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이야기지만. 나는 삼십 세가 되는 날, 서점으로 달려가 한 권의 책을 샀다. 그리고는 연필을 들고 열심히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어떤 문장을 가슴을 후려치고, 어떤 문장은 모호하거나 어렵고, 지루해지면 몇 장을 건너뛰어 읽기도 했다. 그건 삼십 세가 되는 나를 위한 일종의 의식 같은 거였다. 목적이나 의미는 없는 그냥, 자기 만족감을 위한.
30세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젊다고 부르는 것을 그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 자신은 일신상 아무런 변화를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불안정해져간다.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라고 시작하는 그 유명한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삼십 세>다. 그리고 사실, 그 당시 보다는 지금이 읽기가 수월하다. 물론 30세에 그어 놓은 밑줄을 찾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여기저기 많이도 그어 놨다.
실상 훨씬 젊었을 한때에 그는 꽤나 늙은 것처럼 느껴졌었고 머리를 떨구고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사상과 육체가 너무나 그를 심란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한창 젊었을 때 그는 일찍 죽기를 소원했었고, 30세가 되고 싶다고는 조금치도 바란 적이 없었다. (68쪽)
마침내 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나는 진정 살아 있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더욱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이다. 하나의 고통, 초로의 밝은 증거인 이 흰 머리. 이것이 도대체 왜 나를 이토록 놀라게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이삼 일 지나 그것이 빠져버리고 새로운 흰 머리가 그렇듯 쉬 나오지 않는다 해도, 나는 이 시식의 맛을 잊지 않으리라. 그래서 구체화되어가는 나의 과정에 대해 다시는 공포를 느끼지 않게 되리라. (69쪽)............. 내 그대에게 말하노니- 일어서서 걸으라. 그대의 뼈는 결코 부러지지 않았으니.(70쪽)
도대체, 이 글을 읽으며 당시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위안이나 허영을 채워주는 감미료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재미는 있다. 이 책을 사서 정성스레 밑줄을 긋고 읽고 있는 나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리고 책 모퉁이에 베껴 적은 시 한 구절.
철없어 흘리던 피는 달디 달지만
때로는 몇 개의 열매도 맺었지만
철들어 흘리는 피는 왜 이리 쓰디쓸까. (최 승자, 삼십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