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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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어느 지점에선가 남자와 여자의 대화중에 ‘늦어도 11월에는.......’이라는 서글픈 말줄임표를 붙인 말이 나온다. 여자의 다그치는 질문에 대한 남자의 대답이다. 잔뜩 긴장을 하고 읽어나가다가 만나는 의미심장한 제목은 가슴에서 덜컹하는 소리가 나게 한다. 그때에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드시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징후도 없지만, 갑자기 숨이 딱 멎는 강렬한 느낌만은 생생하다.


책을 읽기 전부터 슬픈, 비극적인 이야기일 거라는 짐작으로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하다가 번잡스런 일들을 다 끝내고 한가로워진 늦은 저녁부터 책장을 펴들었고, 결국은 밤을 새워 다 읽었다. 누구라도 이 책을 읽던 중에 손에서 내려놓기란 힘들 것이다. 누구라도 그녀, 마리온을 비난하거나 미워할 수 없는 것처럼.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며 말은 건넨 남자를 따라 나서는 소설의 시작은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근사하지만, 불행히도 그건 시작이다. 부와 명예와 남편과 아이를 버린 여자의 미래란 아무리 그럴싸한 미사여구로 포장을 해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가 끝이거나 이야기의 마지막이라면 상상을 그만두면 되지만, 잔인하게도 작가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해 버린다. 책을 읽다가 맨 앞의 작가소개로 돌아가 작가의 흑백사진을 꼼꼼히 들여다본 것도 처음이다. 주름으로 뒤덮인 거친 얼굴이다. 눈썹은 짙고 눈은 깊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지만 마리온이란 여자는 이제까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미묘하고도 독특한 인물이다. 작가의 어떤 상상력을 통해 태어났는지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사진이 그 의문을 풀어줄리는 없지만.


그리고 우린 어딘가로 날아갔다. 아프지는 않았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고통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376쪽) 그들의 마지막 순간이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의 시작과 절대적으로 어울리는 끝. 이보다 더 멋진 사랑과 죽음은 있을 수 없다. 언제나, 가장 멋진 연애소설의 끝은 어느 한쪽만을 남겨놓는 불완전보다는 함께 죽거나 사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황홀할 정도로, 찰나에 이루어진, 불안한 온갖 요소들을 일시에 거둬가는 마법 같은 그들의 최후에 탄성을 질렀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소설을 읽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갑자기 12월이 마구 풍성해진 기분이다. 어떤 선물보다도 가슴 벅찬 소설이다. 권태로운 삶에서, 쏟아지는 졸음에서, 이유모를 배신감과 불안과 공허에서 단숨에 탈출하고 싶다면 누구라도 좋으니 이 책을 집어 들고 밤을 새워 읽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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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12-19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태로운 삶, 쏟아지는 졸음, 이유모를 배신감고 불안과 공허에서 탈출하고 싶다라니....책의 내용보다는 이 구절에서 마구 구매욕이 일어나네요.

겨울 2006-12-20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대와 이십대에 읽은 로미오와 줄리엣,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주드 등과 함께 삼십대에 읽은 가장 멋진 연애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