 슬퍼도 잔다. 아파도 역시 들입다 잔다. 거기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이런 밤, 천둥이나 번개, 기둥뿌리를 뒤흔들 바람도 없는 밤이라니, 최악이다.


그래서 철딱서니 없는 망상을 한다. 광폭한 태풍이 부는, 마당의 감나무가 뿌리째 뽑히는 그래서 정전으로 세상천지가 암흑이 되는 엄한 상상에 몸을 맡긴다.


가족이란, 버릴 수도 품을 수도 없는 가족의 인연이란, 정말이지 비극이다. 녀석들을 어쩌면 좋을까. 실수하고 용서하고 또 실수하고 그래도 용서하고 다시 실수를 반복하는 어리석음의 극치 앞에서 더 이상 말을 잃고 갈피를 못 잡겠다. 타인이라면 도대체가 반성이나 개선의 여지가 없는 인간을 몇 번이나 보듬었을까. 절대 그럴 리가 없지. 단호히 잘라내고 돌아서서는 결코 뒤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무정한 인간이,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고 만다. 요는 그 인내심의 한계가 과연 어디까지일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우습게도.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나겠지만, 지금 내 이성은 신발을 벗어던지고 도망치고 있다. 쫓아가서 잡아야겠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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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9-14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서 웃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겨울 2005-09-15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제 다 나았어요. ^^ 다행인 건 우울도 슬픔도 아픔도 길지가 않다는 것, 하루면 충분하다는 것.
 

 

어저껜가 막내의 전화를 받았다. 화단의 무성한 잡초와 자잘한 정원수와 보리수나무 등등, 남김없이 몽땅 베어 버렸다는 얘기였다. 말로는 잘했다고 했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대충 받아들였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마당을 보고는 헉하고 놀랐다. 말 그대로 정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 딱 한 가지. 베어낸 자리에서 올라온 목련은 남겨두었다. 작년에 흉하도록 높고 우람한 목련을 베고는 여름이 가도록 후회를 했으니까. 굳건히 버티고 서 있을 땐 몰랐다가 사라지니까 드러나는 효용성이랄까. 그 커다란 백목련은 마당 한 구석에서 우뚝 서서는 뜨겁게 내리쪼이는 햇볕을 가려주었던 것. 봄마다 피어 올리던 화사한 꽃송이들은 두말할 것도 없다. 어리석게도 떨어지는 꽃과 잎이 지겹다고, 혹은 이웃의 잔소리가 듣기 싫다고 베어버리겠다고 원망을 퍼붓던 소심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자각한들 이제 와서 무엇하랴만. 다행히도 나무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어여쁜 줄기와 넙적한 이파리를 여름동안 만들어냈다. 올 겨울, 내년 봄을 지나면 두 배 아니 그보다 더 훌쩍 자랄 것을 믿는다.


자리공과 망초 등의 잡초들로 무성했던 올 여름이, 나는 사실 싫지가 않았다. 놀러왔던 지인이 물만 흐르면 계곡이 따로 없다고 할 정도로 거실 창을 활짝 열고 소파에 기대 바라보는 초록의 이파리들은 더위에 지친 심신을 달래 주었고, 심심찮게 새들도 와서 놀다 갔다. 뽑아내고 뽑아내도 올라오는 돌 틈 사이의 잡초를 바라보며 흙과 공기와 나의 존재이유에 대한 소소한 즐거움도 발견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여름이 지나면 손에 몸에 걸리는 것들을 조금씩 베어내고 뽑고 버릴 생각이긴 했지만, 막내가 그 아이의 성격과 방식으로 모조리 정리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럼에도 나는 잘했다고 연신 잘했노라고 말했다. 잡초를 뽑아서 서운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당장 사용하지 않으면 무조건 처분하는 막내, 밥도 반찬도 딱 한 끼 먹을 것만 만들고 나머지는 가차 없이 버리는 막내의 생활방식을 나와는 다르다 해서 뭐랄 건 없다. 사소한 무엇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고 또 쌓아두는 내 성격을 썩 좋아하지도 않으니, 주변에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막내가 있음은 오히려 자극이 될 수도 있다. 단지, 시커먼 돌들이 흉하게 알몸을 드러낸 마당을 바라보는 심정은 여전히 허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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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를 뽑았다. 한마디로 끔찍했다. 눈을 꼭 감고 있어서 보지는 못했지만 잇몸에서 이빨이 뽑혀나가는 느낌은 너무나 생경해서 몸서리가 쳐졌다. 의사가 힘을 줄때마다 온몸이 딸려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데 그 무식함과 잔인함에 기절할 것 같았다. 내가 숨죽인 신음을 터트릴 때마다 의사는 아프냐고 물었는데, 사실 전혀 아프지는 않았다. 단지 이빨을 쥐고 뒤흔드는 그 느낌에 경악했을 따름이다. 누가 나에게 너 치과에 갈래 죽을래 라고 물으면 난 주저 없이 죽을래 라고 말할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이빨이 아프다한들 결코 죽어지지는 않는다는 거다.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아픈 것은 괴로우니 사색이 되어서라도 치과의 문을 넘을 수밖에. 치과에 있는 간호사들이 아무리 생글생글 웃으며 친절하게 굴어도 결코 마주보며 웃을 수가 없는 곳을 다녀온 지금, 난 파김치가 됐다. 해마다 치과 문을 넘나들 때마다 몸살을 앓았는데 올 해도 어김없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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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8-29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리 나으세요... 저도 네개나 뽑은 경험이 있네요^^;;;

겨울 2005-08-29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네 개요? 존경합니다.

날개 2005-08-29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 저런~ 마취 풀리면 상당히 아플텐데요....ㅜ.ㅠ

겨울 2005-08-29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빼기 전, 빼는 동안엔 덜덜 떨었는데, 웃기게도 하나도 아프지는 않아요. 이상할 정도로요.^^ 천만다행이지요.

잉크냄새 2005-08-29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랑니가 자리를 잘 잡았다고 하더군요. 치과 의사 왈 " 나이 들어 어금니 빠지면 사랑니에 틀니 걸면 되니까 간수 잘하세요"

겨울 2005-08-30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사랑니가 그런 용도로도 쓰여지다니 금시초문입니다. 뽑았다고 마냥 좋아할 일도 아니군요. -_-
 

 

열었던 창문 꼭꼭 걸어 잠그고, 무릎 시리고 발 시려 이불 찾아 둘둘 말고, 냉장고에서 막 꺼낸 물이 차서 쉬었다가 마시고, 고무장갑을 끼고 하는 설거지가 훨씬 편해진 이런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며칠 전부터 귀청이 시끄럽도록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심상치 않더라니, 느닷없이 여름은 가고 가을이 남았다. 그래서였나. 만사 귀찮음, 밥 맛 없음, 웃기도 말하기도 싫음, 딱 석 달 열흘만 입 닫고 귀 닫아걸고 살고 싶다는 소원을 하였는데, 계절이 가고 오는 길목에서 몸살을 앓았던 것일까. 한번도 이런 일 없더니, 무슨 변덕이라니. 나이 들어가는 거 티내는 중?


한동안 표정관리가 전혀 되질 않아서 고심했다. 억지로 웃으려니 입가와 눈가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 대수롭지 않게 주고받던 농담도 나와 주질 않고 속으로는 ‘제발 말 좀 시키지 말아줘’라고 비명을 질러댔다. 뭐가 문제일까, 생각을 해도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도 없고, 그냥 때가 되어 꼿꼿하게 세웠던 등을 내리고 늘어진 몸을 기댈 기둥을 필요로 했는지도 모르겠다. 날 대신해서 근심과 걱정을 챙겨주시는 지인을 만나 응석을 부려 봤더니 한결 마음에 여유가 생긴 듯 했으니까. 그런 거다. 지친 거다. 동생들 걱정하고 남 얘기 들어주고 이런 척 저런 척 폼 잡는 거에 질린 거다.


확실히 어제와 그제하고는 또 달라서 방안의 공기가 서늘하다. 몸이 제일 먼저 느끼고 깨고 있다. 벌써 몇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도 지치고 늘어지는 기분이 없다. 자판을 두드리는 것도 귀찮았던 근래를 돌아 볼 때 엄청난 변화다. 할머니를 뵈러 갈까. 친구 분이 돌아가셨다고 상심이 크셨는데 어찌 지내시는지. 어서 죽어야지 하는 입버릇에 지금처럼만  오래오래 사시라고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사실 거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었는데, 미안하다. 매번 화를 내고 돌아서서 후회하고 미안해하면서도 같은 상황이면 또 화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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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8-2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정관리해야한다는 건 참 속상한 일이지요. 그냥 감정대로 표현하고 싶은데, 왜들 그렇게 관리, 관리를 운운할까요..

겨울 2005-08-22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분대로 성질대로 살았던 것이 까마득하답니다. 차갑다 딱딱하다 인상 더럽다는 소릴 듣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살지요. 사회적 약자의 비애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