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앨리스 > 젊은 작가 5인과의 만남_젊은 작가 5인, 독자와 마주보고 앉다

     그 날이 돌아왔다. 4년에 한 번, 역일과 계절을 맞추기 위해 선물처럼 주어지는 하루. 사실 말이 좋아 선물같은 하루지, 일상을 살아내는 사람들에게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일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했다. 특별한 하루, 뜻깊은 하루. 그런데 나는 4년 전의 2월 29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때 역시 특별한 하루, 뜻깊은 하루라는 의미가 부여됐을 것이고 어쩌면 그 때는 지금보다 더 말랑말랑한 감성이었을테니 뭔가 두근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억에 나지 않는 것이다. 내 나이 26에 주어졌던 그 하루는 추억도 남기지 않았고 기억 속에서도 이미 사라져 버렸다. 내가 34살이 되었을 때도 그럴 것이다. 또 사람들은 특별한 하루, 뜻깊은 하루라며 그 날에 의미를 부여할테고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살며 4년 전의 이 날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그러며 또 나의 기억이 아닌 시대를 탓할 것이다. 시대가 각박해서 사람들에게 하루하루에 의미를 부여하게 만드는 것 뿐이다. 그래야 오늘을 살 수 있을테니까. 뭐 이런 개똥철학을 늘어놓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어쩌면 34살의 내가 떠올리는 30살의 2월 29일에는 추억이 된 기억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4년에 한 번 돌아 온 그 날, 내겐 즐거운 일이 생겼으니까.

     그 즐거운 일에 대해 말하기 전에 잠시, 김경주 시인에 대해 말하고 싶다. 사실 이 날 열리는 김경주 시인의 북콘서트에 나는 신청을 해 두었었다. 김경주 시인이 낸 두번째 산문집 「밀어」를 읽으며 김경주 시인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김경주 시인은 모르겠지만 그와 나 사이에는 내가 만들어 둔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처음으로 누군가 인정해줬던 나의 문학적 감수성은 그와 내가 나누었던 대화 중 흘러나온 김경주 시인의 시와 산문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패스포트」의 여운이 다 가시기 전이었고 나는 여전히 그렇듯 한 권의 책의 여운에서 빠져나오기 전까진 그 책을 입에 달고 살았다. 시보다 산문이 더 좋았다는 내 말에 그는 공감해주었고 내가 가진 문학에의 애정을 인정해 줬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김경주 시인에 대한 내 애정이 더 깊어졌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두번째 산문집이 나왔고 어려운 사유 속에서 빛나는 문장과 단어의 수려함은 깊어졌다. 그런 텍스트를 보며 작가가 궁금했고 작가가 보고 싶었다. 북콘서트를 신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문장을 봤고 나의 고민은 깊어졌다.

 

      하필이면 같은 날 같은 시간.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김경주 시인의 북콘서트 신청 메시지를 삭제했다. 이럴 때보면 내 머리보다는 내 감각이 훨씬 발달되어 있는 것 같다. '김성중,' '정용준' 두 작가의 이름만으로도 가고 싶은 이유는 확실했고 독자와 마주보고 앉다!라는 그 카피 역시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리고 사실, 문학과 지성사는 내가 가장 좋아하며 꿈꾸는 출판사이기도 했으니 그 실체를 살짝 들여다 보고 싶은 것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 젊은 작가는 내가 지킨다는 말도 안되는 혼자만의 착각도 그 선택의 이면엔 존재했을 것이다.

 

      그 날이 돌아왔고 그 날은 그 날이었다. 돌아온 그 날은 4년에 한 번 오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기도 했고,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기도 했지만, 내 평생 처음 하는 경험이 들어있는 날이기도 했다. 두개의 신청페이지에서 확인한 참석인원은 대략 15명 정도. 독자 15명에 작가 5명이라니. 이런 1:3의 비율의 낭독회에 내가 또 언제 참가해 볼 수 있을까. 이건 분명 멋진 선택이었고 멋진 경험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문지는 내가 꿈꾸는 회사가 맞았고 작가들은 멋있었다. 소규모지만 합정, 홍대 일대에선 꽤 유명한 북카페에서 진행 된 행사는 처음부터 감동이었다. 그동안 이곳저곳의 작가와의 만남, 북콘서트 등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소규모의 인원으로 정성껏 진행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소소한 먹을 거리, 글맛을 돋우는 최고의 파트너 맥주 한 잔 모든 것이 참석한 독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고 서효인 시인의 사회로 행사 진행은 매끄러웠다. 여성 작가 3분과 함께 하는 1부, 남성 작가 2분과 함께 하는 2부의 낭독회와 간단한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텍스트로 읽는 글맛과 작가가 직접 읽는 글맛은 역시 오묘한 차이가 있었다. 이런 시간, 이런 분위기, 문학과 함께 주어지는 최고의 이벤트가 틀림없었다.

 

      행사가 끝이났고,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려는 내게 들리는 한 마디. 작가들과 함께 하는 맥주 타임 (물론 표현은 이렇지 않았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술을 잠시 멀리해야 했을 때지만 어디! 이런 기회를! 1주일 금주는 그 날 막을 내렸고, 내 앞에는 정용준 작가가 오른쪽 옆에는 임수현 작가가 앉아있었다. 아, 이런 벅참, 이런 훈남 작가들 사이의 나는 두근거려도 충분한 자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곧 내게 단편 하나로 큰 임펙트를 안겨주었던 김성중 작가가 옆 자리로 왔고 그녀는 정말, 그녀의 단편만큼이나 멋진 입담과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자리에서 우아함을 뽐내며 꼭 읽어봤으면 하는 책들을 짚어주던 김선재 작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란. 윤보인 작가와는 거리도 좀 있었고 작가님이 일찍 자리를 뜨는 바람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잠시의 만남에서 그녀에게 들은 궁금증은 저 여린 몸과 목소리의 어디에 그런 날카로운 글들이 숨어 있는지였다. 다음엔 꼭 알려주시길!

 

      그런 행복한 시간들이 돌아온 그 날에 존재했다. 이러니 나의 34살 그 날에는 기억할만한 4년 전의 그 날이 있을 것이 분명한 사실이 되었다.헤어지는 순간 손을 꼭 잡아주던 김성중 작가의 작고 차갑던 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손이 있어서, 그 손으로 쓰는 글들을 앞으로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시간이 있어서, 한국 문학 새로운 작가들을 계속계속 기다리고 찾아보게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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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 당신의 반대편에서 415일
변종모 지음 / 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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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것과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을 하다'라는 것,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는 이 두 말을 소리 내서 읽어보면 그 미세한 뜻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출렁, 그 거짓말을 하고 있는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 온다. 달출판사의 에세이들은 늘 제목부터 이런 식이다. 첫 만남에서 인상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말해주듯 늘 제목으로 나의 마음을 흔들어 버린다. '치유'가 각종 매체들의 키워드로 떠오르기 전부터 이 출판사의 에세이들은 제목 그 자체에 치유의 힘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이젠 달출판사의 에세이를 보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 되었다. 나의 진실과 마주하는 일이자, 다시 한 번 나의 감수성을 일깨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변종모 작가의 책이다.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라는 조금은 손 발이 오그라드는 제목의 책을 기억한다. 달짝지근한 감성엔 적응이 잘 되지 않는 체질인 터라 밀어내던 책을 우연히 마주했을 때 그 안에서 밀려들었던 감성들도 기억한다. 그러기에 한 번 더 출렁. 스스로에게 물었다. 낯선 땅에 서 있었던 여행자를 질투하는 마음 없이 그의 마음의 흐름에 동행할 수 있겠느냐고. 그렇지 않다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못하는 내게 우울할 테니까. 지금 내 마음 어디에선가는 누군가를 그리워 하던 마음과 여행하던 발을 몹시도 그리워 하고 있었으니까. 한동안의 감정 싸움이 끝이 나고 책을 폈다. 그리고 알았다. 그런 감정 싸움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한 장을 넘기고 한 장을 넘기다 보면 모든 것은 정리가 되어 있을 일이었다.

이 마음을 안다. 나의 기억에도 이 마음이 존재하던 때가 있다. 나와 잠시 이별하기 위한 여행, 나를 잠시 두고 떠나는 여행. 그 여행 길에서 문득 외로워졌고 누군가가 그리워졌었다. 그 때마다 나를 두고 떠나왔지만 여전히 나와 붙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더 나를 잘 알게 되는, 모순 같지만 모순 일 수 없는 그 때 그 감정들이 저자의 걸음 걸음과 함께 되살아 났다.

작가의 여행의 이유와, 자신의 글을 '반성문'이라 칭한 그 이유를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자주 여행을 다녔으나, 현실에 돌아오면 여행에서 느끼던 행복이 어느샌가 도망가 버린 것 같은 기분, 그런 느낌에 다시 여행을 했을 것이다. 유성용 작가의 책 제목이기도 한 '여행생활자' 혹은 '생활여행자'의 느낌이 이 작가에게서도 난다. 하지만 여행은 돌아올 곳이 있기에 가능한 움직임이다. 어떻게 보면 장소 전환, 기분 전환의 refresh 개념인 것이다. 그러니 다시 돌아온 곳에서는 떠난 곳에서 느꼈던 refresh 되는 느낌은 이내 사라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을 버티지 못하면 다시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떠나는 순간, 다시 알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나는 다시 돌아가야 함을. 그래서 작가는 길 위에서 외로움과 싸우고 문득 떠오르는 얼굴, 시간, 장소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려 하며 반성문을 썼을 것이다. 그들과 같이 있는 가치를 몰랐기에, 혹은 이 시간이 끝나면 다시 또 현실에 적응하려 하다 또 떠날 것임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작가의 소소한 감성들에 동감하며 책 귀퉁이를 접어놓다보면 어느새 책은 두배의 부피로 불어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 접힌 흔적을 바라보는 일은 책과 나의 공감의 부피를 보는 것만 같다. 그렇기에 두배의 부피로 불어나 있는 이 책이 참 좋다. 그것이 이 책에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이며 최고의 표현이다. 그리고 바라게 된다. 나도 이제 이런 거짓말 없이 살고 싶다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이뤄질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여전히 나는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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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
크리스 임피 지음, 박병철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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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나 섬세한 감성을 갖고 있는 (내 말의 90%가 뻥이라고 해도 이 말은 진심으로 진지하다) 대신에, 이성적 사고력은 거의 영유아 수준인 덕에 수많은 과학자들의 끊임없이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반복해 발표한 이론들 앞에서도 난 감성으로 그것들의 진위를 판단하곤 했다. 즉, 내 섬세한 감성이 촉을 곤두세우고 믿을 수 없다고 외면해 버리면 그것은 진리라고 하되 개인적인 의심은 남아있으니 알고 싶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과학 시험 점수는 늘 바닥이고, 수학 시험 역시 공식이 적용되는 근거를 믿지 못하니 그 점수 역시 빵빵빵. 그러니 우주나 나와 상관없을 먼 미래 따위는 관심 있을 턱이 없고, 그러나 나와 관계있을 죽음은 어찌나 무서운지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죽은 후 어찌 될까에 대한 궁금증이 이는 것이 아니라 땅 속에 들어가고 내 몸이 썩을 그 것이 무서워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는 삼십년을 보내왔다. 그런 내게 우리의 삶과 과학과의 관계에 대해 귀뜸을 해 준 것은 그 어떤 과학책도 아닌 파울로 코엘료의 <브리다>였다. 요 멋진 할배가 내게 해 준 말은 이런 것이었다. '자, 보자. 한정되어 있는 공간에 자꾸 뭔가 생기기만 하면 어떻게 되겠어? 터지겠지? 그러니 지구 안의 모든 생명은 순환할 수 밖에 없는 거지. 뭔가 없어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무언가는 생기는 거야. 그러면 지구 안에는 늘 일정한 에너지가 유지되게 될테고, 네가 죽는다한들 너는 무엇으로든 다시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 이 얼마나 명료하고 지성 돋는 설명인지 나는 그 책을 읽은 후에서야 질량보존의 법칙을 믿게 되었고, 에너지의 순환이 일리있음을 실감하게 되었으니 역시 나는 감성이 풍부한 사람일 수 밖에. 그런 내 감성을 다시 자극하여 과학이란, 우리의 역사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믿을 수 없고 비감성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 빌 브라이슨 할배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였다. 하긴, 그 책은 이성적인 사고에 대해 납득시킨 것이 아니라 빌 브라이슨 할배의 말 빨이란 어떤 힘을 가졌는가에 대한 강의였대도 무난하지만 어쨌든 그 후 다시 한 번 나를 이성적인 사고가 무엇인지 납득하게 말해준 것이 바로 이 크리스 임피의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이다. 고로, 지금 내 이성적인 사고는 초등학생 수준까진 진화했다.

    우주 생물학이라는 뭔가 21세기 적인 학문을 공부하는 이 아저씨는 내가 무서워 하는 '죽음'에 대해 말하는 데도 결코 무섭지 않았고, 거기서 플러스 점수 획득! 추론을 과학적으로 분석해주고, 그 추론이 미신이나 소문에 근거한 것일지라도 그게 사실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 보자는 아주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사한다. 그러니까, 딱딱한 과학자들이 내 이론은 이것이요, 다른 이론은 다 헛소리지, 라고 우쭐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맞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그 말들이 생겨난 이유는 이런 배경 때문이지, 라고 이야기를 해 주는 셈이다. 이 아저씨 정도면 강남의 스타강사도 울고 가야 한다. 이 아저씨의 이야기가 더 매력적인 이유는 알랭 드 보통의 섬세함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데, 하나의 이론이나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종말론 등에 자신의 철학을 불어넣고 독자의 생각을 정리해 보게끔 하는 데 있다. 철학은 쥐뿔도 모르지만, 알랭 드 보통의 말 빨에 현혹되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과학 역시 쥐뿔도 모를지라도 크리스 임피의 말 빨에 충분히 현혹될만 하다. 그렇게 현혹된 독자들에겐 엄청난 마지막 문장이 기다리고 있다. 마술 같은 사건으로 가득 찬 이 우주에서 마지막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아니, 실컷 인류와 지구, 우주에 대한 온갖 가설을 다 말해놓고 던지는 마지막 말이 이렇게 시크할 수는 없다. 그래, 우리가 알 필요도 있고 그런 흐름 속에서 나름의 삶을 즐길 필요는 있지만 그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무를 막 베어내고, 강을 가지고 무슨 사업을 한답시고 강을 막 막고, 이래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아직 멀기만 한 시간들을 걱정하며 살기보단 라돌체비타, 현재에 충실하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멋진 결말의 과학책을 난 본적이 없다. 

    지금까지 단 한권의 과학책이 감성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조금 달래주었더랬다. 그리고  한 명의 이름이 또 인식되었다. 크리스 임피, 그의 책은 이제 안 볼 래야 안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우주생물학이라는 뭔가 의심스러우면서도 21세기스러운 이 단어가 르네상스시대의 감성을 가지고 있는 내게도 통해버린 찌릿함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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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 - 대한민국 사법부를 향해 석궁을 쏘다 우리시대의 논리 12
서형 지음 / 후마니타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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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뱉는 말들이 얼마나 사람을 가볍게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한 쪽 이야기만 듣는 것도 선호하지 않는다. 설사 그들이 약자이거나 피해자라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일은 쌍방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법부에 대한 끊임없는 의혹과 법조인들의 둔감한 현실감각을 탓하면서도, 석궁 사건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었다. 영화가 나왔을 때도, 시각적 오락성이 현실 판단을 흐리게 할까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고 싶었고 양 쪽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무엇이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이 사건이 잘못된 것인지. 그러기엔 역시나 책이 좋겠다 싶었다. 김명호 교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3자의 시선으로 쓰여진 책이 필요했고 거기엔 영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이 책이 적절했다.

     이 책에 대한 사건은 인터넷만 찾아봐도 그 자료가 무궁무진하게 나올테니 각설하고, 이 사건에서 눈여겨 볼 것은 김명호 교수와 그를 대하는 법조인들의 태도이다. 나는 김명호 교수가 잘했고, 그의 행동이 영웅시 되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다. 그가 화살을 쐈건 안 쐈건 그것은 중요하다고 보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이 사건의 판결을 달리 할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긴 하지만 일단은 그의 극단적인 행위는 문제가 아주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나는 현실감각이 부족한 판사들만큼이나 김교수 역시 현실감각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조금 다르게 풀어나갈 수 있었다. 무작정 자신의 올곧음만 주장하며 타인의 비도덕함을 탓하는 것은 어떤 입장의 누구든 잘못이다. 즉, 나는 그 사건을 담당했던 판사나 검사들에게도 저마다의 입장이라는 것은 존재함을 인정 한다. 김교수는 누군가 옷을 벗을 각오를 하고 정의를 위해 싸워주길 바랐겠지만, 어떤 사람에게 정의가 어떤 사람은 직업윤리와 더불어 자신의 생활터전과 연관이 있기도 한 법이다. 그럼 문제는 그런 현실을 알면서도 우리가 왜 그 사건과 관련있는 판사나 검사들을 비판하느냐로 옮겨간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프라이드가 담겨있는 세계가 공격을 당했을테고, 그런 상황에서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옛말은 진리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핵심을 파고들자면 그것은 자신들의 프라이드이기 이전에 한 개인과 집단의 싸움이었다. 가장 처음의 싸움에서 그들은 강자의 편을 들었고, 아니 누가 누구의 편을 들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정황상 김명호 교수에게 불리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적어도 그들은 김명호 교수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대 줄 수 있는 판사와 검사에게 사건의 최종해결을 맡겼어야 했지만 그랬지 못했고, 그 과정에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옛말은 떠올랐다. 즉, 가장 본질적인 문제로 가자면 그들의 프라이드 문제나 그들의 생활터전의 문제가 아니라 한 약자의 생활문제와 직면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린 김명호 교수가 잘한 행동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의 목소리에 힘을 싣는다. 김교수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은 머리와 마음으로 이해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은 머리로는 이해하되 마음으론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김명호와 법조인들의 이야기를 들음과 동시에 마이크를 일인시위하는 그들의 억울함에까지 들이댄다. 그러면 우리는 알게 된다. 소수의 억울함은 도저히 말할 곳이 없다는 것을. 이 세상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면 속이라도 시원해지는 장소도 주지 않고, 신문고를 죽으라 두드리면 왕이 들어줄 수도 있다는 아주 작은 희망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저, 힘없고 빽없는 자들은 자신의 무능을 탓해야 하는 아주 어지러운 상황만 제공할 뿐이다. 그렇기에 법조인들이 자신들은 결백하고 자신들은 나날이 발전하는데 국민들이 자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한탄에 코웃음이 나올 뿐인 것이다. 큰 사건을 보기 좋게 처리한다고 해서 소수의 억울함은 풀리지 않는다. 적어도 화장실 개선 공사나 있으신 분들의 봉사활동으로 포장하지 말고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려는 아주 작은 노력이라도 했다면 그들의 신뢰도는 더 높아졌을 수도 있다. 이 사건은 그래서 단지 김명호 교수 한 사람의 투쟁이 아니라 모두가 잘 살아보자는 모두의 투쟁이 되버린 것이다. 이 점들을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주는 인터뷰어로서의 저자의 능력은 충분했다. 아주 잘 이 책을 걸러 읽어간다면 이 사건, 그리고 이 사건 이전의, 그리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소수의 짓밟힘을 볼 수 있다. 단, 걱정되는 점은 김명호 교수를 영웅화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의 행위의 이유는 정당하지만 그 수단은 정당하다거나 타당하지 못했다. 그것은 부서진 화살의 행방, 혹은 실제 유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아주 작은 유연함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부서진 화살은 실제의 화살이 아니라 사회의 거대한 보이지 않는 힘에 부딪혀 부서지고 있는 김교수의 독고다이 정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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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 - 제17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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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69호 - 2011. 겨울에 실린 문학동네 소설상 당선작의 제목을 보았다. 「챔피언」이라고 했다. 그 제목이 조금 더 말랑거리는 제목「귀를 기울이면」으로 출간되었다. 책을 읽기 전 당연히 챔피언과 귀를 기울이면 사이의 연관성을 상상하게 되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이미 알아버린 후였지만, 잠시 머리 속에서 밀어두고 두 제목 사이에 있는 공간에 내 이야기를 넣어보는 것은 재미있었다. 내가 만들어 낸 이야기는 복싱 챔피언 자리를 노리던 소지섭이 경기 중 귀에 부상을 당하는데, 그 후에 세상의 모든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결국 소지섭은 주먹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절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와 상대방의 스탭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소리 등을 들을 수 있게 되어 상대의 공격패턴을 예상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챔피언이 된다는 코미디같은 이야기였지만, 늘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본다는 것은 두근거리는 일이다. 그 두근거림을 또 한 번 선사해 준, 조남주 작가와 문학동네 편집부의 콤비플레이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2010년 문학동네 소설상의 수상작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 수상작엔 더 없는 관심을 기울였다. 거기다 문학동네 소설상이라 함은 내게 은희경, 천명관, 김언수, 김진규 등의 애정돋는 작가라인을 만들어 주었다. 당연히 새 작가에 대한 기대도 클 수 밖에 없었다. 제목을 따라 독자도 움직이는 듯, 내 귀가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에 기울여졌다. 그리고 두런두런 그들의,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가 들렸다.

    부모의 욕심, 산업 체제의 부조리, 자신의 욕심만 중요한 어른 사회의 손놀림 등이 '쓰리컵대회'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포장 되어 지능도 조금 모자라고 가정환경도 조금 모자란 한 아이를 무너트리고 있었다.  내면에 아무도 모르는 작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던 아이는 그 가능성을 자신의 즐거움이 아닌 어른들에 의해 써버리게 되지만 그 역시 외면당하는 순간, 현실은 아이에게 지옥이 된다. 그 과정을 우울하지 않고 재치있게 풀어 낸 이 소설은 지루하지 않았고, 이전의 수상작들이 그랬듯 뛰어난 가독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무언가 모순 된 체제를 보여주려 하는 것 같다는 초반의 기대는 (작가의 이력을 전혀 모를지라도) 후반으로 넘어갈 수록 작가의 이력에 방송일이 포함되어 있을 것 같다는 확신과 함께, 서서히 흔들려간다. 심사평에서도 나왔듯 뒷힘이 부족한 것은 독자에게도 꽤나 맥이 빠지는 일이다. 그러나 신인 작가이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빼 버리고라도 이 작가에게 하게 되는 기대는, 이미 많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우려먹었던 퀴즈쇼, 혹은 배팅 게임, 그리고 좀 모자란 사람의 재능 발견기를 식상하지 않고 다시 새롭게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겐 작가는 소설 속의 생활을 체험해야 인물과 사건을 생생하게 불러낼 수 있다는 자각을 다시 한 번 하게 해 주었으니, 여러모로 고마운 소설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작가 인터뷰와 수상 소감은 뭉클했다. 왜 나는, 결혼해서 애도 낳아보지 않았으면서 이렇게 결혼해 애 낳고 키우는 어려움에 공감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글을 쓰고 싶었다는 그 마음에 울컥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 사랑한다, 사랑하는 방법이 모두 다른 것 뿐이야. 라는 마음에 책을 읽는 내내 잡고 있던 긴장의 끈을 스르륵 놓아버렸다. 이게, 어쩌면 내가 모든 소설에서 듣고 싶었던, 그리고 요즘 내게 가장 필요했던 말일지도 모른다. 완성도, 몰입도, 즐거움이야 어쨌건 처음부터 끝까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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