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놓은 지 한참이 지나서야 읽게 되는 책에는 이유가 있다. 이 책은 어렵지는 않지만 타의 혹은 자의에 의해 망명, 유랑하다 죽은 자와 죽음에 대한 사색들이 상당히 암울하다. 그래서 저조했던 당시의 상황과 기분으로는 제대로 몰입하여 읽을 수가 없었던 것. 그러다보니 연이어 다른 읽을거리들에 점점 책장 안쪽으로 밀려들어갔다. 읽다 만 책들이 시간이 흐르면 마치 다 읽은 듯 뻔뻔히 바라보기 마련인데 소설이 아닌 다른 것을 찾는 내게 딱 걸려들어, 이 12월에 온전히 만났다.


그의 여행이 언제는 고독하지 않았냐마는 이번 글에서는 유난히 쓸쓸함이 짙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텅 빈 마음이 느껴진다. 어쩌면 나이 듦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형제애나 가족애, 어떤 사상이나 이념으로도 건드릴 수 없는 수 없는 영혼의 서글픔 같은. 그의 디아스포라적인 감정과 사색은 태생의 우울이 아닐까. 그것이 역동적인 힘이 되어 살아 왔지만 찰나의 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그는 고백한다. 그가 말하는 죽음과 삶과의 거리는 너무 가깝다. 


이렇게 나를 이 세상에 잡아매두는 끈들은 그 어떤 것도 인공적이고 불투명한 것이다. 내가 ‘죽음’을 향해 몸을 내밀었을 때, 그 끈들이 나를 꽉 잡아줄 것인가. 그럴 것 같지 않다. 내 쪽에서 손에 쥐고 있는 끈을 살짝 놓으면 그걸로 그만일 것이다.


국적이나 고향, 가족의 뿌리 안인들 그와 같은 방황이 없을까? 어디서 어떤 삶을 산들 천성이 고독과 죽음을 끌어당기는 사람이 있다. 똑같은 사물을 보고 상황에 처해도 누군 절망을 하고 누군 낙관을 하듯이. 그리고 나는, 세상은 낙관하는 이보다 절망하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위안을 얻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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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2-21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이 책을 읽고 나시면 많은 실항민을 생각하기게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이 책 읽으면서 고향을 떠나 사시는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여집니다.

잉크냄새 2006-12-2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생적인 외로움과 우울함, 고독을 천형으로 타고난 사람들...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이 생각나네요.

겨울 2006-12-21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년 동안의 고독', 잊고 있었어요. 집에 있는 낡은 책을 처분하기 전엔 다시 읽을 수가 없노라 생각했던 책 중의 하나였는데, 올해가 가기 전엔 반드시!

산타님. 저도 집을 떠나 살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 책을 읽고 있어요. 혼란한 역사 속의 한장을 기록하지 못한 삶일지라도, 인간 대다수의 삶은 디아스포라임을 생각하면서요.
 

 

먼 옛날이야기지만. 나는 삼십 세가 되는 날, 서점으로 달려가 한 권의 책을 샀다. 그리고는 연필을 들고 열심히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어떤 문장을 가슴을 후려치고, 어떤 문장은 모호하거나 어렵고, 지루해지면 몇 장을 건너뛰어 읽기도 했다. 그건 삼십 세가 되는 나를 위한 일종의 의식 같은 거였다. 목적이나 의미는 없는 그냥, 자기 만족감을 위한.


30세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젊다고 부르는 것을 그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 자신은 일신상 아무런 변화를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불안정해져간다.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라고 시작하는 그 유명한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삼십 세>다. 그리고 사실, 그 당시 보다는 지금이 읽기가 수월하다. 물론 30세에 그어 놓은 밑줄을 찾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여기저기 많이도 그어 놨다.


실상 훨씬 젊었을 한때에 그는 꽤나 늙은 것처럼 느껴졌었고 머리를 떨구고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사상과 육체가 너무나 그를 심란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한창 젊었을 때 그는 일찍 죽기를 소원했었고, 30세가 되고 싶다고는 조금치도 바란 적이 없었다. (68쪽)


마침내 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나는 진정 살아 있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더욱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이다. 하나의 고통, 초로의 밝은 증거인 이 흰 머리. 이것이 도대체 왜 나를 이토록 놀라게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이삼 일 지나 그것이 빠져버리고 새로운 흰 머리가 그렇듯 쉬 나오지 않는다 해도, 나는 이 시식의 맛을 잊지 않으리라. 그래서 구체화되어가는 나의 과정에 대해 다시는 공포를 느끼지 않게 되리라. (69쪽)............. 내 그대에게 말하노니- 일어서서 걸으라. 그대의 뼈는 결코 부러지지 않았으니.(70쪽) 


도대체, 이 글을 읽으며 당시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위안이나 허영을 채워주는 감미료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재미는 있다. 이 책을 사서 정성스레 밑줄을 긋고 읽고 있는 나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리고 책 모퉁이에 베껴 적은 시 한 구절.


철없어 흘리던 피는 달디 달지만

때로는 몇 개의 열매도 맺었지만

철들어 흘리는 피는 왜 이리 쓰디쓸까. (최 승자, 삼십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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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12-19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은 뭐니뭐니해도 김광석의 노래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군요. 그나저나 최승자님의 시는 항상 살벌하네요.
 
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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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어느 지점에선가 남자와 여자의 대화중에 ‘늦어도 11월에는.......’이라는 서글픈 말줄임표를 붙인 말이 나온다. 여자의 다그치는 질문에 대한 남자의 대답이다. 잔뜩 긴장을 하고 읽어나가다가 만나는 의미심장한 제목은 가슴에서 덜컹하는 소리가 나게 한다. 그때에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드시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징후도 없지만, 갑자기 숨이 딱 멎는 강렬한 느낌만은 생생하다.


책을 읽기 전부터 슬픈, 비극적인 이야기일 거라는 짐작으로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하다가 번잡스런 일들을 다 끝내고 한가로워진 늦은 저녁부터 책장을 펴들었고, 결국은 밤을 새워 다 읽었다. 누구라도 이 책을 읽던 중에 손에서 내려놓기란 힘들 것이다. 누구라도 그녀, 마리온을 비난하거나 미워할 수 없는 것처럼.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며 말은 건넨 남자를 따라 나서는 소설의 시작은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근사하지만, 불행히도 그건 시작이다. 부와 명예와 남편과 아이를 버린 여자의 미래란 아무리 그럴싸한 미사여구로 포장을 해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가 끝이거나 이야기의 마지막이라면 상상을 그만두면 되지만, 잔인하게도 작가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해 버린다. 책을 읽다가 맨 앞의 작가소개로 돌아가 작가의 흑백사진을 꼼꼼히 들여다본 것도 처음이다. 주름으로 뒤덮인 거친 얼굴이다. 눈썹은 짙고 눈은 깊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지만 마리온이란 여자는 이제까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미묘하고도 독특한 인물이다. 작가의 어떤 상상력을 통해 태어났는지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사진이 그 의문을 풀어줄리는 없지만.


그리고 우린 어딘가로 날아갔다. 아프지는 않았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고통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376쪽) 그들의 마지막 순간이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의 시작과 절대적으로 어울리는 끝. 이보다 더 멋진 사랑과 죽음은 있을 수 없다. 언제나, 가장 멋진 연애소설의 끝은 어느 한쪽만을 남겨놓는 불완전보다는 함께 죽거나 사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황홀할 정도로, 찰나에 이루어진, 불안한 온갖 요소들을 일시에 거둬가는 마법 같은 그들의 최후에 탄성을 질렀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소설을 읽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갑자기 12월이 마구 풍성해진 기분이다. 어떤 선물보다도 가슴 벅찬 소설이다. 권태로운 삶에서, 쏟아지는 졸음에서, 이유모를 배신감과 불안과 공허에서 단숨에 탈출하고 싶다면 누구라도 좋으니 이 책을 집어 들고 밤을 새워 읽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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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12-19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태로운 삶, 쏟아지는 졸음, 이유모를 배신감고 불안과 공허에서 탈출하고 싶다라니....책의 내용보다는 이 구절에서 마구 구매욕이 일어나네요.

겨울 2006-12-20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대와 이십대에 읽은 로미오와 줄리엣,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주드 등과 함께 삼십대에 읽은 가장 멋진 연애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오늘날 세계 곳곳의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식료품점에서 반조리된 냉동식품을 사다 먹거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한다. 그 먹을거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키워지거나 재배되었으며 어떻게 조리되었는지, 어디서 나는 재료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 음식들을 먹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 그 동네의 식료품점에 진열되기 위해 얼마나 먼 거리를 이동해 왔는지, 그것이 그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자원이 투입되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재정적 수익을 올리는 데 혈안이 되어 괴물같이 변해 버린 기업들의 탈취를 중단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건강과 후손들이 살아갈 이 지구의 건강이 주주총회에서의 결정(그것은 당연히 기업의 수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결정일 것이다.)에 좌우되는 이런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거대 기업의 탐욕 앞에서 인간과 동물이 고통을 당하고 환경은 파괴되어 가는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들은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복잡한 문제들 앞에서 그만 무기력증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인식하고서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게 그저 현상을 되는 대로 인정해 버리려는 태도에서 벗어나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자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차이를 만든다.”는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제인구달, 희망의 밥상, 27쪽>

 

이 책은 눈으로만 읽고 지나치기엔 너무 절박하다. 첫 장부터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또박또박 옮겨적고 싶은 글이다. 결국엔 옮겨적는 걸로도 성에 차질 않겠지만. 이런 책을 교과서로 채택하여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엄마가 딸에게 아들에게 가르쳐야 하는데. 이런 책을 반복해서 읽어야 하고 달달달 외워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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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2-0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업의 이윤추구는 '종자개량'으로 까지 이어져서 생물학적 변종에도 기여합니다.
식민지와 영세 소작농을 향한 경제적 착취와 생명에 관한 무서운 재앙이지요.
이런 문제에 직면해서 우리가 간과할 수 있는건
대개 눈에 보이는 '건강'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는거죠.
경제적, 생물학적 측면을 무시하구요.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카길'사와 '스타벅스'로 거론될 수 있겠슴다.
이건 단순히 먹는 문제가 아니라 '착취'의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우몽님의 지적처럼 교과서로 채택한다면 가난하거나 덜 풍족해도
지금보다는 더 많이 나누고,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을거라는 말입니다.
촛불이 모여, 횃불이 되는거죠

겨울 2006-12-06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히 유전자 변형 곡물, 식품, 작물, 사료 등에 관한 글에 충격을 금할 수가 없어요. 남의 나라 일이려니, 아직은 우리의 농업이 살아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했거든요. 정말 살이있나요? 이미 다국적기업의 달콤한 술책에 포섭되어 선량한 가면을 쓰고 뒤로는 이익에 눈이 멀어있지 않나요? 에효, 무서워요.
 
미국의 송어낚시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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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송어낚시. 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재미 혹은 흥미다. 흥미는 재미는 떨어져도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고 수명이 길다는 장점이 있다. 생태주의 소설의 효시라는 데 번쩍 손을 든 이 책은 역시나 재미보다는 인내심이 조금 많이 필요했던 흥미로운 소설이다.


<송어는 미국에서 어쩌면 가장 흔한, 혹은 미국인들과 가장 친밀한 관계가 있는 미국의 대표적 물고기...... 그래서 어느 의미에서는 미국을 상징하는 물고기라고 할 수........ 또한 송어는 현대의 미국인들이 잃어버린 미국의 꿈일 수도 있고, 기계문명이 쫓아낸 푸른 초원이라고 할 수도.........> 라는 저자의 인터뷰를 읽으며, 미국, 미국, 미국이란 단어에 살짝 거부감이 드는데. 시대가 시대고 때가 때인지라 그 위화감이라니. 리처드 브라우티건. 가난했던 그는 차라리 교도소에 들어가 배불리 먹어보려는 생각에 경찰서 유리창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를 오리건 정신병원으로 보내 전기충격 치료를 받게 했다. 는 이력에 흥미는 돋긴 했지만  배고프고 추워 유치장을 선택했다는 사람들 얘기는 심심찮게 들은 얘기라 놀랄 일도 아니고 다만 정신병원행이라니. 이 사람 엄청 미움 받았구나 싶더라. 뭐, 표지에서부터 나 대단해요, 라는 이미지가 풀풀 날리지만.


책에 대한 정보가 미비할 때, 가장 먼저 읽는 것은 작가의 이력 그리고 해설이다. 한번으로는 부족해서 두어 번을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반복해서 읽은 듯. 오, 이런 대단한 책이었어? 군침을 흘리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미국의 송어낚시군. 혹은 미국의 송어낚시양의 이야기는 상당히 기묘하고 낯설었다. 이렇게 짧고도 우스운(?) 이야기 안에 그런 심오한 사상이 숨어있단 말이지.


글쎄다. 그가 살았던 나라, 이웃이라면 한결 공감하기가 쉬웠을라나. 도무지 아리송하고 에둘러 가는 이야기에 자꾸 딴 짓을 하게 만들지만 결국은 소설이다. 이런저런 거창한 꼬리표를 떼고 모르는 건 대충 넘어가면 술술 읽힌다. 2쿼트 분량의 쿨에이드 드링크를 1갤런 분량으로 묽게 타서 먹어야했던 시절의 가난이나. 마리와 칼라스와의 저녁 만찬과 호두케첩. 송어하천인줄 알았던 나무계단이나 노파와의 만남. 그래서 결국은 스스로 송어가 된.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월든 호수에서 두 화가가 말하는 정신병원에의 미래 같은 거. 그리고 송어들이 싫어하는 찰스 헤이만씨는 물론이고 포토와인에 취해죽은 송어 이야기도 나름 비장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발명품 ‘최후의 만찬’이 낚시의 미끼로 둔갑하다니 참, 그의 조크가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그럭저럭 적당히 지루하고 썰렁하고 오묘한 장들을 읽으면서 문득 이 책을 읽고 심기가 불편했을,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미국의 송어낚시에 반하는 삶을 정치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심심찮은 애도 정도는 올려야겠다. 사족이지만 표지 사진은 안보는 게 좋았을 걸. 그 사진의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떠날질 않는다. 1984년. 브라우티건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설마 캘리포니아 관목 숲에서?). 그가 언급한 헤밍웨이처럼. 왜 그랬을까. 좀 더 살아서 더 치열하게 그의 나라를 조롱하며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그의 나라가 지금 보다는 나았을지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그는 일본 문화와 문학의 예찬론자였단다. 작가 중에는 오에 겐자부로를. 흠,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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