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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그 날 이후로, 두 번째의 시간이 흐를 것 같았다. 난 또 한 번의 나이를 먹을 것이었다. 이 책의 첫 장을 편 순간 그 시간이 올 것임을 깨달았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읽던 그 날 처럼.
시간이란, 사람이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흘러간다고 믿는다. 이 책 속의 말처럼 시간은 방향은 일정하지만 밀도와 속도는 균일하지 않은 셈이다. 책 속 주인공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10년 전 가을, 그 애가 내 눈 앞에서 사라진 시간의 그 틈으로 나왔다가 사라진 두 번째 소년, 그 아이가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소설이란 늘 과거의 어디쯤에 있어 독자를 과거의 시간으로 데려다 놓곤 한다. 물론 그 때의 독자의 시간은 소설 속 인물의 그것과 동일하지는 않은 법이다. 난 지나 버렸지만 흘러 버리지는 못한 그 시간을 걷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약속이 있었다. 첫 눈을 함께 보자는 낭만적인 대사는 하지 못했지만 드라마 속 소년 소녀의 풋풋함으로 2년 후의 가정을 했더랬다. 그 때 우린 그런 약속을 할 만큼 충분히 어렸고, 우리는 아직 사회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 어떤 면으로도 어른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 아이의 인생은 평범하지는 않다. 하지만 세상이 정해놓은 '평범'이란 선에서 어딘가 모르게 빗겨나간 환경의 요소들이 아이를 성장시킨다. 아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익숙해지며 그 안에서 가족, 사랑, 우정을 배운다. 고독은 혼자 이겨내야 하지만 슬픔은 함께 나눠야 한다는 큰 진리까지도.
이야기 속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그리핀의 형상은 질풍노도시기를 겪고 있는 그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들은 이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사자가 되어야 한다. 그 사자의 등에 날개를 다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세상의 풍파라는 것에 휩쓸리면서도 몇 번을 일어서면 언젠가 날개가 생겨나고 그들은 자신을 향해 날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풍파에 휩쓸리고 일어서지 못하면 결국 그 날개는 꺽여버리고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일장춘몽, 하루 밤의 꿈과 다를 바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청소년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청소년 시기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미 커 버린 어른들의 지난 시간이며, 물리적인 시간만 흘러보냈을 뿐 여전히 그 어디쯤을 멤돌고 있는 성인이라는 세상이 붙여 놓은 이름을 단 어린성인들을 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들과 함께 길을 걸었다. 난 아직 10년 전 가을 그 어디쯤을 헤메고 있을 뿐이었다. 내 나이는 훌쩍 그 때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이제 난 하이힐이 어색하지 않고 마스카라도 자연스럽게 바를 수 있어졌지만 내 마음과 기억들은 여전히 그 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난 그들이 키우는 사랑에 설레였고 그들이 뿜어내는 싱그러움이 부러웠고 그들의 고민에 함께 마음을 졸였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끝이 났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는 것처럼 나의 이야기도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
늘 알고있었다. 내가 그 때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일은 단 하나 뿐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난 달아나지 않았고 그 어딘가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하나의 뒷모습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시작해야 할 때가 된 것같다. 그들이 도망치지 않고 나름의 방법으로 일어나 자신의 날개를 달기 시작한 것처럼, 이 책 속 그들과 함께 내 등 어딘가에도 날개가 나기 시작하려는 듯 간지럽기 시작했으니까.
방향은 일정하지만, 시간이란, 밀도와 속도에서는 절대로 균일하지 않는 것. (p.12)
우리는 이치에 닿지 않는 세계에 태어난 거라고. 그래서 그랬나봐. 나는 어디론가 떠나서 숨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거든. (p.139)
각자 너무 다른 존재들이기 때문일까. 사람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런데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제 멋대로 결론을 내버린다. 미리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무러 해도 관계는 바뀌지 않는다. (p.140)
삶을 다양하게 해석하여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고 생각을 유연하게 만드는 것도 싸움의 한 방식인 것이다. 혁명이란 다른 혁명에 의해 무너질 수 있어야 진정한 혁명이다. 또한 약함은 약함을 뿐이지만 스스로의 약함을 표현하는 태도는 강함이기 때문이다. (p.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