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사학사 -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역사학은 끝났는가?
게오르그 이거스 지음, 임상우.김기봉 옮김 / 푸른역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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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학사'라는 제목보다 외려 부제-'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역사학은 끝났는가?'-가 이 책의 성격을 더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단순히 지난 시대의 사학사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공세 속에서 '역사학은 끝났는가'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지난 시대의 역사학을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랑케로 인해 하나의 전문 분과로서 출현한 고전적 역사학은 그 특유의 형이상학적 가정과 관념성, 정치위주의 서술, 그리고 무엇보다 랑케 스스로 '실제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데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어떤 역사가도 그 자신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인 이상 '판단'하는 것을 회피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위기를 맞았고, 이러한 고전적 역사학의 위기는 당시 각광받던 사회과학에 의해 '구제'된다. 이러한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결합은 독일의 사회경제학파와 미국의 신사학파에 의해 조악하게나마 그 모습을 보이다가 프랑스의 아날학파, 마르크스주의 사학파, 독일의 역사적 사회과학 학파에 의해 만개하지만 이는 60년대 말 크나큰 도전을 받게된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라는 야만과 이어진 베트남전의 부조리, 관료제의 모순은 계몽의 기획 자체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분위기를 조성했고 아울러 서구 중심, 근대적 합리주의 중심, 거대담론 중심의 사고의 부당함과 야만성이 재조명되면서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는 역사와 문학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듦으로써 이전의 역사서술 방식 전반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역사적 분석과 이야기가 동일하며 언어가 실재를 반영하기보다는 구성한다고 보는 언어학적 고찰에 기반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친다. 역사학은 애초 그 대상자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객관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에 대해 어찌되었건 역사가들은 사실과 관련하여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고,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은 결과적으로 정직한 학문과 선전, 선동을 구분하지 못한 '목욕물 버리느라 애까지 버린'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포스트모던의 역사학을 해체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비판은 받아들이지 않지만, 포스트모던의 '역사학'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지난시대의 역사학의 단선적 구성방식이나 협소한 문제의식에서 벗어나 역사학의 범위를 더 넓혀 더 풍요롭고 더 다원적인 역사학을 탐구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때문에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신문화사'에 대해서는 의외로(?) 굉장히 호의적인 입장을 내비치는데, 이는 저자가 신문화사의 문제의식이 어떻건간에 결과적으로는 역사학의 틀안에서 역사학을 더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보고있기 때문인 듯 싶다)

사실 따지고보면 포스트모던의 근본에 대한 문제의식은 '근본주의적'이고 굉장히 '관념적'이라는 데에서 랑케의 고전적 역사학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는 포스트모던의 근간이 된 문학이론이나 랑케의 역사학이 애초 상아탑 속의 고답적인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어 실재를 보지 못한 점도 없지 않기에 그런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계몽이 그 이상적인 측면만큼이나 야만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러한 이중성은 인간이 하는 사유인 이상 포스트모더니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단적으로 '홀로코스트'마저 부인하고야 마는 포스트모던의 문제제기는 모더니즘보다 얼마나 덜 야만적인지 묻고싶다) 어찌보면 포스트모던은 인류(엄밀히 말하자면 '서구문명')의 숱한 실패에 대한 책임회피이고,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지적 유희는 아니었을까? 반성과 고찰을 넘어서 계몽을 '부정'해버리는 것은 무책임과 무능에 대한 변명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계몽의 단죄를 넘어 계몽을 부정하는 것은 야만일 뿐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지고보면, 역사학이야말로 철학과 함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의 근원을 해명해 줄 수 있는 몇안되는 학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사학의 태동과 발전과정을 서술하고 현 시점에서 역사학을 복원하고 있는 저자의 시도는 매우 소중하다. 더군다나 포스트모더니즘이 '60년대 말의 사회적 운동에 의해 적극적으로 사유된 서구에 비해 '90년대 사상의 공백기에 수동적으로 수용되어-그 급진적인 언술에도 불구하고-보수적이고 다소 퇴폐적(?)인 색체마저 띠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있어 저자의 계몽주의에 대한 '의지'는 다시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사학을 다루고 있다는 본서는 '21세기'우리 사회에 여전히 유의미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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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파시즘
임지현.권혁범 외 지음 / 삼인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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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은 유행이 지난 다음에 읽는다.'고 말한 이가 벤야민이었던가. 이 책에 관한 그 수많던 논쟁들이 이 책의 '유행'에 대한 반증인건지 아닌지 나야 알길은 없다만, 책 내용보다는 외려 저자 중 한명이었던 임지현씨에 대한 강준만씨의 실명비판, 문부식씨와 중앙일보가 함께했던 기획기사 등등으로 그것이 국지적이건 아니건 결과적으로 당대(라고 해봐야 불과몇년전이지만)의 굉장한 '문제작'이 되었음을 부인할 이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나의 대학'생활' 몇년동안 그 영향력의 '범위'라는 측면에서 특별히 언급할만한 책을 두권쯤 꼽으라면 아마 손석춘씨의 '신문읽기의 혁명'과 바로 본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이 책은 그만큼이나 양으로건 음으로건(?) 많은 독자들에게 복잡다기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그 영향력은 심지어 이 책을 읽지 않았던 나에게까지 와 닿았었으니깐. 시간이 흘러 '이젠 유행이 지났다'라고 하기엔 이 책에서 제시한 문제의식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과거처럼 이 책과 그 저자들-대표적으로 임지현씨-에 대해 어느쪽이건 다들 흥분해서 이야기하게되는 시기가 지난 이 때 나는 비로소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읽자마자 들었던 첫번째 생각은, '이 책은 정파적으로 잘못 이용되어왔다'는 것.

'한국자유주의의 기원'(책세상)에서 저자인 이나미씨는 새는 진보와 보수가 아닌 '진보'의 날개와 '성찰'이라는 날개로 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책은 '성찰'이라는 측면에 주목해서 그간 우리 사회 소위 진보세력이 사유하지 못해온것들. 즉, 과거의, 소위 '적들(?)의' 악습이었음에도 똑같이 답습해 온것에 대해 진지하게 화두를 던지고 있다. 국가중심주의와 가부장주의(물론 이 양자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가볍게 여겼던 수많은 부분들-일상, 군대, 무의식등등-에서 이어져 온 수많은 파시즘의 잔재 등등을 꼬집고 있는 이 책은 저자들의 의도대로 읽혔더라면 조금더 생산적으로 읽혔을 것이고 더 나은, 발전적인 이야기들이 이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책이 이땅의 소위 '극우세력'에게 이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이 책을 '온전히' 잘 읽고 이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그들이 이 책을 읽었다면 절대 이 책과 '우리안의 파시즘'담론을 자신에 유리하게 해석하진 못했을 것이다. 책은 곳곳에서 우리를 '성찰'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비판의 끈을 놓고있지 않으니깐), 결국 '우리안의 파시즘'담론만을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이 책이 '파시즘'의 개념규정을 확실히 해놓지 않은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사회, 경제, 정치적 조건속에서 극우파의 이데올로기로 발전한 파시즘은 오늘날 여러 분야에서 혼용하여 쓰이기도 하며, 정파적인 언술로 이용될 경우 상대파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방법으로 이용되기도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이다. 저자들이 파시즘이란 단어의 이러한 광범위한 사회적인 쓰임새를 알지 못했을리는 없고, 그렇기에 저자들은 우선 파시즘의 개념규정부터 명확하게 하고 넘어갔어야 했지만, 책에선 그렇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결국 온갖 곳에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마치 '빨갱이'란 단어 쓰이듯 불분명한 기준속에 여기저기 딱지가 붙혀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행위들은 결국 '빨갱이'의 창조자인 극우세력에게 좋은 도구를 제공한 셈이 되고 말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그들의 '미시적 폭력'의 담론은 그 결과적 현상뿐만 아닌 거시적 책임의 부문에서 마저 그 책임을 '민중'혹은 '진보세력'에게 거의 대부분을 전가하는 꼴이 되고 말았고 그 결과는 극우세력의 환호로 이어지고 만 것은 아니었을까? 때문에 개인적으론-공동작업의 한계일수도 있었겠지만-'우리안의 파시즘'같은 센세이셔널한(?)제목을 달기 위해선 우선 그에 대한 개념규정부터 명확하게 하고 넘어가는 것이 우선 아니었을까에 대한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건 확실한건, 이제 그 누구도 '우리안의 파시즘'론에 대해 흥분하며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차분한 마음으로 저자들의 '불편한'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읽을 수 있는 시기라는 이야기다. 민족과잉담론, 국가중심주의, 승리지상주의 그리고 어찌보면 이 책을 하나로 관통하는 중심 토픽이라 볼수있을 가부장주의 등의 담론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 현실적인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물론 그 수준과 만족도면에서 글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는 있다만-은 독자들에게 그 화두들에 대한 좋은 입문서가 되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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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민주화 - 한국 민주주의의 변형과 헤게모니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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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4년전 출간된바 있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후편격이라 할만한 책이다. 흥미로운 것은 책의 구성인데, 최장집 교수가 지난 3년간 발표한 글을 묶은 본서는 하나의 글마다 그 뒤편에 편집자인 박상훈 씨가 글에 대한 배경 설명 및 저자와의 인터뷰를 통한 첨언, 그리고 편집자 개인의 의견 등등을 첨부하고 있으며, 이는 더욱 깊이있는 독자의 이해를 가능하도록 돕고 있다.

저자인 최장집 교수가 서두에 밝히고 있듯 본서에는 구체적인 '대안'이 나와있지는 않다. 비교적 세부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7장의 한미 FTA관련 글이나 8장과 9장의 동아시아 공동체 관련 글 또한 문제제기만 있을 뿐 대안의 제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책은 저자 말마따나 '대안 그 자체보다는 대안을 상상할 수 있는 인식의 터전을 보다 넓게 고르고 다져나가는 일'에 기여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저자의 목적에 비추어본다면 저자의 '전략'(?)이 어느정도 유효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책을 통해 일관되게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바는 단 하나다. 바로 다수의 헌신과 노력에 의해 성취해낸 민주주의가 절차적인 차원에서 공고화되고 안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측면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는 데에 실패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왜 우리의 민주정부는 민중의 열망-실망의 사이클을 벗어나지 못하며, 왜 오늘의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민중들마저도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를 철회할 정도의 정치허무주의에 빠져있느냐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민주주의의 기반이 침식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저자는 그 이유로 동원, 즉 운동으로 인해 달성된 민주주의가 탈동원화된 일상으로 이어짐에 있어서 그 제도적인 기반을 구축하지 못했다는 점을 든다. 이는 기본적으로 민주화 세력 혹은 진보세력이 일상화된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지 못한채 안이하게 기존 체제와 대면했으며, 이 속에서 집권한 민주정부는 기존 사회의 헤게모니에 대항하기보다는 별 생각없이 손쉽게 수용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즉, 오늘의 민주정부는 유권자들의 실질적인 갈등을 대변하여 정치적으로 해소할만한 정당'체제'를 구축하는 문제에 대한 연구는 게을리한채 단순히 지엽적인 정당'구조'에 대한 개혁만을 이야기하며 변죽만 울렸고, 사실상 민주주의의 기반을 침해하고 민중이 정치부문에 참여할 영역을 극도로 좁혀버리는 신자유주의를 별다른 고민없이 극단적으로 수용했으며, 정치를 통해 해결해야 할 복잡한 문제를 단순히 '정치는 나쁜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기존 기득권 의 '반부패담론' 혹은 '성장담론'등에 편승하여 매번 우회해 넘어갔다는 것이다. 민중의 '실생활의 문제'에 대한 고민없이 기존의 헤게모니와 타협하고 수용하려는 태도는 국민들을 항구적인 욕구불만(?)상태로 몰아갔고 이는 정치를 일반 민중의 삶에서 더욱 괴리시켜 애초 극단적으로 이데올로기화 되어있던 정치를 더욱 이데올로기화 하는 결과만을 낳고 말았다는 저자의 주장, 더 나은 민중들의 삶에 대해 고민하기 보다는 그저 쉽게쉽게 '통합담론'에 기대거나, 애초 기득권에 지나치게 유리했던 '기존의 틀'내에서의 생각없는 절충을 반복했던, 때문에 오늘날 '노동없는 민주주의'라는 기형적인 민주주의를 목도하고 말았다는 저자의 지적에는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치문제에 대해 기존의 쉬운 담론(이를테면 '대연정론'류의 '통합담론'같은 것)에 기대어 오늘의 정치문제를 '피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정치를 정치문제로서 직시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싸워나가야 한다는 것, 아울러 '제도개혁'을 한답시고 이미지에만 쫓겨 변죽만 울릴 것이 아니라, '어떤'제도개혁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한'제도 개혁이 되어야 하는지 그 중심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매우 '당연한', 하지만 그 어디서도 정리되고 언급되지 않았던 문제의식을 저자는 날카롭고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으며, 이러한 저자의 빛나는(?) 분석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제서야 비로소 자신을 위한 언어를 얻게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탁월했다.

물론 한미FTA관련된 '시안'은 책을 위해 급히 써내려간만큼 내용 면에서 다소 아쉬움이 남았고,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된 글은 다소 논쟁적인 글이었던 만큼(백낙청 선생이 비판한 부분이 아마도 이 부분일 것이라 미루어 추측된다) 보다 더 구체적인 언급이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은 아쉬움이 남기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문제를 오늘의 문제로서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그 논의의 시작지점을 정한다는 측면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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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평등주의, 그 마음의 습관 SERI 연구에세이 47
송호근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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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한국의 소위 '평등주의'담론을 일종의 이데올로기 공세라고 생각해왔고, 더군다나 이 책이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왔기에 무슨소리를 할런지는 안봐도 비디오라는 생각에 언제나 그냥 지나쳐왔다. 그럼에도 책을 구입하게 된 이유는 오로지 저자의 명성 때문인데,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저술을 접해본적이 없기에 짧은 책으로나마 한번쯤 만나보고 싶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실망이었다.

우리가 소위 '한국의 평등주의'를 이야기하려면 두가지의 전제 즉, i)과연 한국의 경우 유달리 평등성향이 강한것이 사실인지 ii)평등주의의 의미는 무엇인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하지만 책은 이 두가지에 대해 전혀 설명해내지 못했다.

우선 한국의 경우 유달리 평등성향이 강하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에 대해 저자는 그저 '다들 그렇단다'는 언급만하고 넘어간다. 수필이 아닌 이상 비교를 하거나 분석을 하는 등 나름의 과학적인 분석을 시도라도 해보는 것이 사회과학 서적의 기본 요건이 아닐까란 점에서 책은 굉장히 실망스럽다. '사돈이 땅사면 배아픈 감정'은 인간의 경우라면 누구나 느낄법한 감정이며 이는 외국의 영화나 소설을 봐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정서이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이 한국인의 경우 실제 강하기나 한건지 아니면 표현만 과장된 것인지, 그리고 (만약 강하다면) 그러한 개인적 감정이 사회현상으로 확장되어 표출되는 데에는 어떤 기제가 숨어있는지 정도는 언급을 해주는 것이 성실한 자세이겠건만, 그런 언급은 정말 '전혀'존재하지 않는다.

두번째로-이는 첫번째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데-저자는 '평등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등주의에 대한 개념규정을 전혀 해내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 관점에서 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어느덧 갑자기 다원성의 반대되는 '일원화'로서의 평등을 이야기하고 사적재산권과 자유를 동일시하는 폭력성(?)을 보이다가 자기결정권과 다양성으로서의 자유를 이야기한다. 그러다보니 저자도 헷갈리고 독자도 헷갈린다. 지방분권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평등주의적이지만 어떤측면에서보면 서울로 일원화된 사회를 분산시켜 다양화한다는 점에서 평등주의적이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사유재산권의 완전보장 측면에서보면 자유주의적이지만 다양한 것들을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이름으로 일원화 시킨다는 측면에서 평등주의적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조란 노조는 죄다 귀족노조 운운하는건 평등주의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정작 자본가에 대해서는 귀족운운 안하는걸 보면 엄청난 귀족주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것을 저자 또한 알긴 아는지 스스로도 계속 헷갈리며, 그에 따라 읽는 나도 계속 헷갈렸다. 따지고보면 저자가 혼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파시즘(혹은 국가주의)에 의한 사상통제 및 일원화, 돈이라는 그 단한가지 기준만으로 줄을 세우는 천민자본주의, 아버지 밑에 일렬로 줄서게 만드는 가부장주의(그리고 권위주의), 전공을 불문하고 점수하나에 맞춰 학력, 아니 심지어 인간의 됨됨이까지 판단하는 학력주의, 오로지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는 이기주의,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중잣대 뭐 이런 것을 오로지 '평등주의'라는 센세이셔널한 단어 단 하나로 담아내려니 그게 어디 담아내지겠는가? 뿐만아니라 저자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에 사회현상을 끼워맞추려다보니 여러가지 만행아닌 만행을 저지르는데 이를테면 독재자로부터 받은 억압이-그 정도의 심대한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채-민중이나 상류층이나 똑같았다고 이야기를 하며(푸코가 이런 곳에 인용될줄이야~!!), 권리만 주장하지 의무는 외면하는 것은 상류층도 마찬가지(외려 사회적 여파는 그들이 더 강하다)임에도 중산층과 하층민만의 습속인것처럼 이야기할 뿐만아니라,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자유를 평등의 반대말로 사용하고 있다. 빈민들에게 자유가 있을까? 심각한 불평등으로 학업을 관두게 되는 슬럼가 자녀들이 자유로운가? 자유의 반대말은 구속이고 평등의 반대말은 불평등이지, 자유와 평등 그 자체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때문에 루소는 저자의 말마따나 '자유주의'사상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빡센(?)평등사상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위와같은 헐거운(?) 논의조차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의 오류를 범하고 있으니 바로 원인과 결과의 혼동이다. 그래, 평등주의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의도 안되었고, 평등주의가 실제 만연한건지 실증적인 검토도 되지 않았다해도 일단 평등주의라는 것이 '있다'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고 그게 한국인의 마음속의 '습관'으로 치부할 문제인건가? 평등주의가 우리사회 병폐의 어떤 주된 '원인'인걸까? 한국인들은 '원래' 평등주의적인걸까? 한 집단이 '원래'그렇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면 신중해야 한다. 유태인은 원래 사악해, 아랍인들은 원래 과격해, 전라도사람들은 원래 속을 알수없어, 이런 '원래'의 결과가 인류사에 어떤 비극을 야기했는지 안다면 말이다. 외려 한국의 평등주의-그런 것이 만약 있다면-는 원인이라기보단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식민지 경험은 친일파들만을 대거 상류층화시켰으며, 이러한 상류층은 실패한 과거사 정리로 오늘까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민주화과정에서 상류층이 보여준 행태는 설령 저자 말마따나 그들도 똑같이 국가에 의해 탄압받았다 하더라도 실망스럽거나 외려 반동적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에 힘쓴 민중들을 비난하기에 바쁘다. 이런 고리타분한 역사적 배경을 제쳐두더라도 국가경제가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안전망은 비슷한 경제발전 시기의 서구국가들과는 비교하는게 민망할 정도이며, 소득의 양극화가 심각하다는 것은 보수세력마저 인정할 지경일 뿐만 아니라, 사상적 측면에서 시민들은 일제시대부터 오랜기간 '사상통제', 그리고 그로인한 '자기검열'을 받아왔다.(아울러 그 가장 큰 원인이 된 악법은 지금도 안녕하시다) 자, 이런데도 '평등주의'가 없다면, 그게 이상한 일 아닐까?

저자 또한 이 부분을 인지해서인지 계속적으로 갈팡질팡하다가 마지막에서야 이야기한다. '평등주의를 드러내기'위해 책을 썼다고. 미안한 이야기지만, 평등주의는 저자가 드러내어주어 우리가 처음 알게된 새삼스러운 무언가가 아니다. 이미 독재권력과 재벌들은 당면한 문제해결을 회피할 목적으로 자신의 상황에 따라 멋대로 끼워맞춘 평등주의 담론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해왔고, 이로인해 저자가 이야기하는 '사회적 합의'는 번번히 우회되고 지연되어왔다. 어쨌건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저자가 후편을 쓸 계획이 있다는 것.(물론 거기에 '언제 착수할지 모른다'는 언급을 빼놓지 않았다.-_-;;;;) 후편에서는 과연 이 평등주의에 대한 나의 편견-결국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불과할 뿐이라는-을 깨주실 수 있으려나, 하여간 지금까지는 굉장히 불만족스러운 것만큼은 사실이다.

ps.그나마 이 책에서 건질만한 것은 우리의 모델, 우리의 합의, 우리사회에 맞는 교양과 도덕이 형성되지 않은 점을 개탄하며 사회적 합의를 촉구하는 저자의 지적 뿐이다. 그런데 그나마도 정작 저자 스스로 불분명한 근거로 이데올로기 공세를 한 꼴이라 사회적 합의를 촉진하기보단 방해만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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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의 라이벌 - 역비의 책
역사문제연구소 / 역사비평사 / 199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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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역사문제연구소 주최로 자그마치 14년 전(!) 열렸던 '한국사 교실'의 17기 강좌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출간된 책이다. 소재가 소재였던지라 다른 강좌에 비하여 일반인들의 호응이 좋았다고 하며, 그러한 호응은 책의 출판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언급된 인물들은 12명으로, 1.김구-김원봉 2.안재홍-송진우 3.여운형-이승만 4.정인보-백남운 5.박헌영-김일성 6.장준하-박정희의 6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인물들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 이념적인 면과 정서적인 면 모두에서 당대 라이벌로 칭해지던 인물들 뿐만 아닌, 이념적으로 같은 편이었지만, 정서적으로 라이벌이었던 이들, 정서적으로 친했지만 이념적으로 라이벌이었던 이들의 쌍 등 다양한 유형의 '라이벌'강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게 특기할만한 측면이다.

이 책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면, 화자에 따라 스타일이 너무도 다르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여운형-이승만이나 장준하-박정희의 경우 각각 이기형씨와 백기완씨가 강의를 해주셨는데, 두 분 모두 위 인물들 중 한분(이기형씨는 여운형선생, 백기완씨는 장준하 선생)과 친분이 있으셨던 터라 깊이있는 강의보단 인물과 화자간에 있었던 에피소드-그것도 두명중 한쪽으로만 편중된-에 지면이 할애되고 있으며, 반면 김구-김원봉, 박헌영-김일성 같은 경우 다소 아카데믹한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들은 경우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단점이 다소 두드러져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안재홍-송진우와 정인보-백남운, 박헌영-김일성 관련 강의가 마음에 들었었고, 장준하-박정희 및 여운형-이승만의 경우는 다소 불만족스러웠다. 천편일률적인 역사서에 다소 지루해진 분들의 경우 머리 식힐 겸사겸사 한번 읽어보시는 것도 괜찮을듯 싶다. 책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좌여서 그런지 매우 쉬우며, 강의 뒷부분마다 수록된 질문과 답변은 강의의 내용을 조금 더 구체화하는데 충분히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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