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일어서다 - 21세기 한국과 불교의 커뮤니케이션
손석춘 지음 / 들녘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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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가는 불교, 외가는 천주교이다 보니 양 쪽 종교를 골고루 접하며 자랐다. 다행히도 친가, 외가 모두 타 종교에 대한 배타심이 전혀 없었던지라 나에게 어떤 종교도 강요하지 않았고 스스로 선택하기를 권장하셨다. 나이가 먹어서 난 천주교 신자가 되었지만, 철학으로서 한 학문으로서의 불교에 대한 경외심은 늘 가지고 있다.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불교 소설을 쓴 최인호 작가의 <길 없는 길>을 보며, 불교가 종교를 넘어서 인간 본연의 도리를 가르친다는 생각은 강해졌었다. 천주교 신자가 된 후에도 절에 가는 일은 멈출 수 없었다. 절에 간다는 것은 종교적인 예의를 갖추기 보다 마음의 평화를 찾는 일이었다. 조용한 산 속의 절에 가서 스님들의 목탁 소리를 듣고 처마에 걸린 종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세상에서 얻은 근심들이 사라지는 듯 했다. 이렇게 불교란 내게 종교 이전에 하나의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불교를 둘러싼 비리나 잡음들이 들려올 때면 괜히 내 마음이 심난했다. 하지만 늘 그것들은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고 몇몇 잘못 된 사람들에 의해 변색된 것일 뿐이었다. 진정한 철학으로서의 불교, 그것은 늘 우리에게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가르친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나의 의심이 틀리지 않았음은 드러난다.

3개의 장을 통해 불교에서 중요시하게 여기는 3개의 화두를 던지는 이 책은 그 화두 속에서 오늘날의 우리를 바라보게끔 한다. 즉 이 책은 단지 불교를 종교로서 믿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읽어봄직 하다. 살불살조殺佛殺祖, 회두토면灰頭土面, 입전수수入廛垂手가 바로 그 화두 들이다. 임제록에 수록 된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뜻이다. 자신이 믿는 신을 죽이라고 하는 이 종교가 어떻게 보면 이해되지 않겠지만, 이것은 무소유와 일통한다. 자신의 마음이 비어있으면 부처나 조사 그 어떤 관념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세상이 정해 놓은 관념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즉, 신을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해 놓은 관념을 버림으로써 나 스스로가 부처의 가르침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니, 여러 관념들 속에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이나 세상을 어지럽게 바라보는 현대의 모두에게 꼭 필요한 화두임에 틀림없다. 회두토면灰頭土面은 겉으로만 꾸며 체면을 유지하는 데 급급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더러운 세상이라도 이 세상 속에서 사람들에게 그 깨달음을 전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데, 이는 불교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산 속에서 도를 닦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에 대한 답, 그 모든 것이 불교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니 이것은 내가 그동안 생각해 온 불교가 가진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철학과도 일맥상통한 것이었다. 이 가르침은 마지막 장에서 나오는 입전수수入廛垂手와도 뜻을 함께 하는데, 입전수수란 선종의 최고 이상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것은 선을 닦고 본성을 찾아 헤메다가 깨닫게 되는 최고의 경지가 중생의 제도라는 것을 나타낸다. 즉, 불교의 가르침을 잘 받았다면 결국 세상의 제도 속에 들어가 그것들의 문제를 마주하는 데에 큰 뜻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천주교 신자가 된 후에, 아버지는 약간의 아쉬움을 표하시면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더랬다. '너의 종교는 아무래도 좋다. 단, 무엇을 믿음에 신중하고 무엇을 믿더라도 보편적인 가치를 전해주는 가르침은 놓지 말아라.' 그 말의 뜻도 잘 모르고 귀찮은 마음에 대충 고개만 주억거린 나는 이 책을 통해 아버지의 말씀을 찾았다. 아버지는 내가 종교로서가 아닌 철학으로서 불교를 존중함을 알고 계셨고, 그러니 한가지 종교에 치우치지 말고 여러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강조하셨던 것이었다. 그것이 이 책의 세가지 화두에서 드러났고 그럼에 이 책이 더 고마웠다. 이 책은 21세기 대한민국이 어느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난 그에 앞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스스로의 문답에도 익숙치 않은 나는 아직 가엾은 중생일 뿐이었다. 부처처럼 큰 사람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부처의 가르침은 받아들이고 싶다던 나는 30년 째 제자리 걸음이었다. 그런 내가 대한민국을 논하기엔 버거웠지만, 이 책을 통해 딱 두 가지는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 똑바로 눈을 뜨고 문제를 직시하고 나 하나부터 올곶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말로 표현하는 대신 이 책을 전해드리는 일로 하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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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인형
왕멍 지음, 전형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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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왜 읽는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설보다는 현실에 도움이 되고 삶에 지식이 되는 책을 읽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내게 충고했다. 나는 '현실에 도움이 되고' '삶에 지식이 되는' 책의 기준이 무엇인지 몰라 눈만 멀뚱멀뚱 하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히 소설은 내게 다분히도 현실적이었고 지적인 도구였다. 그것들은 현실에 대한 천착을 하고 살아가게 했으며, 수많은 세상의 이야기를 알려줬었다. 그것이 소설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떤 책들이 소설을 대신한다는 것인지 나는 궁금했다. 봉건제도의 뿌리가 아직 깊이 남아있었던 1940년대의 중국에서 한 가정이 어떻게 해체 되고, 그 속에서 개인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를 소설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일까.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님을, 나는 다시 한 번 깨닫는다.

1980년 독일에서 니자오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40년이라는 시간을 넘나들면서, 시대의 흐름에 따른 세대의 교체와 그 교체점에서 방황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인물들은 저마다의 고통을 안고 변화의 시기를 버텨나간다. 유럽으로 유학까지 다녀온 니자오의 아버지 니우청은 신지식인으로써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고통스러워 한다. 그리고 이런 남편을 둔 쟝징은 여전히 봉건적인 생활에 젖어 있기에 남편과 끊임없이 대립하고 이런 불화를 고통스러워 한다. 한 가정의 중심축이 되는 이 부부의 고통을 보고 있는 쟝징의 어머니와 언니는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쟝징이 필요하고, 이 부부의 불화가 그들을 쟝징과 연결시키는 매개체가 됨을 알기에 그것을 해소시킬 생각이 없지만 자신들의 처지에 또 다른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쟝징과 니우청의 자식들 역시 부모의 고통을 고스란히 함께한다. 이 우울한 이야기가 중심축이 되어 전개 되는 이 소설은 결코 즐거울 구석이 없고, 삶에 희망적일 이유조차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렵게나마 이 소설을 읽게 하는 힘은 그 우울함 속에 진정성이 숨어있기 때문이고, 현재 우리의 모습 역시 발견되기 때문이다. 지식인이기 때문에 가져야 하는 드높은 이상은 현실과 전혀 들어맞지 않지만 현실을 개조할 의지 또한 엿보이지 않는 니우창의 모순, 봉건제에 얽메여 있지만 실생활에서는 그것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쟝징과 친정 가족들의 모순, 이런 인물들의 모순들은 엄청난 환멸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 삶의 모순 또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 역시 변화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고 그 속에서 변하는 가치들에 얼마나 큰 혼란을 겪고 모순된 삶을 살고 있는가. 하지만 소설은 그 모순과 환멸이 우리에게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이상을 제시해 줌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이 단순해 보이는 구조가 사실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것이며,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재미를 유발하고, 이 우울한 이야기를 결국은 희망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왕멍이 작가의 말에서 '이상은 현실을 개조하지만, 이상은 반드시 현실의 노력을 통해 현실을 개조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도 이상을 개조한다. 이 과정은 비록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이 말은 스스로의 독백이기도 하겠지만, 결국 니자오의 말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작가가 독자에게 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또한 소설 속에서 계속해서 드러나는 니자오가 즉 왕멍이라는 공식을 대입해서 볼 때, 소설을 통한 과거와의 화해, 소설을 통한 자신의 모순과의 극복은 책을 읽고 난 후 독자가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희열이 될 수도 있다.

도대체 소설이 무엇을 얼마나 더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나는 늘 이렇게 소설 앞에서 부끄러워진다. 끝없이 자기 반성을 해야 한다. 이런 부끄러움을 주는 이 대단한 소설 앞에서는 노벨문학상 후보라던가 서울대학교 추천도서라던가의 수식어 역시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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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상페
장 자크 상뻬 지음, 허지은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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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인 지식은 하나도 없이, 그냥 그림보는 행위 자체를 좋아한다. 그림과 마주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갑자기 그 그림과 이야기를 하게 되거나, 내가 메리포핀스처럼 그 그림 속에 들어가게 되는 일이 발생하는데 그런 순간적 동화 때문에 그림을 보는 일을 놓을 수가 없다. 그 그림은 유화, 수채화 등에 국한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순간이 발생시켰다는 그 우연같은 느낌 때문에 드로잉을 좋아하는 편이고, 그림 속에서 유머와 작가의 심리를 엿볼 수 있다는 의미로 그래피티나 풍자 만화도 좋아한다. 장 미쉘 바스키아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독특한 우울과 뱅크시의 그래피티에서 보여지는 도발적 예술성도 좋고, 툴루즈 로트렉의 광고 그림에서 나타나는 그 시대의 분위기도 좋다. 그런 비슷한 이유로 장 자크 상뻬의 단순한 따뜻함을 사랑한다. 상뻬의 그림은 단순해 보이지만 따뜻하고, 특히 그의 글들과 함께 보게 되면 그 감성은 배가 되었었다. 「속 깊은 이성친구」나 「얼굴 빨개지는 아이」는 특히 좋아하는 책이고, 쥐스킨트의 글에 그가 그림을 그린 「좀머씨 이야기」나 명작 반열에 올라도 좋다 싶은 「꼬마 니꼴라」시리즈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그런 상뻬의 그림만을, 그리고 겻들여 그의 이야기들을 감상할 수 있는 이 책이 반갑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동안 상뻬를 좋아했다면, 이 책을 통해 그의 프로다운 모습에 더욱 감탄하고 이젠 그를 존경해 마지 않을 것이다. 1978년 이래로 미국의 <뉴요커>의 표지를 그려온 상뻬는 <뉴요커>를 동경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 곳에서 일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도 못했다. 그것은 자신에게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꿈을 확신시켜주기도 한 그 곳에 대한 벅찬 감정 탓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사람들이 뉴요커에 그림을 보내보라는 말을 했을 때도 항상 그쪽에서 먼저 연락을 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 탓이 아니라 거절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는 뉴요커 본사 앞에 서서 그 홀에 들어갈 용기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꿈에 대한 열정은 결국 기회를 주는 법인지 그는 뉴요커 사장의 편지를 받았고 그림을 보냈고 첫 번째 표지가 실린 이후 꾸준히 뉴요커 표지를 그리게 된다. 상뻬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수정 요청을 너무나 당연히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들였다. 그는 뉴요커 사장만큼 최고의 잡지를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인정하고, 몇 번이고 수정을 한다. 그리고 뉴요커 사장은 상뻬에게 뉴요커 생각은 접고 당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라고 요청한다. 이것이 바로 함께 일하는 동반자의 신뢰 관계에서 비롯되는 최고의 동업이 아닐까.

자신이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 주는 사치품을 만드는 풍자화가라고 말하는 상뻬의 인터뷰는 그가 왜 이 자리에서 이만큼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해 주는지 충분히 알게끔 한다. 최고의 자리에 있지만 그럼에도 자만하지 않는 것. 자신의 역할이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 주는 것이니만큼, 그것에 더 충실하려고 하는 것. 뉴요커 본사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자신은 이 곳에 일을 하러 왔다는 생각을 하며 밤 작업을 해도 되겠냐는 그의 말은 자신의 직업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장인'이라고 해도 좋을만큼의 치열한 집중력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여전히 우리는 상뻬의 그림을 볼 수 있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떤 사람은 그의 성공에 '운'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운' 역시 상뻬에게서는 그가 만들어 낸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더 많은 그의 그림을 보며 따뜻해질 수 있기를, 그리고 벚꽃이 좀 더 많이 피면 이 책을 들고 야외로 나가보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된다. 그의 그림을 보며 만나는 내 세상은 좀 더 다른 모습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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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양장) - 세상의 모든 인생을 위한 고전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 4
공자 지음, 김원중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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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이 10일 정도 앞으로 다가왔을 무렵, 나는 장대한 독서 계획을 세우고 시카고대학교,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미국대학위원회, 뉴욕타임스, 랜덤하우스 등의 추천도서 명단을 쭉 늘어놓고 그 중 세 번 이상 추천 된 도서 100권을 뽑아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에 <3년 독서 플랜>이라는 이름을 붙였더랬다. 그러니까 3년은 36개월. 5권에서 10권 분량의 시리즈 물이 있는 걸 감안해도 1달에 5권 정도만 읽으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목표였다. 애초에 정독하는 버릇이 들지 못해서 책을 금방 읽는 편이라는 걸 생각하면 가능할 듯 했다. 1년 여간 사지 않던 책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리스트에 맞춰 쭉쭉 주문해 나갔고, 주문한 만큼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플랜이 발효된지 3달 하고도 6일이 지났다. 꼭 실천하고 말겠다고 엑셀을 이용해 그럴 듯한 표도 만들어 놨지만, 그 중에서 내가 읽은 책은 1권. 시리즈를 빼고 1달에 3권만 읽어도 된다고 해도 1/9밖에 달성하지 못한 셈이다. 뭐 물론 계획이란 깨지라고 있는 것이며 각오란 금새 포기해 버리라고 하는 것이라는 씁쓸한 변명을 한다쳐도 작심 세권은 커녕 작심 한권 밖에 못한 이 유약한 정신력은 알아줄만 하다. 그러던 차에 '논어'를 읽었다. 그러니 이제 4월달까지 해서 1/6을 달성한 셈이다. 이 엄청난 달성률에 박수를, 보내기엔 너무나 한심하지만 그래도 시작은 반이라는 씁쓸한 자기 위안은 계속된다.

사실 고전이라는 게 너무 유명한 나머지 수많은 출판사의 수많은 번역본을 발생시킨다. 그러면 독자는 멈칫,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까마득 해 질 수 밖에 없다. 이럴 경우 얕은 지식의 독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번역자의 이름과 출판사의 네임 밸류에 의지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럼에 그 두박자를 딱딱 맞춘 글항아리의 「논어」는 최선책이 될 수 있다. 출판사 이름을 잘 모른다 해도 김원중이라는 세 글자가 가진 힘은 무시하기 쉽지 않다. 거기다 몇 년 전 세계 최초로 완역을 해 낸 사마천의 「사기」가 그 외향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포스를 풍겼음을 알고있다면 (박스에 들어있는 그 책들의 위용한 풍채를 본 순간, 이 책을 이렇게 포장해 놓는 건 사기지! 라고 소리칠 뻔 했다. 언젠간 읽겠지,라며 책장에 전시용으로 고이고이 보관해 놀 것이 너무 뻔했지만 4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그 책에 대한 구매욕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더 무시하기 힘들 번역자의 이름이다.

「논어」의 내용은 저자의 이름과 제목에 모든 것이 있다. 공자가 죽은 후 제자들이 모여 그가 한 말들을 모아 놓고 논의하여 만든 책, 즉 어록집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이라는 것이 주는 딱딱한 이미지를 예상하고 심호흡을 하고 시작했다면, 그 심호흡이 무색해질만큼 어렵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그가 한 짧지만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말들이 하나하나 모여있기 때문에, 역자가 역자의 말에서 밝힌 대로 그 어디를 펴서 읽어도 무방하다. 그렇기에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엔 매일 아침에 그 날 운에 맞춰 임의로 한 페이지를 펼쳐서 '오늘의 격언'으로 하루에 하나씩 새겨도 좋을 일이다. 크게 보면 학문, 덕행, 충의, 신의로 나뉠 수 있는 이 이야기들 속에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하지만 공자의 말인지 몰랐던- 유명한 말도 많이 있고 사자성어의 근원이 된 이야기도 많다. 이렇게 오래 된 이야기인만큼 현실에 걸맞지 않을 것이란 우려도 있을테고, 이젠 너무 식상한 이야기라는 평가도 있을 수 있지만, 알고 있어도 실천하지 못함에 이 이야기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거기다 김원중 교수는 해석의 폭을 제한하지 않는다. 이런 해석도 있고, 이런 해석도 있지만 이런 이유로 이런 해석을 가져온다고 그는 독자에게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럼에 그 글을 읽는 독자가 그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다면 다른 해석을 참고 해서 자신만의 이야기로, 자신만의 명언으로 바꾸어 봐도 좋다.

왜 고전인가, 하는 물음은 결국 이 책 한 권으로 설명되고야 만다. 시대가 아무리 지나도 인류 보편적인 가르침을 제시할 수 있기에 고전인 것이다. 물론 공자의 지나친 고집스러움이 드러나는 대목도 보이긴 하지만, 그럼에 그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음을, 그래도 스스로 깨우치고 정진하려 애썼으며 그 결과물을 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가 봐야 함을 말해준다. 그렇기에 이 책이 갖는 가치가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고전 읽기의 바람이 불고 있고, 논어를 읽어야 함은 계속 주장 되고 있다. 그 이름이 주는 거대한 벽 같은 느낌에 지레 겁을 먹었다면, 일단 이 책의 아무 곳이나 편 후 한 대목을 읽어 본 후 도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어떨까? 그런다면 조금의 망설임 없이 즐겁게 고전을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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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만으로 살아보기 - 최소한의 물건으로 살아본 한 남자의 유쾌한 체험기
데이브 브루노 지음, 이수정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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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이미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100개의 물건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면 나는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은 시작되고 있었다. 맞다, 우리는 너무 많은 물건에 둘러쌓여 있다. 그럼에도 계속 무언가를 원하고 필요하다고 여기고 구입하고 있다. 그런 현실이 제목에서부터 자각되었다. 책을 넘기며, 책 속 삽화에 계속 피식피식 웃게 되었다.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된 후로 이렇게 고양이가 등장하는 그림에는 약해지고 만다. 첫 삽화가 고양이라니, 이미 이 책에 매료될 것임을 알고 말았다.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려고 하면서도 책 앞에서는 꽤나 냉정해져서 작은 어휘나 사고 하나하나에도 트집잡기 일수인 터라 자꾸 트집을 잡아냈다. 예를 들어 가족들의 공동물건은 나의 소유물로 치지 않는다는 규칙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결국 100개만으로 사는 게 아닌 거라고 깐족댔다. 하지만 그런 깐족에는 제목만 보고 내 리스트를 뽑았을 때 10개 정도의 품목이 우리 고양이들을 위한 것으로 채워졌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결국 나는 리스트에 넣었는데 당신은 왜 안 넣어, 라는 어린 투정일 뿐이었다. 그 투정이 성립하려면 나 역시 이런 삶을 살아봐야 하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럴 의지가 전혀 없으니 투정은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괜찮은 직장에서 괜찮은 연봉을 받고 괜찮은 동네에서 괜찮은 집을 구해 살고 있지만 여전히 행복을 체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물건들에 둘러 쌓여서 살면서도 그 물건들에 만족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성향 탓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저자는 어느 날 깨닫는다. 아주 간단히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순간 놓치고 마는 뷰파인더가 제거 된 세상의 행복 등이 우리에겐 사라지는 것이다. 아직 아이를 키우진 않지만, 나의 고양이들과 함께 하며 느끼는 행복감은 그들이 재롱이나 장기를 보여줄 때마다 카메라를 찾고 렌즈를 그들에게 들이댐으로서 그 아주 짧은 순간을 날린 기억을 떠올리면 이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런 경험 끝에 100개만 소유하는 일을 1년간 실행하고 그것을 블로그에 연재하기로 한 저자의 도전은 유쾌하면서도 신선했다. 물론 그런 도전들이 모두에게 찬성을 이끌 수는 없는 일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기준에서 살아가는 세계에서는 자신의 소비 행태에 경종을 울리는 이런 역발상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함께 도전할 생각이 없는 가족의 입장에서도 그의 이런 행동들이 미치는 영향에 그간의 습관들이 뒤틀려버리는 불편함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해 보기로 했다. 분명 물건보다 중요한 것이 삶에는 있을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가 깨닫는다. 물건을 구경하고 욕심내는 시간이 가족과의 대화 시간으로 바뀌고 쇼핑이 줄어들며 가계는 더 단단해졌다. 그간의 욕심은 너무도 부질없는 것이었다. 저자는 100개를 최소 리스트로 뽑고 생활을 시작했지만 1년 후 그는 자신은 14개만으로도 살기 충분한 사람임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다를까.

많은 상품들 속에서 우리는 불행해진다. 이것을 갖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고 그 패배감을 없애기 위해선 날마다 상품을 업그레이드 해 주어야 한다. 단순한 물건 구입의 문제가 아니다.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온라인에 다양한 정보를 축적함에 따라 맛집 탐험은 당연한 일이 되었고 좋은 공연 등을 관람하는 것도 문화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데 꼭 필요한 일처럼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들이 우리에게서 빼앗는 것들에 대해선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조미료를 쓰지 않고 건강한 식품을 가지고 음식을 하는 즐거움, 그리고 그런 음식을 나눠 먹는 즐거움, 비싼 공연 대신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갖는 법 등 너무 많은 소소한 즐거움이 사라지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가 모르는 새 사라지는 그런 즐거움들을 더 많은 물건으로 채우려고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우리의 불편한 현실을 이 책은 너무도 유쾌하게 짚어준다. 그 유쾌함 속에 우리의 오류가 숨어 있었고 우리의 잘못들을 반성할 기회가 제공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더욱 더 유익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당장 우리의 소비행태가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이 책이 갖는 오류 중의 하나는 어쨌든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기 위해 또 하나의 상품을 구매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행동은 쉽게 변화할 수는 없겠지만, 그동안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단 하나의 생활 속 잘못을 발견했다는 데에 큰 의의를 둘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이 주는 것은 딱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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