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을의 정원에는 시든 채송화와 말라비틀어진 국화와 벌레 먹은 맨드라미, 그리고 꽃이 지고 푸른 잎만 무성한 옥잠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목련나무를 휘감아 돌던 으름 넝쿨이 땅바닥을 기고 있습니다. 검은 돌을 지나서, 대리석 언덕을 넘어서, 이끼 낀 시멘트 마당으로 내려오는 걸 매일 아침마다 두 눈으로 확인합니다. 그의 방향을  바꿔볼 요량으로 이리저리 밀치고 치워도 어느 샌가 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립니다. 

빨간 고추가 조롱조롱 매달린 고춧대는 병들어 행색이 추레합니다. 하나씩 둘씩 뽑아내기 시작해서 이제 딱 하나가 남았습니다. 모양은 제각각 못생겼어도 어느 덧 빨갛게 익어 색을 자랑합니다. 내 작은 정원의 풍경입니다.

올 해는 담벼락 밑으로 대파를 묻었습니다. 고향에서 뽑아온 파가 오종종 나란히 줄지어 있습니다. 시든 잎을 매단 채로 살아갑니다. 어여쁘고 기특하지만 흥! 하는 콧소리만 요란합니다. 집이 바뀌고 환경이 달라져도 전혀 꿀림이 없습니다. 자만심이 대단한 녀석입니다. 놀러오는 이웃들의 손에 한 뿌리, 두 뿌리 씩 나눠주는 걸 기꺼워하는 듯합니다. 그냥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작은 정원에 비가 내립니다. 마른 흙이 젖어듭니다. 즐거워 보입니다.

그래서 즐거운 정원입니다. 내 정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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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10-25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느껴지는 정원이네요.^^

겨울 2007-10-28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칭 정원이지요.^^ 사실 꽃도 예쁘지만 채소를 기르는 일이 훨씬 재밌어요.
 
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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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무서워서 긴장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잔인한 파국이 아니라서 안도의 숨을 내쉬는, 다섯째 아이는 행복하지 않은 소설이다. 당신들이 꿈꾸는 가정, 가족, 행복 따위는 결코 없노라고 강하게 부정하는 소설이다. 휘몰아치듯 읽은 그 섬뜩함의 기억이 오래오래 뇌리에서 메아리칠 의외의 소설이다.   




헤리엇은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한 척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데이비드는 어쩔 수 없는 우연히 나타난 유전자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데이비드의 변보다 그녀의 단정이 설득력 있다. 다섯째 아이까지 가기에는 그녀의 모성이 부족한 가 의문이 들 정도로, 벤을 가진 동안의 그녀의 상태는 기이했다. 어리석고 무지한 탓이라고 여겼다. 아이를 향한 그녀의 맹목적인 불안과 증오와 거부가 너무 불쾌했다. 그녀 말고는 아무도 짐작도 불가능한 불안과 공포,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엄마라는 이유로 온갖 죄책감에 시달림에도, 설령 그것이 <크기가 다른 두 종류의 짐승을 접목하는 실험>체일지라도, 아기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벤이 살해되도록 내버려주지 않은 여자, 그녀는 입 밖에는 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이렇게 격렬하게 자신을 옹호했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신봉하고 지지하는 가치관으로 판단해 볼 때 그녀는 벤을 그 장소에서 데려오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 애를 구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의 가족을 파괴했다. 그녀 자신의 인생에 해를 끼쳤다..... (158쪽)




<그 단단하고 차가운 외계인의 눈을 감고 있어서>. 헤리엇이 처음으로 정상처럼 보인 아들로서의 벤을 불쌍하다고 여길 때, 마치 사체와 다를 바 없는 작은 뭉텅이를 담요에 싸서 집으로 돌아오는 그 때, 어리석고 바보 같은 여자, 엄마지만 가장 인간다워 감동했다. 그녀를 비난하고 멀어지는 가족들의 냉대도 역시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헤리엇의 결단, 벤과의 다시 시작된 전쟁에 안도했다. 미친 짓. 그것은 처음부터 그랬다.




다섯째 아이라니. 자궁 속의 태아를 괴물이라고 단정하는 엄마와 동물적이고 야만적인 생명력으로 태동하는 아기 적부터, 그들은 특별한 존재, 관계였지만 가족과는 무관했다. 무력한 가족, 화목한 가족은 적일뿐. 태어나기 위해서, 낳기 위해서 피를 말리는 정신 나간 모자 다른 별, 다른 종이었다. 가여운 헤리엇. 불쌍한 벤. <그 앤 내 애가 확실히 아니야>라고 말하는 아버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정체불명의 인간다움으로부터 백만 년은 떨어져있는 이질적인 존재. 아무도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원할 수가 없는 벤.




세상에 온전히 완벽한 가족은 없다는 것을 이 특별한 아이 벤을 통해 말하는 거라면 참 무시무시한 방법이다. 제각기 보이는 상처와 숨긴 비밀을 품고 그럴듯한 포장지를 씌우고 유지되는 가족들을 향한 경고. 다섯째 아이를 절대 가지지 마시오. 수억만 년 전의 어떤 기이한 유전자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특히 남보다 행복해지려는 허황된 꿈이나 욕심을 버리시오. 그저 적당히 겨우겨우 마지못한 삶을 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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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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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었다......... 나를 이 세계에서 데려가주기를 기원하며. 거기는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일 때도 있고 상상보다 더 나쁜 곳일 때도 있다. 환호와 상처, 무엇이건 결과를 감당하는 건 내 몫이다. 읽지 않았더라면 다른 세계를, 사람을, 장소를 만났을까. 후회하고, 회의하고, 긍정하고, 부정한다.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난 어떤 책의 주인도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책을 산다는 것, 소유한 다는 것, 읽는다는 것 그 어떤 여타의 행위도 내가 그 책의 우위에 있음은 아니다. 오히려 한 권의 책이 책꽂이에 놓일 때마다 내 몸, 혼의 일부가 종속된다. 책의 존재와 의미는 한없이 무거워, 버려야겠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엔 이미 옴짝달싹도 못하게 사지를 결박당한 이후다. 읽고 있는 책의 무거움을 알아채지 못한 가볍고 가여운 인생이다. 좀 더 오래, 미치지 않고, 읽고 싶다. 아니, 살고 싶다.  

읽는다면 즐거울 거야. 믿는다면 너는 인생을 망쳐버릴 거야. 한 발자국, 아니 두 발자국, 아니, 여섯이나 일곱 발자국쯤 멀리 떨어져야 한다. 경솔하게 손을 내밀어, 동등하리라는 착각은 금물이다. 잊지 말자. 즐거움을 얻는다. 하지만 믿지는 않겠다. 신을 불신하듯 책을 불신한다. 경외감을 품지만 두려워하고 공포에 떨지만 절대, 절대 가까이 가서 만지거나 믿지는 않겠다. 질문을 던지고 답이 없어도 화내지 않는다. 서두르거나 안달하지 않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리하여 허영의 독이 중화되기를.

 

습한 십이월, 스물두 살의 합리적인 공학도. 그곳, 그 나라, 책.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내던졌던. 불현듯 읽고 싶어 꺼내 든 매혹적인 그런 책이다. 전체가 아니라 한 구절이, 단어에 뒤흔들리게 하는. 결코 읽었다거나, 이해한다거나, 재미나 흥미가 있거나 없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알고는 있노라고 하고 싶은. 첫 번째를 읽다가 그 내용과는 무관한 그러나 책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는 이유로 오만가지 상념들에 둘러싸여 주저앉은. 이상하고도 이상한, 어쩌면 마법에 걸린 책이 며칠 동안 내 앞에 펼쳐져 있다. 느리게 나아가지만 서둘지 않는다. 일부러 다른 곳을 바라보고, 다른 것을 뒤적이고, 읽다가 말다가, 밑줄을 그어놓은 처음으로 돌아갔다가 원래의 페이지로 와서 새로운 밑줄을 긋기를 반복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읽을까, 궁금하다가 이내 잊는다. 

 

나도 그런 이름이 있었다면, 나도 그런 아버지가 있었다면, 나도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을 거야. 이 책을 지금 이 순간 읽고 있는 건 우연이다. 반드시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가 말하는 것, 원하는 것을 알듯도 싶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미로에 갇혔지만 두렵지 않은 것처럼, 길이 계속되어 어딘가로 통하는 한 걷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처럼. 읽고 질문을 던지고 답을 모른다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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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미루던 숙제를 해결하듯, 병원엘 갔다. 누군가 뒷덜미를 움켜쥐고 병원 앞에 던져줬음 싶은 치과와 겸사겸사 근처에 있는 안과까지. 스케일링은 굳이 할 필요 없다는 얘길 듣고 약간 시리고 부은 잇몸만 간단하게 치료하는 걸로 끝. 환절기마다 의례 겪는 일이라 등한시했던 눈은 생각 외로 심각하다는 말에 좀 놀랐다. 너무 심하게 비벼서 눈 안과 밖이 헐 지경이란다. 좀 강한 스테로이드 안약이랑 방부제가 안 든 일회용 안약을 처방받고 알레르기 약 아침과 저녁 분 3일치를 처방 받았다. 부작용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에 강한 거 말고 효과가 늦어도 좋으니 약한 거 달라고 했더니 그래도 며칠은 써봐야 한단다. 약국언니한테 물었더니 별로 강한 것도 아니라고. 약국에서 느끼는 거. 이 사람들 자신들이 배운 지식의 몇 프로나 써 먹을까. 어떤 질문이건 건성이고 병원에서 받아온 처방대로 약 짓기만 분주하다. 약국이란 약을 파는 마켓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곳. 처방전을 들고 오는 손님에게는 서비스 만점이고 그 외는 대충인 듯 기분이 들고. 병원과 약국 사이의 어떤(?) 거래도 궁금하고. 집 근처에 아주 바쁜 내과가 있는데(당뇨 전문) 그 아래 약국의 주인과 혈연관계라더라, 는 소문이 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만.

오는 길에 산 사과가 겁나게 달다. 트럭 한가득 쌓인 붉은 사과가 어찌나 탐스럽던지 풍덩 빠지고 싶더라. 사과는 이맘때가 가장 싱싱하고 맛나다. 또, 어떤 과일도 사과맛에 비할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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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호박이 세 통 생겼다. 항아리처럼 생긴 호박은 시골 다녀온 동생이 업어왔고, 팔뚝마냥 길쭉하니 매끄럽게 잘 익은 건 앞집에서 주셨고, 긴 것과 둥근 것의 중간 정도 되는 곰보마냥 얽은 흔적이 표면에 있는 건 오가며 인사 나누는 아주머니가 선뜻 안겨 주셨다. 늙은 호박 아니 탐스럽게 익은 호박을 윤기 나도록 닦아서 신발장 위에, 마루에, 방에 하나씩 놓아두고 바라본다. 요리는 모르겠고 두고 보는 용도로 제격이다. 가을이다. 고향은 가을걷이로 바쁘다. 작년부터인가. 매상(추곡수매)을 안 하면서 쌀의 수확량은 급격히 줄었다. 힘들어 하실 때마다 쌀농사를 줄이라고도 했었다. 논 위에 버섯막사, 축사가 세워진 것도 옛일이다. 그것들도 곧 헐리어 잡초만 무성한 잊혀 진 땅이 될 거다. 부모님 살아서는 쌀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는 어찌될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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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10-16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걷이 끝난 논은 얼마나 허전할까요.

겨울 2007-10-17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전하다는 생각보다는 한가로워 좋다는 생각이 먼저였어요.
정말 징그럽게 바쁘니까요.
요즘은 그럴 여가도 못 내지만, 텅 빈 논을 가로질러 걷는 걸 좋아해요.
이를테면 지름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