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 (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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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7년 만에 썼다는 장편소설을, 나 또한 7년 만에 그의 소설을 읽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단편집은 사거나 혹은 얻어 볼일도 생기지 않아 ‘상실의 시대’와 ‘태엽 감는 새’ 이후, 세 번째의 책인 셈이다. 파란색과 초록색의 표지와 손안에 들어오는 크지 않은 사이즈도 그렇고 서점에 갈 때마다 들었다 놨다 했던 별로 매혹적이지 못한 첫 인상을 불식시키듯, 소설은 뜨겁고도 깊다. 그래서일까? 다무라 카프카라는 15세의 소년의 이미지가 무척이나 생생히 그려진다. 자칭, 카프카라고 부르는 소년의 모험처럼 여겨지는 가출에는 현실에서의 탈출과 함께 미지의 세계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그 나이의 소년 소녀라면 누구나 한번은 꿈꾸었던 것이기에 공감하게 된다. 또, 누구보다 혹독한 사춘기를 보냈던 사람이라면 더욱 카프카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다. 소설이 흘러가는 방향과는 관계없이 멋대로 소년을 응원하고 멀리 더 멀리 떠나길 기원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신비롭다. 세상과 동떨어진 별세계 같은 고무라 도서관에서 만나는 오시마상과 사에키상도 역시 마찬가지다. 여자로 태어났지만 성정체성은 남자인 도서관 사서, 오시마상은 머물 곳과 방향을 잃은 카프카의 손을 잡아 한없는 친절을 베푼다. 그는 혈우병이라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다. 어딘가 조금씩 어긋난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끼리의 만남을 통해 카프카는 한발 한발 신비로운 존재에게로 다가서는데, 그 정점에 불혹의 나이를 넘긴 도서관 관장, 사에키상이 있다. [해변의 카프카]라는 그림 속 소년을 사랑했던 15세의 소녀 사에키상과 카프카라는 이름을 가지고 찾아온 역시 15세인 소년의 만남이 우연일리는 없다. 그들의 관계맺음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라는 단정도 있지만, 소설 속 공간이라는 환상에 깊이 빠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구나 사에키상은 어릴 적 헤어진 카프카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 어머니 그리고 누이와 동침하는 아들이라는 아버지의 저주를 피해 달아났지만, 본능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이끌리고 만 두 사람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살해당한다. 카프카는 어쩌면 그를 죽인 것이 자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카프카의 반대편에는 나카타상이라는 기기묘묘한 노인이 있다. 그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모든 기억을 상실하고 퇴행한 이질적인 존재다. 읽기도 쓰기도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고양이와 대화하는 것과 길 잃은 고양이를 주인에게 찾아주는 일이다. 그가 고양이 유괴범 ‘조니 워커’를 살해하는 과정은 너무도 필연적이라 잔혹이나 비극의 냄새 같은 건 전혀 나지 않는다. 하늘에서 개구리와 거머리가 떨어지는 사건조차도 나카타상에게는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다. 그는 고양이의 말을 알아듣는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후, 나카타상이 마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길을 떠나고 입구의 돌을 찾아 제자리도 돌려놓는 과정은 순례의 길처럼 경건하다. 그는 조니 워커라는 이름의 카프카의 아버지를 살해했다. 그것은 카프카에게 씌워진 저주다. 그가 열고자 하는 문은 카프카의 굴레를 벗기는 도구와도 같다. 저 세계와 이 세계를 연결하는 그 문으로 여행을 끝내려는 사람들이 떠나간다. 카프카도 그 통로에 서서 15세의 소녀인 사에키상과 이별한다. 그리고 묵묵히 돌아 나온다.


이후의 카프카가 어떻게 살아갈 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16세가 되고, 17세가 될 지도 모른다. 그는 15세의 자신이 떠났던 여행과 만남과 사랑을 까마득히 잊고, 그저 그렇고 그런 샐러리맨이 되어 지친 몸을 누이고 깊은 잠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15세의 소년이 15세의 소녀를 만나는 달콤한 꿈을 꾸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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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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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환자건 정신과 전문의 이라부 앞에만 서면 우악스런 손아귀와 뇌쇄적인 외모의 간호사의 포로가 되어 무장해제 당한다. 그리고 다짜고짜 그 병의 특효약이라며 엄청나게 아픈 주사가 한 방. 얼이 빠져 있다가 뒤늦게 항의를 하지만, 이런 치료도 있는 거지, 뭘. 하고 시치미를 뚝 뗀다. 죽을상을 하고 병원 문을 들어섰던 환자들이 조만간 환한 웃음으로 나가는 것은 물론이다. ‘이라부 종합병원’에는 하마처럼 생긴 괴짜 의사가 있다.   


살면서 부닥치는 절박한 순간들이 있다. 요행히 피해 갈 수도 있지만 정면충돌로 만신창이가 되기도 한다. 눈에 띄는 육체의 상처는 보이는 병원 어디로든 달려가 치료받지만 마음의 병은 교묘하게 감추기에 바쁜 게 현대인이다. 가족, 친구, 연인에게도 차마 말할 수 없는 신경증, 강박증, 피해망상, 절망감을 주사 한 방으로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사는 어딘가에 이라부 이치로 같은 정신과 의사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한달음에 달려가련만, 아쉽게도 이것은 픽션이다.


이라부의 치료법은 비타민 주사 한 방과 허를 찌르는 몇 마디의 질문과 대답이 전부다. 그리고 그 속에는 묘한 해법이 숨어있다. 아니, 환자의 관점과 입장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체험하고 내키는 대로 무지막지하게 돌진하는 게 이라부의 치료법인 셈이다. 문제발견, 돌진, 충돌. 사람은 누구나 거기서 거기인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 선단공포증에 시달리는 야쿠자 세이지는 적대적 관계인 야쿠자 요시야스가 단도를 품지 않으면 마음의 안정을 잃는 의존증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그간의 불안증을 훌훌 털어낸다. 인간은 누구나 고슴도치라는 것을, 털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스스로를 방어하는 나약한 몸부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공중그네에서 추락하는 공중그네의 달인 고헤이와 3루수로서 1루에의 송구에 실패하는 신이치의 병은 결국 나 아닌 타인을 얼마나 신뢰하느냐의 문제였다.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서 허탈하게 웃지만 그 과정은 미로 찾기처럼 험난(?)하였으니 배꼽을 쥐고 깔깔 웃으며 그들의 여정을 바라보지만 가슴 한쪽이 짜한 것도 사실이다. 대머리 장인의 가발을 벗기지 못해 강박증에 시달리는 다쓰로의 비극도 마찬가지다. 가발은 권위와 체면이라는 허울이고 그것을 벗기는 상상을 함으로써 다쓰로는 시류에 편승한 스스로의 비겁을 단죄한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향해 아무도 손가락질을 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와하하 웃는 천진한 어린아이와도 같이 이라부의 손에 의해 장인의 가발이 벗겨지는 찰나, 다쓰로는 웃고 싶기도 하고 울고 싶기도 한 묘한 감정에 빠진다.


그렇다. 소설은 그렇게 웃음 한편으로 울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한다. 세상은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어울려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뻔한 진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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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20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중그네를 타고 싶어요..;;;

겨울 2005-04-20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상만 해도 멀미납니다.

잉크냄새 2005-04-28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특한 소설일것 같네요.
아, 이 병원 약도를 알게되면 저에게도 보여주시길...^^

겨울 2005-04-28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약도 저도 궁금해요. ^^ 이 소설을 사면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를 공짜로 주는데, 역시나 묘한 코믹 잔혹극 같은 소설입니다. 이런 류의 가볍고 얇은 일본 소설들이 꽤나 많이 번역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왤까요?
 
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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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래일까. 거대함과 신비로 무장한 이 거대한 포유류는 어쨌건 비범하다. 해안으로 밀려든 고래 떼를 살리기 위해 고래 등에 올라탄 소녀를 다룬 <웨일 라이더>란 영화도 떠오른다. 영화에서 고래는 마오리족의 전사를 등에 태우고 나타난 신화 속의 영물로 등장한다.


사람들이 재밌어 죽겠다고 표현하는 소설을 그냥 지나치기란 정말 어렵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길 레 그런지 궁금해서 잠을 설칠 정도니까. 붉은 빛이 도는 표지의 이 책은 두께부터가 압도적인데, 술술 거침없이 읽힌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재미로 무장한 소설 중의 소설로써 손색이 없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읽은 것에 대한 되새김질이 없다. 돌아가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이랄지,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 이미지랄지, 감정이입이 되어 분리가 안돼는 인물이랄지, 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들을 이 소설에서 만난다는 게 요원해 보였다.


적어도 춘희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것은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는 이야기구나 단정을 짓다가,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다가, 그럼에도 이건 판타지가 분명하다고, 오묘한 표정의 작가의 얼굴을 보건대 그의 머릿속은 분명 기이하고 기이한 상상과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을 거라고 믿어버렸다.


국밥집 노파의 삶과 금복의 삶은 너무도 변화무쌍하고, 악랄하고, 비극적이라 앞만 바라보고 곧장 읽어내려 갔지만, 코끼리의 다리를 부둥켜안고 세상을 향해 첫 인사를 건넨 춘희는 달랐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엄마로부터 방치된 존재, 춘희야말로 실질적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아이와 소통하는 코끼리라니, 정말 대단한 소설이 아닌가. 춘희와 코끼리 점보와의 관계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춘희만이 인간들의 희로애락과 흥망성쇠라는 고리에서 이탈하였음은 물론이고, 자연과 동화되어 성장하고, 훗날 벽돌을 굽기까지 겪는 무자비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그녀만은 본성이 변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의 괴물로 묘사된 외모도 비명에 생을 달리한 다른 인물들의 저주받은 욕망과 비참한 죽음에 비하면, 축복이다. 춘희의 비루하고 굶주림의 연속이었던 평대에서의 삶은 결국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예술가의 경지로 끌어올려지는데, 정말 그럴법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벽돌을 구워놓고 가마 옆에서 아사하는, 길고 긴 고난과 핍박의 생을 마감한 구도자와도 같은 춘희는 코끼리 점보에 의한 영혼을 구원을 받기에 이르고, 살아서도 유일했던 친구는 죽음까지도 동행한다.


감동이란, 부풀리고 부풀린 이미지들의 총합이 아닐까. 이 소설에서 나는 오로지 춘희만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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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13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춘희가 좋아요..;;;

겨울 2005-04-13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 그렇지요?

잉크냄새 2005-04-28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처럼 복선에 약하고 이야기 서술구조에 쑥맥인 사람에게 이 작가가 인물들의 다음 행적을 시원시원하게(?) 밝혀준 것이 전 오히려 고마웠답니다.^^

겨울 2005-04-2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히려 그런 부분이 읽기를 방해하더군요.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지않는 친절한 작가의 존재가 생경했어요. 누군가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과 견주어 설명을 하던데, 그 소설도 역시 읽기는 읽되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했었지요.
 
얘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
미즈타니 오사무 지음, 김현희 옮김 / 에이지21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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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석산씨와 미즈타니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우연찮게 보게 되었다. <TV 책을 말하다>란 프로그램이 책 소개의 방식을 달리한 듯 패널간의 토론 방식이 아닌 직접 작가를 찾아가는 형식이 새로웠다. 무엇보다 일본의 스산하고 어둔 밤거리를 걸으며 진행된 인터뷰는 진정성으로 가득했다. 전형적인 일본인의 얼굴을 한 마른 체형의 미즈타니 선생님을 보노라니, 세상의 무수한 삶의 유형 중에는 저토록 이타적인 삶도 있다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하고, 청소년의 탈선과 비행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당면한 현실이기에 저절로 관심이 쏠렸다.


흔히 십대를 가리켜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한다. 유행과 변화에 민감하고, 감정표현이 서툰 만큼 빠르고, 선택이 빠른 대신 포기도 빠른, 그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다. 그들은 흑 아니면 백이지 기타 회색지대가 없는 사고를 한다. 화는 또 얼마나 잘 내는지, 그 화가 풀리는 속도만큼 다시 화를 내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드는 생각은 부모 되기란, 스승이 되기란, 어른이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거다.


괜찮다고, 괜찮으니 살아달라고 너의 고통과 불행은 어른의 잘못이고 사회의 잘못이니, 네 탓이 아니라고 대답하는 미즈타니 선생님의 내면은 보통의 인간이 가진 마음의 크기와는 비교가 안 되는 연민과 관심과 사랑이 넘쳐서, 들리지 않는 척 보이지 않는 척 모르는 척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앞에서는 동정과 이해의 시선을 주지만 돌아서면 잊고 다시 떠올리기를 귀찮아하는 다수의 사람들 속에는 내가 있다.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고 책임과 의무도 네 몫이라고 단호히 뱉어내고, 사적인 울타리 안에는 타인의 어떤 발자국도 허용치 않는 이기적인 나가 있다.


구태의연하게, 책상에 혹은 전화기 앞에 앉아 도움을 구하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거리로 나가 도움의 전화 한통도 걸지 못하고 신음하는, 방치된 하나하나의 존재를 찾아 말을 걸어 무엇을 원하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 미즈타니 선생님. 절체절명의 기로에 선 누군가의 눈에만 보일 하얀 날개를 가진, 그는 분명 지상에 유배된 거리의 천사다.


행복한 사람이든, 불행한 사람이든 태어난 이상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살아가는 가정에는 많은 행복과 슬픔이 함께한다. 그리고 슬픔보다 기쁨이 많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라는 미즈타니 선생님의 평범한 진리는 참 따뜻하다. 죽고 싶다는 아이들의 절규는 살려달라는 구조신호라고 그는 말한다. 그것은 그 비통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따끔한 일침이다. 


솔직히 책은, 장르를 무어라 불러야할지 분간이 안갈 정도로 얇은 것이 내용도 없다. 작가의 진심이 담긴 기록이나 내면적인 일기를 내심 기대했다가 적잖은 실망도 했다. 그럼에도 단편적인 몇 가지의 실화들을 다룬 이야기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고 진중하다. 아이들을 향한 어설픈 감상이나 동정이 아닌 오직 애정과 실천만이 담겼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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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영원히 싫은 사람도 영원히 좋은 사람도 없더라. 미움과 증오가 나의 힘인 것처럼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전진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나니. 누군가를 사랑한 기억보다 미워한 기억 뿐. 세상과 사람을 향해 적대적인 감정만을 품었던 삶이 행복했을 리가 만무하고, 제대로 된 소통과 관계가 있었을 리도 없다. 그 때의 일기장엔 온통 과잉된 울분과 설움과 외로움으로 도배를 했다. 뚜렷한 사유도 모르고 존재 자체만으로 미움을 받았을 사람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얼마 전까지 코드가 안 맞느니 호감도 없느니 눈에서만 보이지 않으면 좋겠다고 소원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의 독선과 아집이 실상은 나로선 상상이 불가한 상처투성이의 어린시절로부터 비롯된 방어라는 걸 알게 되자, 미움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이해와 연민만이 남았다. 그 사소한 앎으로 순식간에 입장을 달리하다니, 사람의 싫고 좋음은 얼마나 유치한 경계인가. 상식 비상식을 쉽게 가르지만 한 사람을 온전히 아는 데는 상식만으로는 모자람을 안다. 누군가를 덜떨어졌다고 이기적이라고 소심하다고 바보스럽다고 손가락질을 하지만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 쉽게 뱉을 말도 아니다.


나 자신의 나약함과 불완전함 때문에 고민하면서도 타인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종종 잊는다. 내 시행착오로 몇 년의 시간을 허비하거나 관계를 단절한 뒤에 뒤늦게 회한에 젖으면서 누군가도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음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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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4-06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고두고 새기고 곱씹어야 할 말이로군요..
어리석지 않도록 노력은 하지만, 천성적으로 어리석은 인간인지.. 그런게 참 쉽지 않네요..

겨울 2005-04-06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반의 반도 몰랐음을 깨달을 때 참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신중하게 사람 대하기를 실천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