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인간이지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서거 소식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를 보면서 몇 번이나 눈물도 닦아냈다. 그가 살아있을 적에도 몰랐던 사실들을 죽음 이후에 알게 되자 더 비통한 기분이 되었다. 그의 비범함과 특별함이 아닌 평범함과 소박함, 인간다움이 가슴을 후려쳤다. 진실한 신자였다면 며칠 낮밤을 통곡이라도 하였을까. 극진히 사랑하는 부모의 죽음처럼 애통했을까. 그만큼은 아니지만 우울하고 슬프다. 인류를 위해 기울인 그의 노력과 기도는 어느 나라의 누구에게로 이어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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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1 - 개정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글을 쓴 작가의 마음을 헤아려 얼마나 아팠을까를 걱정하고 연민하며 소설을 읽은 적이 여태껏 있었던가. 아니, 한번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은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다. 나는 소설 속에 풍덩 몸을 던져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그리고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여 휘몰아치듯 읽어나갔다. 한 글자, 한 문장의 의미가 눈에 마음에 못 박히듯 절절하고 구체적이었던 적은 요 근래엔 없었던 일이었다. 새삼스럽지만 소설에 중독 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가를 만끽했다. 김형경, 당신과 당신의 이야기에 정말 감탄했다.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늘어놓고 실은 당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지언정, 읽고 있는 순간만큼 나는 온전히 당신 소설의 일부로 있었다. 


소설 속의 두 여자는 어디에나 있다. 질풍노도의 연애를 하고 이별을 하고 또 다른 연애를 하는 인혜와 성의 불능은 사랑의 불능이며 삶 자체의 불능이라는 고통스런 자학과 분석을 거듭하는 세진은 여자들의 속에 있는 사랑을 선택하는 두 가지의 기준이다. 자유연애냐 성불능이냐는 독신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눈이기도 하다. 결혼이라는 제도권 안에서의 성은 안정적인 반면 여성으로서의 존재감은 박탈당하기 일쑤니까. 남자의 기대감 어린 눈빛에서 도망치는 인혜의 상처가 치유가 가능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대담성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연애방식에는 수긍이 간다.


내 안에 세진이 있었다는 어떤 독자의 글처럼, 세진은 누구에게나 부분으로 혹은 전부로써 존재한다. 얼핏 대수롭지 않을 유년의 상처들과 기억을 고집스럽게 끌어안고 끊임없이 분석하고 분열하며 응시하고 분노하는 세진은 비정상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똑같은 상처라도 누구는 쉽게 잊거나 극복을 하는데, 어째서 그녀의 자의식은 그처럼 명료한 것일까. 부모의 이혼, 냉정하고 엄격한 엄마라는 존재는 특별하거나 대단한 건 아니다. 최소한 학대하거나 버리지는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어디에나 있을 법 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오직 나뿐이라는 상처는 있다. 그리고 대개는 그 상처를 죽는 날까지 품고 살아갈 것이다. 세진처럼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하여 처절한 몸부림을 치지는 않는다. 상처가 상처인줄도 모르고 억압이 억압인줄도 미처 모르고 일생을 산다고 해서 불행은 아니다. 왜, 너만 유별나게 구냐는 인혜의 의문처럼 세진 같은 부류의 여자는 끊임없이 허물을 벗어놓고 떠났다가 돌아오고 또 떠나기를 반복할 것이다.   


이런저런 불신과 의혹에도 불구하고 세진의 정신분석을 따라가는 동안에도 내 안의 어떤 상처를 발견하고 치유할 방법을 모색하기도 하면서 무뎌졌던 감성의 날을 벼리는 계기가 됐다. 정신분석에의 매혹은 한번도 꺼진 적이 없는 호기심이지만 한번도 충분히 채워진 적이 없다. 그것은 늘 삶의 언저리를 맴돌고 봉인된 기억 앞에서 서성인다. 멀고도 가깝고, 지식은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지만 의미는 모호하고 거대해서 손을 담글 용기가 없다.


아직도 책의 무거움이 온몸과 정신을 짓누른다. 단지 한 권의 책일 뿐이었다고 하기엔 너무 깊이 침몰했다. 책의, 소설의, 인혜 혹은 세진의 심연에 닿았기 때문인가. 천천히 숨을 내쉬지만 여전히 숨이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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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4-19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형경의 책을 딱 한권 읽었거든요.<사람풍경> 너무 "단정적인" 태도에 거부감을 느껴서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는 것을 미루고 또 미루고 있답니다.
근데...님의 글을 읽으니 읽고 싶어져요. 님이 얼마나 이 소설에 빠졌었는지 잘 느껴지는 글이예요.

겨울 2005-04-19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어서 산 책이 아닌 우연찮게 얻어 읽은 책인데, 흥미와 재미면에서 소설이 갖추어야할 모든 것이 있더군요. 김형경의 치열한 글쓰기는 어설픈 감상주의와는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달았죠. 소설가라는 타이틀이 그야말로 딱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가 싶어요. 그렇다고 그녀의 작품 전부가 좋다는 건 절대 아니구요. 소설을 읽는 사람마다의 방법의 차이에 대해 종종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나처럼 읽기를 바랄 수도 없거니와 가능하지도 않지요.
 

 

며칠 전 제주도엘 다녀오신 부모님께서 오징어를 사오셨다고 나눠 먹을 겸해서 다녀가셨다. 아무도 없는 집에 바리바리 싸들고 오신 먹거리를 살짝 놓아두고 가셨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보따리를 풀어놓고 바라보자니 마음이 그렇다. ‘쑥버무리’와 봄동(하루나)에서는 풋풋한 봄 냄새가 폴폴 났다. 주는 이의 마음에 비하면 받는 이의 마음은 허접임을 알고 있다. 무심코 쓰는 말 중에 그거 안 먹어도 사는데........ 라는 말이 있다. 시골에서 나는 이런저런 곡식과 채소를 가져다 먹으라는 말씀에 귀찮음과 시간 없음을 핑계로 차일피일 미룰 때의 일이다. 그러나 무성히 큰 열무나 상추, 파를 보면서 자식들 생각에 잠기는 부모의 마음은 다를 것이다. 덜 먹거나 못 먹지 않음을 알면서도 자식 입에 넣어주고 흐뭇하게 바라보는 즐거움의 미덕은 부모가 아닌 자식은 죽어도 모를 일이다. 다만 짐작하고 추측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되짚어 볼 따름. 내일은 정말 맛있게 잘 먹었노라고 거듭 인사를 드려야겠다. 배불리 잘 먹어서가 아닌 정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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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와 악마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쉽고 빠르게 읽히는 소설을 좋아한다. 반면 무겁고 최대한 느리게 읽어야 제 맛이 나는 소설도 나쁘지 않다. 전자로는 추리, 판타지 등의 모험물이 있는데 어저께 후다닥 읽어치운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가 그런 종류다. 며칠 몇 날이고 침대 옆에서 웅크리고 있는 진도가 나가질 않는 책들 사이에서 ‘천사와 악마’는 휘리릭 하고 책갈피가 넘어가는 기록을 세웠다. 도무지 일도 생각도 뜻대로 풀리지 않고 사람과의 관계도 매끄럽지 못한 요즘 같은 시절에는 도피 혹은 여행과도 같은 이런 책읽기를 추천한다.


댄 브라운과 ‘다빈치 코드’라는 베스트셀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 되겠지만 실상 별로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사람들이 얘기하는 전작에 비해 어떻다는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려는 최소한의 노력을 했고 그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어떤 종교든 그 안에 깃든 사유와 성찰은 매혹적이고 과거를 거슬러가서 만나는 굴절과 왜곡은 더구나 흥미진진하다. 종교와 과학의 만남은 또 얼마나 놀랍고도 신비로운 세계인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이 역사 속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벌어지는 전대미문의 추기경 살인사건을 다룬 이야기 속에서 한번도 가본 적도 없는 도시 곳곳을 상상하고 또 상상하는 것, 그런 가운데 꿈에서 깨어나듯 마지막 장을 덮었다. 


아쉬움은 암살자의 모호함이다. 소설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던 암살자가 죽는 시점부터 이야기는 급격하게 긴장감과 설득력을 잃고 추락한다.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복수심이었다는 결론은 당황스러울 정도다. 교황의 순결서약의 의미가 스승이며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고 살의를 느낄 만큼 절대적인 것인가. 그리고 일루미나티라는 신비로운 집단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허구일까. 이 소설의 백미는 단연 일루미나티라는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집단에 관한 것이다. 제목도 일루미나티였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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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읽기를 주저하는 때가 있다. 내가 먼저 호기심을 느끼기 전에 선택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인가. 이 책 ‘내 생애의 아이들’도 그러했다. 지인의 손에 들린 책을 보고 뭐냐고 물었다가 확 끌어당기는 대답을 듣지 못한 이유도 변명이 될까. 하긴 그녀도 읽기 전이라 감동을 토로할 단계는 아니었었다. 제목과 겉표지를 보고 그렇고 그런 뻔한 교훈을 주는 책 중의 하나려니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고 놓치다가, 이제야 읽어치우고 이야기를 하자니 민망감도 들지만, 뭐든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즐거움이 요 며칠 내내 등을 떠밀었다.


학교에 첫 발을 디딘 어린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인 첫 글을 시작으로 소소하고 잔잔한 감동이 밀려들기 시작하더니 ‘성탄절의 아이’라는 소제목의 글을 읽는 중에는 몇 방울의 눈물이 뚝 떨어지며 기분 좋은 한숨까지 동반했다. 열여섯의 어린선생님을 향한 꼬마들의 맹목적인 애정공세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요즘 아이들과 비교하고, 머잖아 이 이야기는 동화나 전설이 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도 들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는 분명 이 책 속의 아이들과 선생님이 존재할 거라는 확신이 그 보다는 컸다.


내가 문을 열었다. 문턱에 누군가가 와 있었다. 눈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고약한 날씨에 몸을 감싼다고 어찌나 두껍게 털옷을 껴입었는지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내가 그 얼굴을 덮고 있는 목도리를 밑으로 끌어내렸다. 그건 분명 클레르의 푸른 두 눈, 기뻐서 춤이라도 출 듯한 두 눈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작은 꾸러미 하나를 끼고 있었다.

“어서 들어와. 얼마나 추울까. 날씨가 이런 날 밖에 나오다니, 너의 어머니는 어떻게 허락을 하셨다니? 들고 있는 건 좀 내려놓고.”

그러나 그 전에 그는 내게 작은 꾸러미를 내밀면서 말했다.

“성탄절 축하해요! ....이건 엄마하고 제가 드리는 거예요...”

나는 그가 껴입은 옷들을 벗도록 도와주었다. 껴입은 저고리와 스웨터가 대체 몇 벌인지 알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윽고 이제 막 빨아 풀을 먹인 새 칼라가 하얗게 빛나는 푸른 제복 차림의 그 낯익은 어린아이 모습이 쑥 나타났다. 그가 소파 한 가운데로 와 앉았다. 나는 그에게 과자를 집어주었다. 싫어? 그럼 우유를 마실래? 그것도 싫어? 온통 행복한 표정인 그는 내가 우선 무릎 위에 올려놓고만 있는 그 꾸러미를 푸는 것이 보고 싶어 안절부절이었다.


선생님을 향한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는 클레르의 모습 속에서 나는 먼 기억 속의 단편적인 이미지를 떠올렸다. 소박하고 젊은 처녀 선생님은 점심시간이 되면 도시락을 꺼내놓고 앞자리에 앉은 우리를 불러 반찬을 나눠 주셨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멸치볶음과 계란말이, 햄 등의 진귀하고 낯선 그것들을 얻어먹는 달콤한 순간은 선생님의 얼굴보다도 선명하다. 기껏해야 장아찌나 고추장, 김치를 싸들고 다니던 시골 아이들에게 있어 선생님의 도시락은 신기한 마술 상자와도 같았던 것이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 시절의 유일한 간식이었던 맛난 누룽지를 나는 기꺼이 선생님께 나눠드렸고, 그녀는 몹시도 즐거이 먹었던 듯싶다. 아침마다 무쇠 솥에 눌린 누룽지를 긁어 정확히 네 등분을 하여 학교로 가는 우리들의 가방에 넣어주셨던 엄마의 마음이 어쩌면 선생님께도 닿지 않았을까.


과거에는 학교가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가르치느냐는 차선이었다. 선생님은 엄마나 아빠와는 다른 특별한 존재였고 그들이 입고 먹는 것들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선생님의 차, 선생님의 책상과 의자, 선생님의 노트와 필기도구는 만져보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었다. 숙제를 잘 하거나 받아쓰기에서 만점을 받았을 때 선생님은 상으로 빵이나 건빵을 한 봉지씩 주셨고, 먹고 싶은 굴뚝같은 욕망과 싸워 아꼈다가, 집에 돌아와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자랑하던 위대하고 위대했던 시절, 어떤 상처도 그늘진 기억도 없이 순수했던 날들이 있어 행복하지만 지금은 때때로 후회를 한다. 덜 착하고 덜 순수했더라면 이라는 가정의 유혹 때문이다. 학교를 다닌 그 시절은 서슬 퍼런 군부독재의 시대였다. 그럼에도 박정희와 전두환이 어떤 대통령인지를 인지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얼마 후의 일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 선생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회의하고 경멸까지 한 것도 그 즈음일 것이다. 무사안일의 주의자들에 대한 쓰디쓴 비판은 기억 속에서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지우는 것에서 시작했다. 나는 송두리째 그들을 매장했다. 그리고 남은 것이 시골 초등학교의 몇몇 풍경과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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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3-13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송두리째 그들을 매장했다."
저도 한때 그랬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