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
크리스 임피 지음, 박병철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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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나 섬세한 감성을 갖고 있는 (내 말의 90%가 뻥이라고 해도 이 말은 진심으로 진지하다) 대신에, 이성적 사고력은 거의 영유아 수준인 덕에 수많은 과학자들의 끊임없이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반복해 발표한 이론들 앞에서도 난 감성으로 그것들의 진위를 판단하곤 했다. 즉, 내 섬세한 감성이 촉을 곤두세우고 믿을 수 없다고 외면해 버리면 그것은 진리라고 하되 개인적인 의심은 남아있으니 알고 싶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과학 시험 점수는 늘 바닥이고, 수학 시험 역시 공식이 적용되는 근거를 믿지 못하니 그 점수 역시 빵빵빵. 그러니 우주나 나와 상관없을 먼 미래 따위는 관심 있을 턱이 없고, 그러나 나와 관계있을 죽음은 어찌나 무서운지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죽은 후 어찌 될까에 대한 궁금증이 이는 것이 아니라 땅 속에 들어가고 내 몸이 썩을 그 것이 무서워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는 삼십년을 보내왔다. 그런 내게 우리의 삶과 과학과의 관계에 대해 귀뜸을 해 준 것은 그 어떤 과학책도 아닌 파울로 코엘료의 <브리다>였다. 요 멋진 할배가 내게 해 준 말은 이런 것이었다. '자, 보자. 한정되어 있는 공간에 자꾸 뭔가 생기기만 하면 어떻게 되겠어? 터지겠지? 그러니 지구 안의 모든 생명은 순환할 수 밖에 없는 거지. 뭔가 없어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무언가는 생기는 거야. 그러면 지구 안에는 늘 일정한 에너지가 유지되게 될테고, 네가 죽는다한들 너는 무엇으로든 다시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 이 얼마나 명료하고 지성 돋는 설명인지 나는 그 책을 읽은 후에서야 질량보존의 법칙을 믿게 되었고, 에너지의 순환이 일리있음을 실감하게 되었으니 역시 나는 감성이 풍부한 사람일 수 밖에. 그런 내 감성을 다시 자극하여 과학이란, 우리의 역사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믿을 수 없고 비감성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 빌 브라이슨 할배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였다. 하긴, 그 책은 이성적인 사고에 대해 납득시킨 것이 아니라 빌 브라이슨 할배의 말 빨이란 어떤 힘을 가졌는가에 대한 강의였대도 무난하지만 어쨌든 그 후 다시 한 번 나를 이성적인 사고가 무엇인지 납득하게 말해준 것이 바로 이 크리스 임피의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이다. 고로, 지금 내 이성적인 사고는 초등학생 수준까진 진화했다.

    우주 생물학이라는 뭔가 21세기 적인 학문을 공부하는 이 아저씨는 내가 무서워 하는 '죽음'에 대해 말하는 데도 결코 무섭지 않았고, 거기서 플러스 점수 획득! 추론을 과학적으로 분석해주고, 그 추론이 미신이나 소문에 근거한 것일지라도 그게 사실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 보자는 아주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사한다. 그러니까, 딱딱한 과학자들이 내 이론은 이것이요, 다른 이론은 다 헛소리지, 라고 우쭐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맞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그 말들이 생겨난 이유는 이런 배경 때문이지, 라고 이야기를 해 주는 셈이다. 이 아저씨 정도면 강남의 스타강사도 울고 가야 한다. 이 아저씨의 이야기가 더 매력적인 이유는 알랭 드 보통의 섬세함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데, 하나의 이론이나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종말론 등에 자신의 철학을 불어넣고 독자의 생각을 정리해 보게끔 하는 데 있다. 철학은 쥐뿔도 모르지만, 알랭 드 보통의 말 빨에 현혹되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과학 역시 쥐뿔도 모를지라도 크리스 임피의 말 빨에 충분히 현혹될만 하다. 그렇게 현혹된 독자들에겐 엄청난 마지막 문장이 기다리고 있다. 마술 같은 사건으로 가득 찬 이 우주에서 마지막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아니, 실컷 인류와 지구, 우주에 대한 온갖 가설을 다 말해놓고 던지는 마지막 말이 이렇게 시크할 수는 없다. 그래, 우리가 알 필요도 있고 그런 흐름 속에서 나름의 삶을 즐길 필요는 있지만 그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무를 막 베어내고, 강을 가지고 무슨 사업을 한답시고 강을 막 막고, 이래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아직 멀기만 한 시간들을 걱정하며 살기보단 라돌체비타, 현재에 충실하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멋진 결말의 과학책을 난 본적이 없다. 

    지금까지 단 한권의 과학책이 감성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조금 달래주었더랬다. 그리고  한 명의 이름이 또 인식되었다. 크리스 임피, 그의 책은 이제 안 볼 래야 안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우주생물학이라는 뭔가 의심스러우면서도 21세기스러운 이 단어가 르네상스시대의 감성을 가지고 있는 내게도 통해버린 찌릿함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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